2019 문예창작공모전 시나리오 당선작
2019 문예창작공모전 시나리오 당선작
국어국문학과 20111116 김홍인
어둠 속에 삐-거리는 날카로운 이명소리가 들린다. 어둠이 살짝 밝혀지며 쓰러져 있는 젊은 여성 ‘지혜’가 보인다. 그녀의 얼굴이 줌인 되며, 그 위로 흰 글자제목 ‘껍질’이 페이드인 된다. 잠시 후, 글자의 껍질이 벗겨지며 페이드아웃. 어둠 속에서 빛이 모여 서서히 지혜의 얼굴에 동그랗게 집중된다. 얼굴을 찌푸리는 지혜. 그녀가 신음을 내며 악몽을 꾸는 기척을 내자, 암전과 함께 소리도 같이 사라진다.
S#.1 밀실1-지혜 시점
잠에서 깨는 신음 소리와 함께 지혜가 깨어난다. 1인칭 시점으로 화면이 밝아진다. 머리가 아픈 지혜. 어지럽다는 듯 흔들리고 뿌연 화면의 초점이 잡힌다. 앞에는 뚱뚱한 여성 ‘나라’가 등이 보이지 않게 옆으로 쓰러져있다. 하지만 어깨의 끈을 통해 가방을 매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당황으로 멈춰 있는 지혜. 그때 뒤에서 어떤 중년 남성의 소리가 들린다.
준화 : 으아 씨발! 그지같구만.
깜짝 놀라는 지혜. 카메라가 뒤를 돌아본다. 멀리서 중년 남성 ‘준화’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다시 옆에서 젊은 남성의 소리가 들린다.
룡옥 : 아저씨. 그렇게 갑자기 소리 지르시면 막 일어나신 분이 깜짝 놀라잖아요.
준화 : (코웃음 치며)애는 지랄.
카메라가 빠르게 옆으로 돌며 소리가 들린 쪽을 본다. 젊은 남성 ‘룡옥’이 어떤 철문 앞에서 지혜를 본다.
카메라의 광각이 넓어진다. 화면의 중앙에는 철문이 있다. 배경은 주차장과 같은 어둑한 콘크리트 밀실. 가방을 앞으로 매고 철문을 조사하던 것으로 보이는 룡옥. 화면을 등진 채로 고개만 돌려 뒤를 보고 있는 상태이다. 준화는 가방을 한 손에 들고 화면의 끝에서 중앙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무심한 듯 보이는 그의 얼굴이 카메라(지혜)를 보자 멈춰 서서 물끄러미 쳐다본다. ‘랄랄랄라 랄라 랄랄라~’하는 CM송과도 같은 음악이 잔상처럼 은은하게 들렸다 사라진다.
S#.2 가방-알 수 없는 시점
가방을 뒤지고 있는 손이 보인다. 가방 속에는 간단한 비스킷과 같은 음식과 500ml 생수 몇 통이 있다.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움직이던 손이 멈칫한다. 무겁게 들어 올리는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다.
S#.3 밀실2
대화를 하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경직되어 있는 룡옥과 여유로워 보이는 준화 그리고 불안해하는 지혜의 모습.
룡옥 : (잔뜩 굳은 얼굴)상황이 거지같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러고는 앞에 맨 가방을 뒤져 물을 꺼내 마신다.)
지혜 : (의아스럽다는 듯 룡옥과 가방을 본다. 경계하는 태도로)저, 두 분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아시나요?
룡옥 : 아 물론 알죠.
지혜 : (더욱 의심스럽다는 듯 몸을 움츠리며)정말인가요? 저,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지금이 무슨 상황인가요?
준화 : (옆에서 경쾌한 느낌으로) 네. 지금 우린 좆된 상황입니다.
지혜 : 네?
준화 : (낄낄거린다.)
룡옥 : 장난치지 마시고요.
준화 : 너무 심각해 보여서 분위기 좀 풀려고.
룡옥 : (사방을 가리키며)주변을 둘러보세요. 뭣도 없이 꽉 막혀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유는 저도 몰라요. 나도 깨어난 지 얼마 안됐습니다.
지혜 :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그를 흘긋 보면서)정말이요? 그렇지만 왠지 그쪽은….
룡옥 : (지혜의 눈치를 깨닫고는 가방을 가리킨다.)아, 이거요? 이거 모두가 갖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신도 매고 있잖아요?
지혜 : (그제야 자신이 가방을 매고 있단 사실을 깨달으며)아? (쓰러져있는 여성을 살핀다. 그녀도 가방을 매고 있다.) 진짜?….
룡옥 : 가방을 살펴봐요. 저도 저 아저씨랑 비교해봤는데. 비슷하게 들어있는 것 같더라고요.
준화 : (낄낄거리며 짜증을 낸다.)누가 우릴 이곳에 데려다 놨는지 이거 재밌는 놈이야. 영화를 많이 봤는지 무슨 밀실에다 가둬놓고 생존게임을 하잔 건지….
지혜 : (가방을 뒤진다.)물통 몇 개, 비스킷, 마른과일 아, 먹을 거 약간 그리고…어?(권총을 들어 올리며 헉 소리를 낸다.)
룡옥 : 아. 조심해요 그러다 다칩니다.
지혜 : 이거 진짜에요?
룡옥 : 글쎄…. 무게가 진짜 쇳덩이처럼 무겁긴 한데.
준화 : 총알은 하나밖에 없더라고. 그쪽도 아마 그럴 거야. 진짜인지 장난감인지 공포탄인지 모르겠지만. 확인해보고 싶으면 노래처럼 상큼발랄하게 러시안룰렛이라도 해보던가. (스스로의 농담이 웃긴지 낄낄거린다.)
