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흔한 지렁이들의 용기 있는 반란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국어국문학전공
20161078 이혜원
얼마 전,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한동안 가지 못했던 영화관에 방문했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촌스럽고 투박한 포스터와 더불어 무슨 내용일까, 의문을 갖게 하는 영화의 제목에 눈길이 갔다. 포스터의 여성 주인공들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오는듯한 모습이었다. 이는 마치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를 연상케 했다. 원래 보고자 했던 영화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녀들의 당당함에 이끌려 이 영화를 선택해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 관람을 마친 후 작은 지렁이들의 꿈틀거림에 내 마음 역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잔잔한 감동으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이 막힌 여성들이 대기업의 엄청난 비밀을 목격하고 이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렸다. 회사는 그녀들과 같이 고졸 출신의 사원들에게 토익반을 제공하고, 토익 600점을 넘기는 사원에게는 대리로의 진급을 해주겠노라 약속한다. 같은 목표를 지닌 동료들은 한 마음 한뜻으로 중심인물의 행보에 힘을 보태며 자신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는 회사를 지켜내기 위한 뜨거운 반란을 일으킨다.
1. 1995년도의 아름다움
영화의 배경은 1995년도이다. 필자는 1998년생으로, 당시를 살아본 적은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며 그때로 들어가는 듯 했다. 스프레이를 잔뜩 써 하늘 높이 올라가있는 헤어스타일은 고정돼있다 못해 딱딱해 보이기까지 한다. 출근하자마자 커피, 프림, 설탕을 탁탁탁, 황금비율을 맞춰 만드는 손놀림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적 학교에서 보았던 배불뚝이 컴퓨터와 디스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라 꽤나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전혀 촌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노란빛이 도는 필터를 사용했다. 이는 과거를 추억하는 듯 어딘가 빛이 바랜 느낌과,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을 만나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위에서 사용된 당시 사무용품들의 고증은 부드러운 필터를 만나 더욱 정감 있는 것으로 연출되었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연출은 관객을 자연스럽게 당시의 현장으로 인도한다. 또한 스타일리시하게 표현된 그녀들의 사복 역시 1995년도의 촌스러움 대신 그때만의 멋스러움으로 나타나 멋진 영상미를 이루었다.
2. 섬세한 전개, 놀라운 반전
영화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기본 플롯에 충실해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가 뻔한 유형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영화들은 다소 어두운 느낌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경우 이러한 영화들은 쉽게 접근하기에 겁이 나기도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대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극을 가볍게 즐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을’들이 ‘갑’에게 억압당하는 그들의 생활이 유쾌하게 그려졌고 그녀들의 복수극이 손에 진땀을 쥐기보다는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또한 촘촘하게 짜여진 극의 서술은 결말로 갈수록 확실한 명분과 자연스러움을 부여한다. 그녀들의 성격과 그들의 애사심, 간절함은 그녀들이 회사를 옳은 길로 이끌게끔 하는 힘을 준다. 극의 중심인물인 자영, 유나, 보람이 고난을 겪을 때 그들의 뒤에는 든든한 영어 토익반 동료들이 있었다. 모두 그녀들과 같은, 잡일 중심의 업무를 하며 먼 훗날 대리를 꿈꾸는 고졸 출신 여성들. 각종 어려움 앞에서도 회사를 포기하지 않고 살려내려는 이유는 그들이 근무하는 회사가 우리나라 최고의 회사라는 굳은 믿음과 자신이 하는 업무가 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전개 과정을 바라보며 가장 큰 빌런은 페논 방류에 가담했던 전 공장장이자 현 본사 상무인 오태영 상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가 페논 방류량을 거짓 작성해 피해 지역 주민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끔 한 인물인가? 첫 번째 반전은 이곳에서 나타난다. 그녀들이 찾던, 강의 페논 검출 수치를 조작한 인물은 놀랍게도 보람에게 가장 멋지고 인간미 있는 상사로 기억되던 봉현철 부장이었다. 페논 방류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회사의 주가는 무서운 속도로 떨어진다. 이때, 외국인인 사장이 외국계 회사와의 회사 통합을 추진한다. 그는 지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를 지녀 홍보부로 하여금 회사의 홍보모델로 언급되었다. 또한 폭력을 휘두르려는 상무를 리더십으로 제압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두 번째 반전은 수려한 외모로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인 그가 사실 회사의 주가를 고의적으로 추락시켜 헐값에 회사를 흡수하려는 계획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 반전 사이의 연결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이는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지만, 막상 반전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납득하게 된다. 이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스쳐 보냈던 장면들이 사실 이 반전을 위한 단계였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결론에서 을들이 갑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날릴 때,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존재한기도 한다. 토익반의 여성들이 모여 영어 보고서들을 밤새 해석하고, 전국에 퍼져 있는 주주들에게 모두 찾아가 명부를 받는 일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일반 직장인들이 하기에 시간상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또한 그녀들은 사원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나중에 퇴근하며 각종 잡일을 도맡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을 상대로 저지르는 그녀들의 앙큼한 반란은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에 대해 눈을 감은 채 응원의 눈길을 던지게끔 한다.
