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가자 주의사항
이동 코스가 꽤 길고 시간 내에 종료하기 위해서, 진행시 참가자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개인 행동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2. 참고자료
조선초부터 도읍인 한성부에 속함
1867년(고종 4년) 한성부 동부 숭신방 능동계
1894년(갑오개혁)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수문외계
1911년 4월 1일 경성부 숭신면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
1949년 8월 13일 서울 성북구 정릉리
1950년 3월 15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현재 법정동인 정릉동에 행정동 정릉1,2,3,4동으로 구성
▲ 서울특별시 성북구 현황도 (출처: 성북구 홈페이지 https://www.sb.go.kr/www/contents.do?key=5962)
2.자료집_링크 https://sca.seoul.go.kr/front/reference/rsReport/view.do?board_sn=566&searchCondition=1&searchKeyword=&sBbs_group_code=B09
pp.128-187에 성북구 정릉동 일대 도시공간에 대한 조사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음
3. 주택
3-1. 조선주택영단,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
-----------------------------------
조선주택영단 (朝鮮住宅營團)
조선주택영단은 일제강점기에 주택난 해소를 위해 1941년 창립된 특수법인이다. 조선총독부가 도시의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19개 도시에 주택 2만호 건설의 4개년 계획을 세웠다. 해방 전까지 건설한 주택은 총 1만 2,184호 정도였다. 조선주택영단은 해방 후에도 당시의 급박한 주택난 때문에 미군정 감독 하에 존속하였다. 주로 적산가옥 철거민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주택영단은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고, 1962년 공포된 대한주택공사법(법률 3841호)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로 발족하였으며, 2009년에는 한국토지공사와 통합되어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476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 LH 홈페이지 소개 페이지에는 1962년 대한주택공사 창립 이후의 주요 연혁만을 기술하고 있다.
▲정릉동(정릉천변) 재건주택/1954
※출처 : 한국건축가협회 편, 韓國의 現代建築 : 1876-1990 (韓國現代建築總覽 ; 1), 技文堂, 1994, p.542 / 대한주택공사20년사, p.210
3-2. 1946년~1969년 대한주택공사 단지개발 및 정릉동 주택지 참고를 위한 자료(한국건축가협회 편, 韓國의 現代建築 : 1876-1990 (韓國現代建築總覽 ; 1), 技文堂, 1994) 발췌 게재
※ 하이라이트 범례 성북구지역 / 원조주택유형 / 정릉동관련
1946-47년
>>주요 단지개발
1946-47년 : 서울시 후암동(11세대), 용두동(14세대), 안암동(24세대), 신설동(5세대), 사근동(11세대), 홍제동(8세대)
1951-52년
>>주요 단지개발
1951년 : 부산시 범일동, 영선동, 감만동(구호주택 500세대)
1951-52년 : 부산시 단일동, 영선동, 감만동 지구(500세대)
1952년 : 부산시 영도 청학동(흙벽돌집 약 200세대), 부산시 범일동 영단대지(목조가옥 25동 50세대)
1953년
대한주택영단은 휴전이라는 시점을 계기로 안정기에 들어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공식적인 환도가 이루어지자 영단도 서울에 귀환하여 을지로 1가 188의 종전 사무실에서 업무를 개시했다.
이 시기에 사회부는 UNKRA의 원조로 5,500호의 일반후생주택(재건주택)을 전국 각도에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9월에 경인지구에 2,500호와 전국 각지에 3,000호를 배당했다. 후생주택은 건평 9평으로 방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의 평면구조인데 당시 총 공사비는 12만환이었다. 경인지구에 배당한 2,500호 중 1,000호는 서울에 배당되었으며, 이로써 대한주택영단의 본격적인 주택건설이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영단은 처음으로 안암동 개운사 입구에 49채의 재건주택을 지었다. 12월에 공사가 완료되어 준공식이 거행되었을 때 이대통령과 프란체스카부인,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었다.
영단은 이 9평형 집을 설계하는데 있어서 장차 시민들의 생활이 좌식생활에서 입식생활로 변할 것을 예상하고 田字식의 평면을 택했다.
