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낭만주의 : 피아노 협주곡 20번
인문학부
20201037 남수혁
1악장 : Allegro con brio
달착지근한 커피와 탑승권을 왼손에 거머쥔 뒤 대합실에 앉아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오래된 통화연결음이 귀를 지겹게 할 시점이었다. “여보시오?!” 할머니였다. “예 할머니, 저에요. 진혁이.” “아이고 우리 진혁이가 웬일로 전화를 다하노.” “저도 철 좀 들었는데 가끔씩 전화도 드리고 해야죠, 하하.” 다행히 할머니께서 반가워하셨다. 난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하나마나 한 말, 그러니까 또 식상한 질문을 꺼내버렸다. “잘 지내셨어요?” “오야, 잘 지내지 마커... 아이고이 내 똥깐지 목소리 들응게 억수로 반겁네.” “아프신 데는 없으시고요?” “니 고모가 마커 내랑 사이, 머 심심치도 않고 아픈데도 읎네.” 나는 또 나의 음성이 진심어린 음성은 아니라는 걸 확인해버렸는지, 그냥 본론이나 바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지금 울진 내려가요.” “어이?” 잘 안 들리시는 모양이었다. 난 휴대폰의 밑 부분을 입에 더 가까이 대고 손을 가린 채 더 크게 말했다. “저 지금 내려가요. 울진.”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난 몸을 틀어 조금 더 으슥한 곳으로 움직였다. “내려온다꼬? 와 내려오노?” “하하, 그냥 여행가는 셈 치고 내려가는 거예요. 쉬려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달력을 찾아보시는 것 같았다. “글세 노는 날이 아인데... 애미애비랑 같이 오나?!” 생각해보니 할머니로썬 꽤 당황스러우실 것이었다. 명절 이외엔 한 번도 혼자서 내려간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뇨, 혼자가요. 가서 만날 사람도 있고, 바닷가도 그냥 구경하고 싶고 해서요.” “참말로... 머할라꼬 내려오노, 허허. 알읐네, 조심해서 온내이~” 할머니는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으셨다.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H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버스에 타느라 정신이 없기도 하였고, 고작 한 일이란 아직 고속버스까지 탄 것밖에 없는데 그 적은 발자취라도 동네방네 알리고 싶은 목적으로 찍은 사진을 SNS에 게시하느라 정신이 어딘가로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신은 돌아왔지만 나는 주변의 인간들이 또 어딜 돌아다니고 무얼 하고 있는지에 대해 괜한 궁금증에 사로잡혀 SNS를 뒤지고 있었다. 친한 친구가 다른 이들과 어딘가로 놀러 가버린 것에 대한 쓸데없는 질투심, 그리고 왜 나를 찾지 않는지에 대한 의미 없는 분노와 패배감이 꽤 아팠다. 회한이 밀려왔다. 정신이 돌아오긴, 애초부터 난 여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언젠가는 꼭 필요한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종국엔 몰가치한 것이 되었다. 다 필요 없다. 인간은 철저히 혼자다. 이런 생각들을 또 한 점 씹어 먹으며 나는 나에 대한 투자를 해야겠다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되뇌었다. 지금 떠나는 여행도 나에 대한 투자이리라.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책을 폈다. 내 의지가 무색해 질만큼, 버스의 진동과 소음은 나를 순순히 독서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책을 덮었다. 우습게도 난 내심 즐거워하며 무선 이어폰을 야무지게 꼽았고 음악을 골랐다. 베토벤, 아니다. 이런 날에 고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또 싫었다. 바깥에는 아름다운 정경이 가득하였는데 나는 무슨 심보였는지 그냥 풍경과 조금 대비되는 음악을 듣고 싶었다. 옳거니, 쇼팽. 쇼팽이다. 매일 밤 집으로 가던 길에 심연에 잠든 아스팔트를 바라보고 걸으며 들었던 음악이었는데, 지금 들어보면 또 어떤 느낌일지에 대해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Chopin : Piano Concerto No.2 in F minor] 읽기도 어려운 제목이 화면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버스의 속도는 어느새 아기걸음 수준이 되었고 방향을 이리저리 트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울진에 도착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터미널을 빠져나와 주변에 택시를 탈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택시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이 거리에 쭉 늘어선 단층 건물들은 저마다 독특하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쓴 듯 보이는 남루한 간판들을 달고 있었다.