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7 사용자공유공간planc(전주)
원형 투명상자(지름 90cm, 높이8cm), 향과 향꽂이, 오디어 시스템, 프로젝션 시스템, 소리나는 그릇(싱잉볼), 파란가루.
두 번째 생, 첫 번째 질문은 여전히 탐색중이다. 답은 물론이고 질문도 쉬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그 과거를 기반하는 현재이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과거와 현재라는 기준없이 경험과 지식없이 문득 또는 이유없이 미래를 불러오는 게 가능할까? 위안같은 의심이 생겨난다. 현실세계를 살아내는 ‘나’와 미래를 향하는 그것도 너무 멀리 향하는 예술로서의 ‘나’의 괴리가 여전하지만 문득 그조차도 상관없이 낯선 생을 맞이해본다.
라이브퍼포먼스아트 <낯선 생>은 3개의 향을 태우며 시작된다. 향은 과거에 존재했던 이들을 공간속으로 불러들인다. 물질을 흔드는 바람의 행위는 비-존재를 공간에 머물게 하고 공간의 주변을 감싸는 소리들은 공간을 배회하는 물질을 진동 속에 가둔다. 주체의 반복 행위는 첫 번째 생을 물질의 파동으로 변환시킨다. 소리나는 그릇의 3번의 울림은 파동을 다시 소리로 전환시키며 과거와 현재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미래를 불러온다. 탄생하는 자, 미래에서 불리워진 자, 두 번째 생을 맞이하는 자의 피는 파란색이다.
낯선 생은 과거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불러오는 것이다. 결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우연과 마주침을 기반하는 미래이다. 탄생하는 자의 피 색깔은 꼭 파란색이지 않아도 된다. 그저 피를 가지고 있음을 불러오는 것이다. 빨간색 피에 대한 대항이나 대안이 아니라 근거없는 탄생이다. 그런 탄생이야말로 미래를 온전히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투명화는 그저 흔한 사라짐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불리워지지 않으며 기억을 근간으로 하지 않기에 현재에 있지 않고 미래로 향한다. 질서 없음, 원인 없음이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차이를 수용하고 즉각적으로 과거를 지우는 행위이다.
2019.10.05 까페돈키호테(전주)
나무토막, 향, 한지(90×90cm) 또는 프로젝터, 투명한 사각상자(90×90×180cm), 스프레이
나의 관심은 ‘관계’이다. 2017년 발표된 라이브 퍼포먼스아트 <시선>은 관계를 가능하게 조건으로써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언어적 요소르 드러내고자 했다. 2018년 여름 발표된 <반복과 증폭에 맞서는 투명화 전략>은 드러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어 2018년과 2019년 봄에 발표된 <두 번째 생>을 통해 , 전략으로써 ‘두 번째 생’이 선언되었다.
‘인류의 생존전략은 미래에도 ‘드러냄 전략’을 유지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닦달함으로써 실현되는 그 드러냄이다. 드러냄 반대편의 전략은 숨거나 감춘다기 보다 ‘투명화’라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투명화 전략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들은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자들, 죽은자들,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현실화되지 않는 자들이다. 투명화는 드러냄에 반대편에 있지만 드러냄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않는다. 드러냄을 멈추고 전략으로써 투명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것이 인류문명에 특히나 개체로서의 사람에게 어떻게 구체화 될 것인지? 그것이 분명 허무맹랑한 말장난으로 보인다 할 지라도 시도해봐야 한다. 지극히 현실 불가능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 죽음을 이해하고 전략으로 삼을 수 있는지? 닦달이 아니라 지극한 우러나옴을 시도해본다.‘
라이브 퍼포먼스아트 작품 <두 번째 생, 첫 번째 질문>은 ‘세계와 존재의 관계’이다.
세계는 어둠과 빛, 방위와 시간, 영역과 경계, 행위와 감정의 탄생순으로 조직되지만
인류의 기억과 감정과 마음 또는 살고자 하는 의지처럼 ‘있다고’ 인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보이지않는 존재들, 개념으로서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관계맺음에 한계를 느낀다.
2019.08.11 광주518민주광장(광주)
파란천(10×10m), 나무의자, 녹색식물이 있는 화분, 만물은 서로 돕는다(책, 한국어판), 해머드릴, 신발, 장난감블럭, 나무상자
나의 관심은 ‘관계’이다. 2017년 발표된 라이브 퍼포먼스아트 <시선>은 관계를 가능하게 조건으로써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언어적 요소르 드러내고자 했다. 2018년 여름 발표된 <반복과 증폭에 맞서는 투명화 전략>은 드러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어 2018년과 2019년 봄에 발표된 <두 번째 생>을 통해 , 전략으로써 ‘두 번째 생’이 선언되었다.
‘인류의 생존전략은 미래에도 ‘드러냄 전략’을 유지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닦달함으로써 실현되는 그 드러냄이다. 드러냄 반대편의 전략은 숨거나 감춘다기 보다 ‘투명화’라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투명화 전략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들은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자들, 죽은자들,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현실화되지 않는 자들이다. 투명화는 드러냄에 반대편에 있지만 드러냄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않는다. 드러냄을 멈추고 전략으로써 투명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것이 인류문명에 특히나 개체로서의 사람에게 어떻게 구체화 될 것인지? 그것이 분명 허무맹랑한 말장난으로 보인다 할 지라도 시도해봐야 한다. 지극히 현실 불가능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 죽음을 이해하고 전략으로 삼을 수 있는지? 닦달이 아니라 지극한 우러나옴을 시도해본다.‘
라이브 퍼포먼스아트 작품 <두 번째 생, 첫 번째 질문>은 ‘세계와 존재의 관계’이다.
