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눈 동 자
국어국문학전공
20177004 최동희
명품 브랜드의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신사 한 명이 당구장에 들어섰다. 새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형광등의 광채가 가슴팍에 달린 브로치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 뒤를 따라 최 씨 노인이 들어왔다. 그가 입은 낡은 양복은 구김이 가고 색이 바랜지 오래였다.
당구장 사장 현태는 카운터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포켓볼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냉커피 두 잔을 타고 테이블로 가져오기까지 그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넘친 커피가 종이컵을 타고 흘러 흰 쟁반 끄트머리에 고였다.
“진작 이렇게 뵐 걸 그랬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영감님. 좋은 요정에서 폼 나는 양주를 한잔 했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나요, 하하. 그러나 저러나, 당구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보자, 음······. 4구는 너무 시간이 길어질 것 같군. 짧게 포켓볼, 괜찮으시죠?”
최 씨 노인은 말없이 신사를 바라봤다. 신사는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신 다음에 이야길 나누시죠.”
신사는 최 씨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큐 하나를 꺼내들더니 끝에 분칠을 했다. 최 씨 노인도 곁에 놓인 큐 하나를 들었다.
“제가 먼저 시작하죠.”
신사는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훅 들이마셨다. 큐에 맞닿은 흰 공은 빠르게 굴러가 형형색색으로 이뤄진 삼각형을 깨뜨렸다. 신사의 코가 뿜어내는 연기와 뿔뿔이 흩어지는 공들 사이에서 최 씨 노인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수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로 가려지기 시작한 수정동의 푸른 하늘 위에서는 아직 까치가 날아다녔다.
산등성이에 걸쳐진 해가 산 아래를 붉게 물들였다. 산자락 아래에 펼쳐진 동네는 번화가에서 차를 타고 조금은 벗어나야 그 윤곽이 드러났다. 저층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이 한데 모여 있어 제각각인 높이의 굴곡진 차트 그래프를 보는 것 같았다. 높은 건물이라고 해봐야 7층 건물에 옥탑방 하나 있는 정도라, 산 정상에서 볼 때면 도토리들이 키 재기를 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그 사이 사이에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수정동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그런 작고 낡은 건물들과 컨테이너들도 있었다. 무허가 주택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수정동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자리표를 잃어버린 어린아이마냥 웅크려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굴곡진 차트 그래프의 틈 사이에서 수정동 사람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씨앗을 짊어지고 풀숲을 쏘다니는 일개미 떼 같았다.
수정 2동의 마을회관 앞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중심과 같은 곳이었다. 지리적으로도 수정동 전체의 중간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이나 등하교하는 학생들은 물론 수정 1동의 대형 마트로 장을 보러 왔다 갔다 하는 주부들도 마을회관을 지나쳤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들도 마을회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오 사장. 그 소식 들었어?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선대. 어이쿠, 들었지 그럼. 집값 올라가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두근거려지네.”
“쉿! 말조심 혀. 이 동네 자기 집 없어서 단칸방 들어 살거나 하는 사람들도 태반인 거 몰라?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지는 말아, 큰일 나.”
“건너편 1동에 사는 사람들은 뭐라고 한대?”
“거긴 원래 부잣집 동네잖아. 어쨌건 간에 그쪽도 집값이 올라서 좋겠지 뭐. 우리가 올라서 좋은 거나 생각하자고!”
수정 2동의 마을회관 앞은 시끌시끌했다. 얼마 전 수정 2동 구역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건설은 주변 지역에 상권이 생기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동네의 집값과 땅값이 오른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주택이나 아파트,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돈방석에 드러누워 금덩이를 벤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오래 전부터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단지가 들어 있던 수정 1동을 부러워했던 그들이었다. 이제는 본인들도 동등한 대우를 만끽할 수 있음에 즐거워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래요, 윤희 엄마. 당장 마련해 둔 재산도 없는데.”
“그려, 갈 곳이 없어서 큰일이여, 있는 사람들만 기분 좋은 일이지 않아?”
“맞아요. 우리 같이 주머니 털어도 나올 게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래요?”
“모르지 뭐. 입에 풀칠할 것만 걱정했는데, 거리에 나가 앉을 걱정까지 해야 할 것 같네 그려······.”
