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폭력이라는 글자의 무게
<시계태엽 오렌지> 비평문
국어국문학전공
20191093 정원화
Ⅰ. 서론
<시계태엽 오렌지>(1971)는 영화계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최고의 작품이자, 동시에 최고의 문제작이란 평가를 받는다. 근미래 런던을 배경으로 하며 10대 소년 알렉스가 범행을 저지르고 교화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당시 휴고상의 최우수 드라마틱 부문과 성운상의 영화연극/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며 인정받는 동시에 역대 가장 논쟁을 부른 영화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영화에서 폭력은 적나라하고 잔인하게 보인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 것을 보여주며, 폭력의 고리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강제된 선의는 결국 지켜지지 못한다. 작품은 지나치게 폭력적, 선정적이어서 영화를 보며 역겨움을 느끼게 될 정도이다. 주인공 알렉스는 목적과 동기 따윈 없는 폭력을 행한다. 지나가는 노숙자에게 이유 없는 폭행을 가하기도 하며 동료이자 친구를 무참히 짓밟기도 한다. 그러나 알렉스가 친구의 배신으로 교도소로 가게 되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행해지던 폭력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교도소 내에서 루드비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루드비코 요법’이란 일종의 조건반사 강화로, 대상에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담은 필름을 보여주며 구토감을 일으키는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다.
루드비코 요법으로 석방된 알렉스는 ‘만들어진 선’을 행하며 살게 되었다. 알렉스와 친구들이 이유 없이 폭행했던 노숙자를 길에서 만나게 되었고, 알렉스는 노숙자들에게 폭행당하지만, 폭력에 거부감을 가진 알렉스는 저항하지 못한다. 게다가, 함께 악행을 저지르던 친구들이 경찰이 되어 알렉스 앞에 나타나 폭행을 가한다. 석방된 이후에 노숙자, 경찰이 된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하던 알렉스는 빛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 도움을 구하게 되는데, 그 집은 자신이 2년 전 악행을 저질렀던 작가 알렉산더의 집이었다. 알렉산더는 알렉스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의 노래를 통해 그가 알렉스라는 것을 알아보고 복수를 기획한다. 알렉산더는 알렉스가 루드비코 요법의 대상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역겨움을 느끼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틀어 복수를 시도했다. 역시나 알렉스는 노래를 듣다 공포와 역겨움을 느끼며 결국 건물 창문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그는 크게 다치게 된다.
결말로 다가가기 전까지의 내용만을 본다면 권선징악의 우화적인 내용으로만 보인다. 악행을 저지르며 법의 범주에서 벗어나 자신 마음대로 살아가던 청년은 국가의 치료로 악행을 멈추게 되었다. 또한, 자신이 악행을 저질렀던 대상들인 노숙자, 친구, 작가 알렉산더가 차례로 등장하며 각자 복수를 가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권선징악의 뻔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았다. 폭력이라는 것은 절대 교화될 수 없으며, 절대적인 선의 존재는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밝혔다. 작품에서 감독은 ‘폭력’의 굴레는 끊어질 수 없고 교화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감독은 몇 가지 요소들을 통해 주제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Ⅱ. 본론
1. 영상과 맞지 않는 분위기의 음악 사용
영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중 ‘음악’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 그리고 특정 장면과 효과적으로 어우러지며 영화를 돋보이게 한다. 슬픈 장면에서는 서정적이고 느린 음악을 사용해 장면 속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전쟁영화의 매우 급한 상황에서는 빠르고 강한 음악을 사용해 관객들이 긴장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에서 음악을 매우 흥미로운 요소로 작동시킨다. 대표작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현대음악의 적절성과 클래식 음악의 조화가 가장 잘 어우러진 영화라 평가받는다. 영화의 시작 부분 배경에 우주가 나타나고 유인원들이 등장하며 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우주의 광활함과 웅장함을 잘 드러낸다. 소개할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음악이라는 요소는 역시나 감독의 의도에 맞추어 적재적소에 다채롭게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음악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밝다는 점이다. 영화의 소재, 내용, 장면 모두 어둡고 무서움에도 배경음악은 밝은 분위기의 노래가 사용되는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왜 음악을 사용할 때 영화의 배경과 음악의 분위기를 비틀어 사용했던 것일까, 본인은 그 이유를 음악을 주제의식 전달을 위한 요소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먼저 음악 ‘Singing in the Rain’ 등장의 의미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Singing in the Rain’은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메인 OST로, 영화 속에서 주인공 진 켈리가 비를 맞으면서 부르는 노래로 유명해졌다. 영화 속에서 노래는 밝은 분위기와 사랑, 행복을 표현했다. 하지만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는 한 작가의 집에서 작가를 폭행하고, 작가의 아내를 성폭행하며 ‘Singing in the Rain’을 신나게 부른다. 말 그대로 끔찍한 행위를 하는 와중에 밝은 분위기의 노래 ‘Singing in the Rain’이 사용되면서 관객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타 다른 범죄영화들은 범죄장면에서 어둡고 빠른 음악이 사용되어 관객들에게 두려움과 긴장을 제공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밝은 음악을 사용했다.
