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0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리반: 가면을 쓴 글
미래융합스쿨
20206639 정충민
* 이 소설은 허구적인 이야기로 등장하는 인물, 장소 등의 명칭은 가짜입니다.
1865년 3월,
영국 워털루 광장 어딘가의 문학 살롱은 열띤 대화로 시끌벅적했다.
평일 오후에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는 건 매우 드물었다.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 있는 점도 좀처럼 없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일정이 빈 문학인이라면 살롱에 찾아들었다. 수십 개의 좌석과 책상이 한두 개의 빈 자리를 제외하고 가득 찼다. 창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방 안이 열의로 폭발했을 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의자에 앉아있던 늙은 신사가 회중시계를 손에 쥐고 보았다. 시침이나 분침 중 하나가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떴다가 시간이 됐음을 알아챘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살롱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잘나봐야 그보다 잘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문학 살롱의 주인이자 도시 내에서 유명한 최고의 갑부다. 나이가 들수록 주름과 비례하여 재산이 쌓인다는 소문도 있다. 호기심에 못 이겨 그의 눈가주름을 일일이 세 보려고 시도하는 젊은이도 몇 있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부드럽고 나긋한 인상을 지녔다. 작가와 대화하는 것, 독서, 사업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에는 왕립지리학회에서 활동할 정도로 모험심이 강하고 강인한 신체를 가졌다. 그의 기상은 곧 중요한 발표가 있음을 알린다. 나이가 많든 젊든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태생은 스코틀랜드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존 불’을 닮았다고 한다.
“오늘도 저의 살롱에 오신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하고, 잠시 시간을 주시길 청합니다. 아메리카대륙에선 한창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평화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평화를 주신 대왕폐하께 감사드리며 계속 말을 잇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우리의 관심은 한 명의 작가에게 몰려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든 지금 영국에서 일주일을 지내기만 하더라도 들었을 이름입니다.
문학의 거장들 속에서 자라는 그의 이름은 ‘리반(Riban)’! 누구도 과거를 알지 못하고 외모는 더더욱 베일에 가려있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심지어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모릅니다. 성별은 글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극도로 사실적 묘사와 다채로운 문체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저는 출판된 리반의 첫 작품을 읽고 깊게 감명 받았습니다.
작가라면 제 살롱에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수개월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하게 저는 선언합니다. 그를 저에게 데려오는 자에게 2500파운드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남녀 가리지 않고 입을 벌렸다. 당연히 놀랄 만하다. 상당히 큰 금액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마음만 먹어도 식민지를 살 수 있다. 즉, 신뢰해도 좋은 말이다. 몇몇 귀부인들은 프랭크의 말을 빨리 퍼트리고 싶은지 분주히 문밖으로 나갔다. 기자들도 좋은 기사거리라며 흥분해 밖으로 나갔다.
프랭크는 그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었다면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제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능력이 된다면 그를 사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황홀해했듯이 저 또한 리반의 글에 빠졌습니다. 그와 대화하며 밤을 지새워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오늘부터 제가 죽기 전까지 리반을 데려와 입을 열게 하는 자에게 큰돈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일었다. 놀라서 갓난아이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프랭크의 선포는 곧 웅성거림이 뒤덮었다. 거금을 받기 위해 전처럼 열띤 대화가 열렸다.
리반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프랑스의 철가면처럼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작가였다. 맨 처음 글을 찍은 인쇄업자조차 리반이라는 이름만 알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은 대중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정체에 대한 궁금증은 나날이 커졌다.
누구는 도망자라고 하고, 누구는 귀족이라 했으며 누구는 자신이라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알고 싶다. 영국인은 세계 각국의 미지를 모험하기 좋아하듯 그를 파헤치기를 원했던 것이다.
****
다음 날은 잠잠하리라고 생각했다. 사업장을 감사하고 마차를 통해 살롱에 도착한 프랭크가 발길을 옮겼다. 하인이 문을 열고 그가 살롱으로 들어섰다. 안은 한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여자를 본 남자들처럼 말이다.
“무슨 일인가?”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프랭크가 물을 마시는 남자에게 물었다.
“리반의 대리인이라면서 저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상대는 정중히 인사하고 대답했다.
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어깨를 두 번 가볍게 때리고 재미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진지하게 다시 말을 했다.
“정말입니다. 저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리반의 친필사인이라며 편지도 가져왔으니 확인해보세요.”
“정말인가? 말도 안 돼. 저 청년은 누구인가!”