꽃이 활짝 피어오르는 정원 한 구석엔 뽑힌 잡초가 시들고 썩어가는 것처럼, 수정 2동의 다른 한쪽에서는 한숨 소리와 높아진 언성이 터져 나왔다.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게 살아가면서 월세나 전세를 내고 나면 지갑이 더더욱 가벼워지는 그런 이들이었다. 산자락 아래 무허가 주택들, 옥탑, 전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이야기는 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다른 동네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내가 사는 곳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목 밑까지 차올라 있는 상태로 살아왔다. 재개발 확정이라는 현실은 해일처럼 밀려왔고, 불안감은 허탈함으로 변해 사람들의 숨통을 턱 막아버렸다.
수정동 마을회관 앞에 최 씨 노인이 나타났다. 회관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도, 지나가던 사람들도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도 목례를 해 인사에 답했다. 회관 뒤뜰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지렁이를 문 어미닭을 본 병아리마냥 노인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이따 놀러 가면 재미있는 이야기 해 주실 거죠?”
“유리병에 있는 사탕 하나만 주세요!” 노인은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 저녁 맛있게 먹고 오너라. 어머니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드리는 것 잊지 말구.” 그는 회관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의 낡은 점퍼는 구겨지고 색이 바랜지 오래였다. 얼굴에 패인 수많은 주름은 고목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보였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 겪으면서도 수정동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왔음을 증명하는 세월의 도장이기도 했다.
“어르신, 소식 들으셨죠?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김 씨가 꾸벅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최 씨 노인은 가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윤희 엄마에게 하소연을 하던 박 여사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성을 냈다.
“이봐요 김 씨 아저씨,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해요? 최 씨 어르신께서 동네가 갈아엎어질 것을 지켜만 보실 분인가? 그쪽은 주머니 좀 두둑하고 자기 집 있어서 입 꼬리가 귀에 걸린 모양인데, 분위기 파악을 좀 해요!”
“뭐라고? 아니 이 아줌마가 다짜고짜 시비야? 내가 잘못된 일로 돈 벌어 내 집 지었어?”
“사람이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러니까 마을 행사 때도 일손 돕는 데 코빼기도 안 보이지.”
“이 여자가 진짜! 그러는 당신은 하루가 마다않고 편의점에서 복권 쪼가리나 만지작거리나? 그러니까 사는 데가 아직도 전세······”
“그만들 하게. 회관 앞에서 뭐 하는 행동들인가.”
최 씨 노인은 담배를 입에서 떼어 손에 쥐고 있었다. 불꽃이 일렁이던 라이터는 그의 허벅지 위에서 위태롭게 시소놀이를 하고 있었다. 일흔이 넘은 그의 허벅지는 날이 갈수록 앙상해졌다.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에 김 씨와 박 여사 모두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언쟁을 듣고 각각의 편을 기울이려던 사람들도 멈칫하고는, 먼 산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수정 2동엔 본인 명의의 집이 없는 사람들의 절반이라네. 요즘 같은 세상이 어느 때인데 사람들 의견이 그리 묵살되겠나. 관공서에도 귀에 소식이 들어갔을 거야. 잠자코 기다려 보세.”
최 씨 노인의 만류 이후 사람들은 아파트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마을회관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술집이나 반상회, 계모임에서 두어 마디 등장하다가 사라지는 그 정도뿐이었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났다. 시청에서도 동사무소에서도 별다른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회관 근처에서 검은 차량이 한 대 섰다. 까만 양복 차림의 신사 한 명이 내렸다.
“이사님, 이곳입니다.”
