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통해 보는 발해의 수도 천도 과정
1. 동모산
2.현주
3.상경
4.동경
5.상경
한국 측은 발해의 지배 계층을 고구려인으로 바라 보고 있다.
말갈인이 건국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지배계층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문왕이 왜에 보낸 국서
발해 국왕이 일본(왜)에 보낸 국서를 보면 스스로를 고려(고구려)국왕이라고 칭하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국왕 흠무언(문왕)
당나라 시절 편찬된 역사서인 '구당서'에서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건국자인 대조영이 '고려별종'이라고 써져있는데 이는 '고구려 별종'이라는 뜻으로 지배계층이 고구려인임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측이 근거로 활용하는 '신당서'의 '속말말갈'에 대하여 한국은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종속된 부족이라고 말하며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구당서(舊唐書)
아주 먼 고대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공-책봉 문화는 동아시아 외교질서의 기본을 이루는 문화였다고 주장한다.
한국 측에서는 단순히 조공책봉문화만으로 속국임을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측의 논리라면 당과 조공책봉문화를 가졌던 신라와 일본도 중국의 속국이어야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조공책봉문화에는 실질적인 간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발해 출신은 아니지만 빈공과에 합격한 대표적인 한국사의 인물 최치원
한국 측은 발해가 당나라의 속국이 아니었음을 주장하는 근거로 당의 빈공과에 지원 가능했음을 든다.
빈공과는 당의 과거시험 중 하나의 전형이며 '외국인'이 지원할 수 있는 전형이다.
한국 측은 간단하게 외국인인 신라인과 발해인이 동일하게 빈공과에 지원할 수 있음을 근거로 들어 발해가 당의 속국이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발해의 독자적인 연호와 더불어 국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르는 칭호 역시 발해가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었음을 알려주기에 한국 측이 내세우는 근거 중 하나이다.
한국 측은 발해의 문화가 말갈과 당의 문화를 일정 부분 영향 받았음을 인정하면서도 고구려의 문화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주장한다.
왼쪽은 발해 수도에 있던 상경성의 궁성이고 오른쪽은 고구려의 안학궁의 추정도면도이다. 주요건물들의 구조적인면에서 유사한 면을 지닌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발해의 중앙 정치 기구 역시 당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명칭과 운영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발해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한국은 주장한다.
추가로 한국 측은 발해는 당 이외에도 신라도(新羅道), 일본도(日本道), 거란도(契丹道 ) 등 타국과의 교역망을 구축해 활발히 교류했음을 든다. 이 교역망을 통해 교류하면서 타국의 문화가 자연스레 녹아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