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편의점의 모양과 간판은 다를 바가 없었고 그래서 이곳에 있는 편의점은 다소 신기하게 보였다. 사막에 놓인 오아시스처럼, 유난히 눈에 띈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들어가 한 바퀴를 휭 돌고는, 고작 담배 한 갑을 사들고 나왔다. 편의점 옆 그늘진 곳에서 허공을 보고 담배연기를 뻐끔뻐끔 되새김질 하고 있을 때, 난 다급해졌다. 편의점 앞에 택시 한 대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담배는 반도 타들어가지 않았기에 나는 한쪽 다리를 떨며 망설이고 있었다. 혹여나 뒤도 안돌아보고 질주해버릴까 불안했지만, 그 택시는 시동도 걸리지 않은 차였고 무엇보다 택시기사 옷차림을 하고 있는 한 분이 건너편에서 나처럼 담배 한 대를 태우고 계셨기에 나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마지막 담뱃재를 털어내고, 난 택시 주변을 괜히 어슬렁거렸다. [경북20거7638], 역시나 낡은 번호판에는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택시기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너무 빤히 쳐다보면 내가 이상하게 보일까봐, 허공을 연신 바라보고 있었고 잠시 그런 나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혼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땀 한 방울이 구레나룻을 타고 흘렀다. 여름이었다.
2악장 : Romance
“택시 타시렵니까?” 그 사람은 서너걸음이 채 안 되는 도로를 건너오며 꽤 밝은 어투로 말했다. 역시, 기사가 맞았다. “아, 예. 읍내 밖으로 나가려구요.” “그러시군요. 타시죠. 근데, 서울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현지 기사가 서울말을 다루는 것을 다소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일종의 반가움과 동질감이 있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 자리에서 기사님도 서울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것도 내겐 감당키 어려운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었다. “하하, 네. 서울서 버스타고 왔어요.” “멀리서도 오셨네요.” 차량은 낡은 번호판을 달고 있었으나 내부는 꽤 시원했고 새 차 못지않은 상쾌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읍내의 거리엔 햇빛이 빽빽이 찼다. 녹음이 진 인도 한 편에는 할머니 두 분께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초록불이 번쩍이는 횡단보도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긴 대로에는 남루한 승용차와 용달차량 한 두 대만이 골골대며 오가고 있을 뿐, 별다른 볼거리는 없었다. “근데, 울진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동안의 정적이 어색했는지, 기사가 먼저 말을 꺼냈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냥 사람도 만날 겸, 여행도 할 겸 내려왔어요. 좀 쉬려고요.” “그럼 꼭 놀러 오신 거군요.” “네, 여행이죠. 여행.” “여행은 혼자서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렇죠. 혼자 있으면 좋잖아요. 편하고.” 난 마디마다 작위적인 웃음을 꼭 넣어 말했다. “그럼 지금은 누굴 뵈러 가시는 거겠네요.” 난 살짝 과장을 섞어 놀란 듯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가는 곳에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왕복 2차선에 집들만 늘어선 곳인데요, 허허.”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은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었고, 난 할머니께 다분히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작년 추석 즈음, 난 할머니께 편지를 보냈다. [수험생 신분이라 올해 추석에는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수능이 끝나는 대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히 지내주세요] 라는 골조의 편지였다. 해가 지나고도 한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간 스스로와 타자 사이의 지겨운 상호작용, 그리고 발전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해 끝없이 분노하면서도 게으름과 유희를 견지하느라 한바탕 고요의 난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를 쓸 때의 마음가짐이 생각나버린 바람에, 나는 시골길을 달리던 그 택시에서 힘차게 굴러 떨어지고 싶었다. 