신사는 수행원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고는 자신의 옷깃을 어루만졌다. 대기업 마크가 새겨진 브로치는 ‘태양’ 이라는 그룹의 이름답게 금빛으로 빛났다. 브로치와 고급 메탈 시계를 제외하면 장년 초입에 든 평범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꼿꼿한 허리와 구김살 하나 보이지 않는 양복의 결이 빈틈없는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자태는 물가에 선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그러면서도 물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먹잇감을 항시 주시하고 있는 백로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수행원과 함께 일 주일에 두세 번씩은 수정 2동을 방문했다. 다방이나 고급 음식점에서 양복 신사가 누군가와 독대하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가 만나는 인물들은 식당을 운영하는 윤 사장, 원룸텔 건물주 김 씨, 인쇄소 사장 태수 아빠, 청춘 미용실의 파마머리 아줌마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주로 자기 명의의 집이나 땅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저 곳 사장만 만나시면 일정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재개발 조합원들을 구성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사님.” 수행원이 양복 신사의 한 발짝 뒤에 서서 말을 건넸다. 신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당구장 안은 소란했다. 이른 퇴근을 한 것 같은 직장인들과 스무 살 초반 앳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저쪽 테이블로 가 주시겠어요?” 당구장 사장은 반갑게 웃으며 양복 신사와 수행원을 맞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냉장고에서 매실차를 꺼내 컵에 따르기 시작했다. 항상 생기 넘치는 얼굴을 가진 당구장 사장 현태는 불혹을 살짝 넘긴 나이임에도 언제나 활기찼다. 그래서 수정동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동네 아이들을 대할 땐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탕을 쥐어주곤 했기에, 아이들도 그를 잘 따랐다. 탄탄한 근육으로 둘러져 다부진 체격은 그의 인생살이가 고단했음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시커먼 손과 종아리는 크고 작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현태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당구장이 있는 2층짜리 건물이 자신의 것이 되기까지 노력했다는, 일종의 보증서였기 때문이다.
“뭐 드릴까요? 4구? 3구?”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당구를 치러 온 게 아닙니다. 사장님을 뵙기 위해 온 겁니다.”
수행원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꺼냈다.
“아니 어떤 분이시기에 저를······?”
양복 신사가 일어났다.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신사는 이현태를 향해 목례를 건네며 명함을 내밀었다. 현태도 답례를 하며 명함을 받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신사가 말을 꺼냈다.
“태양건설의 이사직에 있는 유현승이라고 합니다.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수정 2동에 들어설 태양 뉴타운의 아파트 건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이 건물 소유주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태양 뉴타운의 조합원이 되시면 입주 시 가전제품과 넓은 평수의 주택은 우선제공은 물론, 현재 조합원에 등록하시는 분들께는 일반 분양가의 75% 가격에 드리겠습니다. 뉴타운이 들어서는 순간 이곳 토지세나 건물 가격은 당연한 얘기고 상권도 수정 1동 못지않게 오를 겁니다. 그 이상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현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들이 당구를 치러 오고 가면서 수다를 떨고 곳인 만큼 재개발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작은 건물이지만 본인의 명의로 되어 있는 내 소유의 재산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어린 나이에 상경하여 산전수전 겪어 가면서,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돈이 된다 싶은 일들을 했다. 스무 살 가까이 되었을 때 이곳 수정동에 정착했다. 최 씨는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을 동시에 했다. 조부 때부터 운영해 온 작은 국밥집 앞에서 최 씨는 쭈뼛거리는 현태를 발견하고는 밥을 먹이고 거둬들였다. 그렇게 이삼 년 동안 현태는 최 씨의 국밥집에서 일을 거들었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둘째 주, 넷째 주 주말마다 소년 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들에게 국밥을 무료로 나눠주는 일이 끝나고 나면 최 씨는 현태를 수정 1동의 당구장으로 데려갔다.
“이 포켓볼이라는 게 참 재미있더라. 하나하나를 구멍에 넣을 때마다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야.”
현태는 자신을 친아들처럼 대해 주는 최 씨와 당구장에 오는 게 행복했다. 항상 혼자였던 최 씨는 마음으로 낳은 아들과 무엇인가를 함께한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했다.
현태는 성인이 되어서 어항을 만드는 회사 내 유리 공장에 취직했다. 십여 년간 일을 하면서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아 나이든 공장장의 퇴임 후, 젊은 나이에 공장 책임자로 올라섰다. 대형 그룹에서 운영하는 수족관의 수조 납품이 체결되어 회사의 수익이 올라가고 규모가 커지자 그의 주머니도 함께 두둑해졌다. 이맘 때 늦은 결혼을 했고 아이도 생겼다. 공장에서 일한 지 이십 년이 살짝 넘었을 때였다. 아내가 제안을 했다.
“동네에 2층짜리 건물이 매물로 나왔어요. 크지는 않지만 위치가 좋아요. 수정 1동이랑 가깝기도 하고.”
“우리 수중에 무리하는 게 아닐까?”
“당신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다면서요. 그 동안 모아둔 것도 있고, 나도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런 투자도 해 봐요.”
