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식인들을 상징하는 지역인가?
유비가 형주 지방에서 만난 지식인들에는 사마휘, 서서, 제갈량 등이 있다. 사마휘는 와룡과 봉추, 즉 제갈량과 방통을 소개했고, 서서는 유비의 모사가 되어 공을 세운 바가 있으며,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 형주 지방이 다른 지방에 비해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강(양자강) 이북 지역은 여러 제후들의 패권 다툼 속에서 피폐해져갔지만, 장강 중류 지역인 형주의 경우 큰 혼란 없이 문화적·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형주를 다스리는 유표는 학문을 장려하고 지식인을 우대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도 형주는 각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유표는 또한 본인 스스로도 학자로서의 자질을 많이 지녔기에 자신이 직접 유교 경서의 주석을 집필할 정도로 학문에 밝았으며, 유교 경서 해설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처럼 형주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학문을 권장하는 유표의 태도에 이끌린 많은 지식인들이 전란을 피해 형주로 모여들었고, 뜻 있는 젊은이들은 유학을 오기도 했다. 당장 사마휘와 서서 역시 영천(현재 중국의 하남성 허창시)에서 형주로 옮겨온 인물들이다. 이들 외에도 시인으로 유명한 왕찬이 산동 지방에서 형주로 유학왔고, 훗날 유비의 아들 유선의 스승이 되는 유경학자 윤묵은 익주에서 형주로 왔다. 기록에 따르면, 다른 지역에서 형주로 옮겨 온 지식인의 숫자가 3백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형주의 학문적 풍토에는 한나라의 대유학자 정현의 영향이 컸다. 정현은 유교 경서의 내용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풀이하던 전통에서 벗어나 간단명료하게 풀이하고자 했다. 형주 지역의 학자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제갈량의 경우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책의 대강의 내용과 핵심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지, 한 글자 한 글자를 자세히 따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