3. 개성 넘치는 캐릭터
극을 이끄는 중심인물들은 고아성(이자영 역), 이솜(정유나 역), 박혜수(심보람 역)이 세 명이다. 이들은 각각 확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생산관리부에서 일하는 이자영은 맡은 일을 척척 해내는 인물이다. 황금비율의 커피를 사무실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제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서류들의 위치 역시 그녀의 손길이 없으면 아무도 찾지 못한다. 그녀가 사무실을 비우면 ‘사무실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삐삐가 울릴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정유나는 빛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대졸 출신 대리에게 아이디어를 뺏기기 일쑤이다. 세상에 대해 날카롭게 고찰하며 부당함 앞에선 시원하게 욕도 할 줄 아는, ‘멋진 언니’의 표본이다. 심보람은 수학 올림피아드 출신으로 암산과 각종 계산에 능하다. 소심하고 이상한 것에 집착하지만 그 누구보다 정이 많고 마음 따듯한 여성이다. 이 능력 있고 개성 있는 세 인물이 한데 뭉쳐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서로 이끌어주며 대기업과 뜨거운 한판을 벌인다.
영화는 회사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정말 우리의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밖에 없다. 깐깐하지만 일 하나는 확실하게 처리하는 상사, 얄밉게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상사, 그럼에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사람들. 극 속에서 악역으로 생각되는 인물들 역시 그렇다.
사람을 이분법화 해 악인과 선인으로 나누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세상에 무조건적인 악당과 히어로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못된 사람이 누군가에겐 착한 사람으로 평가되듯이 말이다. 잘생기고 지적인 이미지를 뿜어 회사를 대표하는 홍보모델 감으로 언급되는 외국인 사장은 알고 보니 회사를 팔아넘기려는 검은 속내를 감춘 사람이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전 공장장이자 현 본사의 상무는 후임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사람에게 기댈 줄 아는, 조금은 어린아이처럼 징징대는 면도 있는, 사람에게 정이 많은 인물이다.
필자가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인물은 심보람이 근무하는 총무부의 부장인 봉현철 부장이다. 그는 말 수가 없고 어딘가 멍해 보이는 심보람에게 먼저 다가가 따듯한 조언을 건넨다. ‘하고 싶은 일을 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마’ 누구나 하기 쉬운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흔히 말하는 꼰대의 너무나 당연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너무나 당연한 말은 보람에게 흔쾌히 사무실에서 금붕어를 키울 수 있게 해준 부장의 따사로움과 만나 ‘꼰대’가 아닌 ‘진짜 어른’의 조언으로 들리게 했다.
그가 암 말기로 퇴사를 하고 보람은 그의 병문안을 간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페놀 유출 사건, 특히 피해 지역 강의 페놀 검출 결과 보고서를 누가 조작했는지에 대해 조사 중이었다. 보람은 이러한 상황과 고민을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현철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들이 애타게 찾던 서류 조작범이 바로 현철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가 누군가의 지시로 일을 행했건, 그의 행동은 분명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 서글픈 눈으로 그렇게 못나게 살아서 암에 걸린 것 같다는 그의 읊조림은 그의 기본 성품을 되돌아보게 하며 안쓰러운 감정을 일게 했다.
