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짝퉁
20206232 간호학과 박미경
맑은 날이다. 쭉 뻗은 햇살이 눈꺼풀 위로 산산이 부서진다.
나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너, 걔랑 아직 연락해?”
뾰족한 구두에 발이 아프다. 슬며시 발을 빼 보고 싶은 충동에 강하게 휩싸였다. 나는 입 안쪽을 깨물었다. 너덜거리는 여린 안쪽 입에서 비린 맛이 감돌았다.
“응? 누구?”
A가 되묻는 말이 들렸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친구를 바라보았다. 건물주와 결혼했다는 B는 꽤 윤택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왜, 학교 다닐 때 너랑 잠시 같이 살던 애 있잖아.”
테이블 위로 놓인 작은 잔에 든 새까만 아메리카노. 김이 폴폴 솟아오르는 커피잔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하다.
“아, 미래.”
내 대답에 옅은 웃음이 울려 퍼진다. 한껏 차려입은 옷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맞아. 나미래.”
“민지가 이번에 청첩장 돌리면서 연락하려 했는데 아무도 걔 연락처를 모르더라.”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를 돌리며 B가 말했다. B의 목에 걸린 흑진주가 부드럽게 햇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나미래.
내 친구다. 아니, 내 친구였다. 지금은 연락이 안 되니, 친구였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대학 시절 함께 산 적이 있다. 거창하게 방을 구해 나누기로 했다던가, 처음부터 약속을 하고 함께 살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함께 살게 된 거였다.
“나랑도 연락이 안 돼.”
어색한 미소가 내 입가에 걸렸다.
“너랑 제일 친한 것 같았는데.”
C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C의 귀에서 귀걸이가 짤강거렸다. 이번 시즌에 새로 나온 한정판이다. 미래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모두 입을 모아 극찬했던 제품.
“그랬던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A가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말야.”
커피잔의 온기가 식어가고 있다.
친구들은 저마다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 브랜드에서 새로 나온 목걸이, 저 브랜드에서 프리미엄이 붙은 백. 오랫동안 기다려서 받은 자동차.
나는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보았다.
겨울로 접어드는 초입. 유달리 오늘은 햇살이 좋다.
나는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햇살이 눈 위를 타고 올라와 붉게 물들었다. 내가 미래를 만났던 그 날도 붉은 노을이 예쁘게 물들었었다.
“후.”
나는 반지하 방에서 기지개를 켰다. 기숙사 신청 기간을 지난 신입생에게, 학교는 더이상 방을 열어주지 않았다. 부랴부랴 집을 구하려 했지만 이미 좋은 집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휴가를 내고 급하게 수소문을 한 끝에 겨우 잡은 집. 신입생의 단꿈에 부풀기는 너무 낡은 집이었다.
골목에 골목을 휘돌아 들어가야 위치한 까만 지붕의 뿌리에서 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처음 맞이하는 반지하의 음습한 곰팡내가 코를 간지럽혔다. 나는 작게 기침을 했다.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가 들이마시자 가슴 안쪽이 꽉 막힌 것처럼 아팠다.
나는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투덜거렸다. 부모님들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1년 계약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꼭 옮겨주겠노라고, 몇 번이고 약속하셨다. 나는 짧은 통화를 끝냈다. 무거운 돌이 가슴팍에 눌러지는 기분이 들어 퍽 불편했다.
똑똑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등이 굽은 실루엣이 비쳤다. 주인 할아버지다. 나는 계약할 때 슬며시 보았던 할아버지의 꼬장꼬장한 얼굴을 떠올렸다. 까다로운 얼굴에 괴기스럽게 빛나는 눈. 그 눈 사이로 스쳐 지나가던 이름 모를 뿌듯함이 내 뇌리에 깊게 박혀있었다.
“학생, 일어났어?”
나는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괜히 잠에 덜 깬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문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무도 없이 고립된 이곳에서 문을 여는 것은 꽤 무서운 일이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주인 할아버지에 대한 불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흠흠. 다름이 아니라, 학생 그 때 월세가 비싸다고 했었잖아.”
“네.”
“학생이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다른 여학생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아도 좋으니 방을 꼭 빌려줄 수 있느냐고 해서 말이야.”
500에 45. 전기세와 물세는 별도. 대학가에서 이 정도 되는 집은 찾기 힘들 거라고 거듭 말하는 주인 할아버지의 말이 귓가를 웅웅거리며 돌아다녔다. 할아버지의 말은 맞다. 서울, 그리고 번화가에 500에 45, 그리고 15평짜리 방은 없다. 학교와 조금 멀고, 편의시설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45만원이라는 월세는 큰 부담이었다.