>>주요 단지개발
1953년-54년 : 서울시 안암동(재건주택 49세대)
★UNKRA :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약어로 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단은 1950년 12월 1일 국제연합총회 결의에 따라 한국의 부흥과 재건을 돕기 위해 설립된 기구이다. .. UNKRA의 한국 재건 사업은 1953년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화되었다. ..
※ 참고링크 : 국가기록원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unitedKoreaInc.do
※ 참고링크 : 서울기록원 유엔한국재건단(UNKRA)과 서울의 재건주택 https://archives.seoul.go.kr/contents/unkra
1954년
1954년에 접어들면서 영단은 정릉동과 휘경동에 9평형의 재건주택을 계속 건설해 나갔고 자재는 계속 UNKRA의 원조를 받았다. 특히 정릉천변 253호의 흙벽돌집을 지은 것은 해방 후 영단 최초의 대량생산이며 또한 최초의 단지사업이었다.
(1954년에 접어들면서 영단은 정릉동과 휘경동에 9평의 재건주택을 속속건설해 나갔고, 자재는 계속 UNKRA의 원조를 받았다. 영단직원이 남영동에 있는 일제시대의 일본군 78연대가 있었던 자리인 미군기지에 가서 받았다. 이 때만 해도 미군과 교섭을 잘하면 좋은 자재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정릉천변에 253호의 흙벽돌집을 지은 것은 해방후의 영단에 있어서는 최초의 대량생산이며 또한 최초의 단지사업이었다. 입주자들이 주택가격이 비싸다고 물의를 일으켰으나 실상은 심화하는 인플레로 물가와 노임이 앙등하여 불하와 분양부금의 수입으로서는 그 호수대로의 집을 지어나갈 수 없어, 그 후부터는 건설호수가 줄어들어갔다. 그러나 흙벽돌집을 순환적으로 지어 염가로 분양해 나갔기 때문에 영단은 정부와 은행측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그 업무를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출처 : 대한주택공사20년사, 1979, p.210)
한편 영단의 기술진에서는 UNKRA로부터 가공기구 일부를 원조받기로 하고 안양에 조립용 콘크리트 부품공장을 지었고 또 목공기구를 원조받아 문틀과 문을 짜게 됨으로써 조립식 방법을 도입했다.
>>주요 단지개발
1954년 : 서울시 안암동(재건주택 49세대)
1954년-55년 : 서울시 성북구 정릉 재건, 희망주택(355세대),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재건, 희망주택(121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창인동 재건, 희망주택(159세대)
1955년
1955년 2월 16일에 정부기구가 개편되었는데, 이에 따라 사회부와 보건부가 통합되어 보건사회부로 발족했고, 대한주택영단의 관할은 보건사회부로 이관되었다. (중략) 이 해 12월 3일에 김병화가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했다. 김 이사장은 취임하자 처분과를 신설하고 영단소유 주택의 본격적 불하를 시작했다.
>>주요 단지개발
1955년 :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희망주택(940세대)
1955-59년 :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희망, 재건, 국민주택(272세대)
1955-61년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외인, 국민, 시범, 시험주택(333세대)
1956년
영단은 서울시내 여러지구에서 재건주택과 희망주택을 지어나갔다. 답십리지구에서는 답십리 2동 53번지 일대에 9평형 흙벽돌집 303호를 지었으며, 불광동지구에서는 139호를 지었다. 그리고 이 해 3월 20일 소공동의 사옥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8월 31일에 준공하였다.
>>주요 단지개발
1956년 :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재건주택(79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재건주택(171세대),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희망주택(39세대)
1956년 : 1961년 :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 재건, 국민주택(383세대)
1957년
1957년부터는 정부의 주택정책이 크게 변혁되어 영단의 활동도 이에 따라 활발해졌다. 이 때까지 정부는 외원(外援)자금으로 응급적인 구호(救護)주택 위주의 건설만을 해왔으나 1957년부터는 구호용 간이주택 건설이 지양되고 항구적인 주택건설계획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 때 정부는 귀속재산처리적립금과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한 주택자금을 조성하였고, 외원자금으로 ICA자금을 수수하여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주택자금으로 운영토록 하였다.