세계는 어둠과 빛, 방위와 시간, 영역과 경계, 행위와 감정의 탄생순으로 조직되지만
인류의 기억과 감정과 마음 또는 살고자 하는 의지처럼 ‘있다고’ 인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보이지않는 존재들, 개념으로서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관계맺음에 한계를 느낀다.
2019.06.21. 이강하미술관(광주)
나무토막, 향, 드라이아이스, 뜨거운 물, 투명한 사각상자(65×56×75cm)
나의 관심은 ‘관계’이다. 2017년 발표된 라이브 퍼포먼스아트 <시선>은 관계를 가능하게 조건으로써 비가시적 비물질적 비언어적 요소르 드러내고자 했다. 2018년 여름 발표된 <반복과 증폭에 맞서는 투명화 전략>은 드러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어 2018년과 2019년 봄에 발표된 <두 번째 생>을 통해 , 전략으로써 ‘두 번째 생’이 선언되었다.
‘인류의 생존전략은 미래에도 ‘드러냄 전략’을 유지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닦달함으로써 실현되는 그 드러냄이다. 드러냄 반대편의 전략은 숨거나 감춘다기 보다 ‘투명화’라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투명화 전략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들은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자들, 죽은자들,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현실화되지 않는 자들이다. 투명화는 드러냄에 반대편에 있지만 드러냄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않는다. 드러냄을 멈추고 전략으로써 투명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것이 인류문명에 특히나 개체로서의 사람에게 어떻게 구체화 될 것인지? 그것이 분명 허무맹랑한 말장난으로 보인다 할 지라도 시도해봐야 한다. 지극히 현실 불가능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 죽음을 이해하고 전략으로 삼을 수 있는지? 닦달이 아니라 지극한 우러나옴을 시도해본다.‘
라이브 퍼포먼스아트 작품 <두 번째 생, 첫 번째 질문>은 ‘세계와 존재의 관계’이다.
세계는 어둠과 빛, 방위와 시간, 영역과 경계, 행위와 감정의 탄생순으로 조직되지만
인류의 기억과 감정과 마음 또는 살고자 하는 의지처럼 ‘있다고’ 인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보이지않는 존재들, 개념으로서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관계맺음에 한계를 느낀다.
이 작품은 1948년 4월 3일~1954년 9월 21일, 7년 7개월동안 제주도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희생자 14,44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7,624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528명 외, 유족 72,845명. 2019년 12월 기준 4·3위원회 통계)의 위패와 5.18광주민주항쟁 희생자 195명의 위패를 시각화한 설치작품‘Black Ribbon’의 후속작이다.
작품 <두번째 생>의 모티브는 나무로 만들어진 1만여개의 위패다. 작품은 위패에 새겨진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며 시작된다. 약 180여개의 이름이 불리우고 순서대로 탑을 쌓아 올리고 탑을 태운다. 태우는 행위는 제사를 지내고 지방을 태우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4.3희생자들이 그 영혼들이 연기속에 스며들며 흩어진다. 태우는 행위는 믿음으로 비롯되기 보다는 주체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마주침에 대한 환대다. 환대로부터 현재를 살아내는 힘을 얻고 미래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생은 지속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은 잠시 스쳐 지나는 현재일 뿐이다. 두 번째 생은 첫 번째 생의 연속선에 있은 것이 아니라 독립적이다. 두 번째 생은 단절을 필요조건으로 삼지 않는 선언이다.
2018.09.08 소촌아트팩토리(광주)
줄자, 커다란 못, 망치, 빨간색 끈, 삽, 타이머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변방의 이름없는 그가 논하기엔 어려운 물음이다. ‘왜 예술인가?’ 이 또한 그렇다. 이 물음들은 구도로써의 질문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물음에도 매번 실패를 거듭한다. 목적은 실현되지 않은 채(그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유보가 반복되고 그는 반복되는 시선과 증폭되는 사건들 속에 휘말린다. 어쩌면 삶이란 드러내는 것이 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각화되는 것만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지 않을까? 드러내지 않기가 아니라 투명화하는 태도와 방법, 드러냄에 또는 드러내지는 것들에 맞서는 투명화 전략 그와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드러냄이 생성되지 않을까?
<시선>은 작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라이브퍼포먼스작품이다. 관객 모두는 작은 원형거울을 가지고 있고 작가의 방향에서 쏘아지는 녹색의 레이저 광선을 반사시켜 다른 이에게 보낸다. 네 개의 녹색레이저광선이 관객에게 쏘아지고, 쏘아진 광선이 관객을 교차한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녹색광선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다른 이에게 옮겨지고, 예고없이 단절되기도하고 끝내 사라져버리기도 하면서 주체들의 관계망을 시각화한다.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시각화하는 녹색 광선에 있기 보다는 녹색광선을 흐르게 하는 거울과 거울, 개체로써의 관객과 관객의 사이에 있을, 있어야만 하는 어떤 물질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암흑물질이라 불리울 만한 것이다.
개체로서의 물질과 물질,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 사람과 비물질 사이에 그것들을 사이띄기 하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주는 어떤 것, 그것은 도덕과 같은 사회적 질서일 수도 있다. 인식 또는 지식체계일 수 있고, 감정일 수 있다. 아니 그것보다는 미세한 움직임, 말투나 말소리, 걸음걸이나 옷차림 등에서 말로 옮겨지기는 어색한 것들, 언어로부터 배제된 그래서 없는 것처럼 인식되게 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언어화되지 않는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또는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그래서 결국 없다고 인식되어 버리는 투명화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예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