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주체,
플라뇌르
류재한(전남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도시-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주체,
플라뇌르
류재한(전남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강연일 : 2023.4.26.(수) 오후 2시~4시
강연장소 : 온라인 줌(Zoom)
강연자 :류재한(전남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강연 내용 : 시민(인간)으로 도시 얼굴 읽어내기
<강연 요약 영상으로 다시보기>
1. 플라뇌르(Flâneurs)란
프랑스어인 ‘플라뇌르(flâneur)’는 ‘배회하다, 산책하다(flâner)’의 명사형 단어로, ‘한가롭게 거리를 거니는 사람’이라 번역할 수 있다. 프랑스 특유의 개념으로, 도시와 거리를 두고 목적지 없이 걸으며 도시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존재를 말한다. 문학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플라뇌르를 “무관심하지만 매우 예민한 브루주아 지식인”으로 묘사했다. 이들은 도시를 사회학적, 미학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도시 애호가,(Urbis amator), 호기심과 게으름을 가진 사람, 개구쟁이(Gamin), 인문적 사유를 하는 의지적 산책자, 도시 얼굴의 문해력을 갖춘 사람’ 으로 특징을 묘사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얼굴은 그 자체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낼 때 비로소 나타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얼굴이 개념적으로 정해진 경계를 너머 과거의 먼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얼굴로까지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시의 얼굴을 읽는 사람이 바로 플라뇌르이기에, 플라뇌르는 도시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존재이다.
도시를 관찰하는 플라뇌르
Gustave Gaillebotte Parist Street, <Rainy Day>(1877)
2. 19세기 도시 공간과 건축의 변화에 따른 세 가지 유형의 플라뇌르
1) 도시- 텍스트와 플라뇌르 : 변화하는 도시의 외부 공간의 텍스트를 해독해내는 산책자 유형
플라뇌르는 인간 흔적의 기록인 텍스트로서의 도시를 해독하고 의미를 생성하는 도시의 문학과 철학, 예술의 주체이다. 플라뇌르는 능동적인 사람들로, 도시의 단순한 구경꾼이며 도시의 변화를 그저 바라볼 뿐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수동적인 바도(Badauds)와 구별된다.
발터 벤야민의 책 『파리 , 19 세기의 수도』 에서 플라뇌르는 삶의 무늬인 흔적으로 가득 찬 도시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인물이다. 발터 벤야민은 “도시는 이야기책이며 걷기라는 언어로만 해독이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인문적으로 사유하며 도시를 걷는 플라뇌르만 도시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제르멩 누보의 시집 『사실주의 10 행시 Dizains réalistes 』과 랭보의 시 『 파리 Paris 』의 화자들은 플라뇌르인데, 파리 도시를 산책하며 보는 풍경을 나열 기법이나 콜라주 기법 등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고 기록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골콩드>는 프랑스 지도 모양인 육각형의 형태로 비처럼 내리며 파리의 도처를 바라보는 플라뇌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Golconda>(1953)
2) 내밀한 실내공간과 브루주아 수집가
프랑스의 브루주아 수집가들은 도시의 내부 공간인 실내에 장식품과 예술품을 수집했다. 발터 벤자민은 “그들이 만드는 내밀한 실내공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오롯이 담아내는 하나의 ‘우주’이고, 살롱은 세상이라고 하는 극장을 온전히 관람할 수 있는 ‘복스 좌석’이다.”라고 말했다. 실내공간은 그들이 만든 이야기와 의미로 가득 찬 또다른 도시 풍경이며, 브루주아 수집가는 자신만의 이야기와 의미를 새기고 읽는 플라뇌르였던 것이다.
3) 탐정 소설의 형사와 탐정
탐정 소설 속의 형사와 탐정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시 공간에 새겨진 흔적을 찾고 읽는 플라뇌르 유형이다. 건축방식 변화에 따라 생긴 복도와 같은 열린 공간에 침범자가 남긴 흔적이나, 실내 공간에 새겨진 주거자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한다. 도면을 통해 공간 구조를 파악하고 범인의 동선을 추리하기도 한다. 유명한 인물로 에드거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알로가 있다.
가스통 르루의 추리소설 『노란 방의 비밀』
3. 도시-텍스트(text)와 인문도시
도시가 인문학적 텍스트인 이유
텍스트(text)의 어원인 직물(textūra)은 실로 짜서 만들듯이 도시도 인문학적 실로 짜서 만드는 완전한 하나의 인문학적 텍스트이다. 인문학이 사람의 흔적(人紋)을 기록하고 연구(人文)하는 학문이라면 도시는 이러한 인문이 켜켜이 누적되어 있는 공간이다. 발터 벤야민이 책 『파리, 19 세기의 수도』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듯이 도시-텍스트 안에는 인간의 삶과 존재 방식의 흔적, 인문(人紋)이 남겨져 있다. 고대의 동굴 벽화, 몸의 문신과 같은 것도 흔적의 예이다. 이러한 흔적은 누적되면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이룬다.
인문(人紋)도시와 인문(人文)도시
도시는 인간의 흔적, 인문(人紋)과 그 흔적에 대한 기억을 보호함과 동시에 새로운 기억을 새기고 기록하는 공간이자 장소이다. 그렇기에 인문도시란 인간 공동체의 흔적이 제자리에 새겨져 있는 인문(人紋)도시와, 이것을 해독하고 새로운 것을 새기며 기록하는 인문(人文)도시의 복합체이다.
<인문도시의 예>
1) 도시가 보유한 역사와 문화를 장소가치를 온전히 체현하여 이를 새로운 도시의 활력으로 삼는 창조도시
2) 시민들이 예술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인문 교양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설과 프로그램을 갖춘 학습도시
3) 시민들이 예술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시민예술도시
플라뇌르의 역할
플라뇌르는 이런 도시에 남겨진 인간의 흔적을 읽고 변화하는 흔적을 쓰고 기록하며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만드는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도시는 계속 변화해간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고유한 무늬인 시그니처를 새겨 넣었듯이, 도시 역시 곳곳에 플라뇌르가 그 도시만의 시그니처를 찾아내고 새겨 넣어 도시에 고유한 무늬가 자리 잡고 있을 때 도시의 정체성은 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개발과 재개발은 이 도시에 새겨져 있는 인간의 흔적(人紋)을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 지워졌던 흔적을 회복하고 그 이야기를 되살리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 예로 나가사키 시민이 직접 일본 전국에 나가사키의 숨은 매력을 알리기 위해 개최한 박람회인 <나가사키 사루쿠>는 ‘플라뇌르’ 시민이 가이드가 되어 길을 걸으며 나가사키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야기와 역사를 지워버리는 도시에선 도시-텍스트의 읽기와 쓰기가 불가능하다. 획일적인 아파트 숲으로 변모한 도시의 경우, 플라뇌르의 설 곳은 사라지고 수동적인 바도(badau)들이 도시를 채우게 된다. 도시의 인문 人紋 과 인문 人文 을 의지적으로 읽고 해독할 것이 넘쳐날 수 있도록 도시가 조성될 때 도시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플라뇌르로서 인문학적 텍스트인 도시에 어떤 무늬와 흔적을 남길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강연. 류재한(전남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요약. 진영민(아트콜라이더랩 외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