지혜 : (기분이 상해서 말없이 준화를 노려본다.)진짜 이상한 아저씨네.
그때, 옆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준화 : 하, 드디어 모든 사람이 일어나는 건가. 지각이야 지각.
하지만 나라는 쉽사리 깨지 않고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 죄며 숨을 가쁘게 내쉰다. 눈을 뒤집고 발작을 한다.
룡옥과 지혜는 당황해서 멈칫거린다.
준화 : (화들짝 놀라 달려들며) 뭐야, 지랄병이야? (나라의 옷을 좀 풀고 가방을 벗긴 후 바르게 눕혀 숨쉬기 편하게 만들어준다.)어이, 처자. 진정해봐. (나라의 손발을 주무르면서) 어이, 거기들 뭐 약 같은 거 없어? 빨리 뭣 좀 찾아봐!
룡옥과 지혜는 서둘러 가방을 뒤지며 괜찮은 물건이 있는 지 찾아보지만 마땅한 것이 보이질 않는다.
준화 : (신경질을 내며) 에이 씨벌. (나라의 얼굴을 툭툭 치며)이봐요 아가씨. 진정 해봐요. 자, 날 따라 숨을 내쉬어 봐요 천천히 (마치, 산모가 출산 시 숨을 내뱉는듯한 행동을 반복한다.) 자 옳지 좋아. 천천히.
S#.4 밀실3
사건이 진정되어 있다. 네 사람이 대화를 한다.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인 나라의 모습이 보인다.
준화 : (한 시름 놓았단 듯이)휴, 그지같구먼.
나라 : (정신 차린 나라가 힘없이 걸터앉는다. 부끄럽다는 듯이 기어가는 목소리로)…가…감사해요.
준화 : (말없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룡옥 :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벌써 진땀만 뺐군요.(심각하게 나라를 바라보며)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지병이 있으신 건지? 아니면 혹시, 이곳에 오기 전에 무언가 일이라도? 아니면 설마 이 방에…?
나라 : (화들짝 놀라서)아, 아뇨. 그냥 제가 가끔씩…….몸이 좀 안 좋아서요. (문득 정신을 차려서) 어…. 그런데 여기는…?
준화 : 어이 처자. 혹시 여기까지 오게 된 기억이 있어?
나라 : (약간 멍해서)기억…?
룡옥 : (주변을 환기시키며)자자, 이제 모두가 다 일어나게 되었으니 서로의 퍼즐을 한 번 맞춰보도록 하죠.
지혜 : 어떻게요?
룡옥 : 우선 저부터 말하자면, 방송국에서 새끼피디를 하던 ‘김룡옥’이라고 합니다. 분명 어제,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사우나에서 잠시 눈을 부쳤는데 이상하게 눈 떠보니 이곳이었습니다. (가방을 들어올리며) 이 이상한 가방하고 말이죠.
지혜 : 와, 피디라고?
나라 : (눈을 반짝이며)와, 어느 프로그램이셨나요? 저도 예전에 방송작가하려 했는데….
룡옥 : (담담함을 가장하며) 이거저거 하다가 최근에 <그것이 알고 싶다>팀으로 갔습니다.
지혜 : 우와, 그거 유명하잖아요? 되게 힘들지 않아요?
나라 : (흥분해서)공중파잖아요? 게다가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면 능력도 있어야하고 목적의식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힘든 만큼 승진도 잘되는 곳일 텐데?
룡옥 : (잘난 척하지 않으려고 겸손을 피우며)아닙니다. 뭐 그래봤자 똑같은 일인데요. 차라리 좀 편한 데가 낫지 힘들어서 죽을 것 같습니다.
준화 : 잘난 양반이었구먼.
룡옥 : (헛기침을 하며)아무튼, 저는 이렇습니다. 다른 분은 어떻습니까?
(지혜와 나라는 우물쭈물한다.)
준화 : (시큰둥한 목소리로)뭐, 나는 ‘최준화’라고 합니다. 하는 일은 사회복지사들 일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어제 일이 좀 늦게 끝나긴 했는데 별 일 없이 집에 가서 발 닦고 잤을 겁니다.
지혜 : 사회복지사? 혹시 봉사기관인가요?
준화 : 뭐, 일종의?
지혜 : 어딘데요? 그럼 어쩌면 제가 알 수도 있어요. 저, 주말마다 봉사 가거든요! 요즘엔 <늘 밝은 집>에 가고 그랬어요.
준화 : 뭐 사회복지과야? 봉사시간 필요해?
지혜 : 아, 처음에는 봉사시간 때문에 갔는데 이제는 그냥 사람들 도와주고 기뻐하는 게 좀 뿌듯해서요.
준화 :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이야…. 진짜 닮았네. (조금 풀어진 모습으로 낄낄 웃으며) 거, 얼굴도 예쁜 처자가 마음도 예쁘네. 처자가 알긴 힘들 거야. <춘천데이케어센터>에서 일하고 있거든.
룡옥 : 아 거기라면…….
준화 : 왜, 그쪽에서 유명한가?
룡옥 : 훌륭한 곳이라고 누가 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지혜 : 아, 저는 ‘최지혜’라고 합니다. 스무 살 대학생입니다. 아, 음 어제는 학교 애들과 약속이 있어서…아마,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준화 : (언짢은 듯)으음.
룡옥 : 흔한 대학생의 생활이군요.
나라 : 흔한가요?
지혜 : (부끄러운 듯)아뇨 뭐….
룡옥 : (나라를 보며)그쪽은요?