나는 내 보금자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부엌이 딸린 거실 하나와 화장실 하나. 그리고 작은 방 하나. 턱없이 작은 이곳 여기저기 풀다 만 짐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서 한 명이 더 살 수 있을까.’
좁다. 본가의 내 방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집에 사람이 더 들어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저, 그건.”
“학생이 방을 쓰고, 새로 온 친구가 거실에서 자면 될 거야. 월세는 25만원, 22만원.”
가격이 거의 반으로 떨어졌다. 나는 주인집 할아버지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2만원의 월세를 더 받겠다는 것이다. 뻔히 보이는 그의 생각에 나는 도리질 쳤다. 월세가 반으로 깎인다고 해도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 쪽에서 침묵이 흐르더니, 타이르는 듯한 말이 돌아왔다.
“그럼 한 달만이라도.”
“한 달이요?”
“지금 당장 집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하니까 말야.”
얼굴도 본 적 없는 여학생에게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처럼 실수로 인해 집을 구하지 못한 신입생일지도 모른다. 한 달 만이라면, 그 애가 그사이 다른 집을 구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한 달만 있는 걸로 하죠.”
“휴.”
안도의 한숨이 문 너머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차분한, 그러나 앳된 목소리다. 나는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노을이 불투명한 유리 사이로 이지러져 보이고, 작고 아담한 실루엣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그럼 나는 가볼게. 둘이서 이야기 잘 해 봐.”
주인집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문에 대충 걸려 있던 걸쇠를 젖혔다. 걸쇠가 덜거덕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반지하에 흘러 들어갔다. 잡아당긴 문 너머로 새빨간 해를 등진 여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역광 때문에 그 애의 얼굴은 시꺼멓게 보였다.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끌고 온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그 애는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저는 나미래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그게 나와 미래의 첫 만남이었다.
미래는 유별난 데가 있었다.
특히 미래는 스무살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가끔은 강박적일 정도로. 아침 일찍 일어나 계획표를 썼고, 밖에 나가 있다가 일찍 돌아와 일기를 쓴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항상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미래는 마음에 드는 룸메이트였다.
그래서, 나는 한 달 후 연장 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세 달째 우리는 같이 살고 있었다.
“계란 먹을래?”
나는 아침을 만들면서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의 손이 잠시 멈췄다. 무심코 바라본 미래의 계획표는 12시에 멈춰 있었다.
“응, 고마워.”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며 미래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싸구려 커피의 탄내가 버터의 녹진한 냄새와 뒤섞여 우리의 아침을 만들었다. 중고마켓에서 산 책상을 펴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사과와 씨리얼, 계란이 조촐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미래가 포크로 계란을 가르며 말했다. 계란의 노른자가 튀어나와 접시의 바닥을 지저분하게 물들였다.
“혹시 너 나랑 아르바이트 하지 않을래?”
나는 미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명문대를 다닐 때 으레 한다던 과외도, 나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유 없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떤 건데?”
“선배가 소개해 준 아르바이트인데, 세미나 접수하는 데 인원이 필요하대.”
컨벤션 센터에 앉아서 행사 진행을 도와주면 된다고 하더라고, 미래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상기된 미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흥분과 희망으로 뒤섞인 미래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오늘 얘기해 놓을게.”
혼자 하는 아르바이트보다는 나을 것이다. 마침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기도 하고. 나도 미래에게 슬몃 웃어 보였다. 미래도 나를 보고 마주 웃었다.
띵동.
미래의 휴대폰에서 밝은 소리가 울렸다. 미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내 쪽에 있는 미래의 휴대폰에 손을 뻗었다.
“안돼!”
번개같이 달려든 미래가 휴대폰을 거머쥐었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미래와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귀한 물건이라도 쥔 것처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미래는 휴대폰을 내려보고 있었다.
“미안, 나는 그냥 건네주려고.”
“아니야. 중요한 연락이 올 게 있어서 내가 예민했나봐.”
내 사과에 미래는 내 쪽을 흘긋 쳐다보고 다시 휴대폰의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래는 가끔 이랬다. 절대 접근하면 안 되는 것. 휴대폰과 계획표가 들어있는 일기장. 그 금기의 장소에 내 손이라도 닿을 성 싶으면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설령 그것이 내가 그냥 그것들을 전달해 주려고 하는 것일지라도.
