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울 일대 경춘선, 구 서울공대 관련 연표
1911년 경원선 부분 개통
1914년 노해면사무소(창동) 설치
1933년 망우리 공동묘지 개설
1939년 경춘선 개통
1940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1,3호관 준공(?)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설립
1945년 군사영어학교 이전(현 육군사관학교)
1971년 경춘선 성동역 폐지
1974년 지하철1호선 개통(성북역)
1980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관악캠퍼스 이전
1988년 노원구, 중랑구 신설
1996년 지하철7호선 개통(장암-건대입구)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전철화 사업 추진, 성북역~갈매역 폐선
2013년 경춘선 전철 개통
2018년 경춘선 숲길 개방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8-9 참고
일제강점기의 북서울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뒤 한성부는 경성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경기도 소속의 일개 지방 도시로 격하되었다. 더불어 한성부 관할 하에 있던 성저십리도 경기도 양주군과 고양군 소속이 되었다. 이에 앞서 1907년 겨울, 항일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조직했고, 이 중 양주에 집결한 1만여 명은 허위의 지휘 하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했다. 이 의병부대는 비록 패퇴했으나 그 후 한동안 북서울 일대에서는 여러 의병부대가 활동했고, 지역 주민들은 음으로 양으로 이들을 지원했다.
한적한 농촌 지대이던 북서울 일대의 변화를 촉진한 주요인은 철도 부설과 서울의 팽창이었다. 철도역 주변에는 화물과 사람이 모여들어 상업지대가 형성되었으며, 서울을 소비시장으로 삼는 근교농업지대의 권역도 넓어졌다. 철도 교통으로 인해 서울과 교외 지역 사이의 심리적·시간적 거리가 단축됨으로써 신문물과 신사상의 전파 속도도 빨라졌다. 이러한 변화를 배경으로 1931년에는 북서울 최초의 근대적 초등학교인 창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서울의 인구 증가는 교외 지역의 농업과 출산업 발전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매장지 면적을 확장시켰다. 1913년 경성부는 미아리, 이태원, 신설리, 아현리, 신사리 등지에 부립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1936년 경성부역 확장에 따라 이들 묘지는 대부분 택지로 전환되었고, 그 대신 망우리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만들어졌다. 이후 수십 년 간, 망우리로 향하는 길에는 매일 여러 차례씩 상여 행렬이 지나다녔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1941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규정'(총독부령 제29호)이 제정됨에 따라 1941년 4월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학부의 교실을 빌려 첫 수업을 시작하였지만, 1942년 4월에 1·3·4호관이 신축되고, 1943년 4월 2호관이 신축되면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32-33 / 기타 인터넷 참조
경원·경춘선
일제강점기 북서울에는 세 줄기의 철도 궤도가 놓였다. 1910년 용산에서 착공된 경원선은 1914년에 개통되었다. 용산에서 출발하여 한강 북안을 따라 가다가 왕십리 방향으로 북행하여 원산까지 이어진 경원선은 옛 경흥대로의 역할을 대부분 흡수하였다. 북어 등 동해안 북부의 물산이 철도편으로 서울까지 운송되었고, 금강산을 구경하려는 서울 사람들도 이 철도편을 이용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북서울에서 가장 큰 경원선 철도역은 창동역이었다. 북서울 최초의 근대적 초등 교육기관이 창동에서 설립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경춘선은 1939년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성동역(1971년 폐쇄)과 춘천 사이에 부설한 사설 철도이다. 이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경원선과 경춘선이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연촌역(1963년 성북역으로 개칭, 현재의 광운대역)이 북서울의 중심역으로 급부상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34-35
경춘선
경춘선은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건설되었다. 경춘철도 건설은 1935년 9월 1일에 개최된 경춘발전책 좌담회에서 발의되어 조선총독부에 경춘직통철도 부설이 진정되면서 시작되었다. 진정 당시에는 예산 문제로 빠른 시간 내 건설이 어려울 경우 주민이 건설비용을 부담하여 건설하겠다고 할 정도로 주민들은 철도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후에 춘천의 유지들이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춘천 이외에 화천, 양구 등지에서도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1936년에 들어서 천만원의 자금으로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창립되어, 동년 6월 24일에 실측에 착수하였으며, 7월 19일에는 부설이 인가되었다. 성동부터 춘천까지 총 연장 93km로 건설비는 1,400만원으로 1939년 7월 22일(25일?)에 개통되었으며, 개통 당시 역은 다음과 같다.
성동-고상전-월곡-연촌-묵동-태릉-갈매-퇴계원-사릉-금곡리-평내-마석-대성리-청평-상천-상색-가평-서천-백양리-강촌-의암-신암-성산-춘천
경춘철도는 춘천지역을 비롯한 넓은 지역에 자원을 개척하고 군수, 산업자재를 공급하고, 연선에 태릉, 불암산, 광릉, 퇴계유원지 등의 문화산업의 촉진을 위해 개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철로 운영되었으나, 해방 후 1946년 5월 17일 국유화되었다.