바로 몇 분 후면 펼쳐질 광경들, 그리고 내가 느낄 모든 감정들을 계산해보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아마 그렇지 않으시리라 생각했다. 아마 나를 보면 마냥 반가워하실 것 같았다. 차라리 크게 화를 내시고 나를 문책하시는 게 내 마음으로썬 더 편할 것 같았다. 차창 바깥으로 정겹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친숙한 정경이 필름 감기듯 촤르르륵 지나가고 있을 때, 난 눈을 질끈 감았다. 할머니, 곧 도착합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금새 도착할 줄은 몰랐다. 아니다. 내가 시간을 느리게 셈하고 있었겠다. 나는 기사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기사님, 제가 잠시 저어 집에 들렀다가 다시 어디에 바로 가야하는데요... 어떻게 가죠?” “아, 그러십니까. 흠, 여기 버스는 배차 간격이 많이 긴데... 방금 지나갔을 테니 한두 시간은 족히 기다리셔야 버스가 올 겁니다.” 택시 기사는 내가 잠시 당황해하며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얼마나 계시렵니까, 좀 기다려 드리죠.” 사실 바라고는 있었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할지는 몰랐다. 서울에선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최대한 금방 나오겠습니다. 돈은 두 배로 드릴게요.” “하하, 두 배까진 안 주셔도 됩니다. 저도 사람 태우는 맛에 택시 모는데요. 얼른 다녀오시죠.” 길은 쭈욱 뻗어 있었고 할머니 댁은 저편에 놓여 있었고 뒤에는 푸르른 산과 드넓은 하늘이 배치되어 있었다. 구름이 햇빛을 적당히 가려서 퍽, 꽤... 낭만적. 낭만적이었다. 난 대문 앞에 서서 잠시 멈추었다가 발을 들였다. 들어가며 인기척을 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머니께서 느릿느릿 안방에서 나오셨다. 머리는 정말이지 흑발 한 올 없는 백발이셨고,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에 나를 초점 맞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셨다. 서글펐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정말 건강하게 보이셨는데, 세월이 그토록 길었던 것인가. 할머니께서도 더 이상 예전의 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힘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왔나.” 활짝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도 웃었다. 사들고 온 과일과 음료들을 내려놓고 마룻바닥에 앉아 할머니와 한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사이좋게 잘 지내신다고, 나도 물론 대학에 붙고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그리고 잠시 여행을 온 것이라고. 할머니는 몇몇 마디엔 웃으시며 이야기하다가 몇몇 마디엔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하이고... 난 우리... 진혁이가 일케 커가... 혼자서도 찾아 오이고... 할 줄은 몰세...” 할머니는 갑자기 나의 양 손을 번쩍 잡으시더니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배고프제....!” 배고프냐는 한 마디를 하시고, 엎드려서 그토록 서럽게 우셨다. 난 그 광경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려 울었다. 정작 음식도 많이 안 드실 텐데, 뭐가 아쉬우셔서 점심까지 든든히 먹고 온 나한테 배고프냐고 물으시고는 이토록 서럽게 우실까. 아니다. 아마 그냥, 내가 정말 보고 싶으셨던 것일 테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불쑥 튀어나온지라 눈이 충혈 되진 않았다. 난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었다. 할머니도 눈물을 그치시고 다시 호탕하게 웃으셨다. “고모는 어디 가셨어요?” “뒷산에... 칡 캐러 간 겔세.” 고모가 계셨기 때문에 난 할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할머니, 저 이제 가야해요.” “으이씨, 온지 을마나 댔다고 벌써 가노!” “하하, 죄송해요.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요.” “으휴... 그람 가야제... 잠은 여기서 자나?” “아니요, 오늘 저녁에 올라갈 거예요.” 할머니는 다분히 서운해 하셨고,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께 큰 절을 올렸다. “할머니 저 갈게요. 그간 건강히 계셔요. 추석 때 다시 올라올 거니깐 별로 안 기다리셔도 돼.” “오야, 또 오게잉~!” 나는 억지로 나오시려는 할머니를 만류하고 대문 밖을 나섰다.