1957년 3월 1일에 영단은 국무원 사무처로부터 용산구 이태원동에 건립된 단독주택 168동(185호)의 외국인주택을 인수하여 이태원 외국인주택관리소를 개설했다.
그 후 남산외인아파트 건립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118동(133호)을 불하하였으며 현재 남산기슭에 자리잡은 뉴-이태원 50동 52호가 남아 있다.
또 흑석동의 재건주택 50호의 경우에는 지대가 낮은 관계로 흙을 돋구어 지었는데 부근에 인가가 없고 거리적으로 멀어서 입주자가 없었다. 홍제동의 부흥주택 136호에는 문화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입주하여 이 지역을 문화촌이라 불렀다.
9월 5일 보건사회부는 부흥주택 관리요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제7회산업부흥국채주택자금으로 중앙산업주식회사, 남북건설자재주식회사, 한국건재주식회사, 한국건설주식회사 등이 건설한 부흥주택의 관리요령을 결정한 것으로써, 이들 회사가 건설하여 준공된 주택은 가격결정과 동시에 대한주택영단이 인수하여 입주희망자에게 분양 관리하게 되었다.
>>주요 단지개발
1957년 :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부흥주택(283세대),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 국민주택(300세대), 서울시 중구 신당동 부흥주택(146세대)
1957-58년 : 서울시 관악구 흑석동 재건, 국민주택(62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대조동 재건, 국민주택(95세대), 서울시 성북구 정릉 부흥, 국민주택(130세대)
1957-58년 : 1960년 :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부흥, 국민, 희망주택(188세대)
1958년
1958년 2월 12일에는 건설업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이 때의 직원수는 180명에 이르렀다. 정부는 건설업계의 제반 폐단을 시정하고 업자난림상태로 인한 경영난의 타개(打開) 및 건설공사의 조잡(粗雜) 방지 등을 강구하기 위하여 건설업의 면허제와 건설기술자의 면허제 실시를 추진한 것이다.
3월 20일 보건사회부는 귀속재산적립금 60억환으로 주택 9,000호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는 무질서하고 빈약한 가로변을 정리하는 뜻에서 상가주택의 건설에 착안하여 계획을 세웠다. 영단은 이 계획에 따라 남대문로와 태평로 등 시내 해당지역에 짓는 시범상가주택과 일반상가주택 공사에 참가하여 감독을 맡았다.
>>주요 단지개발
1958년 :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재건, 부흥주택(371세대),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국민주택(54세대)
1958-59년 : 서울 종로구 이화동 국민주택(143세대)
1959년
1959년은 영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해이다. 이 해 4월에 착공하여 6월말에 준공한 불광동지구의 국민주택은 최초로 단지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일가일수를 내걸고 영단직원이 각호에 가서 나무를 심어주었고, 어린이놀이터 공원을 만들었으며, 점포주택이라 하여 점포형태의 주택을 만들어 분양해 줌으로써 입주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했고, 의료실을 설치하여 의사를 입주시켜 입주민들에게 의료의 편리를 주었다.
(중략)
영단은 이해 11월 21일에 주택상담소를 개설했고, 12월 31일에는 부흥주택 관리요령에 의해 용산구 한남동에 건설된 외국인주택 108동 및 창고 15동을 인수했다.
>>주요 단지개발
1959년 : 서울시 관악구 본동 국민주택(40세대), 서울시 관악구 상도동 국민주택(75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국민주택(102세대),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부흥주택(30세대)
1959-69년 :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외인주택(263세대)
1959년, 1963년 :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국민주택(242세대)
1960년
>>주요 단지개발
1960년 : 부산시 연지동 국민주택(40세대)
1960-61년 : 서울시 도봉구 우이동 국민주택(392세대)
1961년
1961년 1월 31일에는 전년 7월에 착공한 부산지구 연지동의 외인주택이 준공되어 2월 24일 현지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이 주택은 아파트 2동 14호와 단독주택 8동의 구모로써, 정부와 USOM 간에 체결된 건설협정에 의거하여 소유권은 정부에 귀속하되 입주권은 USOM이 가지며 건설 및 관리는 영단에서 담당한 것이다.