특히 휴대폰의 경우에, 미래는 더 강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아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래 답지 않은 이상한 미소만이 휴대폰을 보고 있을 뿐. 나는 휴대폰에 이런 소리가 들린 날 미래의 행동을 알고 있다. 집에 일찍 들어왔다가, 잠시 나가서 무언가가 담긴 봉투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 그 봉투 안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담겨져 있었다. 하루는 명품 브랜드의 옷이었고, 하루는 다른 브랜드의 신발, 손수건, 하루는 작은 악세서리기이기도 했다.
“나 가 볼게.”
나는 미래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미래는 어느새 일어서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다녀와.”
나중에 연락할게, 라는 말을 남기고 미래는 문을 닫았다. 나도 몸을 돌려 가방을 챙겼다. 나도 2교시, 수업이 있었다.
[이번주 토요일 10시. 같이 나가면 될 거 같아. 나는 오늘 늦어.]
휴대폰에 떠오른 메시지가 밝게 빛났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
오늘도 바쁠 것이다. 다른 날들도 그랬듯이.
토요일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나는 접수 데스크에서 멀뚱히 앉아 애꿎은 엑셀파일만 건드렸다. 학계의 유명한 분들이 모여서 한다는 행사였다. 미래와 나는 오자마자 따로 떨어졌다. 나는 접수 데스크에서, 미래는 VIP룸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내 일은 간단했다. 오는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명찰을 지급하며, 일정이 쓰인 팸플릿을 주는 것.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혼이 쏙 빠질만큼 바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산해져 행사가 중반에 치달은 지금 이 시점에는 이렇게 여유로웠다.
미래는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내 눈앞에 작은 음료가 불쑥 튀어나왔다. 고개를 들자 미래가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예쁘다. 평소보다 훨씬 차려입은 옷에, 공들인 화장이 미래를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미래가 내민 음료수를 받아들어 빨대를 꽂았다. 퐁, 소리와 함께 빨대가 꽂혔다. 미래는 같은 음료를 홀짝이며 말했다.
“어때, 할 만하니?”
“많이 배웠어.”
내 말에 미래가 대꾸했다. 단순노동에서 뭘 배웠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뭘 배웠어?”
“이것저것. 걸음걸이, 말투, 차를 마시는 것, 뭐 그런 것.”
미래의 목소리가 꿈을 꾸는 듯 했다. VIP룸에서는 별 걸 다 가르친다,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미래의 표정이 너무 희망차보였기에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거 지워야 하지 않아?”
대신에 옷에 묻은 커피 얼룩을 손으로 가리켰다. 미래는 흰 원피스 앞에 묻은 갈색 얼룩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나중에 드라이 맡기자.”
내가 말하자, 미래는 천천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파르레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마 정도 나올까?”
“글쎄, 이거 그 옷이지?”
연예인 K가 입고 나왔던 옷, 나는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가 작게 긍정했다.
“그럼 특수세탁해야 해서 좀 나올 것 같은데.”
“아, 그렇구나.”
미래의 입가에 억지웃음이 걸렸다.
“걱정하지 마. 금방 지워질 거야.”
나는 미래를 위로했다.
찰박
나는 찰박거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비가 오는 걸지도 몰라, 여긴 반지하니까. 나는 생각하며 한뼘 남짓한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새벽의 어슴푸레한 하늘 사이로 특유의 촉촉한 냄새가 창문으로 밀려 들어왔다.
비가 오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나는 미래가 깰세라 문고리를 조심히 돌렸다. 오래된 집이어서 그런지, 비명 소리 같은 소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래가 깨면 어떻게 하지. 발끝으로 바닥을 디디며 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미래는 거실에 없었다.
찰박
욕실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을 타고 침이 넘어갔다. 욕실에 있는 게 미래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큰 문제다. 유달리 헐거웠던 대문이, 밀면 열릴 듯한 창문이 내 머릿속을 점령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꽉 쥐고 욕실 문으로 다가섰다. 찰박거리는 소리는 욕실 안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욕실 문 틈 사이로 눈을 가져다 댔다.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래였다. 흰 물체가 담긴 작은 대야에서 찰박대는 미래의 모습이 희끄무레한 불빛 사이로 어른거렸다. 미래가 흰 옷을 들어올렸다. 어제 입고 갔던 옷이었다. 연예인이 입어서 완판되었다는, B브랜드의 명품 옷.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 옷은 물세탁을 할 수 없는 옷이었다.
“미래야, 이 시간에 뭐해?”
나는 일부러 눈을 비비며 화장실 문을 슬쩍 밀었다. 미래는 홍당무같이 새빨개진 얼굴로 옷을 몸 뒤로 감추었다. 바닥에 흥건한 물 사이로 거품이 울컥울컥 치솟고 있었다. 아무것도, 미래는 웅얼거렸다. 미래의 눈동자가 바닥에 얼룩진 타일에 떨어졌다.