현태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내와 함께 건물을 매입했다. 1층에는 세를 내 작은 카페가 들어섰고 2층은 내버려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직원들과 함께 어항을 옮기다가 허리 디스크가 터지는 일이 생겼다. 급하게 한 수술은 성공했으나 의사는 더 이상 무리한 일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아내도 만류했다. 아버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두 번째 사장은 현태에게 적지 않은 퇴직금을 마련해 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키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현태는 그 돈에다 좀 더 무리를 했다. 그렇게 자신의 건물 2층에 당구장을 차렸다. 포켓볼 테이블 하나에 4구 테이블 4개가 들어가는 작은 규모였다. ‘행복 당구장’이라는 이름의 당구장은 당구를 칠 곳이 없던 수정 2동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과 중년 사내들에게 인기 만점의 공간이 되었다.
“사장님?” 옛 생각을 하고 있던 현태는 양복 신사의 부름에 정신을 되돌렸다. 뉴타운이 들어선다는 것은 건물 값도 오르고 세를 더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드러내 놓고 좋아할 만한 일이었다. 어렵게 일해서 얻어낸 재산이었으니까. 하지만 최 씨 노인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분은 오래도록 수정 2동에 살면서 동네의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했다. 둘째 주 넷째 주 주말마다 불우이웃들에게 국밥을 무료로 제공한 것도 그런 부분에서였을 것이다.
‘자네가 이곳에 온 건 내게도 자네에게도 축복인 것 같네.’
포켓볼을 치고 갈 때마다 최 씨 노인이 남기는 말이었다. 자신을 받아 준 수정 2동이 망가지는 것은 기쁠 수가 없었다. 조합원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뉴타운이 들어서는 걸 반기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입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살고 있는 동네가 좋네요.”
“태양 뉴타운의 건설은 확정이 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재고해 보심이······.”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중 되어서는 모르겠네요. 그래서 두 분, 어떤 것 하시겠습니까? 4구? 포켓?”
주변의 시선이 이쪽에게로 쏠렸다. 양복 신사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나중에 다시 뵙겠다고 목례를 한 뒤 당구장에서 나왔다. 수행원도 허겁지겁 따라 나왔다.
“저 사장이 조합원이 되면 영향력이 클 텐데요. 여기서 산 지 오래 되었고, 성격과 인품도 훌륭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좋은 조건을 거절하다니, 아쉽습니다.”
양복 신사는 차에 타려다가 차문을 열고 이야기하는 수행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바로 단정지어버리면 안 돼. 사업하는 사람들은 결단력 있을 필요도 있지만,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모르는 일이야 암. 모르는 일이고말고.”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소. 그래서 결정했어요. 시위를 해야 합니다.”
마을 회관 앞에서 사람들을 모은 건 최 씨 노인이었다. 그는 홀로 찾아가 재개발 반대 의견을 계속해서 어필했지만, 시청과 동사무소에서는 그 누구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쪽저쪽 부서로 책임을 회피할 뿐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최 씨 노인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너도 나도 “옳소, 맞습니다.” 를 외쳤다.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뒤쪽에서는 무리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태도 최 씨 노인의 부름에 합류했다. 얼마 안 되는 자신의 것을 빼앗길 수 없다는 결의에 찬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공간에 정이 있어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저 앞쪽에서는 최 씨 노인이 짜는 시위 계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현태는 중간에서 조금 뒤편에 서 있었다. 최 씨 노인은 뒤쪽을 의식하지 않았다. 현태와 눈이 마주치자 주름진 눈꺼풀로 살짝 곡선을 그렸을 뿐이다. 현태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시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최 씨 노인이 현수막을 여러 장 만들었다. 몇몇 사내들이 수정 2동 이곳저곳에 현수막을 걸었다. ‘재개발 결사반대!’ ‘내 터전을 빼앗아가지 마세요.’ 몇몇 사람들은 ‘살 곳이 없어요. 도와주세요.’ 라는 현수막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 앞에서 현태도 오랫동안 서 있었다.
시위 첫 날, 최 씨 노인과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은 시청 앞으로 몰려갔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박 여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재개발이 무슨 재개발이냐! 없는 사람 배려도 없는 재개발, 즉각 취소하라!”
“취소하라! 취소하라!”
“돈만 좇는 태양그룹도 마찬가지다! 조합원 설립 즉각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행복 당구장 사장인 현태가 최 씨 노인을 도와 팻말을 들고 있다는 데 큰 호의를 느꼈다. 역시 된 사람이다, 베풀 줄 안다며 덕담을 건넸다. 그럴 때마다 현태는 어색한 미소로 답례를 했다. 최 씨 노인과 함께 시위대 맨 앞줄에 서 있거나, 박 여사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확성기를 잡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와 줘서 고맙네.”