나라 : (우물쭈물하며) 아, 저기 저는 일종의 선생님이에요.
지혜 : 와, 선생님이라니 무슨 과목이신데요?
룡옥 : ‘일종의’라니 학원 강사 같은 겁니까?
나라 : 아, 아뇨. 한국어교사라고 외국인한테 한국어를 가르치는 거예요. 센터 같은데 돌아다니며 수업해요.
준화 : 호, 신기하구먼. 근데, 몸이 그런데 가르치다 쓰러지는 거 아니야?
룡옥 : 흠, 그럼 직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납니까?
나라 : 아…. (목소리와 행동이 움츠러들며)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돌아다니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요즘엔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냥. 학원 다녀와서 공부하다 집에서 잔 것 같은데….
룡옥 : 흐음.
지혜 : 얘기를 들어보니 모두 자기할일 하다 갑자기 이곳에 온 것 같은데요?
준화 : 뭐, 자는 사이에 납치라도 당했단 거야? 무슨 이유로?
지혜 : 어…. 글쎄요?
준화 : 무언가 공통분모가 있어야지.
지혜 : 어…. 봉사?
룡옥 : 아니면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죠.
지혜 : (화들짝 놀라) 설마?
준화 : (시큰둥하게)뭐, 그럴 수도 있지.
지혜 : 어, 아니. 아저씨는 왜 그렇게 담담하세요?
준화 : 아니, 이게 뭐 영화도 아니고. 복수를 위해서 모았겠어? 유괴? 정부의 실험쯤 되나? 아 저기 피디양반이면 당할 수도 있겠구먼. 하지만 여기 아가씨와 나를 보니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아. 장난이라면 금방 풀어주겠지.
룡옥 : 그럴 수도 있지만. 만일, 풀려날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떠합니까? 예를 들어, 어떤 미친놈이 ‘그냥’ 눈에 띄는 사람들을 모아 ‘재미로’ 감금한 것이라면? 그래서 우릴 관찰하고 있다거나, 가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나라 : (공포에 질려)네?
준화 : (여전히 시큰둥하게)그럼 뭐, 그냥 좆된거지 뭐.
(모두가 잠시 침묵한다)
지혜 : 아, 저기. 그럼 일단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않을까요?
룡옥 : …사실, 아가씨들이 깨어나기 전에 준화씨와 방을 둘러봤습니다. (가운데 문을 가리키며)저기 용접이 된 것으로 보이는 철문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방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면 우리가 매고 있는 가방정도가 되겠죠.
S#.5 - 숫자 4
갑자기 철문 위로 디지털 숫자‘4’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S#.6 - 밀실 4
철문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숫자 4’를 지혜가 본다. 깜짝 놀라서 가리키지만 무언가 뜬 것 같은 인상만 본 사람들.
룡옥 : 정확히 어떤 글자였죠?
지혜 : ‘숫자 4’였어요!
준화 : (와락 인상을 구기며)이런 씨벌…….
지혜 : (달려가 철문 위에 숫자가 생겼던 곳을 만지며)안에서 조정하는 걸까요? 이음새가 없어요!
나라 : (안색이 흐려지며 숨을 다소 가쁘게 쉰다.) 설마, 사람 숫자일까요?
룡옥 : (심각한 표정으로 관객을 둘러보며)이로써, 누군가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것이 증명됐군요. 누군가 우리에게 원한이 있는 걸까요?
나라 : (마치 재채기가 터지듯)저, 전 아니에요! 저는 선량하게 살았어요. 가난한 집에서 부모님이 싸우실 때도 조용히 참았고, 어머니의 기대에 항상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누군가와 다투지 않으려고 힘들어도 항상 참고, 착하게. 착하게 살았어요! 남들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서 노력하고, 지금도 조용히 공부하고 있고요!
준화 : (지루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지혜 :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에 그저 당황한다.)아….
룡옥 : (약간 짜증을 내며)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하시지 않으셔도 되는데…다만, 조금 진정하셨으면 합니다. 지금 같은 ‘사고’현장에서는 재채기 같은 감정보다 숨을 고를 수 있는 이성이 더 중요합니다.
나라 : (패닉에 빠져)아니, 그러니까 나는 아니, 저는….(숨이 가빠진다.)
준화 : (나라의 등을 쓸면서)자자, 젊은 처자. 진정해 진정. 잘 했네. 잘 살았어.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구먼. 원래 뭐, 사람이 실수도 하고 사는 거지. 부모라고 마냥 잘하진 못해. 나도 뭐 좋은 가정을 이루진 못했지만 처자는 뭐, 좋은 딸내미가 되려고 노력했잖아. 그럼 된 거지. 부모가 몰라줘도 이미 좋은 딸이야.
지혜 : (가만히 중얼거리며) 그러면… 좋은 딸…?
룡옥 : (낯설다는 듯 팔짱을 끼며) 흠.
나라 : (조금씩 진정이 되며)감사합니다. 아, 그, 죄송합니다.
룡옥 : 신기하네요. 감성팔이가 도움이 되군요.
준화 : 나는 잘 모르겠지만 때론 그렇지. (가방을 뒤져 음식을 꺼내 먹는다.)이거, 진짜 오래 가두면 어쩌지. 이런 아무소리 없는 곳에서 굶어 죽는 건 싫은데.
룡옥 : 우릴 가둔 범인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진 않을 겁니다.
지혜 : 하지만 바라는 것이 없다면요?
