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문인 이규보는 그의 한시 <시벽(詩癖)>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그만둘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엔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깎아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이규보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시마(詩魔) 때문에 시 쓰기를 멈출 수 없다고 하였다. 후대에 남길 만한 훌륭한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살이 내릴 정도로 괴로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고, 스스로 돌아보아 뿌듯한 일도 아니건만 우리는 쓴다.
올해 문예창작공모전 소설부문에 제출된 작품은 총 16편이었다. 유례없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사회 제 분야에서 침체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지만, 창작열은 식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전개의 개연성, 문장 표현력 등도 예년과 비교하여 상당히 향상된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작품들이 주제적으로 ‘나’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침잠하고 있을 뿐,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전체적으로 초반부의 패기와 흥미로움을 결말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발목유령>, <7시 57분>, <선문답>은 각각 가족, 친구를 잃은 아픔과 극복, 혹은 극복 불가능을 다룬 작품이다. <발목유령>은 죽은 동생이 3년마다 되돌아온다는 착상의 기발함이, <7시 57분>은 장례 과정의 먹먹함을 전달하는 기법이, <선문답>은 그 바의 한구석에 독자를 앉혀놓고 대화를 엿듣게 하는 듯한 생생함이 좋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개인적 차원의 경험 서술이라는 느낌만이 드는 점이 아쉬웠으며, 이는 <내가 걷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고슴도치 아이>, <크레파스의 정답은>은 어린이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회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루었다. <고슴도치 아이>는 ‘가시’라는 은유를 사용하면서도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냈으나 결말이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맺어진 점이 아쉬웠다. 이는 <크레파스의 정답은>에도 해당된다.
기법이 독특한 작품도 있었다. <평범한 선화씨>는 집단 상담이라는 장치를 통해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배치한 점이 돋보였으며, <소녀와 신>은 다듬어 웹소설의 프롤로그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 당선작에서 제외했다.
장려로 선정한 <낭만주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과거와의 얽힘과 결별을 울진, 할머니, H라는 공간과 인물을 통해 그려냈으나 문장이나 표현의 측면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역시 장려로 선정한 <눈동자>는 재개발 지역의 이권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짝퉁>은 상층에 대한 속물적 동경을 지닌 인물들을 등장시켜 흥미를 끌었으나 두 작품 모두 인물들이 너무 전형적이라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서사가 진행되어 익숙한 느낌을 준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우수작으로 선정한 <세컨드 이방인>은 주전공, 복수전공 간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아정체성 탐색이라는 진부한 주제에 닿아있지만 유려한 문장으로 뻔함을 덜어냈다. <운명과 장난>과 <야누스>는 최우수상과 자리를 다툰 작품이다. 둘 다 서두는 강렬한 흡입력을 보여주었지만 뒷심이 부족했다는 평을 남긴다. <운명과 장난>의 결말은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야누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최종작으로 선정한 <긴머리양>은 계속해서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초반부의 구성을 높이 사고 싶다. 등장인물에 대한 상이 머릿속에서 완성될 무렵, 작가는 이것이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다만 결말은 역시 아쉬운데, 그 아쉬움이 재미있는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독자의 심리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주면 좋겠다.
신입생 특별상 <리반: 가면을 쓴 글>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 없다. 완벽하게 허구적인 시공간과 인물을 직조하여 한편의 풍자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성장을 기대한다.
어쩌면 소설마(?)가 붙었을지 모르는 16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고통과 별개로 즐겁고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내년에는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심사평을 마친다.
심사위원 이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