최 씨 노인은 현태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일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시위 소식은 양복 신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수행원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와 반대로 양복 신사의 표정은 천하태평이었다.
“이사님, 시위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거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
“참 볼수록 순진한 친구야. 저런 걸 보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는 거지. 그냥 모르쇠 하고 쳐다보면 돼. 윤 비서, 네가 어려서 그런 거라 생각하겠어.”
수행원은 양복 신사의 말에 죄송하다고 하고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위가 커지고 격해지면 용역을 써야 하는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끔찍한 광경이 떠올랐다. 수행원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가 대충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 어휴 순진하기는! 그런 방식은 쌍팔년도 철거 때나 쓰는 일이야. 뉴스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또 영상 몰래 찍어서 동영상 사이트에다가 퍼뜨리는 놈들도 있고. 회사 입장에서도 아주 골치 아파. 게다가 당장 아파트를 뚝딱 올려야 하는 것도 아니잖나? 다~계획이 있는 거란다. 일단은 그 사람이나 만나 봐야겠어. 최 씬가 뭔가 하는 영감님.”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재개발을 보류하겠다는 말 아니면 듣고 싶지 않아. 돌아가게. 직접 찾아와도 모자랄 판에, 아니 그래도 달라질 건 없을 걸세.”
최 씨 노인은 시위 현장에 자신을 찾아 온 수행원을 돌려보냈다. 수행원은 두세 번 더 찾아갔다. 하지만 최 씨 노인을 마주치지도 못했거니와 시위대에서 날아오는 계란에 애써 다린 양복이 상할 뻔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양복 신사는 코웃음을 쳤다.
“영감님이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매우 피곤하실 텐데, 허 참!”
그는 다리를 꼬아 번쩍 치켜 올려 책상 위에 걸치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행원에게 했던 말처럼 용역을 쓸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런 몸 쓰는 사람들 고용하는 일은 철거가 원활하게 하지 않을 때에나 고려해야 할 단계였다. 일을 크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쉽고, 간단하게. 저들의 힘을 빼 놓는 것······. 양복 신사는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는 키폰을 눌러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행원을 호출했다.
“이봐 윤 비서, 수정 2동 조합원들 수가 어떻게 되나? 그리고 전세 아파트나 세 들어 사는 사람들도 좀 조사해 봐.”
시위가 시작된 지 일 주일이 좀 넘어갔을 때였다. 수정 2동에서는 태양 뉴타운과 관련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우리 같은 전세 주민들에게만 주는 혜택이 있대요.”
“그러게, 휴대폰 사는 것처럼 할부분양을 한다면서. 월이 부담스러우면 3개월, 반 년 이런 식으로. 단 기한 내에 이사를 가 버리면 그건 배상해야 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뭐 우리가 여길 떠날 일은 없지 않잖아요? 풀칠을 해도 하던 자리에서 해야지. 다른 데 가면 더 나을 거라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요.”
조합원들에게는 또 다른 내용이 태양건설 측으로부터 전달되었다.
‘저희 태양 뉴타운의 입주를 계획하신 조합원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추가적인 혜택을 드리고자 하여 연락을 드립니다. 지인이나 가족 등 연이 있는 주변 사람들이 조합원에 가입하신다면, 소개시켜 주신 분과 새로 조합원이 되는 분들께는 최대 60%의 가격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선착순 제한 있습니다. 놓치지 마세요!’
기존의 조합원들은 너도 나도 사람들에게 조합원 권유를 했다. 잔잔하면서도 빠르게 차오르는 밀물의 갯가처럼 조합원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기 시작했다. 반면 시위대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썰물이 시작된 갯가 같았다. 칠십 명 가까이 되던 인원이 서너 명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며칠도 안 돼서 절반으로 줄었다. 스무 명도 안 되는 날도 있었다. 일이 바빠져서, 사정이 생겨서 못 나온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예 말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도 있었다. 확성기 담당도 박 여사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태양 뉴타운의 할부 분양을 신청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사장, 자네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왜 어려운 길을 자처하는가.”
“그려, 나나 김 씨 아저씨 지인이라고 이야기하고는 조합원에 들어와. 누구도 거절할 사람이 없지. 암! 그쪽도 나도 좋은 일 아닌가?”
