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가자 주의사항
이동 코스가 꽤 길고 시간 내에 종료하기 위해서, 진행시 참가자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개인 행동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위동은 지속적인 재개발 재건축 가능성이 높는 곳으로, 대상 코스 중 주거지역에서는 사진을 찍으실 경우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설명도 작은 목소리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학업을 위한 공간으로 캠퍼스 출입은 가능하나, 건물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을 계획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왕릉 의릉은 입구에서만 설명하고 지나갈 예정입니다. 국가지정문화유산 의릉과 의릉 내 국가등록문화유산 '구 중앙정보부 강당과 회의실'을 보실 분들은 산책 종료 후 개별적으로 관람하시기 바랍니다.(입장료 있음)
※ 본 페이지의 내용은 (사)지음건축도시연구소 최호진 소장이 ‘2019 장위동 · 석관동 역사문화 스토리텔링북 발간사업 콘텐츠 개발 및 연구용역’에 참여하여 2020년 3월에 작성한 내용을 일부 웹페이지로 옮기고 자료를 추가, 편집하여 참가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2. 장위동 ; 주택지
2-0. 장위동 산책 루트
2-1. 조선주택영단,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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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택영단 (朝鮮住宅營團)
조선주택영단은 일제강점기에 주택난 해소를 위해 1941년 창립된 특수법인이다. 조선총독부가 도시의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19개 도시에 주택 2만호 건설의 4개년 계획을 세웠다. 해방 전까지 건설한 주택은 총 1만 2,184호 정도였다. 조선주택영단은 해방 후에도 당시의 급박한 주택난 때문에 미군정 감독 하에 존속하였다. 주로 적산가옥 철거민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주택영단은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고, 1962년 공포된 대한주택공사법(법률 3841호)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로 발족하였으며, 2009년에는 한국토지공사와 통합되어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476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 LH 홈페이지 소개 페이지에는 1962년 대한주택공사 창립 이후의 주요 연혁만을 기술하고 있다.
2-2. 1953년~1964년 장위동 주택지 참고를 위한 자료(한국건축가협회 편, 韓國의 現代建築 : 1876-1990 (韓國現代建築總覽 ; 1), 技文堂, 1994) 발췌 게재
1953년
대한주택영단은 휴전이라는 시점을 계기로 안정기에 들어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공식적인 환도가 이루어지자 영단도 서울에 귀환하여 을지로 1가 188의 종전 사무실에서 업무를 개시했다.
이 시기에 사회부는 UNKRA의 원조로 5,500호의 일반후생주택(재건주택)을 전국 각도에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9월에 경인지구에 2,500호와 전국 각지에 3,000호를 배당했다. 후생주택은 건평 9평으로 방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의 평면구조인데 당시 총 공사비는 12만환이었다. 경인지구에 배당한 2,500호 중 1,000호는 서울에 배당되었으며, 이로써 대한주택영단의 본격적인 주택건설이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영단은 처음으로 안암동 개운사 입구에 49채의 재건주택을 지었다. 12월에 공사가 완료되어 준공식이 거행되었을 때 이대통령과 프란체스카부인,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었다.
영단은 이 9평형 집을 설계하는데 있어서 장차 시민들의 생활이 좌식생활에서 입식생활로 변할 것을 예상하고 田字식의 평면을 택했다.
1954년
1954년에 접어들면서 영단은 정릉동과 휘경동에 9평형의 재건주택을 계속 건설해 나갔고 자재는 계속 UNKRA의 원조를 받았다. 특히 정릉천변 253호의 흙벽돌집을 지은 것은 해방 후 영단 최초의 대량생산이며 또한 최초의 단지사업이었다.
한편 영단의 기술진에서는 UNKRA로부터 가공기구 일부를 원조받기로 하고 안양에 조립용 콘크리트 부품공장을 지었고 또 목공기구를 원조받아 문틀과 문을 짜게 됨으로써 조립식 방법을 도입했다.
1955년
1955년 2월 16일에 정부기구가 개편되었는데, 이에 따라 사회부와 보건부가 통합되어 보건사회부로 발족했고, 대한주택영단의 관할은 보건사회부로 이관되었다. (중략) 이 해 12월 3일에 김병화가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했다. 김 이사장은 취임하자 처분과를 신설하고 영단소유 주택의 본격적 불하를 시작했다.
1956년
영단은 서울시내 여러지구에서 재건주택과 희망주택을 지어나갔다. 답십리지구에서는 답십리 2동 53번지 일대에 9평형 흙벽돌집 303호를 지었으며, 불광동지구에서는 139호를 지었다. 그리고 이 해 3월 20일 소공동의 사옥 복구공사를 착수하여 8월 31일에 준공하였다.
1957년
1957년부터는 정부의 주택정책이 크게 변혁되어 영단의 활동도 이에 따라 활발해졌다. 이 때까지 정부는 외원(外援)자금으로 응급적인 구호(救護)주택 위주의 건설만을 해왔으나 1957년부터는 구호용 간이주택 건설이 지양되고 항구적인 주택건설계획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 때 정부는 귀속재산처리적립금과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한 주택자금을 조성하였고, 외원자금으로 ICA자금을 수수하여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주택자금으로 운영토록 하였다.