“얼른 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에게 그 옷은 물세탁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옷은 이미 물에 푹 절여져 미래의 등 뒤에서 축 늘어져 버렸다.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 방에 다시 돌아왔다.
새벽인데도, 나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얼굴에 햇빛이 비스듬히 스며 들었다. 나는 샛노래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지하의 창문에도 햇살은 공평하게 흘러들어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느긋함에 기지개를 켰다. 얼마나 잔 거지? 눈을 돌려 시계를 보았다. 열 두시.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라 이런 여유를 더 즐길 수 있다. 미래와 카페를 가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이렇다 할 외출을 함께 한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 시간이면 미래가 이미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밖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의구심을 누르며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밖은 깨끗했다.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래가 항상 쓰곤 했던 계획표와 일기장도, 애지중지하던 명품 옷을 걸어놓던 옷걸이도, 낑낑대며 끌고 오던 캐리어도. 어느 하나 남은 것은 없었다. 텅 비어버린 거실에서 나는 우두커니 섰다. 증발하듯 사라져버린 미래를 생각하자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비틀거리는 정신을 붙들고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오래된 씽크대 아래쪽으로 삐쭉 튀어나온 갈색 종이에 내 시선이 닿았다. 나는 기다시피 다가가 종이를 집어들었다.
곱게 접힌 종이였다. 고급스럽다고 말 할 수 없는 크라프트지는 그곳에 오래 처박혀 있었던 것처럼 곰팡내를 풍겼다.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햇빛 사이로 희뿌연 먼지가 흩날렸다.
[가난은 거미처럼 벽을 타고 내려왔다.]
정갈한 미래의 글씨로 또박또박 쓰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미래의 메모다. 한 장만이 뜯긴 채 왜 이 구석에 들어있는지 몰라도, 미래가 여기에 있었다는 단 하나의 흔적이다.
[눅눅한 물기가 천정을 타고 내려올 때면, 나는 다짐하곤 했다. 여기서 벗어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잘 사는 사람들의 사회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할 일.”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메모로 된 일기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목록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학식과 교양을 쌓기 위한 내용들과 중고 명품을 구하는 방법이 좌르륵 나열된 초반을 지나, 만날 사람들과 나눌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담긴 후반부의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목표: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기.]
나는 조용히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진정이 필요하다. 나는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한 잔 탔다. 커피향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자 생각이 어지러워졌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미래는 대체 누굴까. 미래와 같이 살면서 미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학과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사라진 미래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학과 사무실에서는 학과 동기들 200명 중 나미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연락했던 동기들은 미래를 수업 때 말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커피잔은 식어 있었다. 나는 거뭇한 커피에 일렁이는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후로 미래를 만날 수 없었다.
“너 괜찮아?”
“응.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손 끝에 닿은 커피잔에서는 차가운 기운마저 느껴졌다. 크레마 자국이 희미하게 붙은 커피 위로 낯선 내 얼굴이 비췄다. 이상한 표정이 커피 위로 흔들렸다.
“그럼 너도 가는 거지?”
B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B사 차, 이번에 우리 전부 시승하러 가려고.”
괜찮으면 세컨카로 장만할 생각이야, C가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았다. P사의 신상 팔찌가 탁자에 부딪혀 챙강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 카드값이 얼마더라, 생각할 틈도 이유도 없다. 운전을 못 한다는 핑계를 대면 사지 않아도 되니까.
“당연하지.”
“그럴 줄 알았어.”
A와 B가 꺄르륵 웃는 소리가 천진하게 퍼졌다.
“아, 맞다.”
C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주소 알려줄래? 이번에 R사에서 주문제작한 디저트 괜찮아서 보내주려고.”
“나는 괜찮아.”
주소를 메시지로 보내는 A와 B 사이에서 나는 멋쩍게 말했다. C는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먹음직스러운 디저트 아래에 몇십만원대의 금액이 떡하니 박혀있다. 다음에 그냥 같이 가서 먹자, 내가 말하자 C가 아쉽다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음 주에 청담에서 봐.”
곱게 짜인 트위드 재킷을 걸치며 A가 일어났다. B와 C도 뒤이어 몸을 일으켰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일어났다. 발끝에 전해져오는 아릿함에 구두를 벗어 던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래.”
노을이 카페 안으로 예쁘게 스며든다. 미래를 만난 날처럼.
“그 때 보자.”
좌우로 흔들리는 C의 손 위에서 다이아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참, 눈부신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