이 해 10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새 정부조직법을 공포했는데, 정부조직은 1월 12부 2처 4청으로 되고 국토건설청이 11월 13일자로 대한주택영단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 해에 행해진 마포아파트의 건립은 영단의 웅대한 도약의 시도였다. 이 계획은 총예산 약 50억환으로 11동 1,158호를 건설하는 것으로써 10월 16일 착공되었다.
>>주요 단지개발
1961-63년 :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국민주택(158세대)
1962년
1962년 3월 20일에는 대한주택공사법 시행령이 공포되었고, 6월 18일에 주택공사의 관할이 건설부로 이관되고, 7월 1일 자본금 5억원의 대한주택공사가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과 함께 주택영단시대의 회사 호칭 변경에 따라 이사장을 총재로 개칭하고...(후량)
공사는 창립일인 1962년 7월 1일을 기하여 서울 장위동에 5-8평형 단독주택 108호를, 8월 15일에 대구시 동인동에 10-15평형 단독주택 150호를, 8월 20일에 부산시 명륜동에 10-15평형 단독주택 200호를, 8월 25일에는 서울 불광동에 10-15평형 단독주택 98호를 각각 착공했다.
>>주요 단지개발
1962년 : 서울 마포구 공덕동 국민주택(28세대),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국민주택(75세대), 서울시 마포구 용강동 국민주택(154세대),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국민주택(96세대),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국민주택(108세대),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국민주택(95세대),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국민주택(27세대), 대구시 인동 국민주택(150세대), 울산시 국민주택(50세대)
1962-63년 : 부산시 명륜동 국민주택(225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국민주택 (158세대)
1962년, 1964년 : 서울시 마포구 마포 아파트(642세대)
1963년
>>주요 단지개발
1963년 : 서울 도봉구 수유동(1차) 국민주택(288세대),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아파트(48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국민주택(25세대), 서울시 성북구 정릉 국민주택(47세대),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국민주택(50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국민주택(25세대), 대구시 내당동 국민주택(165세대)
1963-64년 :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국민주택(110세대)
1964년
공사는 1964년도에 서울의 장위동, 남가좌동, 갈현동, 수유동 및 부산의 광안동에 연립주택을 건설했으며..
>>주요 단지개발
1963-64년 :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국민주택(110세대)
1964년 : 부산시 광안동 국민주택(159세대),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국민주택(50세대),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2차) 국민주택(37세대), 서울시 마포구 중동 국민주택(85세대),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아파트(30세대), 서울시 중구 정동아파트(36세대)
1964-65년 : 서울시 서대문구 갈현동 국민주택(437세대)
1965년
>>주요 단지개발
1964-65년 : 서울시 서대문구 갈현동 국민주택(437세대)
1965년 :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국민주택(80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소형아파트(81세대),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국민주택(90세대), 서울시 종로구 동대문 아파트(131세대), 서울시 동대문구 망우동 국민주택(134세대)
1966년
>>주요 단지개발
1966년 :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10만단지 토지구획정리 및 공영주택(358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아파트(150세대), 광주시 공무원 아파트(60세대), 대전시 공무원 아파트(60세대)
1966-67년 : 대구시 대명동 공무원아파트(96세대)
1966-69년 :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아파트(1,312세대)
1967년
>>주요 단지개발
1966-67년 : 대구시 대명동 공무원아파트(96세대)
1966-69년 :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아파트(1,312세대)
1967년 : 서울시 서대문구 문화촌 아파트(456세대), 서울시 성북구 정릉 아파트(167세대), 수원시 공무원 단독주택(59세대), 전주시 공무원 단독주택(96세대)
1968년
>>주요 단지개발
1966-69년 :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아파트(1,312세대)