택시기사가 트렁크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도 한 대를 피우려다가, 정말 중요한 일을 까먹었던 참에 작은 갈등이 있었다. 기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괜히 해야 할 것만 같은 일을 하지 않고 돌아섰을 때 오래 남을 찝찝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기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난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뒷걸음질 쳤다. 할머니 댁 뒤편 공터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를 찾았다. 무성히 자라 있던 고사리들을 거칠게 헤치며 걸었는지라, 바지엔 풀떼기들이 적잖이 묻어 있었다. 난 내가 피우려다 만 그 담배를, 딱 골라 집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묘 앞의 연석에 돌멩이를 하나 받쳐 고정시키고 한두 걸음 떨어져 절을 올렸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난 그 담배연기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추석 때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나는 기꺼이 되돌아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마당 쪽으로 돌아와 창문을 통해 안방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고 TV에는 어떤 교양프로그램의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모가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죠.” “아닙니다. 좀 오랜만에 읍내를 벗어난 것이라, 꽤 괜찮네요. 저도 꼭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하하, 가시죠.” 기사는 자꾸 나를 송구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십니까?” “죽변항으로 가주세요.” “음, 이번엔 진짜 여행을 하러 가시는 것이겠군요.” 나는 흐뭇해하며 말했다. “네. 바다 좀 봐야 되겠어요. 그래도 울진까지 왔는데.” 내가 사랑하는 이 시골에는 작은 도랑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 누군가의 땅에는 언젠가 수확될 상품작물이 푸르싱싱하게 줄을 지어 있었고 굽이굽이 뻗어 나간 시골길 때문에 따스한 여름의 햇살이 차 내부를 비췄다 비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올 때 제대로 느끼지 못한 그 시골의 흥취를, 내가 선호하는 음악들과 함께 잠시나마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기사님, 잠시 음악을 들어도 될까요?” “같이 들으면 참 좋을 텐데요. 어떤 음악을 들으시렵니까?” “아 죄송합니다만, 저는 클래식을 들어요.” “오, 클래식을 사랑하십니까?” “예, 사랑하죠. 많이요. 하하.” “저도 클래식이라면 미치는 작자입니다. 마침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으니, 저도 좀 들려주시죠.” 기쁘고 팔짝 뛸 노릇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나는 일상에서라면 찾아보기 힘든,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잖은 감동을 선사하고 싶었기에 선곡을 신중히 했다. 시골 한 가운데를 조용히 질주하던 그 차 안에는, 베토벤 교향곡 3번의 1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기사도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이게 진짜 낭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택시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도로에서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거진 도착한 모양이다. “죽변항입니다. 바다가 참 예쁘죠.” 죽변항은 올곧게 선 새빨간 등대 하나를 벗 삼아 푸른 바다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평선 저편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걸쳐 있었다. 기사는 잠시 차를 세워 주었다. 모래사장이 내다보이는 도로 한 편의 연석 위에는 긴 장대 사이 새끼줄에 걸려 나풀거리는 오징어들이 있었는데, 햇볕을 잘 맞는 쪽은 거의 익은 색깔을 띠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아직 물기가 묻어 연한 것이 꽤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바다냄새는 나를 더욱 해안선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저 멀리에는 두 아이를 둔 한 가족이 낡은 파라솔에 의지하여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해맑게 물장구치는 그 아이들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는 부모. 정말 영화가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바다가 참 좋지요.” “네, 바다는 언제 봐도 정말 최고인 것 같아요.” “이렇게 바다가 예뻐 보여도, 밤이 되면 또 다릅니다.” “네? 그럼... 밤이 되면 바다는 볼 품 없어지나요?” 바다에 대해 맹목적인 찬양, 그니까 나는 바다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일은 연중무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볼 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주 무서워집니다. 밤이 되면, 바다는 하늘과 함께 암흑에 잠겨버립니다. 두 경계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죠. 새까만 공백이 코앞에 펼쳐져 있어서, 파도 소리도 정말 섬뜩해집니다. 그 앞에 서 있자니 바다가 저를 확 집어삼킬 것 같더군요. 저도 어린 시절에 그걸 견뎌보겠다고 억지로 한참을 서 있었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아이마냥 울어버린 적도 있었답니다. 하하” “아... 그 정도인가요?” 난 해가 지면 다시 이 해변으로 돌아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새 죽변시장을 지나 읍내 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리면 될 것 같아요.” “아, 도착이군요.” 기사는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기사는 대뜸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정이 든 모양입니다.” 나는 머쓱해하며 화답했다. “하하, 네. 저도 막상 발걸음을 떼자니 참... 기분이 묘하네요.” 기사는 두 손으로 내 손을 더 힘차게 흔드는 듯 했다. “서울서... 청년으로 사는 게 참 힘들지요? 건강하게만 살아요. 열심히 살 필요 없습니다.” “하하, 기사님도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기사는 차에 시동을 걸고 조수석 창문을 통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건강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리고 늘 행복하시고!” 그 택시는 시골에서라면 찾아보기 힘들 법한 직선주로를 쭈욱 달리더니 어느새 굽어진 도로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난 괜스레 숙연해졌다.