프랭크는 외치며 무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등장에 자리 하나를 비웠다. 리반의 대리인은 살롱의 주인임을 이미 아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신사답게 인사했다. 대리인이라기에는 옷이 단출했다. 그 말을 진짜 한 사람도 있었다. 새 옷이 아니라 빈민가 사람 같이 입고 있어서였다. 프랭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여 안경을 벗었다 꼈다.
침을 삼키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정말 리반의 대리인인가? 소개를 부탁하네.”
신출귀몰한 작가가 대리인을 보내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중심에 앉은 대리인은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늘름한 자태가 용맹한 기사 같아서 이목을 끌었다. 기다란 손가락,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18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가 특징적인 청년이었다. 대략 나이는 스물쯤 되어 보인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깔끔해서 옷만 신사적으로 바꾼다면 멋진 신사이다.
“프랭크 씨의 제안에 따라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 저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브라이언(Brian)이고, 리반 씨의 조수이자 대리인 자격으로 문학 살롱에 들렀습니다. 물론 이는 리반 씨의 지시임과 동시에 제 손에 들린 이 편지로 증명이 됩니다. 혹시 저를 의심하신다면 이 편지를 열어 읽고 사인을 확인하십시오. 출판된 책에 적힌 사인과 똑같은 필기일 것입니다. 리반 씨가 아침에 제게 이르기를,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에서 저명하신 프랭크 씨께서 나의 신원에 관하여 꽤 큰돈을 걸었구나. 평소에 그의 문학 살롱에 관심이 있었으나 들어가 보질 못했으니 네가 가거라. 내 편지를 들고 가면 사람들이 흥미를 보일 것이니 조심스레 행동해라. 결코 내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프랭크에게 한 개인적인 인사와 똑같은 인사였다. 모두 박수를 보내고 (프랭크를 포함한)미심쩍어 하는 이들은 당장 편지를 가져가 읽었다. 어제의 선포 이후처럼 침묵이 깔렸다.
브라이언은 편지를 되돌려 받고 좋은 인상으로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리반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다. 그때마다 그는 적절히 친절하게 답변했다.
“리반 씨는 혼자 사나?”
“네, 지금은 그렇습니다.”
“어디서 사나?”
“런던인 것만 일러두라 하셨습니다.”
“이놈! 네가 리반 씨의 대리인이라면 책의 내용 정도는 모조리 암기해도 시원찮다. 그의 소설 중 하나인 벽과 벽 사이의 도시의 의미가 무엇이라 하더냐!” 살롱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 지팡이로 브라이언을 겨누며 높은 언성을 냈다.
“어르신, 저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리반 씨는 그 소설에 대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벽이 있어서 유별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같은 인류이고 서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벽은 차별을 의미하며 차별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소설의 빈민가 소년과 귀족 소녀의 사랑을 노래하여 예술의 여신들인 ‘무사이’를 찬양하고, 둘이 결국 사랑으로 평등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비평하는 자들 중에 나를 죽이려드는 자도 있다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은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은둔하는 이유가 고작 그것을 두려워해서란 말인가. 자네는 리반 씨의 대리인이기 전에 무엇을 했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가 바랐다.
행동은 신사적이지만 겉은 아무리 봐도 상류층과 거리가 먼 청년이다.
“항해사였습니다. 고래잡이배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고, 몇 주 전에 돌아왔습니다. 바다야말로 낭만과 모험이지요.”
“그럼 항해사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냈나?”
“예, 그렇습니다. 더 이상 제 신상은 묻지 마십시오.”
“리반 씨의 후원자는 누구인가?”
“후원자는 정숙하고 아름다우신 숙녀분입니다. 저는 그 분에게만 아름답다고 말하려 애씁니다. 이름은 그녀가 밝히기를 싫어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쳇, 대답들이 마치 우릴 들먹이려 드는군.”
질투가 난 남자들은 콧방귀를 뀌며 브라이언에게서 물러났다. 브라이언이 하는 대답은 흥미롭지만 리반을 포착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셈이다.
“그럼 자네도 글을 쓰나?”
“네, 씁니다. 리반 씨에게 작문법을 배웠거든요.”
브라이언은 대답을 마치고 안주머니에서 접은 낡은 종이를 꺼냈다. 많이 접어서 선이 많고 손때가 묻어있었다. 그는 종이를 펼치며 말했다.
“이 종이에 적힌 건 제가 직접 쓴 글입니다. 볼품없지만 한 번 읽어보시고 리반 씨와 비교해주세요. 리반 씨도 칭찬해줬습니다.”
“뭐라고? 줘봐.”
리반의 대리인이 쓴 글은 금세 살롱의 화두가 되었다. 여전히 브라이언이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들도 글에는 관심을 뒀다. 한 번 읽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작가의 가르침을 받았다니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하나가 살롱건물 앞에 멈췄다.