1957년 3월 1일에 영단은 국무원 사무처로부터 용산구 이태원동에 건립된 단독주택 168동(185호)의 외국인주택을 인수하여 이태원 외국인주택관리소를 개설했다.
그 후 남산외인아파트 건립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118동(133호)을 불하하였으며 현재 남산기슭에 자리잡은 뉴-이태원 50동 52호가 남아 있다.
또 흑석동의 재건주택 50호의 경우에는 지대가 낮은 관계로 흙을 돋구어 지었는데 부근에 인가가 없고 거리적으로 멀어서 입주자가 없었다. 홍제동의 부흥주택 136호에는 문화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입주하여 이 지역을 문화촌이라 불렀다.
9월 5일 보건사회부는 부흥주택 관리요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제7회산업부흥국채주택자금으로 중앙산업주식회사, 남북건설자재주식회사, 한국건재주식회사, 한국건설주식회사 등이 건설한 부흥주택의 관리요령을 결정한 것으로써, 이들 회사가 건설하여 준공된 주택은 가격결정과 동시에 대한주택영단이 인수하여 입주희망자에게 분양 관리하게 되었다.
1958년
1958년 2월 12일에는 건설업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이 때의 직원수는 180명에 이르렀다. 정부는 건설업계의 제반 폐단을 시정하고 업자난림상태로 인한 경영난의 타개(打開) 및 건설공사의 조잡(粗雜) 방지 등을 강구하기 위하여 건설업의 면허제와 건설기술자의 면허제 실시를 추진한 것이다.
3월 20일 보건사회부는 귀속재산적립금 60억환으로 주택 9,000호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는 무질서하고 빈약한 가로변을 정리하는 뜻에서 상가주택의 건설에 착안하여 계획을 세웠다. 영단은 이 계획에 따라 남대문로와 태평로 등 시내 해당지역에 짓는 시범상가주택과 일반상가주택 공사에 참가하여 감독을 맡았다.
>>주요 단지개발
1958년 :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재건, 부흥주택(371세대),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국민주택(54세대)
1958-59년 : 서울 종로구 이화동 국민주택(143세대)
1959년
1959년은 영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해이다. 이 해 4월에 착공하여 6월말에 준공한 불광동지구의 국민주택은 최초로 단지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일가일수를 내걸고 영단직원이 각호에 가서 나무를 심어주었고, 어린이놀이터 공원을 만들었으며, 점포주택이라 하여 점포형태의 주택을 만들어 분양해 줌으로써 입주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했고, 의료실을 설치하여 의사를 입주시켜 입주민들에게 의료의 편리를 주었다.
(중략)
영단은 이해 11월 21일에 주택상담소를 개설했고, 12월 31일에는 부흥주택 관리요령에 의해 용산구 한남동에 건설된 외국인주택 108동 및 창고 15동을 인수했다.
1961년
1961년 1월 31일에는 전년 7월에 착공한 부산지구 연지동의 외인주택이 준공되어 2월 24일 현지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이 주택은 아파트 2동 14호와 단독주택 8동의 구모로써, 정부와 USOM 간에 체결된 건설협정에 의거하여 소유권은 정부에 귀속하되 입주권은 USOM이 가지며 건설 및 관리는 영단에서 담당한 것이다.
이 해 10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새 정부조직법을 공포했는데, 정부조직은 1월 12부 2처 4청으로 되고 국토건설청이 11월 13일자로 대한주택영단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 해에 행해진 마포아파트의 건립은 영단의 웅대한 도약의 시도였다. 이 계획은 총예산 약 50억환으로 11동 1,158호를 건설하는 것으로써 10월 16일 착공되었다.
1962년
1962년 3월 20일에는 대한주택공사법 시행령이 공포되었고, 6월 18일에 주택공사의 관할이 건설부로 이관되고, 7월 1일 자본금 5억원의 대한주택공사가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과 함께 주택영단시대의 회사 호칭 변경에 따라 이사장을 총재로 개칭하고...(후량)
공사는 창립일인 1962년 7월 1일을 기하여 서울 장위동에 5-8평형 단독주택 108호를, 8월 15일에 대구시 동인동에 10-15평형 단독주택 150호를, 8월 20일에 부산시 명륜동에 10-15평형 단독주택 200호를, 8월 25일에는 서울 불광동에 10-15평형 단독주택 98호를 각각 착공했다.
>>주요 단지개발
1961-63년 :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국민주택(158세대)
1962년 : 서울 마포구 공덕동 국민주택(28세대),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국민주택(75세대), 서울시 마포구 용강동 국민주택(154세대),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국민주택(96세대),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국민주택(108세대),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국민주택(95세대),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국민주택(27세대), 대구시 인동 국민주택(150세대), 울산시 국민주택(50세대)
1962-63년 : 부산시 명륜동 국민주택(225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동 국민주택 (158세대)
1962년, 1964년 : 서울시 마포구 마포 아파트(642세대)
1963년
>>주요 단지개발
1963년 : 서울 도봉구 수유동(1차) 국민주택(288세대),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아파트(48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국민주택(25세대), 서울시 성북구 정릉 국민주택(47세대),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국민주택(50세대),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국민주택(25세대), 대구시 내당동 국민주택(165세대)
1963-64년 :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국민주택(110세대)
1964년
공사는 1964년도에 서울의 장위동, 남가좌동, 갈현동, 수유동 및 부산의 광안동에 연립주택을 건설했으며..