비록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대기를 타고 잔잔하게 넘어오는 파도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구역이었다. 그리고 죽변은 읍내라기보단 차라리 조촐한 시가지였다. 브랜드 대형 마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갖추고 있을 법한 중형 마트도 있었고, 노래방이나 PC방처럼 최소한 불행을 잠시 잊게 해줄 수 있는 생명유지시설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 H가 살고 있는 건물이 있었고 나는 그 앞에 서서 괜스레 설레고 있었다. 7층으로 올랐다. 701호. 그래. 분명 H는 701호라고 하였고 내 눈 앞에는 [701]이 새겨진 꽤 모던한 문양의 현관문이 있었다. 안에서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나는 오직 그 감미로운 음악에 매혹되었다. H가 원래 피아노를 쳤었나하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H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비창]은 확실히 또 다른 느낌이었고 나는 그 혼신의 연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 앞의 계단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여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음이 들리자,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H의 목소리다. 아닌가, H에게 자매가 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럼 그냥 전자음으로 들리기에 어색한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여서 느끼는 어색함인가를 떠올리며 어떤 말을 꺼낼지 당황해하고 있을 때 안에서 현관문 쪽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레 문이 활짝 열리자 나는 지레 놀란 채로 꼼짝없이 서 있었다. “뭐야 미친, 정진혁이잖아?!” H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를 꼭 안아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안아주었지만 기꺼웠다. “금방 온다고 얘기는 해야지!” “다른 곳도 좀 돌고 오느라, 정신이 없었네 미안. 하하” 나는 그 순간부터, 이번 여행은 다분히 성공적이었던 여행으로 갈무리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3악장 : Con dolore
달착지근한 음료 한 모금을 머금고 다소 높은 곳에서 죽변의 전경도 바라보고 피아노의 건반을 맥없이 한두번 눌러보기도 하고 집안을 정처 없이 살금살금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H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잘 지냈냐구.” “나야 잘 지냈지. 알다시피, 서울에선 뭐 굶어 죽을 일은 없잖아? 단지 불행할 뿐이지 뭐... 학교를 못가니 참, 사람도 못 만나고. 새사람을 못 사귀었으니 어디 놀러가더라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 하하.” 난 자조적인 어투로 말했다. “글치... 서울이 뭐 못 살 곳인가, 사람이 그렇게 많이 사는데. 여긴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래도 좀 자유로운 편이긴 한 거 같아. 마스크도 자주 쓸 일이 없고. 근데 너처럼, 좀 외롭고 심심하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 하하” H와 이런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깨나 겸연쩍었다. 해는 많이 기울었고 하늘은 점점 황혼을 품고 있었다. 나는 하루가 참 짧다는 것에 충분히 원망하고 있었고, H와 죽변 바닷가에서의 낭만은 진하게 만끽하고 싶었기에 H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종용했다. 모래사장은 어느새 밝은 아이보리빛깔을 감추어버렸고 바다는 적당히 어둑어둑했으며 보랏빛 공백을 통해 다소 구수한 내음을 불어내고 있었다. 발걸음은 푸석푸석한 모래사장 덕분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모래사장 뒤편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것이 때에 맞춰 아주 감사하게도 도로의 소음을 완전히 차단해주고 있었다. H가 먼저 벤치에 앉았고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잠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가 착석했다. “늦게 와서 미안해. 역시 울진을 당일치기하기엔 좀 무리인가 봐.” “아니야,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좋은데 뭐.” 이렇게 낭만적인 흥취 앞에서 마냥 시시콜콜한 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을 터. 나는 드디어, H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자 H에게 가장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자 H와 나눌 수 있는 가장 가치 있을 법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나는 이 한마디에 대해 사실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H는 내가 아니었다면 죽어버렸을 것이다.