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야누스
철학전공
20161002 강병교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것이 이번이 세 번째다. 같은 이유로 입상하지 못한 것도 역시 세 번째다. 평단에선 내 소설이 ‘지나치게 마초적이며 여성 인물들을 비 입체적으로 소비한다’고 평했다. 마초적과 비 입체적과 소비. 그 단정 짓는 단어들을 스스로는 제대로 단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초적이지 않게 써야 한단 말인가. 마초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여성스러움’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형언할 수 있나.
쓰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맨 처음 최종심에 오를 때만 해도 평론가들의 단어는 나에게 용해되지 못했다. 그저 나도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 하나로 오직 긍정의 표현들만 주워섬겼다. 그러나 반복된 평은 내 기대를 가로막았다. 문체의 변화가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끈을 놓기에는 최종심이란 과실이 내겐 너무 달콤해 보였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젊은 작가라는 정원이 화려해 보였다.
마초적이다,라는 말을 조용히 곱씹어 본다. 비릿한 담배 연기와 함께 내게 웃을 수밖에 없는 일화들을 피워올렸다.
*
내 어린 시절의 좌절을 관장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평론가들이 지루하게 내뱉는 여성스러움이었다. 남아로 태어난 나는 신의 웃긴 농담이나 장난처럼 예쁜 아이였다. 어머니가 나를 안고 다닐 때면 사람들은 ‘공주님’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남자아이에게 ‘예쁘다’라는 말의 폭력성은 초등학교 입학 때 본격적으로 테를 드러냈다.
여자애처럼 곱상하게 생겼고 소극적인 나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어쩌다 소리를 밖으로 힘겹게 태동하면, 아이들과 선생님은 미성의 여자아이 음성에 빤히 쳐다보곤 했다. 그 시선, 남자아이의 옷을 입은 남자아이 같지 않은 음성에 그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시선이었다.
어머니는 목소리의 변성기가 지나면 걸걸해지고 남자다워질 것이라 했다. 그저 아들을 예쁘게 바라보는 어미의 시선에 아이의 고민은 그저 귀여운 투정이었을 것이다. 그 몽상 같은 말은 사춘기를 맞는 나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먹잇감을 알아본다. 심지어 다른 먹잇감들조차 서로를 알아본다. 난 혈기왕성한 남자아이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남성성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내 겉모습과 목소리는 약하다는 것을 사방에 내뿜고 다니는 향수 같은 것이었다.
반복된 지리한 폭력은 내게 공포감과 동시에 그들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게 했다. 피폭력은 학습이 됐고 학습은 반복하면 얻어진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들의 세계를 동경한 나는, 그들이 되기로 결심했다.
변성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고 바꿀 수도 없었던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폭력의 먹잇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종일 주먹을 내지르고 가상의 적들과 싸움을 했다. 어떤 날은 학교를 빼먹고 체육관에 갔다. 부모는 그저 내가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상의 적들은 점차 나와 같은 먹잇감으로 상상됐다.
공포로써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그들의 모습을 모방했다. 그들은 먹잇감을 골라 허무맹랑한 이유들을 만들어 두들겨 팼다. 생각과 체득으로 깨달은 이후 난 더 이상 맞지 않았다. 가상의 적들과 혈투를 벌였을 때처럼,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들의 방식처럼, 그들의 학습처럼. 공포를 인지시켜 주는 것은 내 고민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난 그저 멱살을 잡고 얼굴을 뭉갰다. 무지는 공포로, 다음으론 경외로 변모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절차로 학습했다. 그 우월감에 취한 나는 예전의 나와 같았던 먹잇감들을 그들과 함께 경멸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난 포식자들과는 달리 말을 내지 않았고, 먹잇감들은 나와 다르게 학습 능력이 없었다.
그 이후로 학교를 여러 번 옮겨 다녔고 늘 내가 포식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그렇게 피식자는 완전히 포식자가 되었고, 대입을 앞두고 나는 그 행위를 그만두었다.
*
그토록 얻고자 했던 마초성은 대학에 합격한 후 1년 뒤 향한 군대에서 내게 확신을 주었다. 공수특전여단에서의 생활은 태초부터 내가 완전한 남성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자주 확인시켜 주었다. 어릴 적 고민했던 ‘계집애 같은’ 면모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여전히 여리여리했다. 그러나 타인들은 남자다운 모습의 여리한 목소리를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난 여성스러움을 거세한 채 살아간다고 믿었다.