1968년 :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30만단지 토지구획정리 및 민영주택(310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철우주택(63세대), 서울시 용산구 힐탑 아파트(120세대), 서울시 홍제동 인왕아파트(132세대)
1969년
>>주요 단지개발
1966-69년 :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아파트(1,312세대)
1969년 :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아파트(368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대지조성, 서울시 영등포구 개봉동 30만단지 토지계획정리 및 민영주택(300세대), 서울시 용산구 탑라인 아파트(32세대),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대지조성, 광주시 화정단지(2,900세대), 대구시 수성동 공영주택(292세대)
※출처 : 한국건축가협회 편, 韓國의 現代建築 : 1876-1990 (韓國現代建築總覽 ; 1), 技文堂, 1994, pp.542-558
3-3. 원조 주택의 구별
3-3-1. 대한주택공사 사사
한편 영단의 기술진에서는 UNKRA로부터 가공기구 일부를 원조받기로 하고 안양에 조립용 콘크리트부품공장을 지었고 또 발전기를 포함한 목공기구를 받아 문틀, 문을 짜서 미국식으로 블럭 사이에 끼면 되는 조립식 방식을 도입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 건축된 주택의 명칭은 각양으로 불리워졌는데, 이것을 대별하면
①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 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립금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하여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은 아파트 상가주택을 포함하여 부흥주택 또는 국민주택이라 불렀고
② 정부계획에 의하여 UNKRA 원조의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관리하는 주택을 재건주택이라 하고 /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에 한하여 영단에서 배정분양하는 주택을 희망주택이라 했고
③ 1항과 같은 자금으로 건설 및 관리하는 외국인용주택을 외인주택으로
④ 그리고 해방전에 조선주택영단이 지은 집을 기설주택 또는 기존주택이라고 불렀다.
※출처 : 대한주택공사 20년사, 1979, pp.212-213
한편 영단의 기술진에서는 UNKRA로부터 가공기구 일부를 원조받기로 하고 안양에 조립용 콘크리트 부품공장을 지었고 또 발전기를 포함한 목공기구를 받아 문틀, 문을 짜서 미국식으로 블록사이에 끼면 되는 조립식 방식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에 건축된 주택의 명칭은 각양으로 불리워졌는데, 이것을 대별하면
①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 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립금중 주택자금 융자에 의하여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은 아파트, 상가주택을 포함하여 부흥주택 또는 국민주택이라 불렀고
② 정부계획에 의하여 UNKRA 원조의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 관리하는 주택을 재건주택이라 하고
③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에 한하여 영단에서 배정분양하는 주택을 희망주택이라 하였으며
④ 1항과 같은 자금으로 건설 및 관리하는 외국인용 주택을 외인주택으로
⑤ 그리고 해방전에 조선주택영단이 지은 집을 기설주택 또는 기존주택이라고 불렀다.
※출처 : 대한주택공사 30년사, 1992, p.86
3-3-2. 『서울시민의 주생활』, 서울생활사박물관, 2021
1950년대의 원조 주택
통상적으로 해외로부터의 실물 혹은 자금 원조에 의해 지어진 주택을 원조주택이라 하나, 실제로는 그 자금의 출처를 국내외로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또 지원금을 융자금으로 변용해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에, 원조 기관이나 원조 및 융자 방법 등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1950년대의 공공주택들은 모두 넓은 범위에서의 원조 주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전재민이 대량 발생하고, 남한 주택의 1/5이 파괴되면서 전쟁 전부터 심각했던 주택난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UN에서는 다양한 원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951년 7월에 남한 재건을 위해 설립된 유엔한국재건단 즉,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는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피난민을 위해 대한주택영단이 연립주택 형식의 구호주택 500호를 지을 때 미송美松, 못, 루핑 등의 양질의 자재를 공급하기도 했고, 직접적으로 여러 주택 건설을 지원하기도 했다.(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1979, p.205) UNKRA의 원조로 지어진 주택들은 ‘후생주택’으로 불리다가 정전 이후에는 ‘재건주택’으로 불리게 되었다.