>>주요 단지개발
1963-64년 :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국민주택(110세대)
1964년 : 부산시 광안동 국민주택(159세대),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국민주택(50세대),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2차) 국민주택(37세대), 서울시 마포구 중동 국민주택(85세대),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아파트(30세대), 서울시 중구 정동아파트(36세대)
1964-65년 : 서울시 서대문구 갈현동 국민주택(437세대)
※출처 : 한국건축가협회 편, 韓國의 現代建築 : 1876-1990 (韓國現代建築總覽 ; 1), 技文堂, 1994, pp.542-558
2-3. 장위동 주택건설실적
▲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 pp.312-313'에 정리되어 있는 자료를 편집 작성(최호진 작성)
2-4. 장위동 재건,부흥주택(1958) 단지개요와 배치도 / 평면
2-4-1. 장위동 재건,부흥주택(1958)
외국 원조주택이 지어지던 당시 3종 세트로 흔히 묶여 불리던 주택이 있었으니 재건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이 그것이다. 재건주택 역시 원조자금이 바탕이 되었지만, 직접 원조 대신에 입주자가 공사비의 20% 정도를 먼저 부담하고 나머지는 5~10년에 걸쳐 상환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희망주택 역시 9평의 꿈을 부추겼다. 집 지을 땅값이며 공사비를 모두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는 대한주택영단에서 배정해 공급한 분양주택이 곧 희망주택이다.
부흥주택이란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시행되는 주택 건설 사업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 주로 7회와 8회에 발행된 산업부흥국채 일부를 주택건설자금으로 삼아 공급한 주택을 특별히 ‘부흥주택’이라 부른다.
-박철수, 『박철수의 거주박물지』, 도서출판 집, 2017, pp.79-84
1956년까지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약 3000여호에 이르는 주택이 공공 분야 주도로 공급되었다.
재건주택은 정부계획에 의거해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원조하는 자재 및 자금으로 건설•관리하는 주택을 말하며, 부흥주택•국민주택은 정부시책으로 산업부흥국채발행기금 또는 귀속재산처리적금 중 주택자금융자에 의해 건설하여 분양 또는 임대하는 주택이다. 또 희망주택은 대지와 공사비를 입주자가 부담하되 자재에 한하여 영단에서 배정, 분양하는 주택을 말한다.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돌베개, 2011, pp.372-373
2-4-2. 장위동 재건,부흥주택(1958) 단지개요와 배치도 / 평면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92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93
▲ 장위동 재건,부흥 주택_단지 건설당시 항공사진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 p.94 사진 자료에 1958년 재건주택, 부흥주택 단지 구역 가필(작성 : 최호진)
2-5. 장위동 국민주택 단지개요와 배치도 / 평면
국민주택단지 조성 지역에서 많은 건축물이 다세대나 원룸형으로 바뀌고 있으나, 아직까지 단층 주택으로 외벽과 지붕을 개량하면서 주거 기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곳도 발견할 수 있다.
국민주택의 경우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에 각 평형의 평면들이 수록되어 있어, 대량으로 지어진 주택단지의 공간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공통적으로 방이 두 개 이상이며, 욕실의 설치와 화장실을 실내로 들여온 것이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엌은 재래식이어서 거실과 연결되지 않고 별도의 실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주택개량 사업은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위생이 도시 인프라와 생활환경 등과 함께 개선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국민주택은 블록구조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졌다. 단열 등의 효과와 지붕 개량 등을 하면서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집은 거의 없으나, 현관과 창호, 집의 규모와 마당 등 단독형 주택으로 지어졌던 특징이 일부 남아있는 주택에서 확인된다.
장위동 국민주택 단지 구역에서 원형에 가깝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몇 개의 주택은 지역의 도시발전사와 주택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이므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대량으로 지어진 주택단지는 재료와 시공방법에 있어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주는데, 1950년대는 전후복구가 한참 진행되던 시기로, 주택 공급을 위한 재료와 시공방법의 개발과 적용에서 고군분투했던 대한주택영단(현 LH)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1958년 이후부터 시멘트생산이 본격화됨에 따라 영단(대한주택영단)은 흙벽돌 대신에 최초로 시멘트블럭을 사용, 정릉에 2층 연립주택을 건설하였으며, 그 후 우이동 국민주택 건설시에는 보통블럭보다 견고한 증기압축식 블럭을 사용했다.
