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대전은 221년부터 222년까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와 오(吳)의 손권(孫權)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관우(關羽)가 219년에 오나라의 손권에게 사로잡혀 처형되면서, 유비는 이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유비는 관우의 죽음을 명분으로 삼아 오나라를 공격하기로 한다.
손권은 적벽대전의 승리에 본인 공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유비가 다스리는 형주도 임대해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유비는 적벽대전이 공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얻은 형주 남부는 온전히 촉나라의 땅이라고 여겼다. 이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두 세력은 군사적 충돌을 겪을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결국 촉나라가 손권에게 일부 군만 반환하기로 협약을 맺었고 이 내용은 일단락된다.
적벽대전에서는 동맹이었던 오나라와 촉나라가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 같던 시기에, 어떤 사건이 터진다.
관우가 조조를 공격했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조조의 수하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관우의 군으로서는 포로의 식량까지 감당할 수 없어진 것이 발단이었다. 관우가 해결책으로 선택한 것은 손권의 영지에서 노략질을 해서 식량을 얻는 것이었다. 손권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고 관우를 잡기 위해 조조와 손을 잡았다. 결국 손권은 관우를 잡았고, 처형시켰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바로 손권에 대한 보복이 화두로 올랐으나 손권을 향한 보복전에 찬성하지 않는 신하들은 많았고, 그 중에는 제갈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유비와 장비는 전쟁을 하려는 뜻을 관철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전쟁을 지지하던 장비가 부하들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그 부하들은 심지어 손권에게 자른 장비의 목을 가져가기까지 했다. 전쟁을 반기는 인물은 줄었지만 손권을 향한 유비의 적의는 오히려 계속 커져갔다. 사실 손권도 관우의 사건 때부터 유비의 반응을 예상했고 조용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비는 승상 제갈량에게 성도를 맡기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의 영토로 진격한다. 삼국지연의에는 약 70만 대군이라고 언급되는 규모이다.
유비는 형주로 진격하는 동안 무성과 자귀성을 함락시킨다. 그 중 자귀성에 본영을 설치하고 정월, 오반 등에게 수군을 이끌어 이릉으로 진군하게 하면서 육손을 상대하게 하려고 했다. 그 동안 유비 본인은 본대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육손이 이미 그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촉 장수 황권은 형주로 깊게 진군할수록 후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으로 유비에게 후방을 권하지만 유비는 직접 손환을 이릉성에 몰아넣고 성을 포위한다. 그 동안 황권은 촉나라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성까지 포위하니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유비였지만 육손이 요새화시킨 적의 진영 앞에서 끝없는 수비를 고수하며 도발에도 응하지 않는 적을 기다리는 상황이 계속되자 그는 물론이고 병사들도 지쳐갔다. 교착되는 전선에 사기는 떨어져만 갔다.
유비가 이끄는 촉군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비교적 시원한 숲으로 진영을 옮긴 상태였는데, 이때 유비는 전선 주변부에 50여 개의 진을 한 일자(一) 모양으로 쭉 나열해 두고 유사시에는 서로 지원하게 했다. 이를 탐지한 육손은 대대적인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했다. 이를 위해 육손은 수군을 적진으로 급파하는 한편 육상에서도 전군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촉군 진영들의 주변에 불을 놓은 후 맹공을 가했다.
육손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 전략을 세웠다. 공격할 때도 유비군이 강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퇴각하기 힘든 것을 틈타 육손이 화공을 썼고 유비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큰 혼란에 빠뜨린다. 결국 유비군 패배하고 퇴각한다.
화공을 쓰기 위해 육손은 수군을 적진에 급파하면서 퇴로를 막고, 촉군 진영에 불을 놓을 때도 동시다발적으로 하도록 하는 등 치밀하게 계획했다. 결국 우왕좌왕하는 촉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이후엔 끈질긴 추격이 이어졌다. 촉군인 황권도 손권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결국 항복했다.
이 전투는 결과적으로 손권에게 40여채 이상의 촉나라 군대의 진영을 안겨주었다. 유비가 다시 추스르고 반격을 해보려 시도했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어버려서 그는 백제성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릉대전에서의 패배는 촉한에게 군사력과 재정적인 면에서 큰 타격을 주었고, 유비의 명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전투는 촉한과 오나라 간의 세력 균형을 결정짓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릉 전투의 대패 이후 촉한은 멸망할 때까지 형주로 다시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되었다. 유비는 패배 후 백제성(白帝城)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병을 얻어 223년에 사망한다.
재밌는 점은 유비 사망 후 제갈량(諸葛亮)은 오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고 위나라(魏)에 대항한다는 점이다. 손권이 촉을 침공할 것을 기대한 조비가 그틈을 타 오나라를 침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마저도 예상하고 있던 손권이 오히려 역습한다. 조비의 위나라는 손권과 우호를 맺은 관계였지만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오나라는 촉과만 동맹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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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대전은 유비와 손권 간의 결정적인 전투로, 삼국지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이 전투에서 오나라의 육손은 뛰어난 전략적 능력을 발휘하여 유비의 대군을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전투를 통해 육손의 지략과 결단력을 강조하며, 유비의 무리한 군사적 도전의 결과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