문화재청, 근대기 철도역사(4개소) 기록화조사보고서(고양 일산역,남양주 팔당역,양평 구둔역, 화랑대역), 2012.3.9, pp.51-53
연촌역(硯村驛)
1939년 경춘선이 개통되면서 경원선과 경춘선이 만나는 연촌역이 개설되었다. 이 역은 서울의 동북부 관문이었기에 점차 상권이 커져갔고,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하였다. 당초 행정구역 이름을 따서 월계역(月溪驛)으로 정하였으나, 일본어 발음인 '켓케이げっけい'가 월경(月經)과 같다고 하여 연촌역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1963년에는 성의 북쪽에서 처음 정차하는 역이라고 하여 성북역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2013년에는 행정구역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광운대역으로 변경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C%9A%B4%EB%8C%80%EC%97%AD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32-33 / 기타 인터넷 참조
신공덕역(新孔德驛)
신공덕역은 연촌역과 태릉역 사이에 위치한 간이역으로 시작하였다. 1939년 경춘선 개통 당시 역명은 지명을 따서 묵동정류소(墨洞停留所)라고 불렀으나 1944년 정식 역으로 승격되면서 신공덕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덕역 앞에 '신(新)'자가 붙은 이유는 당시 용산선 공덕역이 있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 역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A%B3%B5%EB%8D%95%EC%97%AD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32-33 / 기타 인터넷 참조
신공덕역 구 역사. 1990년대 중반에 철거되었다.
경춘선숲길
경춘선숲길(안내판)
경춘선은 서울과 춘천을 연결하는 철길로 서울 '경(京)'에 춘천의 '춘(春)'을 더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당시 경인선 등 많은 철도가 일제의 침탈용으로 부설된 반면 경춘선은 우리 스스로 민족의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건설한 특별한 철도이다. 춘천 상인이 중심이 된 번영회에서 1926년 2월 '경춘철도 기성회'를 조직하고 4년간 공사를 벌여 1939년 완공했다. 경춘철도주식회사에서 운영하다 국철로 편입되었다. 서울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출발역인 성동역(현재의 제기역 근처)에서 성북역 구간이 철거(폐선?)됐다. 2010년 경춘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성북역(현 광운대역)~갈매역 구간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청량리역과 상봉역에서 출발하는 경춘선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서울시는 2010년부터 쓰임이 다양한 경춘철교~담터마을(서울 시계) 구간 6km에 경춘선 숲길 공원 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경춘선이 70년간 근대산업 문화유산의 현장을 간직하여 많은 사람에게 옛 기억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고, 서울에서 철길 원형이 가장 길게 남아 있는 특성을 설계 모티브로 삼아 철길 원형을 보존하고 정원과 산책로, 지역주민의 문화공간을 조성하여 2018년 개방했다.
경춘철교 (안내판)
1939년 개설된 경춘선(옛 성동역~춘천역)이 지나던 교량으로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노원구 월계동과 공릉동을 연결하는 폭 6m, 길이 176.5m의 철교이다. 중랑천의 엣 이름을 본떠 한천(漢川)철교라고도 하였으나 서울과 춘천을 왕복하는 열차가 달린다는 의미에서 서울을 나타내는 '경(京)'과 춘천의 '춘(春)'을 더해 경춘철교라 이름이 지어졌다.
1939년 7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후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전철화 사업 추진에 따라 광운대역(옛 성북역)에서 갈매역까지 8.5km 구간이 폐선되어 열차 운행이 중단되기까지 71년간 여객, 화물열차가 경춘철교를 통해 서울과 춘천을 활발히 오갔으며 2016년 경춘선숲길을 조성하면서 보행교로 재정비 되었다.
경춘철교 정비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12개의 교각과 철로를 그대로 보전하면서 보행로를 조성하고, 철교 아래로 흐르는 중랑천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연계되도록 승강기와 전망공간을 조성하였다.
경춘선숲길, 국립현대미술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안내문
완공 2015-2017
면적 연장 6.3km
위치 서울시 노원구
1939년 개통 이래 서울과 춘천을 잇던 철도인 경춘선의 노선이 2010년부터 바뀌면서 성북역에서 갈매역까지의 운행이 중단됐다. 서울시는 약 8.5km에 이르는 이 구간을 활용하고자 공원화 사업을 추진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철도가 일본 주도 사업이었던 데 반해, 경춘선은 춘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적인 자본으로 건설한 중요한 근대 문화유산이다. 그렇기에 서안이 제안한 공원 설계의 핵심은 철길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지역 사회와 도시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한 것이다. 철길, 철교 등 남겨진 근대산업시설은 물론, 주변의 푸른 녹지까지의 보존을 원칙으로 하고, 공원은 지역 주민들의 일상 속 공간으로 환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대상 구간인 6.5km를 세 단계로 나눠 설계했으며, 그중 첫 번째 구간은 철길을 포함해 폭 12m 남짓한 단독주택 지역이었다. 철도로 인해 개발이 지연됐던 탓에 좁은 골목길과 얽혀 있는 복잡한 마을의 구조였다. 서안은 '마을의 뜰'을 주제로 지역 주민들이 함께 가꾸는 작은 정원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철길 변 숲길이 잘 보존된 곳은 그 공간의 느낌을 강조하면서 천천히 산책할 수 있는 길을 조성했다.
두 번째 구간은 중랑천을 지나는 철교와 함께 공동주택지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주민들이 산책하던 잣나무 수림과 철길 변 텃밭이 있던 장소다. 40~50m폭의 넉넉한 부지를 활용해 기존 지역 공동체의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 '공동체정원'을 주제로 직접 가꾸고 생산하는 과실수와 텃밭 공간을 디자인했다. 또한 중랑천 산책로와 자전거길을 연결한 철교는 옛 모티브를 최대한 살리면서 경춘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향수를 간직하도록 했다.
