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기, 중앙 정부는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황제와 조정 대신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지방 관료들은 착취와 횡포를 일삼았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의 불만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농민들은 고된 세금과 부역, 자연재해로 인해 삶이 고통스러웠다. 기근과 전염병은 빈번했고,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란에 나서게 되었다. 도교 교단인 태평도의 교리와 예언은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조직적인 저항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4년, 장각과 그의 형제들은 '청천백일(靑天白日)'이라는 구호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각이 신비로운 힘을 빌려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장각의 예언에 따라 수많은 농민들이 황건적에 합류하였고, 반란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장각은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고, 이 조직은 빈민의 반(反)권력적인 성격과 결합되어 군사적인 조직으로 변모했다.
반란은 삽시간에 후한의 각지로 퍼져나갔으며, 황건적은 각지에서 관군과 충돌했다. 황건적은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지방 관청과 군대를 공격했다.이들은 기습적인 공격과 유동적인 전술로 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장각은 도교의 신비한 힘을 빌려 적군을 무찌른다는 믿음을 퍼뜨리며, 민중의 사기를 북돋웠다. 당초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고위층의 부패와 민생의 어려움 때문이었지만 천자가 될 야망을 가지게된 장각은 점점 거만해졌고 백성들을 약탈하는 등 황건적 내에서도 부패가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13곳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봉기였으며, 그 확산도 심상치 않았다. 이에 후한의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인 하진과 함께 진압군을 편성한다. 편성된 진압군에는 유비의 옛 스승 노식, 황보숭과 주준 등의 장수가 포함된 전투부대가 있었으며 조조는 기도위로서 황건적 토벌에 임한다.
황실의 진압군 외에도 진압에 나선 세력이 있었다. 강동의 손견도 토벌에 참여했다. 1,5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 등이 주축이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의 주인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고 직접 불러모은 500명의 장정들과 유주의 탁현에서 황건적 토벌을 시작한다.
유비의 전투
유비의 활약은 유주성 전투와 청주성 전투로 알 수 있다. 유비는 먼저 황건적 토벌을 결심한 이후 먼저 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그곳에서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결과적으로 정원지와 그 부하는 장비와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이고 싸움은 유비측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 이후 유비는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를 받고 이후 청주성 전투라고 불릴 전투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는 유언이 지원한 군사 5000명이 함께 싸웠다. 유비의 황건적들을 계곡으로 유인한 후 무찌르는 전술과 더불어 공경의 군사들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퇴로를 막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유비는 옛 스승 노식이 광종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우려 하나, 이내 황보숭과 주준을 돕기 위해 영천으로 향한다.
유비는 이후 양성에서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우며 장기전을 준비한다. 이는 장보의 측근 엄정이 오히려 장보를 살해하고 항복하게끔 만든 좋은 계책이었다.
반란의 진압
영천 장사현에서는 관군들이 황건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첫 전투에서는 파재에게 패배하는 등 고전했지만 황보숭과 주준의 협력으로 화공을 이용해 파재는 물론 장량과 장보도 무찌른다. 이 전투는 영천 전투라고 불리며, 이 전투에서 패배해 도망가던 장량과 장보가 도중에 조조를 만나 10,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 것이 유명하다. 이후 예주에서 황건적들은 힘을 쓰지 못하고 왕윤의 별동대와 관군에게 격파당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수그러든다.
황건적의 정신적 지주이자 구심점이었던 장각이 병으로 사망한 이후 황건적의 사기가 떨어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장량이 새로운 우두머리로 올라섰으나 관군과 거록 태수 곽전에게 곡양을 기습 공격 당하는 등 고전한다. 특히 조조와의 전투에서는 조조가 7전 7승을 기록하며 기세를 높이자 결국 장량은 전투 중 목이 베인다. 이 전투는 조조와 황보숭이 큰 벼슬을 받게 된 전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왕조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켰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각지에서 군벌들이 세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반란 진압 과정에서 각지의 군벌들이 세력을 키웠고, 이는 후일 삼국 시대의 군웅할거로 이어졌다. 조조, 원소(袁紹), 손견(孫堅) 등의 군벌들은 반란 진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도 했다.
황건적의 난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적 불만이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에도 농민 반란이 빈발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은 단순한 농민 반란을 넘어, 중국 역사에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