D.C. Muecke는 이런 상황을 ‘영화에서의 아이러니’라고 정의했고 “영상에서 이미지와 사운드가 미 일치되는 상황은 관객이 작품의 등장인물들과 본인과의 거리 두기를 발견하게 하며, 서로 다른 감정의 처지에서 대립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치”라 말했다. 큐브릭은 어떤 감독보다 영화적 아이러니를 잘 활용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어두운 이미지의 상황에서 밝은 음악의 사용은 알렉스가 저지르는 범죄의 끔찍함을 역으로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다. 분명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알렉스는 죄책감이나 일말의 반성 따윈 없는 표정과 모습으로 춤을 추며 밝은 음악의 대표 격인 ‘Singing in the Rain’을 열창했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알렉스’라는 등장인물이 얼마나 잔인하고, 지금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를 강조하며 그가 악독한 범죄자임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의 사용에서도 큐브릭만의 영화적 아이러니를 찾아볼 수 있다. 큐브릭은 음악의 절묘하고 남다른 사용으로 주목받았는데, 그중 클래식 음악의 사용은 큐브릭 영화에서 절묘하고 획기적으로 등장한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조아키노 로시니가 작곡한 희극 오페라이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은 희가극으로서 경쾌한 분위기를 연상시키고 밝고 활기찬 리듬으로 전개된다. 이는 ‘Singing in the Rain’과 마찬가지로 밝은 분위기를 연상시키지만, 이 음악이 사용된 장면의 분위기는 노래와 사뭇 다르다. 영화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은 알렉스 일당이 죄 없는 노숙자를 폭행할 당시에 등장한다. 영화를 보며 마치 게임과 같이 폭력을 가볍게 묘사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폭력을 행사할 당시 밝은 분위기의 음악 사용은 폭력을 가볍게 묘사하고, 알렉스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기능을 했다. 또, 영화 처음부터 밝은 음악을 사용해 ‘알렉스’의 폭력의 굴레는 결국 끊이지 못할 것을 암시하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알렉스에게 폭력은 하나의 장난과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알렉스는 폭력을 행사하며 노래를 부르고 큐브릭은 배경음악으로 밝고 경쾌한 클래식 음악을 덧붙인다. 또한, 관객에게 아이러니를 주며 알렉스를 용서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한 인물로 묘사한다. 영화 말미 알렉스는 수감생활과 루드비코 요법으로 교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관객들은 앞선 폭력 장면들을 생각하면 교화의 과정을 쉽게 믿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2. 주제를 전달하는 마지막 장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은 결말을 제시하기도 하고,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은 채 영화를 마쳐 관객들에게 영화의 결말에 대해 추측을 하게 하는 예도 있다. 영화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집으로 들어오고 돌고 있는 팽이를 보여주며 마친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독은 주인공이 목표에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해피엔딩의 결말을 알려주었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결말을 통해 알렉스의 교화 여부에 대해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며 주제의식을 부각한다.