결국 보람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한다. 현철은 수학 영재 출신의 그녀가 총무부에서 접대비용 등 부당하게 사용한 영수증의 구멍을 메우는 일을 한다고 해서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부하직원이라고 해도 그녀를 존중할 줄 아는 성품을 지녔고, 그 누구보다 그녀를 응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대기업에 취직하면 뭐해, 회사 사람 중에 아무도 조문 오는 사람이 없는 걸’이라는 친척들의 조롱에 보란 듯이 홀로 찾아와준 것 역시 현철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차마 고발할 수 없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지던 날,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수사에 열중인 그녀의 친구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현철의 병실을 찾는다. 현철과 보람은 병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비가 쏟아지는 창문을 바라본다. 그의 병실에서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에게 지난날의 울분을 다 쏟아낸 보람에게 현철은 나는 나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으니, 너는 늦기 전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해준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 멋진 회사에 다니며 대리를 달아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는 일. 창밖의 비처럼 하염없이 울던 보람이 그의 말에 눈물을 그치고 고개를 든다. 둘이 함께 바라보는 창에는 비가 어느새 그쳐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길로 돌아 친구들에게 달려간다. 비와 함께 고민을 떠내려 보내고, 햇살을 맞이한 그녀가 그 순간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지난 행동은 비도덕적인 행동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 걸어야 하는 길을 안내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든든한 받침목이 되어 그녀를 끝없이 보듬어 준 봉현철 부장은 악인일까, 선인일까.
4. 영화의 모티프
영화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대기업의 권력에 맞서는 한없이 작은 존재들의 반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를 이끌며 영화에서는 중심이 되는 키워드들이 존재한다.
우선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영어 토익반’이 그러하다. 회사는 고졸 출신의 직원들에게 토익 공부의 장을 제공하며 토익 점수 600점이 넘을시 대리 승진이라는 엄청난 제안을 한다. 이에 대해 ‘초 치는’ 성격의 유나는 말한다. ‘토익 600점이 말이나 돼? 이거 다 정리해고 하려고 각 잡는 거야’ 이에 대해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정해진 토익 점수를 넘겨 대리가 될 생각에 들떠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가볍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사실 유나의 말은 옳다. 1995년도 당시는 사교육조차 흔치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토익 600점은 대학 출신들 역시 넘기 힘든 점수였다. 영어의 기본도 탄탄하지 않은 그녀들로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수기도 했다. 또한 회사가 정말로 그녀들에게 대학 출신의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해당 공고문을 내건 것일까? 유나의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저학력, 저부가가치의 여성들이 사회로 나오게 된 배경은 ‘싸고, 말 잘 듣’기 때문이다. 저비용으로 쉽게 부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배움의 장을 열어준 것은 해당 회사가 훌륭한 덕목을 지닌 곳이기 때문일까?
토익반의 형성이 지니는 의의 자체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활용이 순전히 저학력 직원들을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영어 토익반은 ‘자기계발’이라는 명칭과 상통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서점의 많은 베스트셀러는 자기계발서로 이루어져 있고, 일반 시민들은 끝없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는 굉장히 발전적인 태도로 평가되지만 사실 자기계발의 논리는 굉장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은 사실 대기업에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영화의 내용과 동일하게, 회사는 복지차원으로 당사의 직장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며 스스로를 다질 수 있는 경험을 시켜준다. 의의는 굉장히 긍정적이나, 곧 이의 활용은 폭력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급에 좌절하거나 구조 조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무기로써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사가 당신에게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당신이 우리가 애써 지원한 자기계발 무대에서 실패했고, 당신은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그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복지라는 명목으로 사원들에게 제공해 박수갈채를 받은 행위는 대기업이 피지배자들을 대상으로 손쉽게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는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를 대표로 드러내며 은연중에 대기업의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페논 방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피해 지역의 강물에서 페논 검사를 실시했으나, 이에 대한 보고서에서 페논 검출 수치를 대폭 감소하며 조작한 것이다.