“최 씨 어르신께서는 고집이 너무 강해. 이 사장, 자네는 할 도리를 다 했어. 우리가 볼 땐 친부모 모시는 것보다 더 했으면 했다고 생각하네. 이제는 자네 생각대로 할 차례야.”
조합원 자격을 가진 몇몇 손님들은 당구장에 찾아 와 현태를 설득했다. 그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며 손님들을 돌려보냈다. 현관 이 열렸다 닫히는 종소리가 들린 후 그의 표정에는 그늘이 내렸다.
“아저씨, 이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저씨는 여유가 있으시잖아요. 식당 때문에 그러세요? 제 돈으로 사람을 써서라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자원봉사, 그것도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시위를 한다고 달라지는 건 바위에 머리를 들이 받는 거나 다름이 없어요. 부탁드립니다.”
현태는 최 씨 노인에게 시위를 그만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 혼자 남더라도 계속 해야 하네. 여유가 없다면 그만 나와도 괜찮아.” 표정 하나 바뀌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현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한 최 씨 노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랬다.
시위대가 걸어 놓았던 현수막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X자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거나 갈기갈기 찢겨 있는 경우도 보였다. 무허가 주택에는 흉한 낙서들이 새겨졌다. 용역의 짓이라는 이야기가 들렸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마을 회관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예전의 풍경은 사라졌다. 허심탄회하게 여럿이서 모여 웃음을 나누던 사람들은 온데 간데도 없었다. 서로 흘겨보는 사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골목을 빙 돌아가는 사이. 서로 멱살을 잡느라 지나가던 이들이 뜯어 말리는 사이가 수두룩했다.
행복 당구장에서도 다툼이 자주 벌어졌다. 조합원끼리 온 테이블과 시위에 참여한 사람끼리 온 테이블끼리 말싸움을 하거나, 멱살을 잡는 일이 생겼다. 현태는 하루에 한두 번, 많게는 서너 번 싸움을 말린 일도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 있는 동안 귓가에 맴도는 어젯밤 아내가 건넨 말을 또다시 떠올렸다.
“여보, 나 둘째를 가졌어요. 한 달째래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신혼 이후부터 쭉 지내 온 좁은 평수의 빌라였다. 자신의 명의로 된 정이 든 집이었기에 이사를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 식구라면 모를까 네 식구가 살기엔 좁았다. 아이가 6학년이 되면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해졌다. 수정 1동에 사는 친구들 집에 놀러 갔다 온 후로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조르는 일이 잦아졌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좁은 집에 산다고 친구들을 데려오지도 못할 것 같다고 투정도 부렸다. 타이르고, 혼내 보기도 했지만 그 순간 잦아질 뿐 없어지지는 않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집이 좁게 느껴졌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게다가 넓은 집에 사는 친구들을 보니 부러움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의 조름과 성장으로 인한 비좁음이 한겨울의 문풍지 틈으로 살살 불어드는 찬 기운이었다면, 아내의 둘째 임신 소식은 북서풍처럼 문풍지를 뚫고 훅 밀려들어와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현태는 몇 날 며칠째 불면증에 시달렸다. 어렵게 끊었던 담배에 손을 대었고, 잠든 아내를 두고 침대에 일어나서 소주 한 병을 들이켰다. 그래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아이가 뒤척이다가 차 버린 이불을 덮어 주면서,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 뛰어노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성별도 모르는 둘째 아이가 뛰어다닐 모습을 그려도 보았다. 최 씨 노인과 시위를 하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흐릿해졌다. 둘째 아이를 껴안고 있는 아내와 손등을 덮는 중학교 교복을 입은 큰아이의 모습, 그리고 지어질 태양 뉴타운의 윤곽은 더욱 더 선명해졌다. 어느 날 밤이었다. 현태는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그 때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소주병 옆에 놓인 지갑은 열려 있었다. 명함 하나가 비죽 나와 있었다.
당구장 안은 최 씨 노인의 뿌연 담배연기와 깊은 한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찬바람이 뒤섞여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현태는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숨이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한 마디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최 씨 노인은 물티슈 담긴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현태는 최 씨 노인의 손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어지는 긴 침묵을 깬 건 노인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난 이해하네. 자네도 먹고 살아야겠지. 둘째가 생겼다면서. 다 이야기 들었네.”