주인공 알렉스는 루드비코 요법 치료를 받고 사회로 돌아가지만, 자신이 이전에 범죄를 저질렀던 작가를 만나게 된다. 작가는 복수를 위해 알렉스를 방에 가두고 알렉스가 두려워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 노래를 틀어 고통을 준다. 알렉스는 노래를 듣고 공포와 역겨움을 느끼게 되고, 버티지 못해 결국 창문을 통해 건물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을 시도했던 알렉스는 루드비코 요법이 주는 공포보다 더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기에 더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다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정부는 알렉스의 루드비코 실험의 성공을 통해 정부의 지지율을 높여가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막아야 했다. 정부의 장관은 알렉스를 찾아와 음식을 먹여주고,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줄 것을 약속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알렉스는 기자들 앞에서 “나는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성적인 행위 묘사를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작품의 의도를 완전히 전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마지막 단 하나의 장면을 통해 알렉스의 교화는 완전한 실패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알렉스는 듣기만 해도 구토를 하던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스피커로 듣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또한, 본인이 스스로 “치료되었다”라고 말한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죽음의 위기를 겪기 이전까지 알렉스는 이 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고통을 겪으며 억제당했다. 자신이 가벼운 장난처럼 여기던 노숙자와 경찰이 된 친구들이 자신을 폭행함에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 폭력에 대해 역겨움을 넘어 두려움을 가진 알렉스가 능청맞은 표정으로 자신은 루드비코 요법을 통해 치료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는 점은 주인공 알렉스의 뻔뻔하고 죄의식 없는 모습을 다시 보여준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 마지막 장면의 촬영에 대단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나는 치료되었다.'라는 한 대사와 함께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려 74번의 테이크를 촬영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큐브릭이 ‘마지막 장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앤서니 버지스가 출간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버지스의 소설 속 결말은 알렉스가 자신의 지난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의 ‘권선징악’의 형태로 작품을 마친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결말과는 아주 다른 형태이다. 앞서 영화에서 감독은 영화의 결말을 통해 폭력은 교화될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완전히 드러내었다고 말했다. 소설을 원작을 둔 영화들은 대부분 소설의 결말을 따르지만, 큐브릭은 자신만의 결말을 설정하면서 본인만의 주제를 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3. 인물들의 변화를 통한 주제의식 강화
‘시계태엽 오렌지’ 속 인물들의 행동, 태도 변화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강조하며, 감독의 의도대로 변화한다. 영화 초반 무자비한 알렉스 일당에게 무고한 폭행을 당한 노숙자 노인은 알렉스 일당을 향해 법도 질서도 없는 더러운 세상이라 말하고 폭력을 당하며 한탄을 한다. 대사와 태도를 통해 분명 폭력에 대해 분명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어차피 난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도 않으니 죽여라, 죽여. 법도 질서도 없는 더러운 세상이야! 세상은 더 이상 늙은이를 위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세상이 이래? (중략) 그치만, 땅 위의 질서나 법도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을 쓰진 않아.”
하지만 노숙자 노인은 루드비코 실험을 통해 교화된 알렉스를 알아보고 역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내 옆에 아주 나쁘고 잔인한 놈이 있어! 이놈과 녀석의 친구들이 나를 때리고 차고 밟았어. 놈을 붙잡어. 잡으라구. 그 때 내 피와 신음소리를 비웃었겠다?”
노숙자 노인의 본성이 원래 악했을진 모르지만, 알렉스의 폭력 때문에 노숙자는 복수를 이유로 폭력을 행사한다. 노숙자가 알렉스에게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면 노숙자는 길을 가는 무고한 청년을 폭행했을까? 영화 속 알렉스의 복역 이후 노숙자의 등장 장면이 감독이 의도한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라는 주제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노숙자 노인의 폭행 장면 이후 경찰 친구들의 등장 역시 주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낸다. 노숙자에게 폭력을 가하던 도중 경찰관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과거 알렉스와 함께 폭력과 범행을 저질렀던 일당 중 두 명이었다. 이들은 알렉스를 알아보았고, 알렉스가 강제로 교화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알렉스를 돕는 척 끌고 가 물고문하고 곤봉으로 구타를 가한다. 폭력은 여전히 존재하며 경찰이 된 친구 또한 교화되지 못했다. 경찰은 국민을 지키고 도와야 하는 직업임에도 그들은 서슴지 않게 폭행을 저지른다. 중요한 점은 주인공의 교화 실패뿐만 아니라 알렉스 일당의 친구 역시 교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감독과 원작 소설의 작가는 친구들이 교화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보였었다. 2년 전 친구들은 알렉스를 배신하고 경찰에 신고한 장본인이다. 이 점은 단순히 알렉스가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복수의 행위로 추측할 수 있지만, 영화를 보며 친구들은 비행을 그만두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경찰이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이 되었음에도, 경찰에 신고하는 복수를 했음에도 또 폭력을 가한다. 영화를 보며 알렉스의 친구 역시 매우 잔혹한 등장인물이라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결과적으론 자신들을 종종 무시하고 깔보던 알렉스를 배신하고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복수를 했음에도 또 한 번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알렉스에게 당한 폭력은 다른 폭력을 불러왔다. 이들은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다른 시민을 향해 폭력을 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복수의 정점을 찍은 인물은 작가 알렉산더이다. 알렉스 일당에게 성폭행을 당한 알렉산더의 아내는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알렉산더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알렉스의 폭행으로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다. 알렉스는 경찰이 된 친구들에게 도망쳐 불빛을 쫓다가 한 집으로 들어갔지만, 그 집은 알렉산더의 집이었다. 알렉산더는 처음엔 알렉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알렉스를 불쌍히 여겨 잘 대해준다. 후에 우연히 그가 알렉스임을 알아보았고, 그는 알렉스에게 복수를 가한다. 알렉산더는 루드비코 실험에 관심이 많아 알렉스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고, 2년 전 자신의 집에 침입했던 자가 알렉스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알렉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벌을 주기 위해 알렉스가 두려워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틀어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이로 인해 알렉스는 도저히 참지 못해 창문을 통해 자살을 결심했고, 죽지는 않았지만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앞서 등장한 노숙자와 경찰이 된 친구들은 자신이 당한 폭력에 대한 복수를 신체적 폭력으로 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알렉스에게 음악을 틀어주며 육체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고통을 주었고, 그 장면을 행복함과 희열을 느끼는 표정으로 지켜본다. 정신적 고통을 줄 때 알렉산더의 광기 어린 표정은 관객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잘 묘사했다. 알렉산더는 평생을 폭력과 무관하게 살아왔고, 높은 지위와 명망을 지녔다. 하지만 알렉스의 그런 폭력은 작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의 복수가 다른 인물들과 다른 점은 육체적 폭력을 넘어 정신적 폭력을 가했고, 이를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알렉스가 행한 폭력은 영화 속 여러 인물의 인생을 바꾸어놓았고, 폭력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인다.