네 마리의 말이 모는 마차이기에 시민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신사들은 어떤 사람이 내릴지 지켜보겠다며 멈춰서고, 젊고 늙은 여인들은 모여 웅성거렸다.
“메리, 살롱에 갔다가 금방 나올 테니 넌 근처 상점에 들어가서 고기를 사와라. 오늘 리반 씨를 위해 음식을 가져가야 한다.”
마차의 주인이 내릴 준비를 하며 맞은편에 앉은 하녀, 메리에게 일렀다. 마부가 문을 열자 화려한 치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는 스누드에 리본으로 장식하여 전체적인 모습이 우아하고 매력적이다.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마부는 메리까지 내리자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여인의 이름은 헬레나.
스코틀랜드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아 런던의 저택에서 살고 있다. 헤브리디스 제도를 여행하다가 문득 런던의 소식을 듣고 떠나왔을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 그녀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살롱의 문턱을 넘었다. 그녀의 등장에 남자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리반의 글을 베끼는 것만도 못하는 것 같구나. 더 열심히 쓰는 게 좋겠어.”
“평론가로서 말하자면 이런 걸 소설이라고 내놓는다면 사람들이 종이가 아깝다고 할 거야.”
“훌륭한 묘사지만 연결성이 부족해.”
비판 속에서 브라이언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보란 듯이 회중시계를 한 번 꺼내보고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프랭크 씨, 리반 씨가 시간이 된다면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오, 정말인가? 나와 대면하고 싶다고 했어?”
“예, 때가 되면 정체를 밝히리라고 말했었습니다. 헬레나 양,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그는 마음대로 섞이지 못하는 여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헬레나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옆에 붙어 살롱을 유유히 나갔다. 사람들은 재미삼아 둘의 관계를 유추했다.
그 중 예리한 시선을 가진 한 남자가 확신했다.
“저 여자가 바로 리반의 후원자야! 분명히 그럴 테야. 그러지 않고서야 둘이 뭉칠 이유가 없어!”
애드거 앨런 포가 둘을 본다면 단번에 관계를 맞출 수 있었을까?
그건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
프랑스 어로 쓰여진 쥘 베른의 책(지금 그가 읽고 있는 건 기구를 타고 5주간이다)을 읽으며 푹신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건 그의 행복 자체다.
고즈넉한 방 안에는 낡은 침대, 책장, 널판 따위가 뒤죽박죽 자리하고 의자가 가운데에 놓여있다. 화로는 없고 주방은 있다. 방 한 칸에서 살아가는 그는 자신이 빈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도박, 사치를 부리지 않고 펜만 붙잡는다. 그의 글이 정말 세상에 나가리라고는 스스로도 상상치 못했다. 심지어 그 글이 잘 팔릴 지도 몰랐다.
그는 책이 출간됨과 동시에 출판업소로 편지를 보내어 다음 작품을 계약할 테니 헬레나에게 자신이 받아야 할 금액을 줄 것을 요구했다. 작가이자 출판인인 피에르 쥘 에첼은 그렇게 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자신을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며 책의 페이지를 넘긴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덮었다. 육분의, 지도 등을 헤집기 시작했다. 거의 바닥에 나무로 된 접시 하나가 나왔다. 그는 이미 식탁에 올려있는 그릇 하나 옆에 그 그릇을 닦아 올려놓고 나이프와 포크, 촛불을 챙겨 상을 놓았다. 천장이 낮아 가끔 허리를 숙이기도 해야 했다.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는 때에 기묘하게도 문이 두들겨졌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고 촛불도 주위를 더욱 밝게 비추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단숨에 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헬레나가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덤덤하게 서있었다.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그가 먼저 말했다.
“오늘만 인사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이것이 잘못된 행위입니까?”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정말 혼자 들어오셔도 되겠습니까?”
“그럼 이 좁은 집안에 누굴 더 데려와야 하나요?”
그녀의 새침한 응수에 그는 그녀를 집으로 들였다. 문이 닫히고 요리가 접시 위에 올라갔다. 서로 마주보고 앉은 남녀는 식사를 시작했다.
“리반 씨, 정말 이대로 괜찮겠어요?” 헬레나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어스퀴보가 없는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지요. 더불어 당신이 이렇게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풍족합니다.”
“그게 아니에요. 살롱에 당당히 들어서는 게 편하잖아요.”
동등한 신분이 아님에도 그녀는 격식을 갖추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리반을 얼마나 존경하는 지 알 수 있다. 리반은 수건으로 입을 닦고 말했다.