세 번째 구간은 옛 화랑대 역사를 문화재로 보존하면서 주변의 플랫폼과 철길, 인근 숲 또한 보존하는 '철도역 공원'으로 계획됐다. 역사 앞 인근 공터에는 폐기차로 만들어진 북카페와 마을 행사를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공릉동도깨비시장, 철길 변 카페거리, 마을 도시농업센터에서 진행되는 친환경농업 교육까지, 조성 이래 다양한 변화와 행사가 개최되어 온 <경춘선숲길>은 이제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많은 방문자가 찾는 명소가 됐다.
<경춘선숲길>은 선유도공원(2002)과 함께 산업 시설을 공원화한 서안의 대표 프로젝트 중 하나로, 조경 설계가 주도적으로 도시 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촉진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회 안내 https://booking.mmca.go.kr/product/ko/performance/246
서울 공릉동 행복주택
위 치 서울 노원구 공릉동 428-7
건축가 설계 >한지윤 설계 >유한준
조 직 시공 >㈜코원건설 시공 >뉴프린스종합건설㈜
수상현황 (2020)2020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부문 / 준공부문 / 우수상
용 도 공동주택
대지면적 2834.6 m2 지상층수 15
건축면적 398.34 m2 지하층수 1
건폐율 14.05 % 구조 철근콘크리트구조
연면적 6045.31 m2 용적율 153.69 %
작품설명 이웃과 함께하는 공원 속 도시주거
과거 경춘선 신공덕역이 위치했던 역사 부지로 경춘선이 폐선 되면서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부지 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유휴지로, 지역 우범지, 쓰레기폐기 공간 등 도시 흉물로 방치되어 있었다.
정부정책의 일환인 도심 내 유휴지(특히 철도부지)를 활용한 행복주택 건설목적으로 이 부지가 선정되었으나, 조망권, 행복주택의 선입견 등 지역 주민들의 많은 의견들을 4년이라는 오랜 기간 협의를 통해 공공성에 대한 이웃의 배려를 이끌어낸 민원 극복과 주민화합의 결과물로 건설된 상징적 행복주택이다.
과거 경춘선에 의한 지역단절을 겪었던 이 지역에 이웃의 소통, 철길의 기억을 간직한 철도 활용 보행로 공원화 계획과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으로 도시에 사는 것이 어려운 젊은 세대인 미래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학생 신혼부부를 위한 도시 기반시설인 공적 도시 주거를 건설하였다.
경춘선 공원 부지에 계획된 본 건물은 기존의 전형적인 공동주택의 형태를 벗어난 입체적 입면, 조형성 강조된 매스와 다채로운 컬러디자인계획으로 지역 커뮤니티 허브, 지역 디자인 앵커등 공원의 오브제이며 지역 랜드마크로 공원과 지역에 활력을 불어 넣는 젊은 행복 주택. 공원 속 미래의 꿈을 키우는 도시 주거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링크 AURUM(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https://www.aurum.re.kr/Bits/BuildingDoc.aspx?mm=4&ss=1&num=9371
> 링크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우수상] 공릉동 행복주택
서울경제, 2020.11.18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내지도
경성광산전문학교
광업에 관한 전문적 학술기예를 가르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광업에 관한 이전의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에 폐지된 광무학교(鑛務學校)가 있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의 전신은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내에 설치된 광산과로, 1923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학교가 개편되었다.
그 뒤 중일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일제는 광물채굴과 그 야금에 필요한 기술인력이 시급히 요청되어, 1939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내에 설치된 광산학과를 분리, 독립시켜 한일인공학(韓日人共學)의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수업연한 3년제인 본과와 1년제의 전수과를 두고 채광학과와 광산기계과를 설치하였다. 1941년에 야금학과를 증설하였으며, 1945년 9월까지 배출한 한국인 본과졸업생은 159명이었다.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문부 광산공학과로 흡수되었고 그 뒤 공과대학 광산학과로 개편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성광산전문학교 (京城鑛山專門學校)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549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광산학과가 분리되어 설립된 학교로,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관립 전문학교였다. 대(對)중국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심화되면서 광물수요가 급격히 증가해 많은 광산전문가가 필요해졌다. 때문에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분리된 별도의 광산전문학교가 설립되게 된 것이다.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일본인 광업가 기부금 300만원과 조선총독부 예산 50만원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같은 건물을 사용했지만 1942년에 현재의 공릉동으로 새로운 교사를 지어 이전하게 된다. 설계 및 건축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함께 공릉동에 지어졌다. 학과로는 광산기계과, 채광과, 야금과등을 두었으며, 10여 명의 별도의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수업연한은 3년이었고, 졸업한 후에 2년간의 연구과에 재학할 수도 있었다. 학년별 정원은 광산기계과 35명, 채광과 50명, 야금과 15명이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광산의 간부로 우선채용되었기 때문에 전쟁시기 취직이 매우 어려웠던 당시 대단히 인기가 있었으며, 때문에 입시 경쟁률 또한 최고수준을 나타냈다.