영단은 또한 일부 국민주택 지붕은 시멘트기와 대신에 석면슬레이트를 사용했으며 이보다 앞서 내벽에는 석탄가루를 섞어 만든 아스벽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때에 건설된 주택의 외부 마감은 시멘트 몰탈을 바른 위에 안료를 섞은 시리콘 방수액으로 뿜칠했다. 그리고...(후략)
또한 건물의 외관에 있어 외벽도 시멘트 몰탈 뿜칠과 적동와를 조화시켰고 지붕재료로는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산이 가능한 재료로 한국슬레이트에서 개발 생산한 슬레이트기와를 사용케 되었는데 이로 인해 지붕 구배를 완만하게 할 수 있었고 모양도 현대적인 감각을 내게 되어 재래것보다 세련되었고 건물 모양도 요철로 다양하게 했다. 국민주택은 이밖에도 많은 새 재료를 사용했는데 새로운 재료로는 1958년 정릉 국민주택을 건설할 때 온돌석 대신 최초로 신안재료인 온돌판(시멘트제품)을 사용하기도 하고 우이동 국민주택에서는 마루천정을 문화벽으로 시공하기도 했다.
(중략)
국민주택은 재료 시공면에서도 커다란 혁신이 있었지만 설계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진보가 있었다. 평면상으로 볼 때 넓은 마루방을 리빙룸으로 만들어 주택의 생활공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했고 또한 해방후 처음으로 욕실을 설치하였으나 침식분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엌도 한 단 떨어뜨린 재래식(부뚜막식)이었다. 이러한 부엌은 주택개량상으로 봐서는 일보후퇴를 의미했으나 그 때만해도 중류생활의 주부들은 그것을 원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국민주택은 평면에 많은 연구를 한 주택이었으며 특히 1961년도에 답십리에 건설한 9평주택은 좁은 공간을 가장 유효하게 처리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한주택공사20년사, 1979, pp.357-358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96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35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39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45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97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52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53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54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56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_p.266
▲ 장위동 국민주택_단지 1978년 현황사진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 p.95 사진 자료
2-6. 장위동의 주택지
장위동에 1958년에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이 들어서고, 이 구역의 남쪽과 서쪽으로 국민주택 단지가 추가로 들어섰다.
돌곶이역 교차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화랑로는 1976년 6월 26일 방사2호선의 이름을 바꾸면서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이 길은 조선시대 이후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가로(京元街路)로 혜화문 밖에서 의정부와 춘천으로 연결되던 길이었다. 노원구 공릉동에 육군사관학교가 있고,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인 화랑대(花郞臺)에서 도로의 이름이 붙여졌다. (「서울지명사전」 2009.2.13.)
화랑로와 인접한 북쪽에서 장위초등학교(1946년 분교로 개교, 1949년 국민학교로 승격)의 남쪽까지 전후 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주택단지 조성 이후 1972년에 단지의 서쪽에 월곡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부흥주택, 재건주택, 국민주택 단지는 장위초등학교와 월곡초등학교 사이에서 화랑로 북쪽까지 넓은 구역에 단지 구획을 가지고 있다. 주거지역에는 골목형 시장인 장위골목시장이 부흥주택과 재건주택 단지에 붙어 형성되었고, 1972년에는 건물형 장위시장이 개설되었다.
1962년부터 지어진 국민주택은 장위동의 남쪽 경계인 화랑로에 인접하여 단지가 형성되었고, 1963년에 들어선 국민주택은 언덕과 경사지에 자리잡았다.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은 연립형이고, 국민주택은 단독형으로 조성되었는데, 개별 필지와 건축물이 대부분 재건축으로 멸실되어 남아있는 주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 2021년 항공사진(카카오맵) 위에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에 정리되어 있는 주택지의 위치와 구획을 가필함(최호진 작성)
2021년과 2018년의 항공사진위에 표시한 주택지 위치를 비교하여 2018년~2021년 사이의 장위동 지역 재개발 현황을 가늠하고자 함
▲ 2018년 항공사진(카카오맵) 위에 '대한주택공사주택단지총람(1954-1970)'에 정리되어 있는 주택지의 위치와 구획을 가필함(최호진 작성)
2-7. 사라진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건축가 김중업
건축가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1939년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横浜高等工業学校)(現 요코하마 국립대학) 건축학과를 다녔다. 광복 이후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전임교수를 지내며, 1952년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건축가 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 사무소에서 3년간 근무를 하게 된다. 1956년 파리에서 귀국하여 종로구 관훈동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국내 건축활동을 시작한다. 1966년에는 성북동 95번지에 자택 겸 아틀리에를 운영하게 되는데, 건축작품전과 다양한 작품활동을 펼치면서 당대의 건축가로 입지를 다졌다. 88올림픽 평화의 문이 김중업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이며 1988년에 별세하였다.
서강대학교 본관(1958), 유유산업 안양공장(1959), 주한프랑스대사관(1960), UN묘지 채플(1963), 제주대학교 본관(1964), 서산부인과병원(1965), 국제화재해상보험 사옥(1968), 31빌딩(1969) 등이 1960년대까지의 주요한 작품이다.
종로구와 성북구에 머물던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주택 작품 중, 석관동 한 씨 주택(1956-1964), 성북동 김광섭 주택(1961), 성북동 전성우 주택(1967), 동선동 윤주탁 주택(1967), 성북동 미국 F.N.C.B 지배인 주택(1967), 성북동 송요찬 주택(1969)이 성북구에 지어졌고, 1970년대 국외 추방 시기를 지나 귀국 후 성북동 이병목 주택(1982)을 설계하였다. 김중업은 성북구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 때 자택도 위치해 있었던 만큼, 향후 건축가의 행적과 활동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 연구가 더욱 필요할 것이다.