1953년 사회부는 UNKRA 주택 재건비로 5,500호의 재건주택을 전국에 건설하기로 하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당시 정부에서 파악한 긴급 복구 필요 요청 주택 수가 총 46만 5천여 호였으니, 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서울의 경우 안암동, 정릉동, 회기동, 대현동, 돈암동, 영등포, 답십리, 불광동 등지에 재건주택이 지어졌다. 재건주택은 시기와 조건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공급되었는데, 대부분 흙벽돌 구조였고, UNKRA로부터 여러 자재를 지원받아 지었다. UNKRA와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제작한 ‘표준 한국주택’은 9평형을 기본으로 하고, 6.4평형과 12평형, 15평형, 20평형 등도 포함하였다. 1959년 말까지 대한주택영단은 모두 5차례에 걸쳐 재건주택을 분양했으며, 서울의 경우 총 1,553호가 공급됐다.(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1979, pp.208~210; 박철수, 『한국주택 유전자 1』, 마티, 2021, pp.486~487; 전남일, 『한국 주거의 사회사』, 돌베개, 2008, p.168;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pp.371~373.)
또, 1954년에는 사회부 주도로 대지와 공사비는 입주자가 선납으로 부담하고 자재는 대한주택영단에서 배정하여 지은 ‘희망주택’이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재건주택과 거의 같은 평면과 재료, 구조로 지어졌다. 서울에만 지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휘경동, 회기동, 창천동, 정릉동, 홍제동 등지에 지어졌다.(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1979, p.213;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pp.372~373.)
한편,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은 수혜국이 자립적 경제개발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원조자금을 삭감하였고, 이에 따라 UNKRA에 의한 원조처럼 자금과 자재를 주택 생산에 직접 투입하는 방식은 이 시기에 이르러 융자 지원으로 전환된다. 이와 관련된 협정을 한국 정부와 체결한 기관이 미국의 국제협력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이기에 이 자금에 의해 지어진 주택을 ‘ICA주택’이라 부르게 되었다. ICA 원조자금 액수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총 17억 달러에 달했으나, 1960년에 약 5,700호를 공급하는데 그치는 등 성과는 저조했는데, 이는 땅과 상환 능력이 있는 무주택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ICA 주택은 부암동, 화곡동 등지에 지어졌다.(임서환, 『주택정책 반세기』, 대한주택공사, 2002, pp.19~28; 박철수, 『한국주택 유전자 1』, 마티, 2021, pp.445~459;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p.372.)
같은 시기 북한에서도 역시 한국전쟁 이후 공산권 국가들에 의한 원조로 여러 도시에 집합주택이 지어졌는데, 흥미롭게도 미국에 의해 남한에 지어진 원조주택들과 외관·평수·공간 구성 등이 거의 유사하다. 무주택자를 위해 최소 규모로 지어져 변화의 여지가 적었고, 참여한 기술자들이 모두 일제강점기 건축 교육을 받았다는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또 당시 기능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능주의 건축사조가 전 세계에 유행할 때라는 시대적 상황 등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전봉희 외, 2021 서울생활사조사연구『서울시민의 주생활』, 서울생활사박물관, 2021, pp.18-21
3-3-3. 박철수『박철수의 거주박물지』, 도서출판 집, 2017
외국 원조주택이 지어지던 당시 3종 세트로 흔히 묶여 불리던 주택이 있었으니 재건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이 그것이다. 재건주택 역시 원조자금이 바탕이 되었지만, 직접 원조 대신에 입주자가 공사비의 20% 정도를 먼저 부담하고 나머지는 5~10년에 걸쳐 상환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희망주택 역시 9평의 꿈을 부추겼다. 집 지을 땅값이며 공사비를 모두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는 대한주택영단에서 배정해 공급한 분양주택이 곧 희망주택이다.
부흥주택이란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시행되는 주택 건설 사업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 주로 7회와 8회에 발행된 산업부흥국채 일부를 주택건설자금으로 삼아 공급한 주택을 특별히 ‘부흥주택’이라 부른다.
-박철수, 『박철수의 거주박물지』, 도서출판 집, 2017, pp.79-84
3-3-4. 임창복『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1956년까지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약 3000여호에 이르는 주택이 공공 분야 주도로 공급되었다.