해방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와 함께 대학기관인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 흡수되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격상되었으며, 현재 광산학과 교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광산학과 교사 (서울大學校 舊 工科大學 鑛山學科 校舍)
분 류 등록문화유산 / 기타 / 교육시설
수량/면적 3개동 본관3층 건축면적 476.03㎡, 연면적 958.68㎡, 실험실 1층 건축면적/연면적 370.25㎡, 연구실 1층 건면/연면370.25㎡
지정(등록)일 2008.02.28
소 재 지 서울 노원구 공릉동 189번지
시 대 1942년
소유자(소유단체) 교육부
관리자(관리단체) 교육부
Ο 1942년 신축된 건물로 중앙의 본관을 중심으로 무도장과 강당(現 실험실과 연구실)이 배치되어 있다.
Ο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광산학과로, 광복 후 1980년까지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구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다.
Ο 디자인은 모더니즘 풍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 배치에서는 고전적인 틀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본관 중앙에 탑을 높게 배치하여 본관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 일제강점기 고등교육 시설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문화재안내판(2014.1) 설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륙관'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369호 / 시대 : 1943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번
이 건물들은 일제가 1943년에 경성광산전문학교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로 이전시키면서 지어졌다. 그래서 공덕리에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교사가 있었다. 중앙에 본관을 두고 그 옆에 무도장과 강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1946년의 도면에는 본관 뒤쪽으로 더 많은 공장과 실험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음을 알려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경성광산전문학교가 썼고, 1946년에 경성광산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1980년까지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5호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가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1940년대 모더니즘 풍이다. 전체 배치는 축과 중심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에 속하며, 특히 본관 중앙의 높은 탑은 일제시대 전문학교의 위용을 보여주려는 시각장치라고 볼 수 있다.
▲출처 : 정준영, 「제국 대학의 한 페이지, 공릉 캠퍼스」, 서울과기대 신문, 2020.11.16
관련 링크
추억 속의 캠퍼스 : 공과대학 1946-1975, 서울대학교 기록관 홈페이지
https://archives.snu.ac.kr/DAS/H/H3/3/H3_3_02_P01.do?colidx=346&colnumber=COL-2017-0002
◀ 공과대학 전경 (1955)
경성고등공업학교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상과와 공과를 갖춘 상공학교(商工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예산결손으로 운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1904년 일본 제국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상공학교에 농과를 가설하여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로 다시 개교하였다.
...
1906년 통감부와 대한제국의 공업고문인 히라가 박사의 기획에 따라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분리ㆍ확대되어 1907년 2월 1일 공업전습소 관제가 반포됨으로써,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로 개편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 4월 21일에 개교하였으며, 1908년에는 공업전습소 교사가 완공되었다. 공업전습소 설립 당시에는 조선인 교관이 약간명 있었으나 이후 모두 일본인 교관으로 교체되었다.
...
경성고등공업학교는 대한제국 때 성립된 공업전습소가 승격되어 설립된 관립 전문학교였다. 일본의 직공학교 수준에 불과했던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발전함에 따라 진정한 고등공업교육이 시작되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공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업전습소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에도 동일한 체제로 운영되다, 1916년 4월 1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관립 전문학교가 되었다. 이후 1922년 4월 1일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44년 4월 6일 경성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0년대까지 조선의 유일한 고등공업기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전문학교에 비해 특수한 학교로 여겨졌다.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에는 조선인을 전체정원에서 2/3가량 선발한다는 내규가 있어 조선인의 입학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지만, 교육령 개정 이후 그러한 내규가 폐지되어 입시 경쟁률은 13:1에서 27:1까지 폭증하게 되었고 조선인의 입학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1935년의 입시에서는 토목과에 조선인 학생이 단 1명만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교육계에서는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의 조선인 입학난과 함께 경성고공과 경성고상의 입시제도를 조선인에게 유리하게 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이었고, 학과로는 방직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응용화학과에는 요업, 염색, 응용화학의 세과(細科)가 있었다. 1937년에는 전기공학과와 기계과가 가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 중국과 만주로의 대륙침략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병참기지적 공업화가 가속화되자 기계과, 토목과, 건축과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조선 각지와 만주국의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 경영자 수요가 급증하자 광산과의 인기도 높아졌다. 광업분야 수요가 폭증하여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광산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39년에는 광산과를 분리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41년에는 이과양성소(理科養成所)가 부설되어 수학, 물상, 화학, 생물 중등교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원동기과와 전기화학과, 전기통신과가 추가 설치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대부분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다. 건축과와 토목과 졸업생의 상당수가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채용되었으며, 방직과와 응용화학과 출신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술인력이 희소했기 때문에 조선인 졸업자도 타 전문학교 출신자와 달리 지방관청이나 일본인 기업에 취직하는데 차별을 받지 아니했다. 이와 같은 취직의 유리함은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입시경쟁률을 높이는 데 일조를 했다.