‘人’ 자의 집(석관동 한씨 주택)
김중업이 1958년에 설계하여 1964년 준공된 작품으로 알려진 ‘人’자의 집은 건축가 김중업의 초기 주택 작품 중 하나이다. 석관동 한창우 주택으로도 명칭된 이 집은 위치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장위동(월곡) 국민주택단지의 자료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김중업의 초기 건축작품에서 지붕의 조형이 강조되는데, 그의 대표작인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붕의 조형으로 표현하는데에 공을 들인 작품이 바로 이 집이다. 육중하게 느껴지면서도 날렵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지붕의 곡면이 매우 인상적이고, 서로 다른 지붕면이 맞닿은 곳에는 천창을 설치하여 채광의 기능과 함께 실내에서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음악가라고 알려진 건축주의 주택을 지으면서도, 김중업은 당시 본인의 건축관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人’ 자의 집 서울, 1958
Mr. Han’s Residence, Seoul
젊고 꿈많은 작곡가의 창작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일이었다. 작은 공간 속에 다채로움을 담고 부드러운 입김이 감돌 수 있는 분위기를 창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예산도 넉넉할 리 없고 대지조건도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교양이 배어 밉지 않은 집. 계절에 따라 표정이 바뀌고, 사는 이의 정감이 흠벅 담겨져야 했다. 지붕을 치켜올려 비바람을 막고 우리 전통의 정감어린 선을 강조하였다. 앞뒤에 놓인 구부러진 곡면지붕 사이를 띄워 환희의 햇살이 부엌과 화장실에 아른거리고, 밤에는 달과 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자연과의 의외의 만남이 집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인가. 우연치 않게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 내 젊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애착가는 작품이다.
“집은 노래 불러야 한다.
집이 매력에 넘치는 것은 우리들의 희열 속에 끌어올리기 때문이요,
쓸모를 넘어 영속하여 미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출처 : ‘김중업, 빛과 그림자’(열화당, 1984., pp.36-39)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김중업 다이얼로그’전 전시회 촬영 사진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김중업 다이얼로그’전 전시회 촬영 사진
이 집이 있던 위치는 1962년 조성된 장위동 국민주택단지의 서쪽 월곡동 구역과 동쪽 장위동 구역의 사이에 있었다. 이미 작은 필지로 나뉘어진 상태에서 대지의 경계선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서 꽉 찬 집을 설계해야 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한옥은 장방형의 긴 쪽이 정면이 되고, 측면에 지붕의 모임 형태가 보여지게 되는데, 이 집의 대지는 긴 쪽이 남쪽을 향하고 있었고, 조형성이 강조된 지붕을 설계하는 데에 좁은 대지가 큰 제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장위동 국민주택 1978년 현황 사진에서 확인되는 ‘석관동 한씨 주택’ (사진출처 : 「대한주택공사 주택단지총람(1954-1970)」, p.95)
이 주택이 확인되는 항공사진은 1982년도에 촬영된 것이고, 현재는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공영주차장이 있는 위치로 성북구 장위동 65-154번지이다.
(1982년 항공사진에서 확인)
(2018년 항공사진에서 위치 확인)
1997년과 1998년의 항공사진 비교를 통해 1998년의 주변 건물과 땅의 모습이 2019년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주차장 확보를 위하여 건축물이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항공사진)
(1998년 항공사진)
이 주택이 석관동으로 알려진 이유를 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주택의 남쪽 화랑로를 경계로 북쪽은 장위동, 남쪽은 석관동으로 인접하여 있기에 석관동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전시정보 클릭!)은 김중업 사후 30주기에 열린 전시로, 이 주택에 대한 설명에 행정구역에 대한 부분이 잘못 기재되어 있으나, 김중업 관련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내용은 참고할 만하다.
석관동 한씨 주택은 서울시 노원구 소재의 주택으로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141.90㎡ 규모의 벽돌조 주택이다. 독특한 형태의 지붕이 특징적인 '人'자 집은 한 작곡가의 의뢰로 지어진 단층구조의 주택이다.
1958년 설계하여 1964년 준공했다. 당시 김중업은 지붕의 조형적 의미에 대하여 많은 고민한 끝에 우리 전통의 '선'을 강조하고자 지붕을 '人'자의 형태로 올리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주택으로 설계했다.