룡옥 : 그건…. 이유를 알아봐야죠. (사람들을 둘러보며) 혹시, 이곳에 오게 된 소스, 의심 가는 정황이 없나요? 저는 솔직히 말해, 최근에 조사하던 곳을 약간 의심하고 있습니다. 시골의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는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거든요. (조심스럽지만 추궁하듯)그래서 여러분들. 종교가 어떻게 되시나요?
나라 : (약간 날카로워져서)우리가 그 사이비종교를 믿는 사람이고 그것 때문에 납치됐다고 의심하고 있는 거군요?
룡옥 : 네. 사실, 누굴 납치하고 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라고 추측했었는데 제 주변에서 건질만한 사항이 그것 밖에 없거든요. 만일 맞는다면. 꽤나 흥미진진한 오판이 되겠죠.
나라 : 확실히 단언하죠. 저는 아니에요. 저는 모태신앙 기독교인이에요. 사이비도 아닌 장로회 쪽이며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신앙생활은 저를 지탱해 준 버팀목이에요. 더 의심하신다면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어요.
룡옥 : 음….
준화 : 오, 처자, 문자 좀 쓰네.
지혜 : 아, 아저씨. 지금 진지한데!
준화 : 알았어. 알았어. 딸 같은 아가씨한테 혼나네.
지혜 : 딸이 있어요?
준화 : 아 뭐. 딸이 하나 있는데. 스무 살 이랬나? 아가씨랑 같을 거야 확실히….
나라 : (그들을 멍하니 보다 소리를 지른다)다들 절 무시하는 거예요?
지혜 : 네? 네? 아뇨. 아뇨!
준화 : (손사래 치며)워워, 진정해 처자. 원래 말이란 게 흘러가다보면 삼천포가 일상이잖아. 미안해 미안.
나라 : (말없이 노려보다가)…그리고 처자 소리 좀 하지 말아주세요. 좀 불편해요.
준화 : 아 그래, 그래. 이름이 뭐라고 하셨더라?
나라 : 나라요.
준화 : 맞아 맞아. 나라. 나라씨. 이제 조심할게요.
룡옥 : (헛기침을 하며)저 때문에 괜히 분위기가 안 좋아진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 의심 가는 상황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나라 : (한숨을 쉬며)네 그건 맞죠. 저도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준화 : 암 맞지. 맞죠. 아, 나도 무교요. 종교단체 껴서 운영하던 센터에서 일했을 때 좋은 기억이 없어서….
지혜 : 일단 저는 기독교이긴 한데 그렇게 열심히 다니진 않아요. 부모님 따라 갔던 건데 부모님도 그렇게 열심히 다니시진 않거든요. 차라리 주말에 봉사를 하는 게 더 뿌듯하기도 하고.
룡옥 : …그렇군요. 음. 아, 참고로 저도 무교입니다. 맹목적으로 누굴 믿는 게 영 체질에 안 맞더군요.
준화 : 종교인이 하나 뿐인데 사이비종교에서 공격했단 건 억측이 아닐까? 물론 거짓이 없다는 전제 하에.
룡옥 : 네 음. 이런저런 사건이 많아서 말이죠.
나라 : 그렇지만 여러분. 믿는다고 손해는 아니니 제가….
룡옥 : (단호히 끊으며) 잠깐! 잠깐 잠깐. 지금은 종교에 대한 논의 보다 당장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준화 : 맞아 맞아. 친한 친구래도 종교 얘기, 정치 얘기는 하는 게 아니랬어.
나라 : 아, 하지만…!
룡옥 : 일단. 우리 생존을 위한 규칙을 정하는 게 어떨까요?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가정해야죠. 가방을 모아서 식량을 공동분배 합시다. 총은……위험하지만 혹시 모르니 가방 하나에 넣어두고 숨겨둡시다.
준화 : 그려, 그려.
나라 : (다소 불만족스럽게)…네.
지혜 : (바로 몸을 움직여 가방을 모아둔다.)여기 철문 앞에 둘까요? 가운데이고 공동으로 보고 지키기 쉬우니까요.
룡옥 : 네 좋습니다.(가방을 옮기는 것을 도와준다.)
나라 : (말없이 같이 가방정리를 돕는다.)
지혜 : (가방에서 총을 꺼내 한 곳에 모아두다가) 아 설마?
룡옥 : 왜요?
지혜 : 아까 분명 ‘숫자 4’가 떠올랐다 사라졌어요. 총이 4개이고 총알도 마찬가지이니 여기에 힌트가 있는 게 아닐까요?
나라 : (그렇게 믿고 싶다는 듯)아 그럼, 사람 숫자가 아니라 총알 숫자가 아닐까요?
지혜 : 맞아요! 확실하게… 일단 쏴봐요!
룡옥 : 아니, 잠깐. 그 글자가 ‘숫자 4’인지도 확실하지 않는데!….
준화 : 만약 숫자면 0이 되게 해야 하는 건가?
지혜 : 총알을 다 쏘면 문이 열리는 게 아닐까요?
룡옥 : 하지만 단순히 총알이 0이 된다고 문이 열리는 건 너무 쉽지 않나요?
나라 : 그건 그렇죠. 의미도 없고 이상하긴 하네요.
지혜 : 애초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해요.
준화 : 뭐, 배고프다고 밥 대신 먹고 죽으라고 준 것은 아니겠지.(낄낄거린다.)
나라 : (불쾌해져서)뭐가 웃겨요…?
지혜 : 아저씨, 진짜 이상해요.
준화 : (그 소리를 듣고 또 낄낄거린다.)
룡옥 : 일단은, 넣어두고 좀 더 이곳을 살펴본 다음에 한 번 쏴보도록 합시다.