생산관리부에서 근무하면서, 페논 방류를 처음으로 목격했던 이자영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최동수 대리와 함께 마을 주민들을 만나며 합의서에 서명을 받는다. 이는 그녀가 회사에서 제공한 페놀 방출 수치가 진실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기업에서 이익을 위해 주민이 겪는 신체적 고통을 외면하며 적은 액수로 그들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서명을 받기 위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던 자영은 사과나무 밭의 한 음악가가 자신의 몸을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마주하며 의문을 가진다.
두 번째 모티프는 바로 앞에 언급한 ‘사과’이다. 영화는 생각보다 첫 장면에서 많은 정보를 남기곤 한다. 자영, 유나, 보람이 영어 토익반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들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한다. 유나와 보람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영은 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소개한다. ‘I like a apple’. 자영은 사과를 좋아한다는 소개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도 영화는 후에 사과가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후 영화의 전개부분까지 사과의 존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자영이 페놀의 검출량이 매우 극소량이니, 합의서에 서명해주길 바란다는 취지로 마을을 돌아다니다 몸에 이상이 있어 보이는 주민을 만난 곳은 다름 아닌 사과밭이었다. 후에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찝찝함을 느낀다.
후에 그녀와 친구들의 열띤 조사를 통해 보고서가 조작되었으며 실제 페놀 검출 수치는 사망까지 이를 수 있는 양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지난날 지역 주민들을 위해 합의서를 받았던 것에 발목을 잡혀 주민들이 피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는 최동수 대리와 함께 다시 공장이 있는 지역을 방문한다.
그렇게 마을을 정처 없이 떠돌다 한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하필 그곳은 지난날 자신이 의문을 품었던 그 사과밭이었다. 그녀는 자영에게 아버지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되며, 현재 수술비가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눈물을 흘린다. 자영은 그때 몸을 심하게 긁던 남자가 지금 울고 있는 소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가까스로 눈물을 삼킨 소녀가 자영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선물을 준다며 들고 온 것은 ‘사과’였다.
자기소개에서 사과를 좋아한다고 밝혔을 만큼 사과를 애정하는 그녀이지만, 쉽사리 사과를 베어 물지 못한다. 페놀이 식수와 농업수로까지 뻗쳐 소녀가 건넨 사과가 페놀 덩어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가 해맑게 ‘보기엔 이래도 맛있다’고 말하는 그 사과는 얼핏 봐도 건강해보이지 않았다. 자영은 소녀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웃으며 사과를 한입 가득 베어 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외국인 사장은 회사를 팔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그녀들은 그를 이길 최후의 수단인 ‘다이너마이트’를 등에 업고 그의 사무실에 잠복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온 사장에게 그의 비서가 건넨 것은 ‘사과’였다. 사과밭의 소녀가 자영에게 집에 가져가 가족과 함께 먹으라며 싸준 그 사과를 악인인 사장에게 건넨 것이다.
자영에게 사과는 처음엔 단순히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사과는 더욱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빨갛고 동그란 모양을 지닌 사과는 우리의 심장과도 비슷한 모양을 지녔다. 그녀에게 있어 사과는 그녀의 죄책감, 양심이었다. 소녀가 건넨 페놀 사과를 베어 물며 소녀의 가족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에 자신의 탓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미안함을 느꼈고, 이를 바로잡아야한다는 일념에 눈을 반짝였다. 사장에게 준 사과의 의미 역시 양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며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되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독성에 바짝 말라비틀어진 사과를 사장에게 주면서 이는 그의 인간성이기도 하니, 그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을 것이다.