1940년 무렵 평양에 공업전문학교가 하나 더 설립되고[1],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1941)가 설치되었으나, 이 두 학교 모두 시기상 졸업생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배출된 건축가, 공학자의 절대 다수가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이었으며, 경성고공 출신은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 공업분야와 공학계를 주도해나간다. 특히,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의 건축가들은 21세기가 되기까지 남한의 건축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현대 한국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해방이후에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함께 대학기관인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공학계에 흡수되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1941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규정'(총독부령 제29호)이 제정됨에 따라 1941년 4월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학부의 교실을 빌려 첫 수업을 시작하였지만, 1942년 4월에 1·3·4호관이 신축되고, 1943년 4월 2호관이 신축되면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32-33 / 기타 인터넷 참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일제강점기 말, 북서울 최대의 사건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경성광산전문학교의 설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최고조에 달한 1920년부터 민족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한 민립대학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일제는 관립대학을 설립함으로써 이 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24년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었고, 청량리에 예과(豫科) 건물을 지어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이어 1926년에는 동숭동과 연건동에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각각 개교하였다. 이때 이공학부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한국인에게 고등과학기술을 전수하지 않으려는 방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과학기술 인력 부족으로 인한 문제를 절감한 일제는, 한국인 고등교육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939년 경성광산전문학교,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두 학교는 현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자리로 새로운 교사를 지어 이전하였다.
두 학교를 공릉동에 세운 것은 경원선과 경춘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로서, 동북부 지방의 광물을 운반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북서울의 도로망과 산업지형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학예과(大學豫科) https://namu.wiki/w/%EB%8C%80%ED%95%99%EC%98%88%EA%B3%BC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전시도록, 2016.12., pp.38-39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공덕리) 캠퍼스
일제시기 학교건축도면 콘텐츠 https://theme.archives.go.kr/next/dwg/dwgSearchTailView.do?com_code=KS0007&com_kind=S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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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9월 22일 이공학부 4호관 상량식을 거쳐 1942년 4월 경성제대 이공학부 신축교사가 일부 준공되어 입주하게 되었고, 1943년에 이공학부 2호관도 완성되어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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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떨어진 여러 서울대학교 캠퍼스들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이 수립되고, 관악캠퍼스를 계획하여 1975년부터 이전하게 되었는데 공과대학은 1980년 2월 이전하였다. 이전하면서 남은 부지 및 건물은 당시 경기공업전문대학(현 서울산업대학교의 전신)에 이관되어 현재 1호관은 다산관으로, 2호관은 창학관으로, 4호관은 다빈치관으로, 경성광산전문학교 건물은 대륙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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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경성제대 이공학부 신축교사가 일부 준공되어 입주하게 되기 전인 1년 동안, 지금의 혜화동에 있었던 경성제대 법문학부 및 의학부 교실을 빌려 수업을 하였다. 특히 이때는 가교실을 지어 사용하였는데, 법문학부 북쪽 교실 및 학생집회소의 서쪽에 가교실과 가제도실을 신축하였다. 또한 법문학부의 남쪽에도 온실과 가창고 등을 지어 당시 이공학부의 부족한 시설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도판1] 참조)
이런 1년 동안의 과정 동안 공덕리 부지에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이게 되는데, 우선 1,2,3,4 호관 및 연결도로의 토목공사가 진행되었다. 부지는 북쪽으로 경사져 있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각 건물의 부지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후 1호관이 먼저 건축되었고 뒤이어 3호관 및 4호관이 1942년에 건축되었다. ([도판2,3] 참조) 또한 이 시기에 운동장도 신설되어 1호관의 서쪽에 내부도로를 건너 위치하게 되었다. 운동장신설 이전에 운동장 북서쪽 모서리에 두 동의 건물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1943년에 2호관이 완성됨에 따라 공학관 모두가 완성 되었다.([도판4] 참조) 또한 건축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호관 남쪽에 창고 및 차고가 신축되었고, 4호관 서쪽에는 수력실험실이 건축되었다.