김중업은 "작은 공간 속에 다채로움을 담고 있는 이곳에 게절에 따라 표정이 바뀌고, 사는 이의 정감이 흠뻑 담겨야 한다."고 했다. 또한 김중업은 이 집에 대해 "자연과의 의외의 만남이 집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인가"라고 회상하며 "우연치 않게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간, 자신의 젊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애착가는 작품이다."라고 언급했다.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김중업 다이얼로그’전 전시안내자료
석관동 한씨 주택은 한국의 전통적인 한옥의 지붕 형태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조형성을 강조하고, 기능적인 부분을 계획에 반영하였으며, 건축 어휘의 상징성을 다양한 곳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벽난로의 굴뚝, 향후 김중업 건축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빗물체인,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던 좁은 대지 안에서의 조경 등이 반영된 주택 작품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기록을 잘 남겨 당대의 유명 건축가가 지역에 남긴 역할과 영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 장위동 국민주택 1978년 현황 사진에서 확인되는 ‘석관동 한씨 주택’ 부분 확대 (사진출처 : 「대한주택공사 주택단지총람(1954-1970)」, p.95)
3. 석관동 ; 세계유산 조선왕릉 '의릉'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그리고 구 중앙정보부
3-0. 석관동 산책 루트
3-1. 조선왕릉 의릉
3-2. 한국예술종합학교
3-3. 구 중앙정보부
3-3-1. 의릉과 중앙정보부
석관동 의릉 부지에 중앙정보부 청사가 들어서며, 의릉의 모습은 많이 훼손이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 5월 26일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고 5월 27일에 고시된다. 1970년에도 의릉 권역이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18개의 능을 한꺼번에 문화재로 지정하는데 함께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이 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와 서쪽의 천장산 자락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이 되어왔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의릉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능 주변으로 청사, 운동장, 강당 등을 짓고 일반인에게 비공개하였다. 이후 회의실을 비롯하여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인공연못을 조성하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고 청사를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조선왕릉 의릉 이야기, https://royal.khs.go.kr/ROYAL/contents/R106020000.do?schBdcode=rtm&pageType=story&bdProgramCode=storyCtg7&returnPage=subMain&schBdIdx=20231026044229634026&schIdx=11 )
2003년 7월 19일부터 10월 10일에 현장조사가 마무리되어 2004년에 발간된 ‘의릉 복원정비지역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의릉 권역에 대한 조사 배경 및 목적이 서술되어 있다.
의릉은 1970년 5월 26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 이미 국가정보원(구 중앙정보부)이 자리잡고 주변으로 관련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일부 지형들이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조성되어 있는 연못 또한 중앙정보부 관리시절에 조성된 것이며, 다행히 1995년 9월에 중앙정보부의 새로운 통합신청사가 내곡동에 준공되면서 1995년 11월 2일 부지에 대한 1차 반환이 이루어졌고, 점차적으로 2002년까지 총 4차에 걸쳐 반환되어 현재는 대부분의 경역(境域)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부지 및 건물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관리 하에 놓임에 따라 완전한 반환은 이루지 못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반환받은 의릉의 일부 경역에 대하여 원래 능제(陵制)에 맞게 복원정비하고자 복원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이에 앞서 그 근거를 마련하고자 금번 조사를 본 연구소에 의뢰하게 되었다.
3-3-2. 석관동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창설한 국가정보기관이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청사의 후보지 중에서 의릉을 정했다고 하며 본 청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들은 1962년부터 자리잡게 된다. 1968년 항공사진을 보면, 전체 부지에서 본관(멸실)과 운동장(멸실), 강당(현존), 현 미술원 전문사동, 현 무대제작 실습장 및 회전교차로 등 몇 개의 건물과 도로구조가 완성되었고 천장산 주변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의릉 복원정비지역 발굴조사 보고서, 2004, p.55)
1972년 정보기관의 기능이 확장되며 중앙정보부는 현대사의 기억으로 언급되는 남산에 분청을 열게 된다. 남산에 중앙정보부 분청이 세워지면서, 고문으로 유명했던 남산 분청은 주로 국내 분야를 담당했고, 석관동 본청은 해외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몇 년 사이에 개봉하거나 방영된 영화와 다큐멘터리에 단골 소재로 등장한 10.26 사건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고 궁정동 안가를 빠져나와 남산 중앙정보부로 향하다가 육군본부(현 삼각지 전쟁기념관 부지)로 발길을 돌리면서 또 다른 군사정권이 시작되기도 했다. 남산의 중앙정보부는 네가티브 헤리티지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며 남산의 북사면에 자리한 많은 건물들이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남아 유스호스텔, 서울소방재난본부, 문학의집 서울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관동 중앙정보부에서는 국내외 전 분야에 다양한 정보활동이 이루어졌는데, 1964년에는 이집트에서 볍씨를 훔쳐왔고, 1966년 북한이 잉글랜드월드컵 8강에 진출하자 당시 부훈이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이름을 딴 ‘양지축구단’을 창단했다고 한다. 이 축구단 선수들은 군복무를 대신하면서 실업팀 수준의 월급을 받는 등 특급대우를 받았고, 바로 이 석관동 중앙정보부 내 잔디구장에서 맹훈련을 했다고 전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 캄캄한 '양지'의 꿈 석관동 중앙정보부 옛 청사, 「희망세상」, 2008년 8월호)
1981년 4월 중앙정보부를 개편하여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공개된 정보가 없어, 석관동 중앙정보부의 많은 건물들이 어느 해에 단계적으로 건립되었는지는 명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1968년과 1982년의 서울시 항공사진을 통해 14년의 시간 동안 중앙정보부 내의 시설 건립 현황을 추정해 볼 수 있고, 또한 중앙정보부의 건물이 설계 작품 이력으로 기록된 건축가 정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서울시 항공사진)
중앙정보부 본관은 건축가 나상진의 작품 목록에 올라와 있다. 나상진은 국내파 건축가 중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사람으로, 군 관련 인물들과의 교류나 행정 관청과의 관계를 통하여 공공청사 분야에 상당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군사정권에서는 공공청사나 보안시설들을 공개적으로 매체에 소개하기 어려웠기에, 향후 기록이나 연구를 통해 그 작품들을 주목하거나 추적하기에 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공공청사에서 보여준 중정(中庭)형식의 건축계획은 건축가 사후에도 두드러져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상진(1923-1973)은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화가로 알려진 부친의 영향으로 예술적 감각을 익혔으리라 짐작이 되며, 1940년 전주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1945년까지 일본회사 카지마쿠미에서 일한다. 광복과 전쟁을 거쳐 1952년부터 독자적인 설계사무소를 운영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나상진은 연합참모본부와 관계된 일을 여러가지 진행하다가 1960년대 5.16 군사혁명 이후 정부와 관련된 많은 일을 하였다고 알려져있다.