“나 같은 미천한 사람은 돈에 쫓겨 글을 쓰곤 합니다. 당신이 주신 옷과 책으로 스스로를 교양 있게 꾸미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그렇기에 저는 자신을 꾸미고 남들 앞에 서기로 다짐했습니다. 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의 환상이 깨지고 제 글은 누구도 읽지 않을 겁니다. 제가 유령이기에 그들은 제 글을 좋아하는 겁니다. 그건 오늘로 증명이 됐지요.”
“오늘로 증명이 됐다니요?”
“살롱에서 이미 세상에 드러난 글을 살짝 바꾸어 보여줬습니다. 허투루 문장을 쓰지 않았고 저는 지금의 책보다 더 낫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살롱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종이가 아까울 지경이라더군요.”
살롱에서 직접 보여줬다. 자신이 쓴 글을. 살롱사람들이 알고 있는 건 리반의 대리인뿐이다.
그는 ‘직접’ 자신이 쓴 글을 살롱의 문학인들에게 보였다.
헬레나는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접어진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것을 읽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편안한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 글은 재미있지요. 물론 저도 남들처럼 당신이 리반임을 아니까 훌륭하다고 여기고 읽는 걸지도 모르지요. 편견은 몸에 자연스레 배어드는 냄새와 같으니까요. 아, 맞다. 알려드릴 게 있어요. 출판업소와 상의하여 삽화가를 구하는 중이에요. 당신의 글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선 흥미로워요. 앞으로도 저와 함께 해주실 건가요, 브라이언 씨? 이제 단둘이니까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지요?”
‘리반’이라는 가면을 쓴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오늘 들었던 살롱에서의 비난을 연료 삼아 집필의지를 불태웠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도 서로 최고라 평가하는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입에 오른 사람만 수십은 되었다. 빅토르 위고, 뒤마, 대니얼 디포, 호손 등의 이름이 음식의 연기와 함께 창밖으로 새어나갔다.
****
다음날, 살롱은 세 번째 놀라움에 빠져 시끄러웠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프랭크가 외치며 빠른 걸음으로 젊은이들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질문을 하지 않아도 답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동굴 속에서 뜻하지 않게 광명이라도 본 듯이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진 건 한 장의 편지였다.
그 편지가 든 봉투에는 다음과 같이 리반의 필체로 적혀있었다.
「살롱의 주인, 프랭크 씨에게
작가, 리반 올림」
편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고 당연하다는 듯이 프랭크가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프랭크 씨? 당신이 제 정체에 대해 현상금 비슷한 거금을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저는 더더욱 정체를 숨기고 살롱엔 얼씬도 하지 못하겠군요. 그래도 살롱은 문학인들의 교류가 활발한 만큼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프랭크 씨의 살롱은 더더욱 말입니다. 제 계획은 대리인을 만들어 보내는 것이었죠. 어제 살롱을 방문하고 와서 그가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교양 있고 격식 있게 차려 입었지만 말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눈은 붙어있으나 제 기능을 못하여 다빈치에게 분석을 의뢰하고 싶어진다. 하나둘 모여 글을 읽고는 신랄하게 깎아 내렸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가 공개한 글은 제가 출간한 책의 일부를 조금 바꾼 것일 뿐입니다. 살롱의 사람들 중에 글의 내용을 기억하기보다 단점을 부각하려는 자가 더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 같은 작가가 똑같이 공들였는데도 어떤 글은 대단하고, 어떤 글은 대단하지 않단 말입니까? 살롱의 사람들은 작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유행을 사랑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드는 밤이군요. 시간이 된다면 찾아가겠습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십시오.”
편지가 끝마쳐지자 듣느라 차분하던 분위기가 들끓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거리까지 쏟아져 나왔다. 길을 걷던 이들이 창문을 올려다볼 정도였다.
한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무엇이 대단하고 평가할 지는 독자의 몫이다.
눈을 가리고 더 맛난 음식을 고르라고 하면 간혹 뜻하지 않은 음식을 고를 때가 있듯이 글 또한 그렇다. 작가가 누군지 모른 채 읽으라고 제시하면 누구는 의도치 않게 자신이 싫어하는 내용의 책을 고를 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해서 자주 실수하고 잊는다.
골목에 서서 살롱의 건물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이런 생각을 했다.
셰익스피어 이후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나 시도는 해보고 싶다.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훌륭한 글을 쓰고 있을 거라 확신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다.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가 그것을 증명하듯 말했다.
“리반이란 놈이 얼마나 대단한 글을 내놓을지 궁금하군!”
같은 것을 두고도 같음을 알지 못하니 그것은 맹인인가, 바보인가? -브라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