지혜 : 에이, 그냥 지금 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룡옥 : 혹시 다른 때 필요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라 : 누가 그냥 우리를 놀리는 것일 수도 있죠. 무작위로 사람을 뽑아서 관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던가?
룡옥 : 음…. 우리나라 특성상 무리입니다. 사전에 동의 받지도 않았고, 검증받지 않은 일반인이 얼마나 재밌을 지도 모르고, 그리고 총까지 있죠. 이런 위험한 상황은 힘들어요.
지혜 : 그런데 저 총알이 진짜인지도 모르잖아요?
룡옥 : 그건 그렇죠.
준화 : 아.
지혜 : 왜요?
룡옥 : 화장실 가고 싶은데 그건 어쩌지?
지혜 : 설마 큰 거 인가요?
준화 : 아니,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닌데….
나라 : 아….
룡옥 : 으음. 일단 구석 한 구석에 보는 건 어떨까요?
지혜 : 모두가요?
나라 : 그건 싫어요.
룡옥 : 그럼, 저기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 끝으로 나눠서 보는 거죠. 여성분들 측에는 옷을 걸어서 좀 안보이게….
지혜 : 윽, 그게 뭐야.
룡옥 : (드물게 우물쭈물한다) 하지만 음, 원룸마냥 다 뚫려서 여기서 어떻게 할 방법이…
나라 : (한숨을 푸욱 쉰다.) 우리의 존엄을 헤치기 전에 어떻게든 빨리 탈출해야겠군요.(총을 들어 올리려 한다.)
룡옥 : 아니, 그런….
준화 : 아 그럼, 일단 난 저쪽 끝에서 물 좀 빼고 올게.(우측 구석 끝으로 달려가 소변을 본다.)
S#.7 - 밀실의 화장실
구석의 시점에서 다가오는 준화를 찍는다. 굉장히 급한 표정으로 오던 준화는 오히려 구석에 다가올수록 무표정이 된다. 지퍼를 내리며 소변을 보는 준화. 준화를 두고 등 뒤의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초점이 맞춰진다.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나라 : (총을 만지작거리며)아, 이거 어떻게 써야하죠? 먼저 장전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지혜 : (같이 다른 총을 만져보며)생각보다 무겁네요. 뭔가 신기하다.
룡옥 : (당황해서)자, 잠깐. 조심해요. 그러다 발사되면 어쩌려고. (둘에게서 총을 뺏으려 한다.)주세요.
지혜 : 잠깐만요. 잠깐. 좀만 더 보고 드릴게요.
룡옥 : (단호하게)주세요. 그건 장난감이 아닙니다.
나라 : (뺏기지 않으려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잠깐만요. 자꾸만 명령하려 드네요. 우릴 무슨 애처럼 보세요? 잘 살펴보고 드릴게요. 방아쇠만 안 당기면 되는 거잖아요?
룡옥 : (나라의 총을 뺏으려고 하며) 아니, 제가 언제요? 저는 그저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총이 방아쇠만 안 당긴다고 안전한 게 아니라….
총을 뺏으려고 몸싸움을 하는 통에 나라의 총이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커다랗게 격발음이 울린다. 철문에 불꽃이 반짝인다.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른다.
뒤에서 벌어지는 소란 속에 준화는 무감각하게 소변을 보고 있다. 그러다 비명소리를 듣고 흐린 카메라의 초점 속에 뒷모습을 보이며 허둥지둥 달려가는 준화.
철문 위에는 어느 새 떠올랐던 숫자 3이 막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정신이 없어 아무도 숫자를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S#.8 - 밀실5
준화 :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며)뭐야, 무슨 일이야. 누가 쐈어?
룡옥 :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가)아….(멍하니 총을 내려 보며)
나라 : (머리에 손을 얹고는)…저기 괜찮으신가요.
룡옥 : 아, 예…. (조용히 총을 주우면서) 누구 다치신 분 없나요.
지혜 : (갑자기 운다.)
룡옥 : (화들짝 놀라서)무슨 일이시죠?
지혜 : (울면서)다리가….(다리를 보여준다.)
-지혜의 다리에 피가 흐르고 있다.
준화 : (혀를 차며)이런, 총알 파편이 튀었나보구먼. (가까이 가서 지혜의 상처를 살핀다.) 뭣들 한 거야? 총을 쏘려면 아무도 없는 벽에다 쏠 것이지 왜 철문에다 쐈데? 이런, 피가 많이 나네.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상처에 물을 붓는다.)
지혜 : (신음한다.)
준화 : 다행히 스친 거 같아.(옷을 벗어서 지혜의 다리에 묶어준다.)
룡옥 : 쏘려고 쏜 게 아닙니다. 총을 떨어트리며 발사가 됐어요. (나라를 보고 화를 내며) 아니, 그세 장전을 다 했습니까? 말했잖아요. 위험하다고! 차라리 애가 낫네요!
나라 : (거의 울상에 잠겨)그게,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룡옥 : 됐습니다.
나라 : (중얼거리다 숨을 헐떡인다.)
준화 : 워워, 진정해 처자. 어쨌든 총알은 공포탄이 아닌가 보구먼.
나라 : (조그맣게) 처자 아닌데….
룡옥 : (무시하며) 일단 지금 상황을 정리해 봐야할 것 같군요. 총은 4개 총알은 이제 3개가 되었고. 사람은 4명. 화장실은 없고 식량과 물은 조금….
준화 : (철문 위에 숫자가 있던 자리를 본다.) 친절하게 진행사항을 더 알려줄 생각은 없나보구먼.
룡옥 : 네….
지혜 : (울음은 잦아들어있다. 약간 쉰 목소리로) 어떻게 하죠 우리?