따라서 당시 이공학부의 전체 배치는 남서쪽으로 연결되는 주출입 도로를 따라 세 갈래의 길로 나눠지고, 그에 따라 건물들이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가장 서쪽의 길은 ㅁ자형 1호관의 측면과 일자형 3호관으로 연결되었고, 3호관은 1호관의 북쪽에 있으면서 건물의 축이 다른 건물과 다르게 비스듬하게 놓여 있었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4호관이 위치하였는데 그 서쪽에 수력실험실도 있었다. 중앙의 길은 1호관의 정면으로, 가장 동쪽의 길은 ㅁ자형 2호관의 정면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1호관 서쪽에 운동장이 있었고, 그 북서쪽 모서리에 두 동의 건물이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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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리 캠퍼스에서 가장 먼저 건축된 3층의 1호관은 ㅁ자 건물이었다. 남쪽 중앙에 위치한 주출입구 및 홀을 중심으로 좌, 우측으로 ㅁ자형으로 실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남쪽과, 북쪽은 편복도로, 동쪽과 서쪽은 중복도로 각 실들을 연결하고 있다. 특히 2호관과 연결되는 동쪽으로는 따로 부출입구를 두었다. 2,3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중앙홀 및 동서쪽에 각 한 개씩 설치되었고, 계단실 옆에 바로 화장실을 두었으며, 계단실 세 곳과 북쪽의 복도 중앙부분을 통해 중정으로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중정은 위요된 공간으로서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활동공간이 되었다. 1층은 주로 각종 관리시설과 교실, 실험실이 있었으며, 2층과 3층은 주로 강의실로 구성되었으며, 3층의 건물 동쪽부에는 대규모 계단식 강의실이 위치하여 2층과 연결되는 독립된 계단을 가지고 있었다. 입면에서는 중앙의 높게 올린 홀 부분, 규칙적으로 배열된 세로로 긴 창문, 세로로 2, 3개 층에 걸쳐 형성된 긴 창문들이 이 건물의 중심성 및 상승의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장식이 배제된 모던한 입면이다. 특히 중앙홀 부분을 수직으로 높게 올려 캠퍼스의 중심성 및 랜드마크적인 성격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는 1호관이 주도로에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기 때문에 학교의 상징 및 중심으로서 역할을 의도한 것이다.([도판6] 참조)
이러한 1호관의 평면구성과 입면은 입면의 중앙부분을 제외하면 2, 4호관에도 거의 같게 적용되었다. 이는 당시 단기간에 넓은 캠퍼스를 건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프로토타입을 계획하여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계획의 시간을 줄이고 공사의 진척도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이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학관 중에서 유일하게 일자형 배치인 3호관은 부분적으로 2층의 높이를 갖는 1층 건물로 1,2,4호관과 다르게 박공지붕이었다. 네 면에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십자형 중복도를 통해 각 실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로 공작실 및 실험실, 연구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쪽부분에 대규모의 보일러실이 있었고 그와 연접하여 원형의 굴뚝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 보일러실을 통해 이공학부의 건물들의 난방이 이뤄졌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건물의 형태와 다르게 유일하게 일자형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서쪽 단부에는 화장실, 욕실, 숙직실과 같은 관리 및 공용시설을 두었다. 건물은 2층 층고의 보일러실과 나머지 1층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층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을 병렬적으로 배열한 방식이었으나, 2층 건물에는 2개 층고의 수직창으로 구성하여 1층 건물과 구분된 형식을 가졌다.([도판7] 참조)
도판2.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1940-41
헤화동 캠퍼스에서 수업하였던 1년 동안 공덕리 부지에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우선 1,2,3,4 호관 및 연결도로의 토목공사가 진행되었다. 부지는 북쪽으로 경사져 있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각 건물의 부지를 정리하게 된다. 그 후 이 두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1호관이 먼저 건축된다. 1호관이 실선으로 표기되고 나머지 건물들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도판3.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증기난방장치기타공사설계변경도, 1941-43
본 도면에서 1,3,4 호관은 실선으로 표기되어 설비시설을 연결하고 있지만 2호관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1,3,4호관이 신축되어 있었지만 2호관은 건축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2호관이 가장 늦게 완공된다.
도판4.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 이호관지부, 1942-43
1,3 호관이 완공된 후 2호관을 신축하기 위한 계획도면이다. 1943년에 2호관이 완성되고 이에 따라 공학관 모두가 완성되게 된다.
도판6.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 제일호관 삼계평면, 1940-41
1호관의 3층 평면도이다. 공덕리 캠퍼스에서 가장 먼저 건축된 3층의 1호관은 ㅁ자 건물이었다. 남쪽 중앙에 위치한 주출입구 및 홀을 중심으로 좌, 우측으로 ㅁ자형으로 실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남쪽과 북쪽은 편복도로, 동쪽과 서쪽은 중복도로 각 실들을 연결하고 있다. 특히 2호관과 연결되는 동쪽으로는 따로 부출입구를 두었다. 2,3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중앙 홀 및 동서쪽에 각 한 개씩 설치하였고, 계단실 옆에 바로 화장실을 두었으며, 계단실 세 곳과 북쪽의 복도 중앙부분을 통해 중정으로 나갈 수 있었다. 따라서 중정은 위요된 공간으로서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활동공간이 되었다. 1층은 주로 각종 관리시설과 교실, 실험실이 있었으며, 2층과 3층은 주로 강의실로 구성되었으며, 3층의 건물 동쪽부에는 대규모 계단식 강의실이 위치하여 2층과 연결되는 독립된 계단을 가지고 있었다. 입면에서는 중앙의 높게 올린 홀 부분, 규칙적으로 배열된 세로로 긴 창문, 세로로 2, 3개 층에 걸쳐 형성된 긴 창문들이 이 건물의 중심성 및 상승의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장식이 배제된 모던한 입면이었다. 특히 중앙홀 부분을 수직으로 높게 올려 캠퍼스의 중심성 및 랜드마크적인 성격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는 1호관이 주도로에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기 때문에 학교의 상징 및 중심으로서 역할을 의도한 것이다.(1층 평면도는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 제1호관 / 1계평면도, (무제) /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 제1호관 / 1계평면도로 추정)]을 참조, 2층 평면도는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 3 / 제일호관 이계평면] 참조)
도판7. 경성제국대학이공학부신축공사설계도 / 삼호관지부, 1940-43
공학관 중에서 유일하게 일자형 배치인 3호관의 도면이다. 공학관 중에서 유일하게 일자형 배치인 3호관은 부분적으로 2층의 높이를 갖는 1층 건물로 1,2,4호관과 다르게 박공지붕이었다. 네 면에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십자형 중복도를 통해 각 실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주로 공작실 및 실험실, 연구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쪽부분에 대규모의 보일러실이 있었고 그와 연접하여 원형의 굴뚝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 보일러실을 통해 이공학부의 건물들의 난방이 이뤄졌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건물의 형태와 다르게 유일하게 일자형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서쪽 단부에는 화장실, 욕실, 숙직실과 같은 관리 및 공용시설을 두었다. 건물은 2층 층고의 보일러실과 나머지 1층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층에는 정사각형의 창문을 병렬적으로 배열한 형식이었으나, 2층 건물에는 2개 층고의 수직창으로 구성하여 1층 건물과 구분된 형식을 가졌다.