*
진 교수를 만나러 카페로 나왔다. 한산한 시간대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진 교수는 대학 때 나의 지도교수였으며,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 자주 원고의 평가를 부탁하곤 했다. 최종심에 오른 후, 그는 내 작품에 대해 얘기해 주겠다며 약속을 잡았다.
진 교수가 밝게 웃으며 등장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근황에 대해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오직 내 작품에 대한 견해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슈들이 입안에서 서서히 말라갈 때 즈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번에도 최종심에서 떨어졌네요”
진 교수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자네 신춘문예 작품 말인가?”
난 짐짓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그래야만 작품에 충분히 열정을 쏟은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진 교수는 아랑곳 않고 냉정히 말했다.
“늘 말하지만, 자네 작품은 남성성이 과해.”
마초적, 이란 단어와 형제지간인 남성성이라는 단어가 진 교수의 입에서 뱉어진 순간, 문학 한다는 늙은이들 머릿속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덧붙인 진 교수의 말은 분명 새겨들어야 할 것이었다.
“문학계가 한없이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네, 문학계만큼 수구적인 단체는 또 없지”
진 교수는 단언하며 또 덧붙였다.
“젠더 의식이 과하게 민감해진 시대야. 자네처럼 지극히 남성적인 문체로는 현 문단에선 외면당하지. 차라리 여성적인 문체면 몰라도.”
나는 재빨리 물었다.
“그럼 도대체 그 여성스러운 문체는 어떻게 쓰는 겁니까?”
진 교수는 슬쩍 웃어보이며 답했다.
“허허, 난 여성 작가가 아니라서 모르겠네.”
진 교수의 화법은 늘 이랬다. 장황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는 단 하나도 던져주지 않았다. 맥이 빠졌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는, 실마리를 얻지 않고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어떤 말로 교수의 굳게 닫힌 입을 열 수 있을까. 문장을 헤아리던 중, 뜻밖에도 그 철창 같은 입을 먼저 연 것은 진 교수였다.
“자네, 작가 J를 아는가?”
J, 소설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혹은 그녀는 2년 전 혜성같이 문단에 등장해 고답적인 문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소설이 어떤 정치의 표방으로 변해버린 문학계에서, 지극히 심미적인 작품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J는 등단했다. J의 등단작 <피는, 카네이션>은 오로지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듯, 순수한 예술의 극치였다. 이후 J는 세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을 냈는데, 모든 작품들이 이기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는 J라는 필명으로 철저한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막연히 그의 문체를 보고 여성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J의 담당 편집자와 그, 혹은 그녀 자신을 제외하곤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모를 수가 있나요, 질투 날 정도로 재능있는 작가인데.”
진 교수는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던지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렇네, 근데 그녀의 작품은 묘한 구석이 있어.”
그녀라, 진 교수는 J를 아는가. 고리타분한 그가 왠지 내게 구원을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일었다. 난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의 발끝도 핥을 수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짐짓 파악했다는 듯 진 교수는 기분 나쁜 미소로 구원의 실마리를 열었다.
“그녀의 편집자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 평론가가 있는데, 그 평론가의 말로는 그녀가 성전환을 했다는군.”
교수란 직함도 찌라시에 현혹되는 중생이었던가. 맥이 빠졌다. 불쾌해진 나는 직선적으로 물었다.
“그럼 저보고 성전환 수술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전해 들으신 이야기 하나 가지고.”
진 교수는 표정을 엄숙하게 바꾼 뒤 말했다.
“자넨 분명 재능이 있어. 내 생각엔 J보다 훌륭한 문장을 갖고 있네. 다만, 여성의 그 섬세함, 그 한 스푼이 부족해.”
이어서 그는 대단한 힌트를 주듯 말했다.
“그렇다면 여성이란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지. 굳이 성전환같은 극적인 방식이 아니라도.”
다시 그 화법.
“그럼 대체 그 ‘극적인 방식’이 아닌 방식이 뭡니까?”
진 교수는 잔잔한 호수에 물고기를 낚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여성이 아니라서 모르겠네.”
*
진 교수와의 모호한 퍼즐 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진 교수는 헤어질 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 그 상투적인 말을 조각난 퍼즐처럼 던지고 떠났다. 내 손안엔 풀지 못한 퍼즐 조각들이 더 들어찬 느낌이었다. 남들이 규정하고 내가 부쉈던 그 여성스러움, 그것이 내 앞길마저 막고 있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홀린 듯 집으로 향했다.