준화 : (가방 속의 과자를 꺼내들며) 뭐, 어떻게든 되겠지.
룡옥 : (그런 준화를 저지한다.) 잠깐만요.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무분별하게 식량을 소비하면 안 됩니다.
준화 : 뭐 어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뽀사시하다는데.
룡옥 : (황당해서) 아니, 당장 배고파서 죽을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립니까. (과자를 뺏는다.) 이리 주세요.
준화 : (툴툴거린다.)독재자 같으니라고.
룡옥 : 뭐요?
준화 : 아 들렸어? 미안, 미안.
나라 : (고개 숙여있다 킥- 웃는다.)
룡옥 : (분개해서) 당장 오늘을 넘어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배분해야 한다고요!
준화 : 어, 그러니까 공산당 같다.
룡옥 : 뭐라고요?
나라 : (비웃으며) 맞네요. 혹시, 북쪽에서 오셨어요?
룡옥 : (기가차서) 아니,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됩니까? 아니,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나라 : (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다.) 자기만 잘났어. 아주.
룡옥 : 아니, 하! 참! (준화를 보면서) 제가 못할 짓을 했습니까?
준화 : 아니, 그건 아니긴 하지.
룡옥 : (나라를 노려보며) 저는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뿐입니다. 여기가 싫어서! 이게 불편한 거면 당신이 쓸데없이 예민해서 그럴 뿐입니다.
나라 : (마주 노려보며) 쓸데없이 예민하다고요? 저 말고도 다른 사람도 불편해 했어요. 마치 당신이 선생님처럼 우리를 통제하려 했잖아요!
룡옥 : 통제라니요? 그저 상황에 맡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끌었을 뿐입니다. 생각하세요, 생각. 방금 전도 당신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사건이 일어난 것이잖아요!
나라 : 뭐라고요?
준화 : 워워, 진정해요 진정.
나라 : 아니, 아저씨는 왜 그렇게 여유로워요? 놀러 나왔어요? 여기랑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혼자 낄낄거리기나 하고!
준화 : 아니, 처자. 진정해. 나한테 왜 그래?
나라 : (소리지르며) 악! 그놈의 처자란 소리도 그만둬요. 옛날사람인거 티내세요? 제 이름은 ‘이나라’에요! 제대로 불러달라고요! 아, (말을 끝으로 휘청 이며 벽에 기댄다.)
준화 : 워워, 진정해. 나랴 양? 나라 씨? 암튼, 몸도 안 좋으면서 열을 내고 그래.
나라 : (힘이 빠진 목소리로) 하아, 이건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그냥, 빈혈 같은 거예요.
준화 : 괜찮은 겨? 혹시 과호흡 같은 게 오진 않아?
나라 : (작은 목소리로)…아직 괜찮아요.
룡옥 : (혀를 차며) 쓸데없이 다른 사람 힘들게 만들지 말고 그냥 누워서 쉬시죠.
나라 : 뭐요?
준화 : 말이 좀 날카로워진 것 같은데 자네.
룡옥 : 죄송합니다. 저도 좀 예민해져서. 그래도 아프시면 대우해 줄 테니까 지혜씨랑 같이 여기 쉬시죠. 괜히 있어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네요. 이 상황에서 뭐가 도움 될지 모르겠으니 방해나 하지 마세요.
나라 : 대우가 뭐요?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룡옥 : (귀를 막으며 낮은 소리로 짜증을 낸다.) 히스테리 말기증 환자 같으니라고.
나라 : (눈이 돌아가 거친 몸짓으로 총을 들어 룡옥을 겨누려 한다.)
룡옥 : (달려가서 나라를 차버린다.)예상했다. 예상했어. 나한테 총을 겨눠? 홧김에 살인할 쌍년 같으니라고! (분에 못 이겨서 나라를 계속 밟는다.)
지혜 : (소리를 지른다.) 아저씨 진정해요! 진정하라고!
준화 : (느릿하게 달려가서 룡옥을 잡아끈다.) 워워, 진정해 진정. 차분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갑자기 열이 올랐어.
룡옥 : (숨을 헐떡이며) 저는, 이런 히스테릭한 여자가 싫어요.
준화 :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 대부분 그렇지.
룡옥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뭔가를 말하려다) 됐습니다.
준화 : 뭐, 뻔한 사연이 있나 보구먼. 무슨 일인데 그려?
룡옥 : (약간 울컥해서) 예, 뭐. 뻔한 이야기지요…. 됐습니다.
준화 : (영혼 없는 말투로) 아니,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는데….
지혜 :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나라 씨 좀 보세요!
그 순간 커트되며, 카메라는 나라의 몸을 찍지 않고 손만 클로즈업 한다. 발작하듯 움직이는 손. 그러면서 가슴이 아픈 지 가슴 쪽으로 양손을 움켜쥔다.
다시 커트되어, 줌-아웃 된 카메라가 뒤에서 세 사람의 모습을 찍는다. 룡옥과 준화가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 나라의 옷을 편하게 풀고 손발을 주무른다.
준화 : (나라의 목을 세우며) 자네 아까 너무 세게 찬 것 아닌가? 뭔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숨을 잘 못 쉬어.
룡옥 : (패닉에 빠져서) 아니, 그게 아까는 갑자기 화가 너무 나서 저도 잘….
준화 : 어어?
두 남자의 모습에 가려져 잘 안 보이는 나라. 그렇지만 순간, 그들 사이로 힘 없이 떨어지는 손이 보인다.
화면이 전환되며 클로즈업된 룡옥의 얼굴이 잠시 비춘다. 신음만 내며 넋이 나간 표정.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전체 사람들을 찍는다.