밀실정치의 공간으로 사용되던 안가를 상당수 설계하였으나, 정부관련시설은 보안상의 이유로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 많다 상대적으로 당시의 다른 건축가들보다 현대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현대건축』이라는 협회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으나, 1973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이후 나상진설계사무소는 해체되었고 당시의 직원들도 각기 흩어지면서 나상진의 작품에 관한 많은 자료들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행철, 「건축가 나상진과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12, pp.20-21
▲ 나상진설계사무소 연표 (출처 : 이행철, 「건축가 나상진과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12., p.79)
나상진설계사무소 연표에 따르면, 1965년 중앙정보부 본청사가 작품 이력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작품을 밝히기 어려웠으나, 설계사무소의 직원으로 근무했던 사람들과 이후 근현대건축 연구자들의 작업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나상진은 1965년 중앙정보부 본청사를 설계하기에 앞서, 1963년 경기도청사를 설계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중앙정보부 본청사를 나상진의 건축계획으로 볼 수 있는데, 2년의 시차를 두고 설계된 두 건물은 모두 1960년대 관공서 청사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중정형식의 평면계획을 가지고 있다.
(출처 : 수원시 항공사진)
(출처 : 수원시 항공사진)
(출처 : 수원시 항공사진)
(출처 : 경기도청 홈페이지)
(출처 : 수원시사편찬위원회 이병희 유족 시민자료)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탈)
경기도청사는 건축가 김희춘과 나상진이 공동으로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중정형의 사무실은 채광과 환기에 유리하며, 기존에 중복도식 건물에서는 사무공간별로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다른데 비해 중정형 평면은 사무공간과 복도를 통해 항상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중앙정보부 본관은 현재 사라져 항공사진과 멸실 전 사진자료를 통해 중정형 구조를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 캄캄한 '양지'의 꿈 석관동 중앙정보부 옛 청사, 「희망세상」, 2008년 8월호, p.15)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 캄캄한 '양지'의 꿈 석관동 중앙정보부 옛 청사, 「희망세상」, 2008년 8월호, p.17)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 국가정보대학원 건물에서도 중정형이 적용된 것으로 미루어, 본관 외의 건물도 나상진이 설계하였거나, 기존 본관의 건물을 참고하여 이후 지어진 건물에 계획 형식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024년 촬영(최호진)
3-3-3. 중앙정보부 강당
1982년 항공사진을 보면, 본관 남쪽에 의릉의 봉문이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 운동장이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운동장의 바로 서쪽으로 낮은 건물이 보이는데 석관동 중앙정보부가 기억되는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가 이루어진 강당(1962)과 회의실(1972)이 그곳이다. 이 강당은 2004년 등록문화재 제92호로 등록이 되었다.
중앙 운동장의 왼쪽편에 보이는 것이 중앙정보부 강당과 회의실
중앙 의릉 권역 아래쪽 숲의 왼쪽편에 보이는 것이 중앙정보부 강당과 회의실
등록문화재 제92호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2004.9.4 등록)은 업무시설로 강당과 회의실 두 개의 건조물이 연결되어 있다. 강당 부분은 2층, 연면적 466.28㎡ 규모이고, 회의실 부분은 2층, 연면적 234.7㎡ 규모를 가지고 있다.