깔끔한 자취방에 깔끔하지 않은, 보통 여자친구나 애인으로 부르는 그녀가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이미 흰 침대 시트 곳곳엔 노란 과자 조각들이 부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현관문에 슬쩍 던진 뒤, 시선을 만화책으로 돌리고 내게 말을 붙였다.
“왔어? 늦을 것 같았는데.”
애써 짜증을 숨기며 차분한 톤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오면 온다고 미리 말 좀 해주지.”
“전화 안 받던데? 왜? 그럼 나 지금 나가?”
도화의 화법 역시 진 교수처럼 일정한 낚시줄을 던졌다.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나쁜 화법.
“진 교수님 만난다고 오전에 얘기했잖아.”
아~ 도화는 전혀 흥미 없다는 듯 점차 바닥을 보이는 과자 봉지를 내밀며 먹을래? 권했다. 과자 봉지를 그렇게 들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데. 한숨을 내쉬며 우선 침대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노란 쓰레기들부터 치워야 그녀가 좀 예뻐 보일 것 같았다. 도화는 나무늘보처럼 엉금 기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곤, 화장실로 툴툴거리며 향했다. 샤워기 호스가 물을 세차게 내뿜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간단하게 방 정리를 했다. 널브러진 책들을 책꽂이에 꽂고, 침대 시트를 털고 바닥을 쓸었다. 도화의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붙어 잘 쓸리지 않았다. 얼추 방 정리를 마치니 그녀의 화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도화는 자신의 화장대에 손대는 것만큼은 허용하지 않았다. 저 무질서한 공간에도 나름의 질서라는 것이 있다는듯한 뉘앙스였다. 화장대의 거울엔 상이 제대로 비치지 못할 정도로 먼지가 끼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앉았을 때 얼굴을 비추는 부분만 동그랗게 먼지가 없었다. 철저한 실용주의군. 속으로 생각했다.
“와, 넌 정말 청소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
도화가 샤워를 마친 듯 머리를 샤워 호스의 물줄기보다 세차게 털어대며 걸어 나왔다. 청소한 걸 알면 머리는 화장실 안에서 좀 털지. 서서히 바닥에 안착하는 그녀의 윤기 있는 머리카락들을 애써 모른 체했다.
“그 교수님이랑 얘기는 잘 됐어?”
침대에 걸터앉은 내 옆으로 그녀가 여전히 머리카락을 날리며 물었다. 난 한숨으로 말을 대신했다. 도화는 다시 입을 비쭉 내밀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오자마자 신경질이구나, 흠.”
맞는 말이기도 했다. 내 생활은 오직 등단에 겨냥되어 있었다. 오직 등단만 하면 잘 풀리고 팔리는 건 시간문제라 여겼고 그렇게 되면 도화의 기이한 행동들도 전부 사랑스럽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도화에게 마음이 쓰여 괜히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번이랑 똑같이 내 문체가 심하게 마초적이라는거야. 그러더니 나보고 여자가 되어보래.”
화장대에 앉은 도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 그럼 언니네 언니.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줄까? 은호언니.”
“나 진지해. 근데 너도 알잖아. 나 터프하고 쿨한거에 집착하는 거.”
내가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도화도 표정을 바꾸었다. 그래도 진지할 때 진지한 것.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웃음기를 거둔 도화가 내게 말했다.
“그럼 여성스러움이 뭔지 알고 그렇게 잡고 쓰면 되겠네.”
“그래, 그거. 그 여성스러움이란 게 대체 뭐냐?”
도화는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며 툭, 내뱉었다.
“글쎄, 난 여자로 그냥 사니까 잘 모르겠는데?”
실소가 나왔다. 남자도, 여자도 모르는 여성스러움이라. 도화는 서서히 가장 자신 있을 얼굴로 분장을 마치고 있었다. 나는 뚫어지게 그 과정을 천천히, 그러나 각인하듯 응시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듯 도화가 아직은 덜 우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왜? 너무 예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이렇게 쥐었다, 펴는 것이 그녀의 주특기였다. 애써 야릇한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다잡으려 괜히 물었다.
“흠, 아니, 그냥 여자들은 화장을 매일 아침 그렇게 오래도록 하나 해서.”
도화는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쭉 올리며 대답했다.
“너 나보고 맨날 게으르다고 하잖아. 근데 화장 이거,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하는 거야.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남자는 꾸며봤자, 머리를 조금 더 신경 써서 말리고 왁스를 바르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자신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도 되는 것처럼 거울 앞에 서보고 끝.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성가신 일이라 생각했다. 문득 도화가 대단한 생각이라도 한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너, 화장 한 번 해봐! 여성스러움이 뭔지 알아야겠다며!”
