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2019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국어국문학과 20151122 이인혜
Ⅰ. 서론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여러 국내외 영화제에서 쟁쟁한 대작 상업 영화들을 제치고 저예산 독립 영화로 여러 차례 상을 받은 작품이 있다. 바로 영화 ‘우리들’이다. ‘우리들’의 성공은 이렇다 할 스타 캐스팅이나 홍보 없이 입소문과 영화의 완성도만으로 이끈 쾌거이다. 감독도 영화 제작 경험이 많은 감독이 아닐뿐더러 출연하는 배우들도 연기 경험이 처음인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많은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의 덕분일 것이다. 이 작품의 주요 소재는 ‘관계’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열한 살의 초등학생이 겪는 ‘관계’에 대한 성장통과 그 의미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소개에 나와 있는 고작 열한 살짜리의 소녀들의 우정 이야기에 대한 줄거리를 보면 영화를 보기도 전에 유치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다. 이토록 어린 열 한 살의 소녀들이 만들어가는 관계가 얼마나 절실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지, 그 시절을 지나온 어른들은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다가 이내 엔딩크래딧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선’에게, 혹은 ‘지아’에게 또 누군가는 ‘보라’에게 공감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정의되며 우리는 좋든, 싫든 사는 동안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 ‘관계’란 때로 아주 절박하게 붙잡아야 하는 어떤 것이 되곤 하는데 그 시기는 또래 집단과의 유대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학창시절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이 되어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게 누구든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린 ‘선’과 ‘지아’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기에 마침내 우리는 이 영화를 마치 내 얘기인 것처럼 공감하며 보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초등학생끼리 투닥거리는 얘기를 다루고 있는데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우리 각자의 학창시절을 지나며 ‘선’과 ‘지아’의 입장, 혹은 ‘보라’의 입장에 서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시기에 맺는 ‘관계’가 됐든 ‘관계’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들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관계에 대한 성장통을 겪는 건 우리가 어떤 집단에 어느 위치에 서 있든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느 세대, 누가 보든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비평할만한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참 어리고 미성숙한 단계에서 겪는 ‘관계’에 대한 성장통을 그려내지만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유,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 주목하여 이 영화의 연출방식, 영화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재들을 분석함으로써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ⅰ. 주제를 관통하는 연출 기법
<우리들>에서 카메라의 활용 기법은 특이한 지점이 있다. 카메라의 높이와 앵글이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대부분이니 의도한 연출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과 함께 화면에 담기는 몇 안 되는 장면에서도 아이들을 비추는데 중심을 두고 있음을 보면 의도된 연출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프레임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카메라 화면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카메라 연출 기법이 갖는 효과는 크게 두 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카메라의 초점을 아이들에게 집중함으로써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이들임을 명백하게 하는 효과이다. 이 영화는 열한 살 소녀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마주하는 관계의 양상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아이들만을 집중해서 비추는 카메라 연출을 통해 그 뜻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카메라 연출을 사용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집중된 관객들의 시선이 다른 인물들로 분산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윤가은 감독은 이러한 카메라 연출을 통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의 기반을 더 확고히 다지고 있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이 맺는 ‘관계’에 있으며,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본인이 조명하고자 하는 대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카메라 연출 기법이 갖는 효과는 하나 더 있다.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이들만의 문제이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아이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영화에는 아이들이 아닌 다른 인물들도 여럿 등장한다. 선의 부모님, 지아의 할머니, 둘의 선생님 등이 그들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어른의 시선으로 보나 아이의 시선으로 보나 그들은 꽤 괜찮은 어른처럼 보인다. 아이들의 문제라고 쉽게 생각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인 ‘선’ 또는 ‘지아’에게, 둘의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영화의 여러 부분에서 확인된다.