마지막 주요 모티프는 ‘지렁이’다. 영화에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 속담이 총 두 번 등장한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토익반에 모여 선생님께 한국 속담을 영어로 배울 때, 다음에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어 토익반의 말단 여성들이 한데 모여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 영어 문장을 다함께 크게 소리친다. 필자 역시 사회 속에서 한낱 지렁이일 뿐이기에, 해당 장면에서 온몸에 전율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은 일반 서민들 역시 파워가 존재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세 인물들이 회사의 비리를 목격하고, 이에 대해 묵인하지 않으며 자신의 소신을 펼치겠다는 다짐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작은 지렁이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회사를 들어와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 무너져 내리며 이에 대한 회의감에 함께 뭉쳐 한번 대차게 꿈틀거려보자 다짐한 것이다.
페놀 검출 수치의 진실을 알게 된 자영이 죄책감을 안고 마을로 들어서고, 소녀의 사과를 받아들며 그녀는 진실을 파헤쳐 이를 알리겠노라 다짐했다. 후에 최동수 대리와 마을을 빠져 나오며 그에게 진실을 캐묻는다. 최동수 대리는 직급은 대리이지만 자영보다 후배로, 그녀에게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계속해서 사용하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그녀의 소신발언 후 갑자기 차를 멈춰 세우게 하더니 직급을 운운하며 호통을 친다. 그녀는 여기서 또 한번 꿈틀한다. 후배였다곤 하더라도 상사인 대리의 등짝을 내려치며 아픈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다, 이기적이라며 크게 화를 낸 것이다. 이내 최동수 대리는 그녀에게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조리 고하며 최고의 조력자가 된다.
세 여성이 열심히 모은 증거들을 들고 신문사를 찾아가지만 다음날 돌아온 기사는 사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그녀들을 향한 징계조치. 보람을 지키기 위해 현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며 그녀들은 가까스로 회사에 남게 되었다. 생각보다도 더욱 거대한 대기업의 권력 앞에서 그녀들은 포기할 법 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토익반 동료를 통해 폐기처분되었다던 사장의 비리 자료를 가까스로 얻어냈다. 또한 비어있는 토익반의 강의실에서 영어로 된 보고서 더미들을 해석하기 위해 밤새 애썼다. 잠깐 졸다 눈을 뜬 그녀들의 앞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들의 토익반 동료들이었다. ‘같은 처지에 너네만 멋있는 일 할거냐’는 장난스런 투정과 함께 지렁이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그들의 반란은 성공을 이루었다. 그들은 회사의 주식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들을 모두 찾아다녔다. 회사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되는 경우 주식은 상승세를 보이다 곧 하락하게 될 것임을 설명해 그들의 마음을 얻어냈다. 결국 대주주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티끌과 같은 주주가 모여 태산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는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그녀들이 부패한 권력자를 위해 준비한 ‘다이너마이트’였다. 결국 그들이 너무나 아껴 지키고자 했던 회사는 지킬 수 있었고, 대규모 구조 조정 역시 막을 수 있었다. 지렁이들이 한데 모여 꿈틀거리자,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거대한 힘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많은 모티프와 상징들이 존재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위 세 가지이다. 대기업의 횡포와 권력,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영어 토익반’, 인간의 양심과 죄책감을 되새기는 도구인 ‘사과’, 작은 소시민의 힘과 그 힘의 유대가 보여주는 ‘지렁이’들의 반란. 영화는 이 세 가지의 모티프를 중심으로 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용기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5. 결론
이 영화에서 소시민은 ‘여성’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로 당시 여성의 권력은 미비했고, 알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부당함 역시 대사를 통해 다수 드러났다. 그러나 필자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여성의 인권 상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에 대항하고자 한 것은 회사의 일반 사원들 모두였기 때문이다. 토익반 여성들을 도와 주주 명단을 처리하고 주주들의 서명이 담긴 서류들을 들고 사장실로 들고 온 것은 그녀들 보다 직급이 높은 회사 ‘동료’들 이었다. 결국 그들 역시 직급을 떠나 토익반 여성들과 같은 소시민이고, 같은 마음이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유나가 일하는 부서의 부장은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 라는 말을 한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며 돈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선택한 그들은 어제보다 더욱 강해졌다. 또한 그들은 앞으로도 성장의 나날을 이루리라 믿는다. 또한 필자 역시 사회에서 작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나만의 소신을 지키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