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H는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로 했고 지금 이 터전에서 고졸이라는 간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기에 당장이라도 돈벌이가 되는 일터들을 탐닉하고 있었다. 그 때의 H는 일터를 분명 ‘탐닉’하고 있었다. 남들은 부모의 손을 빌려, 혹은 거대한 빚을 담대하게 맞으면서까지 학습의 길을 걸으려 했고 나 또한 그 파도에 합류하게 되었으나 H는 그 족쇄를 당당히 풀어헤치려 했다. 성인이 되면 오직 나의 손으로 나를 먹여 살리겠다는 그 의지는, 내가 감히 넘어볼 수도 없는 숭고한 것이었다. 난 진심을 다해 H를 응원하고 있었고, 그 삶을 경외감에 받쳐 사모하고 있었다. H는 실습생으로 몇 번 활동하던 어느 콜센터에서 인턴으로 취직하게 되었고, 노동을 통해 계속 자신을 부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함께 밥도 먹고 때론 술도 마시며 청춘의 아픔을 공유했던 바로 옆자리의 친구가 자살해버리고 H는 그 충격을 견뎌내지 못해 결국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도로 손목을 그어 응급실에 여러 번 실려 간 적들은 차라리 양호하다. 회사의 옥상에서 투신하겠다고 시위하며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날도 있었고, 어느 날 밤 회사에 잠입하여 전산기기들을 모조리 부숴버리려 했기에 배상금을 갚느라 그간의 노동을 허사로 만들어버렸던 날도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버렸다며 나에게 전화해 세상이 떠나가라 통곡한 날에, 아파트의 옥상에서 자신의 슬픔을 끊어버리려는 그 현장에서 내가 간신히 팔목을 붙잡아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런 H에게 든든한 버팀목 혹은 잠시 기댈 곳이라도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H의 사연과 그 때 H의 음성일 떠올리자면 버팀목은커녕 나의 가슴이 먼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한 나의 무력함과 슬픔 때문에 나는 오히려 H로부터 회피하려고 했고, H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내 자신을 억지로 부정하려 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H는 H답게 자기 자신의 초심을 잘 붙잡았다. 그리고 정신과 치료를 꽤 짧은 기간에 마친 그 날, 바로 이곳의 모래사장에서 서로 기대어 한참을 울었었다. 난 그 순간에 대한 향수로써 바로 이곳 해변가에 앉아 있기도 한 것이었다.
“피아노를 치려고.” “피아노? 음악하려고?” “응. 피아니스트가 하고 싶어.” H는 결의에 찬 눈빛과 꾹꾹 눌러 말한 어투로, 바다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이제 정말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게 됐어.” 난 그 말이 너무 반가웠고 오히려 감사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구나. 멋지다.” “아니, 뭐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한 건 아니야. 어느 날 안 친지 오래된 피아노를 붙잡고 한 번 연주해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 그 이후로도 피아노를 계속 했지. 연습도 하면서 물론 짜증나는 순간들도 많았고 다 집어 치우고 싶을 때도 종종 있었어. 근데 생각해보니까, 난 건반을 누를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더라.” “아... 좋아하는 일이구나.” “사랑하지. 그리고 난 내가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생각이야. 하하.” 나는 더 이상 H에게 비관이 아니라 낙관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을 거라는, 바람이 섞인 예상을 했다. H에게 더 이상의 걱정과 고난과 슬픔과 불행과 우울과 통증 따위가 없을 거라는 건 정말 찬란하고도 어떤 의미론 참 가슴 시린 일이었다. 나도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며 이야기했다. “다행이네...” 정말 툭 건들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기에, 난 H의 두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니 진짜 좋다......” H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투영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에게 기대어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나는 H를 안아주었다. 눈물이 흘렀다. 안도감에 섞인 눈물이란 정말이지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쓰디쓴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다는 이제 저편 노을의 빛깔을 점점 놓치고 있었다. 푸르던 산은 암흑에 거의 잠식되어 거뭇거뭇했고 하늘도 이젠 검붉은 빛깔을 내어놓고 있었다. 버스표의 출발시간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H와 헤어져야 한다.