재건주택은 정부계획에 의거해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원조하는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관리하는 주택을 말하며, 부흥주택•국민주택은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금 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해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이다. 또 희망주택은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에 한하여 영단에서 배정, 분양하는 주택을 말한다.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pp.372-373
3-4. 정릉동의 주택
3-4-1. 성북 메모리루프-집
1) 답사형 공유 전시(2025.9.11-9.25) 리플렛 지도(스캔본)
2) 아카이빙북 『정릉읽기』
▷ 링크 https://www.sbculture.or.kr/culture/poster/view.do?archiveId=2839&menuNo=500078
3-4-2. 정릉1동 재건,희망주택
▲출처 : UN Archives Reference code S-0526-0350-0003-00037
촬영일 1960-12-31
사진 좌측에 흙벽돌이 보임
▲출처 : UN Archives Reference code S-0526-0350-0003-00036
촬영일 1960-12-31
단지 북측에서 남측을 촬영한 사진으로 보이며, 벽체가 거의 다 올라간 주택이 보임
▲출처 : UN Archives Reference code S-0526-0357-0003-00044
촬영일 1960-12-31
정릉교회 석조예배당(1954년 7월 착공 동년 12월 완공 추정)이 보이지 않고, 사진 좌측 중앙위에 가로로 긴 건물이 숭덕초등학교 건물로 보임. 사진 하단 중앙에 건물 바깥에 화단경계 같은 것을 쌓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재건주택의 준공전으로 추정됨.
▲출처 : UN Archives Reference code S-0526-0357-0003-00045
촬영일 1960-12-31
정릉교회 석조예배당(1954년 7월 착공 동년 12월 완공 추정)이 보이지 않고, 사진 좌측 중앙위에 가로로 긴 건물이 숭덕초등학교 건물로 보임. 이 사진에서 보이는 부분을 통해 단지의 남서쪽 끝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출처 : UN Archives Reference code S-0526-0343-0029-00001
촬영일 1956-12-31
재건,희망주택단지 구역 사진 중앙에 보이는 정릉교회가 현재에도 있음.(현재의 정릉교회 예배당은 1992년 10월 7일에 기공하였고 1994년 9월 23일에 준공하였음) 정릉교회는 단지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릉교회 오른쪽편으로 보이는 곳은 숭덕초등학교로 추정됨. 이전 사진에서는 숭덕초등학교의 앞쪽 건물만 보였고, 이 사진에서는 뒷편의 신축 건물이 보임.
사진 속 정릉교회의 구 석조예배당은 1954년 7월 1일에 신축(시작으로 추정)하고 동년 12월 25일에 입당(완공으로 추정)하였고, 1961년 구 목조유치원건물에 교육관을 건립하고, 1963년 구 석조예배당을 헌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 (참조링크 : 정릉교회 홈페이지 연혁 https://jeongneung.org/main/sub.html?pageCode=2)
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위의 4장의 UN Archives의 사진 생산일(1960.12.31)이 잘못 기록되어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음.
▲브이월드 3차원 입체모형
1941년 8월 26일 정릉교회 개척
1942년 6월 7일 정릉교회 창립
1947년 10월 15일 예배당 기공(정릉리 산 72, 아리랑고개)
1947년 12월 24일 예배당 입당
1948년 5월 9일 예배당 헌당(정릉리 산 72번지 대지 300평, 건평 34평)
1951년 4월 1일 예배당 파괴 (아리랑 고개 예배당은 유엔군이 작전상 폭파, 예배당 위치가 북쪽을 향한 우리 군대의 포진지로서 최적지라고 판단하여 미군의 진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폭파. 이러한 사정을 안 미국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앞으로 정릉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는 2층으로 잘 지어 주겠다는 약속을 함. 정릉교회 60년사, pp.117-118)
정릉유치원의 원사를 빌어 예배처소로 사용
정릉천변의 배추밭을 부지로 정함
미군 314 병기부대에 요청하여 건축비(1만 5천 달러)에 해당할 만한 분량의 건축 자재를 제공받기로 함. 최초 목조 건물에 해당하는 자재를 지원했는데 중도에 석조 건물로 계획이 바뀌자, 거기에 필요한 모래나 자갈 같은 자재를 미군들이 자진해서 추가로 지원해 주기도 했음.