준화 : (나라를 흔들어본다.)이봐, 처자? 아, 나라 양? 씨? (뺨을 때린다.) 이봐요, 처자! 처자! 죽었어요? 죽은 거야? 진짜?
지혜 : (놀라서 숨을 들이키며)진짜요? 이렇게 갑자기?
룡옥 : (준화를 밀치더니 나라의 코에 손을 대어본다.) CPR의 기본은 먼저 환자의 기도를 확보하고…어, 어….(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며 우왕좌왕하다가 나라의 가슴에 두 손을 올리고 심폐소생술을 시전 한다.)하나, 둘!….
준화 : (그런 룡옥을 보다가 슬쩍 일어난다.) 습관이 아주 예의바른 친구구먼.(그러고는 철문 위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배낭 쪽으로 무심히 걸어가면서) 이거 참. 이렇게 된 이상. 시도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구먼.
지혜 : (배낭 쪽으로 걸어온 준화를 보고 정신이 나가 다급하게) 아저씨, 아저씨! 어떡해요! 어떡하죠? 무슨 방법이 없어요?
준화 : (태연하게 가방이 모인 중앙 쪽으로 가서 걸터앉으며)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든 해야겠네. 이게 이 상황의 ‘해결책’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혜 : 네?
준화 : (가방을 슬쩍 가져와 뒤지면서) 근데 아가씨는 진짜 내 딸내미랑 비슷한 것 같아. 아가씨만 보면 노래가 들려.
지혜 : (멍해져서)에?…그래요? 아니 지금. 무슨 소리에요?
준화 : (가만히 지혜를 바라보며) 예전에 와이프가 내가 싫다면서 나가버렸거든. 그런데, 나갈 거면 혼자 나가지. 내가 애 정서에 안 좋다고 딸내미까지 데려간 거야. 어이가 없지? 그렇지?
지혜 : (분위기가 이상하여 겁을 먹고)네? 아, 네….
준화 : (텐션이 점점 올라간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게 정부에서도 애가 엄마랑 사는 게 좋다고 해버린 거야. 빌어먹을 와이프가 내가 병이 있다고 걸고 넘어졌어.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애를 학대하기라도 한데? 나는 딸내미를 사랑하고 진짜 잘 키울 자신이 있는데! (숨을 고르듯 한 층 다운되어)…그래서 열심히 노력했어.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상 같은 것도 받고 뉴스에 잠깐 나오기도 했다?
지혜 : (기분이 이상해져 몸을 슬쩍 빼며)아, 네….
준화 : (마치, 유혹하듯) 지혜 씨는 내 딸을 정말 닮았어. 그래서 확신할게. 댁네 부모님도 지혜 씨를 정말 사랑할거야.
지혜 : (갑자기 예상치 못한, 듣고 싶었던 말에 혹해서) 아…진짜요? 그럴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실 저희 부모님도 저를 사랑하시는 거겠죠?
준화 : (확신을 담아 인자하게 웃으며) 물론이지! 나는 내가 그렇게 자식을 좋아할 줄 몰랐어. 그런데, 딸내미를 처음 보았을 땐 아주 깜짝 놀랐다니깐? 아니 글쎄, 아기 얼굴을 보니까 머릿속에 노래가 들리는 거야? 그것도 아주 유쾌한 노래가. 그래서….
지혜 : (무언가 감동을 받아 기뻐하며) 와아, 네. 네! 그래서요?
준화 : 그래서, 내가 오랜만에 딸내미를 보면 아주 기쁘거든? 웬만하면 전날에 일을 다 처리해 두느라 딸내미 만나기 전날이면 일을 늦게까지 한단 말이야. 그런데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일을 늦게까지 했단 말이지?
지혜 : 아, 그래요?…. 오늘이 따님 분을 만나려는 날이었어요? 아, 상심이 크시겠네요.
준화 : (의미심장하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지혜 : 네?
준화 : (가방 속에 두 손을 집어넣는다. 달칵-하는 장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뭐가 어쨌든.
지혜 : (상황을 이해 못하고 얼어서) 네? 어, 아저씨?
준화 : 난 사랑스런 내 딸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고.
준화는 말을 끝으로 가방에서 총을 꺼낸다. 카메라는 걸터앉아 가방에서 총을 꺼낸 준화의 모습을 담는다. 준화는 느긋하게 웃으며 총을 쏜다. 탕! 쏘았던 총은 바로 버린다. 바로 가방에서 다른 총을 꺼낸다. 일어서면서 장전을 한다. 느릿하게 걸어가며 총을 겨눈다. 카메라는 계속 준화만 담고 있다. 룡옥의 당황하는 소리와 욕설이 들린다. 탕! 준화는 무표정하게 쏜 총을 버린다. 몸을 돌리고 어깨춤에 손을 올려 철문을 바라본다.
화면이 커트되며, 철문 위에 ‘숫자 1’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준화 : (이상하다는 듯)흐음? 여보세요? 1이 사라져야 끝인가요? 승자가 없는 게임인가? (철문에 다가가 두드린다.) 여보세요? 헬로? (철문을 두드리다 이내 거칠게 발길질을 한다.)씨발! 이봐,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내보내 달라고!
준화는 한참을 철문을 발길질하며 발광을 하다 갑자기 뚝-하니 멈춘다.
준화 : (살벌하게 뒤로 돌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아, 설마?
준화는 무서운 얼굴로 뚜벅뚜벅 카메라를 향해 걷다가, 방향을 틀어 카메라의 앵글에서 벗어난다. 옆으로 움직인 카메라에는 나라의 시체를 지나치는 준화가 보인다. 그리고 나라에게서 떨어져 나간 총을 줍는다.