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손 빈 이들의 마음도 헤아려주었으면 어땠나. 내가 자넬 키우는 동안 죽 말해오지 않았던가. 있는 사람들이 베풀 줄도 알아야······. 아닐세, 괜한 소리를 했어.”
최 씨 노인의 바싹 마른 입술 사이에서 깊고 긴 한숨과 함께 연기가 길고 가늘게 뿜어져 나왔다.
“마음이 바뀌었네. 그 사내와 만나 봐야겠어. 연락을 해 주게.”
열 개의 공이 들판에서 자리를 잡았다. 양복 신사와 최 씨 노인은 긴 큐를 들고, 흰 공을 부리며 나머지 공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신사가 부드럽게 큐를 움직이면 흰 공은 색공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렵다 싶으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녀석들을 이리 저리 휘저어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흰 공은 신사의 충실한 사냥개였다.
최 씨 노인은 흰 공을 쳐다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 죄 없는 동물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냥개 같아 무서웠다. 언젠가 물어뜯을 사냥감이 사라진다면, 최 씨 노인의 목을 향해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큐를 움직이고 나면 눈을 질끈 감았다. 구질구질한 양복을 다리던 세탁소가, 막걸리 한 잔 걸치던 도랑가의 선술집이 저 너머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조부 때부터 이어 오던 기름 냄새가 밴 국밥집도, 그걸 맛있게 먹던 사람들의 발자취도 없어질 것이다. 새로이 연 깔끔한 공간이라 한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 묵혔던 사람들의 정, 수십 년 가까이 모아 온 그것들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공이 파이프 속으로 굴러 가며 나는 소리는 굴삭기가 벽을 헐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냥개는 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야만 먹을 것이 있었다. 못난 주인을 만나 허탕을 칠 때마다, 사냥개는 자연스레 신사의 손으로 다가갔다. 평생을 즐겨 온 포켓볼이라는 놀이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항상 배부르고 따스하게 살아가는 당신네들이, 왜 없는 이들의 것을 탐하는지 궁금하오. 수정 2동을 내버려 둘 수는 없소? 아파트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어찌하라는 거요. 왜 내가 이곳에 정을 둔 지 아시오? 전쟁 통에도 떠나지 않고 피땀 흘리며 지낸 이곳은 내 자식이고 사람들의 터전이오.”
담배 연기 자욱한 당구장을 울리는 최 씨 노인의 말에, 신사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큰 그릇을 가진 사람들은 영감님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배부르게 채워 넣는 게 우선이죠.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은 걸요.”
최 씨 노인은 쓰라린 속을 부여잡으면서도 본인의 공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 남은 8번 공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늙은 폐를 아프게 들쑤셨다.
“있는 자가 이기는 거라는 말, 거스를 방법이 없는 것이오?”
축 늘어진 목소리가 최 씨 노인의 가슴을 대변하고 있었다. 신사는 최 씨 노인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나간 세월이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는 아직 놓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당신은 젊어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선 관심이 없을 나이겠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저 높은 아파트가 아니오. 저 아래에 담긴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소. 당신이 그걸 잊지 않았으면 하오.”
최 씨 노인은 하나 남은 8번 공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영감님께서 이기셨군요. 실력이 녹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신사가 비꼬듯이 웃었다. 그는 큐대를 제자리에 놓으며 손을 털었다. 최 씨 노인은 모든 공이 사라진 당구대를 바라보며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녹스는 것은 사람 마음이 아니겠소.”
최 씨 노인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람들의 성명서가 담긴 봉투를 꺼내 신사 앞 당구대에 올려놓았다. 신사는 봉투를 힐끗 쳐다보더니 손에 든 담배를 그 위에 비벼 껐다. 수행원이 든 겉옷을 가져가 어깨에 걸치고는 당구장에서 나갔다. 최 씨 노인은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흐느끼며 우는 현태를 바라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의 동공은 마음으로 낳은 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사의 차 소리가 들리고 나서 건물 바깥으로 나섰다.
최 씨 노인은 구부정한 허릴 쭉 펴고 막힌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 중턱에서 까치 한 마리가 바람에 몸을 실어 날아왔다. 까치는 물고 온 나뭇가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은행나무 사이에 얹어놓았다.
“녀석들아, 그렇게도 이곳이 좋으냐.”
최 씨 노인은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최 씨의 붉어진 눈동자 안으로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들이 수정 2동의 열기를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