‘선’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시는 소주를 싱크대에 부어버리는 딸의 행동을 보고 무작정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다친 상처를 먼저 살피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거듭해서 묻는다. 하지만 ‘선’은 상처가 난 손을 쉽게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감추려고 애쓰고 엄마의 손길을 벗어나려고 한다. 지아의 할머니도 둘의 담임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지아’가 우울해하는 것 같으니 손녀의 친구인 ‘선’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잘 지내달라는 당부를 전한다. 선생님은 ‘지아’의 악의가 담긴 말실수에 대해 지적하며 사과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렇듯 아이들에게는 꽤 괜찮은 보호자가 있고 아이들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계속해서 피력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어른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이는 아이들 스스로 그 속에서의 문제가 오롯이 자신들이 감당하고 헤쳐나가야 할 문제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러한 암시를 카메라 연출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촬영기법은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구분 짓기 위한 장치가 된다. 감독은 조금도 한눈팔지 않으면서 우직하고 뚝심 있게 아이들의 관계만을 조명한다. 감독은 이러한 우직함이 카메라 연출을 통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이들이 맺는 관계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맞닥뜨린 문제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몫이며 자신들의 세계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ⅱ.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한 섬세한 연출
이 영화는 어린 아역 배우들이 주축이 되어 영화를 끌어간다. 94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짧은 편이 아닌데도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완성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섬세한 감정선이며 표정 연기도 어지간한 성인 배우 못지않은 모습이다. 성숙하고 완성된 연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여러 비평에서 아역 배우들의 연기력을 중요한 비평 지점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에 대한 비평에서 아역들의 섬세한 연기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만큼 이 부분을 집중해서 다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는 감독이 어떤 배려와 연출 방법으로 아역들의 연기를 그 정도까지 끌어낼 수 있었는지 중심적으로 보고자 한다.
가장 처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촬영 환경이다. 배우에게 촬영 환경은 그 어떤 요소보다 중요한 작용을 한다. 연기하는 동안 촬영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배우가 촬영 환경을 얼마나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느냐가 결과물의 완성도를 결정짓는다는 말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감독이 촬영 환경의 분위기를 어떤 식으로 조성했는지, 그 결과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얘기해볼 것이다. 대표적으로 얘기할 것은 두 가지인데 조명과 카메라의 위치이다. 먼저, 조명과 관련된 부분부터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영화 안에서의 실내화면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주로 등장하니만큼 그들의 생활반경에 해당하는 학교 교실이나 학원 강의실과 같은 실내에서 찍은 장면이 많다. 교실과 학원 강의실 말고도 여러 실내 장면이 등장하는데 두 아이의 관계가 변화를 겪는 포인트들이 ‘선’의 집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둘이 봉숭아 물을 함께 들이며 진짜 친구로서 관계를 맺는 것이나,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바다를 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둘이서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는 곳도 바로 ‘선’의 집이다. 이 실내 장면들을 보면 자연광 외에 인위적인 조명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 외에 다른 조명을 쓰지 않은 것이다. 조명은 촬영 화면을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카메라에 담는 대상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조명이 가지는 효과를 버리고서라도 감독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지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카메라의 위치에 대한 것도 얘기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카메라의 위치가 배우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줌을 활용한 카메라 앵글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개중에는 줌을 통한 방식이 필요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도 몇 보인다. 이런 카메라 앵글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위의 자연광을 활용한 이유와 함께 다뤄보도록 하겠다.
감독은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보다, 영화다운 카메라 앵글보다 배우를 배려한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대부분 연기 경험이 없거나 아주 적은 친구들이라고 앞서 밝혔었다. 그런 배우들에게 있어 촬영현장은 낯선 환경이 될 수 있다. 배우가 느끼는 그런 이질감은 결국 연기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감독이 가장 먼저 조성해야 할 것은 배우가 낯설어하지 않을 환경이다.
영화를 보면 카메라의 위치가 배우에게서 멀리 떨어져 찍은 장면이 여럿 있다. 카메라를 배우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줌을 활용해 촬영한 것인데 이는 관객에게 독특한 감상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보는 느낌보다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는 가짜의 세계를 그리는 영화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연출 기법이다. 자칫 지루해 보일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감독은 가장 편한 분위기에서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도출될 수 있게 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다양한 소재들로 활용해 표현하는 ‘관계’
‘관계’라는 건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느낌의 단어이다. ‘관계’ 안에서 보이는 양상들도 아주 미묘하고 섬세해서 구체화해서 영상으로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안에서는 그 추상적인 다양한 도구들을 통해서 구체화하고 있다. 영화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주요 관계는 ‘선’과 ‘지아’의 관계이니만큼 둘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학을 온 ‘지아’는 방학동안 ‘선’과 많은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가 된다. ‘선’을 만나기 전까지 ‘지아’는 ‘헤드폰’을 쓰고 있다가 둘이 친구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나서는 ‘헤드폰’을 끼지 않는다.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선’에게 느끼는 ‘지아’의 느낌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헤드폰’은 또 등장한다. 둘을 가로막는 한 장치가 생기게 된다.