준화 : (멍하니 총을 보며) 설마 이건가? 흠. (그러다 나라의 시체를 본다.) 혹시, 모르니 겸사겸사 확인해 보지. (나라의 시체에 다가가 그녀를 발로 찬다.) 이봐, 젊은 처자. 혹시 살아있나? 죽은 척 한 건 아니지? (나라의 시체를 향해 겨눈다.) 미안해, 처자. 겸사겸사 확인해볼게 있어서. (탕! 총을 쏜다.)
화면전환 되며 철문을 클로즈업하여 찍는다. 철문 위로 ‘숫자 0’이 떠오른다. 곧, 숫자가 사라지고 덜컹-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린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어 철문을 바라보는 준화, 바스트샷.
준화 : (철문을 보고 총을 본 다음 능청스럽게) 총알이었나 보네? (총을 버리고 유쾌하게 철문을 향해 걷는다.)
뒤에서 준화가 철문을 통해 나가는 모습을 롱샷으로 담는다. 준화가 나가고 철문이 닫히며 줌아웃 되며 페이드아웃.
에필로그(Epilogue)
시작할 때의 삐- 거리는 날카로운 이명소리가 들리더니 규칙적인 신호음으로 바뀐다. 중환자실에나 나올법한 건조한 기계음이다. 마치, 심정지 된 사람이 맥을 회복하는 소리 같다.
- 페이드인 되며 중환자실이 보인다. 병실침대에는 준화가 누워 치료받고 있다. 옆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서있고 중년 여성과 스무 살로 보이는 여인이 준화를 간호하며 앉아있다. 스무 살 여인은 지혜와 닮아있다.
의사 : (차트를 넘기며) 최준화 씨. 더 불편하신 데는 없습니까?
준화 : 글쎄요. 대체로 불편한 것 같은데….
의사 : 기적입니다. 그날 추돌사고로 실려 온 사람들 중에서 최준화 씨만 멀쩡히 깨어나셨습니다. 사회봉사로 유명하시다면서요? 평소에 덕을 쌓으셔서 하늘이 보우하셨나 봅니다.
준화 : (갑자기 낄낄거리며) 하늘이 보우하셨죠.
전 부인 : (눈살을 찌푸리며 그러나 모질지는 못한 목소리로) 그 속 빈 강정 같은 웃음소리 좀 내지 말라니까.
준화 : 아, 미안, 미안. 윽.
의사 : 어디 편찮으신가요?
준화 : 웃을 때 가슴이 좀 아픈데요?
의사 : 아 네, 아직 갈비뼈가 덜 아물어서 그렇습니다. 기침을 하거나 웃으면 통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진통제를 좀 놔 드리겠습니다. 그럼 쉬세요.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나간다.
준화 : 이런, 이런.
전 부인 : 잘됐네. 이 기회에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 좀 고쳐봐.
딸 : 아빠 웃음소리가 어때서 그래. 좀 경박하긴 해도 정감 넘치고 좋은데. (침대에 누워있는 준화의 손을 애달프게 잡으며) 아빠 이제 괜찮아요? 아빠 힘드신데 무리하게 우릴 만나러 오려다가…. 이제부턴 제가 찾아갈게요. 엄마가 차 사주신다고 해서 운전면허도 따고 있어요.
전 와이프 : 그러라고 사주는 차 아니다. 이제 대학교 갔으면 공부나 하지 귀찮게 뭘 자꾸 아빠를 찾아가?
딸 : (엄마한테 신경질 내며) 엄마는 만날 아빠한테만 그래! 아빠도 일 끝나고 피곤하신데 바쁘게 우릴 만나러 오다가 다치신 거잖아.
준화 : (허허롭게 웃으며) 괜찮아, 딸내미. 까짓 거 좀 무리할 수도 있지.
딸 : 그래도 그렇지….
준화 : (힘겹게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찾아갈게. 아빠가 딸내미 사랑하는 거 알지? 드라이브할 겸 데리러 가는 거야. 기분 전환도 되고 좋다구.
딸 : 그래도…. 아빠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자주 올게. 학교생활 때문에 매일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자주 올게.
준화 : 얼마나?
딸 : 어, 적어도 일주일에 네 번? 아니, 세 번? (귀엽게 웃는다.)
준화 : 무리하지는 말아. 그래도 입원하니까 편하게 쉬다가 딸내미 얼굴 자주 봐서 좋구먼.
전 부인 :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고) 그럼, 이제 가자. (준화한테) 나 바빠서 이만 갈게. 푹 쉬어.
딸 : 어, 어? 그래. (준화를 껴안고) 아빠 나 갈게. 푹 쉬어.
준화 : 그래, 그래. 조심히 들어가. 몸 다 나으면 아빠가 또 데리러 갈게.
딸 : 아이 참, 이제 안 그래도 된다니까.
준화 : 아빤 걱정 마. 몰랐어? 아빠 완전 주윤발이야. 우리 딸내미 보러가기를 막는 자, 누구든 내 총탄에 쓰러지리라!(재밌는 농담을 했다는 듯 혼자 낄낄거린다.)
‘랄랄랄라 랄라 랄랄라-’하는 CM송 같은 발랄한 노래가 흐른다. 낄낄거리는 준화를 두고, 전 부인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또각또각 뒤돌아 나간다. 딸은 다소 안쓰럽게 준화를 보고는 엄마를 따라 나간다.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노래가 뚝- 끊긴다. 준화는 무표정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