“나 이제 가야 해.” “나쁜 새끼.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벌써 가냐?” H는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은 눈으로 나를 웃으며 노려보았다. 나는 떨었다. 불현 듯 생각이 들었다. 나는 H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서울서 연락할게. 방학이라 시간도 널널한데 뭐. 이제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구.” “진짜 갈거냐고!” H는 크게 소리쳤다. “하루만 자고 가. 내일 일정 없잖아. 버스비 내줄게. 방도 깨끗했잖아. 너가 좋아하는 곡도 들려줄게. 자고 가는 게 싫으면 집에서 맥주라도 한 잔 하자. 할 얘기가 많아. 제발...” H는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마음이 슬슬 얼어붙고 있었고, 나는 불길한 예감 따위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어보였고 나는 그것이 또 온통 비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H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또 다시 H와 내가 옛날처럼 되어버릴까 그것이 무서웠다. 그것이 올바른 생각과 행동은 아니었지만, 난 차라리 H가 이제는 낙관에 담겨져 있다고 성급히 정의하고 떠나버리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다. 나는 이기적이었다. “미안해. 정말... 이만 가볼게. 미안해.” 나는 H의 손을 힘들게 뿌리쳤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파도소리는 H가 흐느끼는 음성을 가려주지 않았다. 호흡은 어려웠고 코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이미 팔목의 소매는 젖어 있었고 그래서 코는 잔뜩 헐어 있었고 그럼에도 나는 해변가를 계속 걷고 있었다. H가 훌쩍이며 뛰어와 나를 붙잡고 돌려 세웠다. H는 나에게 한동안 키스하더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그윽히 바라보다가 다시 저편으로 뛰어갔다. 난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H가 원자만큼 작아지고도 사라진 지 한참이 되어도 그 방향을 바라보며 허수아비가 되었다.
하늘은 온통 암흑에 잠겼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해변가를 걸었다. 고개를 틀어 수평선을 보았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다는 온데간데없었고 드넓은 암흑만이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존재하고 있었다. 겁에 질려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변 시가지의 불빛은 너무 멀리 있었고, 나는 그 먼 거리에서 홀로 나앉았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정말이지 금방 바다에 잡혀 먹힐 것 같았고 나는 어린아이마냥 헐레벌떡 바다를 등진 채 도로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차는 한 두 대씩 가끔 지나갔고 도로를 건너봤자 그 끝에는 산과 절벽이 있었다. 난 혹시나 지나갈지 모르는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죽느니 그냥 바다를 걷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수영하기 전 물안경을 고쳐 쓰고 준비운동을 하는 것처럼, 나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이 잘 들리는지 점검한 다음 다시 바닷가를 걸었다. 눈을 감고 걷자니 부딪힐 것도 없건만 당장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고꾸라질 것 같았고, 눈을 뜨고 걷자니 섬뜩한 바다는 여전히 내 옆에 있었던 것이다.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다. 섬뜩함이 사그라들도록 도와주는 음악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섬뜩함과 공포감을 즐기게 해주었다. 나는 그 거대한 바다 앞에서 당당하게, 담배연기를 뿜어대고 춤을 추며 걸었다. 도리어 저 멀리서 누군가 이 미치광이를 본다면 더욱 섬뜩해 하리라. 나는 또 이것이 낭만일 것이라고, 부끄럼 없이 생각했다.