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연혁
1938년 9월 캠퍼스 부지 선정 작업에 착수
1939년 광산전문학교가 이미 자리를 잡았음. 본관은 대륙관.
1940년 1월 공덕리 일대 16만평의 부지 선정(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총 4개동 건물 신축.
1호관 물리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2호관 화학과, 토목공학과, 광산야금과.
2호관(?)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반도호텔에 이어 제3위의 큰 건물로 불릴 정도로 큰 사업이었음.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서 모든 물자가 부족해져갔던 시기를 고려할 때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었던 사업.
정준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제국 대학의 한 페이지, 공릉 캠퍼스, 서울과기대신문 2020.11.16., 2020.12.07 참조
https://times.seoultech.ac.kr/reports/?category=94&idx=20358
https://times.seoultech.ac.kr/reports/?idx=20376&category=94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연혁
1910년 4월 15일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 개교
1931년 2월 22일 ‘경성공립직업학교’ 개교. 아현동 캠퍼스로 이전(전 경기도공립사범학교 부지)
1945년 10월 4일 경기공업중학교(1945~1951)'로 개칭
1953년 5월 1일 경기공업고등학교로 개명
1963년 3월 7일 5년제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
1974년 3월 경기공업전문학교 교명 변경 / 2년제 '경기공업전문학교로' 학제개편
1979년 3월 1일 경기공업전문대학 '경기공업전문대학'으로 학제개편
1980년 1월 00일 공릉동 캠퍼스로 이전(전 서울공대 공과대학 부지)
1981년 10월 1일 경기공업전문대학을 개방대학실험대학으로 문교부에서 지정
1982년 2월 18일 ‘경기공업개방대학’ 개교
※1982년 11월 27일 (경기공업동창회 총회) 본 대학 총동문회 개최(서울과학기술대학교 총동문회 회칙 인준)
1982년 12월 31일 국립학교 설치령 개정(경기공업전문대학 폐교)
1983년 3월 1일 전문대학과정 2년과 학사과정 2년의 편제로 설치된 경기공업개방대학으로 일원화
1993년 3월 1일 국립학교 설치령 개정에 따라 서울산업대학교로 교명 변경.(대통령령 제13,895호. 93.2.24)
2010년 9월 1일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 변경 현판식
2010년 4월 15일 4년제 국립대학으로서는 최초로 개교 100주년을 맞이함
2012년 3월 1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 전환 개교
2020년 11월 28일 서울특별시가 효제초등학교 부지(서울 종로구 대학로 12) 화단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창설지 표석 설치
1984.2.18 제10회 경기공업전문대학졸업생일동 '경기인의 맥' 비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역사기록관 홈페이지 연표 참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110년사
>1910-1980 초창기, 공업교육 중심의 역사
1910-1931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 개교와 어의동 캠퍼스 시기
1931-1944 경기공립직업학교 (아현동)
1944-1945 경기공립공업학교
1953-1963 경기공업고등학교
1963-1974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
1974-1979 경기공업전문학교
1979년 12월 공릉동 캠퍼스(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로 이전
※1977년 추정 공릉동 캠퍼스 이전 거론, 서울대학교 캠퍼스 종합화 계획과 이전 확정 / 1979년 말부터 공릉동 캠퍼스로의 이전 강행, 1980년 초 이전 완료
>1980-2010 캠퍼스의 이전과 국립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발전
1980-1988.2 공릉동 캠퍼스 이전과 개방대학 체제
1982.3-1988.2 경기공업개방대학
1988.3-1999.2 '경기'에서 서울로 교명 변경
※1991년 1월 정문 공사 / 1992년 '중계2지구-원자력병원 간 도로(산업도로)' 개설 공사, 교내 관통 도로 무산, 터널로 변경하고 도로 곡률 조정. 2007년 11월 26일 서울테크노파크와 연계한 '창의문'을 개통
2010년 4월 15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
>2010-2020 현재 수도권 유일의 국립종합 일반대학으로의 도약
2010년 9월 1일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 변경
2012년 3월 일반대학교로 다시 개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110년사(역사편과 화보편), 2020.4.15 참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1호관(현 다산관) 앞 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趾(발 지, 자취(어떤 것이 남긴 표시나 자리))
이곳은 1941년 4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창설된 자리이다.
물리, 화학, 기계공학, 전기공학, 응용화학, 토목공학, 및 광산야금의 7개 학과를 두었으며
광복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발전하였고,
1979년 관악으로 이전한후
현재 서울 산업대학 교지로 활용하고 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동창회
1997년 6월 설립
>관련 링크
민족의 대학, 국립서울대가 설립되기까지, 2019.10.23.