인물의 변화에서 내무부 장관을 빼놓을 수 없다. 내무부 장관은 루드비코 실험을 주도했으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 내무부 장관이 알렉스를 대할 때와 마지막 장면에서 태도가 정반대인 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감옥에서의 내무부 장관과 알렉스의 만남은 내무부 장관이 갑, 알렉스가 을의 태도로 비친다. 알렉스는 빨리 감옥에서 나가고자 했기에 내무부 장관 앞에서 열정적으로 자신이 실험에 참여하는 것을 요청한다. 영화 마지막 알렉스의 실험에 문제점이 제기되고 정치적으로 지지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내무부 장관은 알렉스의 병실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다. 이때는 내무부 장관이 을, 알렉스가 갑으로 비추어진다. 범죄자 알렉스를 마치 복수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양상으로 영화를 전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전개되며 관객들은 알렉스를 동정하게 한다. 알렉스는 출소 후에 구타를 당했으며,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하며 큰 부상을 당한다. 알렉스가 안타까워 보이게 만든 뒤 정점을 찍은 것이 내무부 장관의 등장이다. 알렉스 앞에서 당당하던 내무부 장관은 알렉스에게 쩔쩔매며 원하는 것을 도와주고 이루어주겠다 약속한다.
4.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
앞선 내용에서는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굵직한 요소들을 알아보았다. 다음은 주제의식을 돋보이게 만든 두 가지 영화적 기법과 디테일을 통한 강조법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첫째로, 주인공 알렉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의 몇 장면이다. 영화 속 알렉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이때 광각렌즈가 사용되면서 주변부가 왜곡되며 중심부는 튀어나와 강조되어 보인다. 알렉스의 시점이 아닌 알렉스를 비추는 장면들에서는 일반 렌즈를 사용해 왜곡 없이 장면을 보여준다. 알렉스의 시점을 왜곡된 채로 보여주는 것은 알렉스가 세상을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광각렌즈는 초점거리가 표준렌즈보다 짧은 렌즈로서 카메라로부터 피사체까지의 거리를 왜곡시킨다. 카메라와 가까운 피사체는 크고 둥그렇게, 멀리 있는 피사체는 작아 보이게 한다. 광각렌즈를 사용해 알렉스가 세상을 왜곡된 상태로 바라본다는 디테일은 매우 기술적이며,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알렉스가 세상을 비뚤게 바라보고 있다고 유도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알렉스의 시선과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알렉스가 경찰에게 잡힌 후 광각렌즈를 사용해 알렉스 시점에서 경찰들을 바라본다. 화면 중심에 있는 경찰은 웃으며 알렉스를 바라보고 렌즈와 시선을 맞춘다. 이 장면은 마치 관객들이 경찰들과 눈이 마주친 것으로 느끼게 하며, 광각렌즈 효과로 중심의 경찰이 튀어나와 보여 어지러움 내지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런 작은 디테일로 관객들은 알렉스에게 동화되고 공감한다.