‘선’이 ‘지아’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엄마를 조르는 모습을 보면서 ‘지아’는 자신에게는 없는 엄마의 부재를 느끼게 되고 ‘선’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낀다. 그리고 바로 헤드폰을 쓴다. 뒤에 이어지는 말은 ‘지아’의 거리감을 더욱 부각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근데 너희 집 왜 이렇게 덥냐?”라는 말이다. ‘선’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가진 유일한 비교우위,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 상처받은 마음을 자신이 우위인 계급에 관한 이야기로 선에게 상처를 주는 식으로 짜여있는 연출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음으로 이야기할 것은 ‘피구’다. 영화의 첫 시작도 ‘피구’를 하기 위해 편을 가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는 점에서 많은 구기 종목들 중에서 굳이 ‘피구’를 영화에 넣은 것은 이유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피구’라는 종목의 규칙을 살펴보면 잔인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꽤 많다. 다른 여러 구기 종목들이 공을 특정한 장소까지 운반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반면 ‘피구’는 공을 이용해 상대 선수를 아웃시켜야 하고 모두 아웃시켜야만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포커스가 ‘공격’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스포츠가 승패를 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아웃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맞춰 떨어뜨려야 한다는 규칙은 어쩐지 서글프고 무섭게 느껴진다. ‘피구’를 하는 그 경기장 안에서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딱 한 가지다. 공격을 피할 곳은 오로지 내부뿐이기에 내부로 깊이,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히 또래 집단과의 유대가 가장 중요한 그 시기에 우리는 소수의 비주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비주류의 역할은 누구든지 될 수 있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내가 비주류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심지어는 스스로가 비주류가 되지 않는 노력에서 더 나아가 다른 누군가를 비주류로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속성은 ‘피구’와 참 많이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감독은 이러한 측면을 고려해서 영화에 ‘피구’하는 장면을 넣은 것이 아닐까. 내부로 파고드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스스로가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관계’의 잔인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Ⅲ. 결론
ⅰ. 아이들의 말을 통해 제시하는 ‘관계’의 해답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그럼 언제 놀아?”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우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난 그냥 놀고 싶은데.”
“한지아 금 안 밟았어. 진짜 금 안 밟았어. 내가 다 봤어.”
‘선’과 ‘지아’가 처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둘의 상황을 숫자가 길게 놓여 있는 직선이라고 설정을 한다면 ‘선’은 마이너스에서 머물러 있는 아이, ‘지아’는 마이너스에서 벗어나 0에서 다시 시작하는 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아이는 모두 왕따의 피해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선’은 현재 왕따를 당하고 있으며, 이런 학교 폭력의 특성상 학년이 바뀐다고 해도 학교에 다니는 내내 이어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아이에게 한 번 씌워진 ‘왕따’라는 프레임은 쉽게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학을 가지 않는 한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선’의 가정 형편상 그런 식의 해결방법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선’은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모르는 ‘지아’라는 인물이 동아줄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반면, ‘지아’의 경우 다니던 학교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가진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 집단에서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아’가 ‘선’을 외면하고 ‘보라’를 선택을 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전 학교에서 마이너스에 머물렀던 ‘지아’는 함께 마이너스에 머물러줄 ‘선’과 같은 친구가 아니라, 손을 붙잡고 플러스로 끌어 올려줄 ‘보라’와 같은 친구가 더 절실했던 것이다.
‘지아’의 그런 선택으로 ‘선’은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렇다고 ‘지아’가 주류가 된 것은 또 아니다. ‘보라’는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 사는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지아’를 다시금 외톨이의 자리로 내몬다. ‘지아’를 외톨이로 만들기 위해 ‘선’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선’과 ‘지아’ 둘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상처를 내게 되고 둘 다 외톨이의 자리에 다시 서게 된다.
둘의 이러한 관계의 위기는 의외의 인물의 대사를 통해 극복될 수 있겠다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아마 이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싶다. 이 관계의 해답은 이 시기를 지나서 성장한 어른을 통해서나, 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선’과 ‘지아’를 통해서 제공되지는 않는다. 대신, ‘선’의 동생. 이 영화에서 가장 어리고 맑은 존재를 통해 해답의 실마리를 살짝 던져준다. 매일 동네 친구에게 맞고 오는 동생을 답답하게 여기며 너도 똑같이 때렸어야 했다고 다그치는 누나에게 하는 동생의 대답은 큰 울림을 준다.
관계에서 중요한 건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감독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는 관계의 회복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실제로 ‘선’에게로 가 ‘지아’를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한다. 억울한 상황에 놓인 ‘지아’가 ‘선’이 함께 지켜주는 것이다. 이후에 둘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었을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감독은 모두에게 어렵기만 한 이 ‘관계’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어떤 게 지혜로운 것인지 영화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