1962년 지어진 강당과 10년 뒤 지어진 회의실로서, 1972년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이 남한과 북한의 합의에 따른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장소다. 건물은 당시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심미성 높은 건물을 설계하던 건축가 나상진(1923-1973)에 의해 설계되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강당은 정면 1층에 주출입구를 두고, 정면의 양측면에 측면벽에 접혀 들어가는 형식으로 디자인이 되어 있으며, 회의실 역시 2층의 정면이 측면에 접혀 들어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강당의 측면은 상어의 아가미를 연상시키듯 정면쪽으로 세로로 긴 벽체가 서 있고, 창을 내면서 측면 벽에서 돌출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2019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강당 내부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의 벽체와 로비 데스크 등에 곡선을 사용하여 관공서 건물의 내부에서는 당시에 일반적이지 않은 디자인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의 내부, 외부 행사를 치러내면서 강당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사무용도의 건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요소로 사용하기 위한 처리 방식으로 생각된다. 강당 내부가 개보수 되면서 정확한 원형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강당의 기능으로 조정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로비 데스크는 강당을 들어섰을 때 중요한 인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2019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회의실동의 전면부는 1층과 2층의 면적이 다르고 강당과 마찬가지로 2층의 정면의 양쪽 부분이 벽면으로 접혀 들어간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회의실동 1층은 2019년 현재 비어있는 상태이나 로비와 내부 공간 사이의 칸막이벽을 격자형 나무 프레임에 유리를 끼워 넣었음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2층 회의실로 올라가는 붉은색 카페트가 깔려있어, 2층 본 회의실의 격식을 갖추기 위한 마감으로 사용되었다. 회의실동 뒷문에는 두꺼운 캐노피가 설치되어 있으며, 빗물 배수를 유도하는 빗물체인까지 설치가 되어 있어, 회의실의 정면 뿐 아니라 후면도 기능적으로 자주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2019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2018년 8월 28일에 열린 2018년도 문화재위원회(근대문화재분과) 제8차 회의에서는 등록문화재 제92호 「서울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 명칭변경 검토 안건이 상정되었다. 제안사유에는 "건물의 고유명사를 사용한 것이나 '중앙정보부'라는 명칭은 건물의 등록취지에 맞지 않으므로 본격적인 활용('18.10월 대국민 개방 예정)에 걸맞은 명칭 부여가 필요하며, 등록문화재 명칭 변경 여부를 검토하고자 하는 사항임"과 함께 "*등록사유 : 7·4남북공동성명 발표된 역사적 장소성과 건축사적 가치"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해당 문화재의 성격과 가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명칭변경 필요성 대두 - 일반공개 예정('18년 10월)"이라고 추진 배경을 밝히고, 「의릉 구 중앙정보부 강당」에서 「7·4남북공동성명 발표」으로 변경 내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중앙정보부 강당은 폭압적 기능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의 아픈 기억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나, 아픈 역사도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기존 명칭을 유지하되, 필요시 7·4남북공동성명발표장을 병기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출석 문화재위원 전원 일치 의결로 부결되었다.
이를 통해, 소위 '부정적 유산'에 대한 것을 감추지 않고, 명칭에서도 그대로 드러내어 살아있는 현대사의 현장 유산으로서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3-3-4. 한국예술종합학교
1995년 안전기획부(구 중앙정보부)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였고, 석관동과 남산의 기존 시설들은 다른 용도로 전환되기 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1990년대 초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설치되며, 서초동과 국립극장에 일부 학과들이 분산되어 있다가, 1996년 석관동 안전기획부(구 중앙정보부) 건물에 정착을 하게 된다.
구 중앙정보부 본관은 일부 학과(영상원, 연극원)가 활용하기도 하였으나, 문화재청의 의릉 복원 계획에 따라 2008년에 철거되면서, 북쪽의 수송대 자리에 새로 신축한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고, 미술원과 전통예술원은 국가정보대학원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학교 본부가 있는 북쪽과 미술원이 있는 남쪽의 사이에 의릉이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2018년 서울시 항공사진을 기준으로, 중앙정보부의 사라진 시설은 1996년 항공사진에 빨간색으로 표시함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과 재건, 성장기를 거치며, 과거의 유산과 근현대 유산이 같은 공간 안에 병치하고 있는 사례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노원구의 태릉선수촌의 남겨진 시설 또한 조선왕릉 보호 구역 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근현대 체육시설로의 가치가 있어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역 내에서 어떻게 존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의릉이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부분 훼손되기도 하였고, 국가지정문화재 의릉이 조선왕릉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보존관리 영역이 크게 부각되었고, 현재는 지속적으로 의릉 복원 정비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와 현대도시에서의 현재 의릉 구역이 차지하고 있는 의미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재로서 조선왕릉도 중요하지만, 실제 현대사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옛 중앙정보부의 흔적 또한 현대인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와 있는 것도 사실이다.
▲ 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주변(출처 : 서울특별시 3차원 공간정보시스템 http://3dgis.seoul.go.kr/, 2020.3)
2012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의릉 구역의 복원, 정비 계획이 진행되면서, 구 중앙정보부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지속적으로 이전 계획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재의 보존이 우선시 되면서도, 현대사의 현장을 증언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물인 구 중앙정보부의 시설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고 남겨야 할지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 남아있는 옛 중앙정보부의 시설들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2019년 촬영(최호진)
2024년 촬영(최호진)
4. 맺음말
장위동과 석관동은 1960년대 이후 도심의 본격적인 확장으로 공공사업을 통한 주택단지의 건설, 국가권력의 상징이었던 구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지역이다. 중랑천의 동쪽으로는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학교 이공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이 자리잡고 두 지역은 경춘선과 화랑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석관동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청와대와 가까운 남산에 신청사가 지어지며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국가지정문화재 의릉 권역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규모 밀집 주택 단지는 재개발로 인하여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고 있고, 의릉은 지속적인 복원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양한 도시 교통 기반시설의 확충으로 많은 인구가 살고있는 동네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 개정서울특별시전도(1974)에 표시한 1960~70년대의 주요 권력기관과 장위,석관의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