둘째, 알렉스의 나레이션을 통해 영화를 전개해간다. 주요 장면들에서 알렉스는 자신의 지난 사건들에 대해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사건을 설명한다. 알렉스의 나레이션은 지나치게 침착하다고 느껴진다. 애초에 영화는 알렉스의 나레이션을 따라가며 알렉스 시점에서 진행되어간다. 앞서 언급한 알렉스 시점에서의 광각렌즈 사용보다 더 디테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사용된 것이다. 영화에서 나레이션은 영화의 해설이나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주인공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속마음으로 말하며 상대 인물이 아닌 관객에게만 전할 때 사용된다. 나레이션이 잘 활용된 영화 '올드보이'에서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 갇힌 오대수의 주관적인 나레이션은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한 복수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반면, 오대수를 감옥에 가둔 이우진의 나레이션은 자신의 계획과 원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영화에서 나레이션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는데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나타난다. 먼저 알렉스의 나레이션은 관객들에게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을 전달한다. 루드비코 실험의 결과발표 자리에서 박사는 알렉스가 저항하지 못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알렉스에게 구두를 내밀며 핥아보게 한다. 알렉스는 저항하지 못하며 구두를 핥는데 그때 나온 나레이션이다.
"나는 그 더럽고 냄새나는 구두를 핥았다."
다음은 알렉스가 출소 후에 노숙자들에게 폭행을 당하던 장면의 나레이션이다.
"난 차마 어떤 반항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부 장면의 나레이션 뿐일 수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이것이 대부분 자기방어적인 나레이션이라는 것이다. 담담하게 경험을 말하는 듯 보이나 자신의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레이션의 다른 효과도 나타나는데, 알렉스의 나레이션을 통해 관객들에게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루드비코 요법을 통해 교화되는 장면은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구두를 저항하지 못하고 핥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잠시나마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때 나레이션을 사용해 "나는 그 더럽고 냄새나는 구두를 핥았다."라고 말하며 동정을 호소하는 듯 보인다.
Ⅲ. 결론
'폭력'은 잔인하고 끔찍하다. '폭력'은 복수라는 감정을 통해 '폭력'을 불러온다. 무심코 던진 작은 돌은 개구리를 맞췄고, 돌에 맞은 개구리는 평생 돌을 던진 사람을 찾아 복수를 계획하며 '폭력'의 주체로 변한다.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그 어떤 영화보다 폭력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잔인하게 묘사한다. 누군가는 논란투성이의 자극적인 영화로, 누군가는 주제의식을 잘 그려낸 명작으로 평가한다. 본인은 영화를 감상하며 불편할 정도로 지나치게 자극적이라 생각했지만, 작품 속에 있는 감독의 메시지를 다양한 요소들로 곱씹어보며 '영화'라는 장르로 잘 전달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겉으로 보이는 외설적이고 폭력적인 장면 아래 폭력의 잔인함, 폭력의 굴레는 끊어질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명확히 잘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는 영상과 맞지 않는 분위기의 음악을 사용해 영화적 아이러니를 불러오며 관객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또한, 관객들에게 알렉스라는 인물이 잔인하고 교화될 수 없다는 인물임을 전달하고 암시한다. 강렬한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결론을 짓는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알렉스의 "나는 치료되었다"라는 대사,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베토벤 9번 교향곡, 알렉스의 성적인 상상의 장면까지 알렉스의 교화는 완전한 실패임을 말해주다 못해 강조하는 것처럼 느꼈다. 알렉스의 변화보다 주변 인물들의 변화는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라는 한 줄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전달해준다. 알렉스에게 폭행당한 노숙자, 친구들, 작가 알렉산더 모두 알렉스에게 각자마다 다른 형태의 폭력을 가해 알렉스를 괴롭힌다. 영화의 기술적 측면을 분석해보자면 나레이션과 광각렌즈의 사용이 독특하다. 주인공 알렉스가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일들을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당시의 기분과 사건을 설명한다. 이는 관객들이 알렉스라는 인물에 동화되게 한다. 광각렌즈의 사용 역시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광각렌즈는 알렉스의 시점으로 사용되며, 알렉스의 시점을 왜곡되고 어지럽게 보여 당시 알렉스의 감정에 이입하게 한다.
큐브릭은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을 사용해 폭력에 대한 주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내었다. 영화를 보며, 관객들은 알렉스를 잔인한 인물로 경멸하다가도 어느샌가 그에 이입하며 알렉스를 동정하게 된다. 폭력을 행한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우화적인 요소로 끝맺지 않고 교화의 실패로 결말을 지은 것은 관객들에게 폭력은 이런 끔찍한 것임을 소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알렉스와 폭력을 저질렀고 이는 다른 폭력을 불러와 우리에게 그대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우리와 알렉스는 또다시 폭력을 행한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폭력이란 짧고 가벼운 두 글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참고문헌>
이현우. (2015).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사운드의 비극적 아이러니. 한국애니메이션학회 학술대회지, (), 48-49.
윤보협. (2013).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올드보이〉의 내레이션. 영화연구, (58), 283-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