1954년 7월 1일 예배당 신축 기공식(정릉동 139-2 건평 160평 구 석조 예배당)
1954년 12월 25일 석조 예배당 입당
이후 예배당 지붕 공사 등 지속적으로 마무리 공사 진행
1963년 6월 2일 헌당식 거행
△정릉교회 60년사, pp.123-140
석조 예배당 철거
1990년 4월 15일 교회창립 50주년을 기하여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함
1991년 4월 14일 건축위원회 구성
1991년 9월 8일 설계사(한 종합건축사사무소) 결정
1992년 7월 11일 건축허가
1992년 10월 7일 성전 건축 기공예배
1994년 9월 23일 준공
1994년 9월 25일 입당예배
1996년 3월 3일 새 성전 헌당식
△정릉교회 60년사, pp.305-310
※『정릉교회 6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정릉교회, 2005 자료 링크 https://jeongneung.org/main/sub.html?Mode=view&boardID=www132&num=14630&page=&keyfield=&key=&bCate=
▲정릉교회 60년사, 2005, p.124
▲정릉교회 60년사, 2005, p.127
▲정릉교회 60년사, 2005, 화보
▶ 대한주택공사 정릉 사업실적
- 사업명 : 재건,희망
- 사업연도 : '54, '55
- 사업면적(평) : 22,948
- 연면적(평) : 3,252
- 주택형 : 단독
- 형별 : 9
- 구조 : 조적조
- 동수 : 355
- 세대수 : 355
▲ 1972년 정릉1동 지역 항공사진
▲ 1972년 정릉1동 재건,희망주택단지 항공사진
3-4-3. 정릉3동 부흥,국민주택
▶ 대한주택공사 정릉 사업실적
- 사업명 : 부흥,국민
- 사업연도 : '57, '58
- 사업면적(평) : 9,029
- 연면적(평) : 1,919
- 주택형 : 단독, 연립
- 형별 : 13, 15
- 구조 : 조적조
- 동수 : 80
- 세대수 : 130
- 비고 : 연립(15평)
▼ 정릉3동 부흥주택 촬영 사진 (2014.6.7 최호진 촬영)
▲ 정릉3동 1973년 항공사진
4. 한옥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수행, 성북구, 2013.12.31)의 내용을 참고하여, 정릉동에서 대표적으로 선정된 한옥밀집지역에 대한 내용을 참고자료로 게재함. 현재시점의 현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
4-1. 성북구의 동별 한옥여건분석
한옥 분포현황을 성북구의 행정동별로 분석해 보면 삼선동-보문동-성북동-동선동-안암동 순으로 동별로 100채 이상이 분포되어 있다. 나머지 동의 경우에는 100채 이하로 분포되어 있거나, 상월곡동의 경우에는 한 채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로 재개발이 많이 이루어진 지역이거나, 늦게 개발된 신생주거지이다. 삼선동, 보문동, 성북동, 동선동의 경우에는 200채 이상이 존재하고 있어 동 단위로는 서울 전체에서도 높은 밀도를 보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1936년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이루어진 ‘돈암지구’에 포함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옥의 밀도가 높은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한옥을 보존하거나 활용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등급 기준으로는 성북동-정릉동-보문동이 20채 이상으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성북동의 경우에는 재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면서 문화재급의 한옥이 많이 분포하고 있고, 장기거주자가 많고, 비교적 주거만족도가 높은 지역으로 비교적 관리가 잘 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정릉동은 성북동이나 보문동과는 달리 1960년대에 만들어진 한옥유형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으로 한옥의 부·자재의 품질과 한옥의 규모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 지역으로 비교적 현대적 생활을 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정릉동은 몇몇의 지역에 같은 유형으로 만들어진 한옥들이 밀집되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가’등급의 개체수가 많다. 보문동의 경우에는 전체 한옥 채수는 많으나, 그에 비해 ‘가’등급의 분포는 적은 편이다. 보문동은 주변지역이 다가구·다세대로 급격히 개발되고 있고, 재개발·재건축구역으로 지정된 곳이 많기 때문에 한옥에 대한 관리가 잘 이루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63
4-2. 성북구 정릉동 한옥밀집지역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78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79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79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80
4-3. 성북구 정릉동 등급별 한옥분포 현황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94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94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95
▲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성북구 한옥보전 및 관리를 위한 기본구상」 최종보고서, 성북구, 2013.12.31,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