나는 버스표를 찢어버렸다. 물론 버스를 타기에 늦은 감도 있었지만, 어차피 못타는 버스라는 이유로 찢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냥 오늘 울진을 떠나는 것에 대해 거부한 것이었다. 더 이상 바다도, 내일의 일정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다만 H가 두려운 것이었고 할머니가 보고 싶었고 그 택시를 한 번 더 타고 싶었던 것이고 낭만에 대해 진중히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소 엉성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향해 뚤린 큰 창문들이 달려 있는 여인숙에 들어갔다. 보통이라면 나름 예약들을 하고 오는 손님들만 있었는지, 난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가장 뷰가 좋은 방으로 달라며 현금을 내밀었고 때문에 주인은 다소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보였다. 카드키 하나를 달랑 받아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팽개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고개를 돌렸더니 바다가 있었다. 죽변항의 등대는 깨나 먼 곳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 훌쩍이며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낭만을 즐기고 싶었지만, 나는 삶 전체가 늘 낭만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이젠 어린 아이가 아닌 어엿한 성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 소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한 도덕률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낭만이란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고,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사이의 혼돈. 그리고 행복과 유희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착취당하는 이 터전이 정말 미웠다. 이 땅에 드러눕게 된 청춘들이, 곧 죽음을 맞을 늙은이마냥 낭만을 펼치지도 못하고 차라리 거대한 품의 부속이 되는 것에 더 만족을 느끼는 것.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들어왔던 친구들의 설움과 TV 너머로 서글프게 들려오는 청춘들의 비극은 모두 생존을 위한 일종의 구조 신호였던 것이다. 시키는 대로 권하는 대로 기대하는 대로 다 맞춰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죽어가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당장 청춘이 되어 맞는 가장 큰 책무는 또다시 미래에 대한 준비였고 그것이 옛날 못지않은 비인간적 투쟁과 경쟁이라는 것은 인생으로써 깨나 큰 비극이었던 것이다. 낭만을 추구하지 못하는 삶, 그럼에도 비관해버릴 수 없는 삶. 모두가 좌절의 토대 위에서 다시 기립하여 질주하는 그 대열에 참가해야 하는 삶. 그리고 내가 그 광경 속에서 힘없이 되뇌고 있는 것은, 정말 그것이 양지(陽地)에 대한 도약이라면,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면, 차라리 햇볕도 들지 않는 곳에서 가끔은 굶고 가끔은 슬퍼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니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세상의 질책은 이미 들리고 있었고, 그럼에도 나는 그 질책 아래에서 꿋꿋이 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을 끝까지 좋아하겠다고, 눈물겹게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H가 생각나는 바람에 눈물은 끊이지가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겠다는 그 말은, 정말이지 툭 내놓듯 쉽게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또 그걸 자신의 이정표로 삼아 온 것이 참으로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저 편에서, H가 무엇을 하고 있을 지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아노를 치고 있겠지, 싶으면서도 나처럼 울고 있지나 않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울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면, 나도 지금 나의 연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전주를 흥얼거렸다. H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지휘에 맞추어 피아노의 첫 음을 떼어주기만 한다면 좋겠다. 전주가 끝나고, 나는 “Con dolore”를 강조했다. 그래, “슬픔을 가지고”. H는 내 사인에 맞게 연주를 시작했을 것이다. 파도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와 H의 협주는 아마 잘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나는 H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적당히 간이 되어 있는 안주에 맥주를 곁들이고 싶었다. 건물 바깥의 한 구석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해 자그마한 레토르트 곱창과 병맥주 하나를 샀다. 다시 여인숙으로 향하는 도중 건물 앞에서 택시를 타고 있는 두 젊은 연인을 보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인숙에 걸어 들어가며 그 택시에 눈을 떼지 못했다. [경북20거7638], 번호판을 다시금 훑어보려 눈살을 찌푸릴 때, 택시는 출발하였고 해안가를 따라 계속 달렸다. 한참을 서 있었지만 도로에 더 이상 차는 지나다니지 않았다. 다만 수평선에서 동이 트고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