그때 내 표정이 정확히 어땠을까. 콤플렉스를 간질이는 찌릿함이었을까, 우연히 원석을 발견한 듯한 짜릿함이었을까.
“야,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거냐?”
뜨거운 것에 손댄 듯 도화는 슬슬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니, 난 그냥 네가 여성스러움 때문에 고민하니까·····”
더 큰 화를 막으려는 듯 말도 안 하고 도화는 후다닥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 의도가 아닌 건 아는데.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아직 화장품 냄새가 가시지 않은 화장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화장을 하라고? 여자처럼? 거부감이 강하게 일었다. 이건 내 자존심에 허락이 안돼. 애써 화장대를 외면하고 침대에 돌아누웠다.
*
도화는 서울의 본가로 내려가 며칠 동안 있겠다 했다. 보낸 마지막 모습이 찜찜하게 잔상처럼 남았다. 그래도 도화는 쿨한 애니까. 별문제 없겠지. 자정이 넘은 시각, 불을 다 끄고 잠을 청해보려 했으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이번에 등단만 하면, 내 인생이 극도로 달라지리란 이상한 확신이 일었다. 그놈인지 그년인지 모를 J처럼. 내 문장은 후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J와 나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문득, J의 얼굴이 떠올랐다. 핏기없는 여성의 몽타주. 그리고 옅은 화장. 다시 도화의 화장대가 눈에 밟혔다. 그래, 난 등단을 하기 위해서면 뭐든 할 수 있어.
홀린 듯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화장대 앞에 앉았다. 도화가 화장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봐왔다. 똑같이만 하면 된다. 스킨을 솜에 묻혀 얼굴에 두드렸다.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션과 아이크림, 수분크림을 발랐다. 도화는 밤에는 달팽이 크림을 대신 바르곤 했다. 선크림과 메이크업 베이스, 파운데이션을 섞어 피부에 천천히 펴발랐다. 어느새 내 손은 부드럽게 여성의 손으로, 도화의 손으로, 혹은 J의 손으로 변하고 있었다. 컨실러로 잡티를 가리고, 브러쉬를 집어들었다. 아이섀도로 눈밑을 정리하고, 뷰러로 속눈썹을 올리고,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고정했다. 붓 펜으로 아이라인을 그렸다. 화장은 서서히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브러쉬를 이용하여 코에 섀딩을 하고, 볼터치를 했다. 마지막으로 붉은 립스틱을 편 입술에 천천히 발랐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보았다. 옅은 조명의 거울 속엔, 내가 학창시절 혐오했던 얼굴의 여성이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는 핏기없는 얼굴로 날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화장을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의 떨림이었다. 예쁘다,라는 말이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듯 흘러나왔다. 나는 그 입술에 다시 혐오감을 느끼며, 마치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듯, 책상에 앉았다. 투고할 소설을 첫 문장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감각으로.
동이 터올 무렵 소설을 마쳤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각의 글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거울에서 마주쳤던, 혐오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쓴 듯한 글.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화장을 지워야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화장실에 가려다 다시 화장대의 거울을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좋은 글을 썼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운명을 만났을 때처럼, 거부할 수 없는 관성이었다.
*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또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이유가 달랐다. 이은호의 작품이 그간 보여줬던 굵직한 남성성의 장점이 사라지고 여성주의 문학이란 대세에 순응한 듯한 문체가 아쉽다는 이유였다. 그동안 떨어졌을 때와 이유는 달랐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라는 것은 동일했다. 신문 뒷장에는 J의 신작 단편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한 평론가는 J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여성 중심의 서사가 부각된 현 문단에서 남성성을 강하게 박동한 야수.’ 그, 혹은 그녀는 이번엔 남자가 되었던 것일까.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지우는 J의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됐다. J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고 나는 문단의 혜성같은 신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또 미뤄야 했다.
*
그리고 지금, 난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더이상 화장을 해야 할 목적이 없는데도. 대체 왜? 의문이 꼬리를 말기 전에 어느새 내 손은 낯설지만은 않은 도구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혐오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얼굴을 그린다. 점차 눈빛은 초점을 잃어가는 듯하다. 거울 속의 여인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본다. 그녀는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J일까. 도화일까. 아니면····· 이은호와 가장 닮은 그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