https://www.snu.ac.kr/about/history/history_record?md=v&bbsidx=126614
개교 원년 바로 찾아 서울대 역사 다시 쓴다!, 서울대학교총동창회 소식지(374호 2009년 5월)
관련 링크
추억 속의 캠퍼스 : 공과대학 1946-1975, 서울대학교 기록관 홈페이지
https://archives.snu.ac.kr/DAS/H/H3/3/H3_3_02_P01.do?colidx=346&colnumber=COL-2017-0002
◀공릉동 공과대학 캠퍼스 전경 (1955)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 창학관, 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1955년 4월 14일 고도 200피트에서 촬영. 출처 전자사료관 NARA
관련정보 링크
일제강점기 우리대학의 발자취, 서울과기대신문, 2022.10.17
https://times.seoultech.ac.kr/reports/?idx=21036&category=82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본관과 교사 (서울大學校 舊 工科大學 本館과 校舍)
분 류 등록문화유산 / 기타 / 교육시설
수량/면적 본관 1동 연면적 10,193㎡, 전기전자관 1동 연면적 8,853㎡
지정(등록)일 2002.05.31
소 재 지 서울 노원구 공릉로 232 (공릉동)
시 대 1942
소유자(소유단체)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관리자(관리단체) 서울특별시 노원구청
'ㅁ'자형의 전형적인 교육시설의 특징을 갖고 있는 한국 근대공업교육의 최고학부(경성제국대학)건물로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교사를 현 위치에 옮기면서 본관으로 이용하였다. 광복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관악캠퍼스 이전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안내판 설명
'공릉동 구 서울 공과대학'
등록번호 : 등록문화재 제12호 / 시대 : 1942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2동 172번지
이 건물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제1호관으로 1942년에 건립되어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설립은 공덕리 일대의 약 52만 제곱 미터의 대지에서 1939년부터 시작되어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3호관과 제4호관은 1942년에 완공되었고, 제2호관은 골격만 세워진 채 공사가 중단되어 1945년까지 완공되지 못하였다.
이 건물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본관인 만큼 중심성과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중앙 8층 높이의 타워, 권위적인 현관, 중정을 에워싼 ㅁ자형 배치 등에 드러나 있다.
건물 외관은 베이지색 타일로 마감했으며, 1층 로비는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내부는 부분에 따라서 편복도이거나 중복도로 구성하였고, 현관의 구성도 빼어난 편이다.
>관련 링크
개교 114주년 기념, 한 눈에 살펴보는 '다산관' 변천사, 2024.4.11
https://www.seoultech.ac.kr/service/info/news/?do=commonview&bnum=3596&bidx=545324
조선총독부 『 조선제학교연감 』 에 수록된 경성광산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시기(?)의 공릉동 캠퍼스
1980년대 중반, 서울과기대 캠퍼스 및 노원구 전경
1980년
1983년 경기공업개방대학캠퍼스(1983년 어의축전 팸플랫에 수록된 캠퍼스 지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110년사, pp.72-73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도서관 별관(구 서울대학교 공학도서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공과 계통과 경성공업전문학교 및 경성광산전문학교를 합하여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발족됨과 아울러 3개 대학 장서 약 3만권을 가지고 이공학부 도서관 자리에 공과대학 도서관을 이루었다. 1965년 11월 20일에 약 1천평에 달하는 독립건물을 신축하고 556석 규모의 열람실 10만권 소장의 4층 서고를 갖추고 개관하였으며, 분관제의 시행으로 서울대학교 공학도서관으로 개칭되었다. 초창기의 장서는 3만권에 달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분실되어 환도 후에는 약 8천권밖에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차츰 장서가 늘어 1975년 4월 현재 30,442권의 장서를 구비하여 초창기 수준의 장서를 확보하였고, 학술잡지도 153종을 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 50년사 1946~1996, 1996.10.1, p.114)
김희춘(1915.12.27-1993.7.24) 설계
1956 서울대 농과대학(수원)교사 및 강당
1959 서울대 공과대학 기숙사, 서울대 사범대학 과학관 및 도서관, 서울대 의과대학 여자기숙사
1963 서울공대 도서관(현 서울산업대학)
1971 서울대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
>김희춘 약력
1937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공학과
1937-41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 기수
1941-46 동경건물회사 경성지점 건축부 기사
1946-47 미군정청 건축서 설계과장
1947-52 대륙공영사 기술부장
1952-59 서울대 건축공학과 교수
1956-57 미국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건축의장 연구 및 미국 유럽 건축시찰
1957 김희춘건축연구소
1964-65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1965 건축사 면허
1974-76 대한건축학회 회장
1975-90 중앙설계심사위원
1976 건축시공기술사 면허
1981 서울대 명예교수
1973년 개관한 부산 시민 회관 전경, 이광노 설계
사진 2000년대, 저작권 부산시청
브라질 대통령 관저(Palácio da Alvorada)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가 1956-57년에 설계, 브라질리아에서 최초로 건설되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정면에 많은 유리창을 활용한 건축양식은 추후 대통령 청사(Palácio do Planalto)와 연방최고 법원에도 똑같이 활용되었다.
사진 Tripadvisor
경기기계공업고등학교 연혁
1957.2.15 청량상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
1961.3.17 청량종합고등학교로 개편
1969.12.20 청량공업고등학교로 개교(동대문구 청량리동 3-1)
1977.12.3 청량기계공업 고등학교로 개편
1981.3.1 경기기계공업 고등학교로 개교
1981.5.7 경기기계공업 고등학교 이전 및 준공식(현재위치, 노원고 하계동 78)
※1982.3 청량고등학교 설립 인가, 개교(4월) (동대문구 청량리동 7)
경기기계공업고등학교 홈페이지(https://ggmt.sen.hs.kr/15525/subMenu.do), 청량고등학교 홈페이지(https://chungryang.sen.hs.kr/7648/subMenu.do)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