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더불어 봄을 이룬다(與物爲春) (2025)는 ‘광장’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설치작업입니다. 작가는 광장을 단순히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로 인해 ‘만들어지는’ 공간으로 바라봅니다. 한국 사회에서 광장은 월드컵응원, 촛불시위 등 다양한 순간마다 일시적으로 형성되고 사라지는, 일종의 공동체적 실천의 현장이자 집단적 기억의 장소입니다.
작품은 수십 개의 솜이불로 엮인 구조물을 통해 관람자에게 물리적이면서도 감각적인 ‘포근한 광장’을 제안합니다. 천장에 매달린 솜이불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드리우고, 바닥의 발 받침 구조물을 오르내리며 관람자는 솜이불 틈 사이로 몸을 내밀어 공간과 상호작용하게 됩니다. 이 공간은 따뜻함과 부드러움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공중에 매달린 마이크를 통해 속삭임과 외침이 겹쳐지며 새로운 공동체적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작가는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미술관 내부를 또 하나의 광장으로 전환시키며, ‘포근함’이라는 감각 자체가 예술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Black Ribbone은 제주4.3항쟁 희생자 14,117명, 5.18광주민주항쟁 희생자 195명. 14,312명 희생자의 위패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시작과 함께 자행되었던 모든 국가폭력에 반대하며, 숫자로만 읽히는 <14,312>를 위패(나무조각, 100×30×8)의 형태로 63㎥의 공간속에 설치, 시각화함으로써 상상으로만 가능한 국가폭력의 실상을 고발한다.
나는 선미촌에 대해 단순하게 말하지 못한다.
예술이란 도구를 가지고선 더더욱 그러하다.
선미촌을 향한 가장된 시선들이 질서 정연하다.
논리적으로 말이다.
가장된 세탁소, 가장된 인권, 가장된 예술이
가장된 동정, 가장된 정치가 숨지도 않고
시선을 보낸다 아니 받는다.
그만큼이나 폭력과 두려움과 천박함이 어지럽다.
화려한 언니들의 몸을 뚫고 자본이 흐른다.
어두움을 뚫고 화려하게 빛을 낸다.
자본이 언니들의 눈을 뚫고 나와 불쾌한 시선들이 오간다.
비열한 착취가 곳곳에서 횡횡한다.
남성들의 가장된 욕망을 위한 언니들.
시선들은 그녀들을 핑계로 지껄이고 있다.
나도 지껄인다.
가장된 나는 천박함을 뒤집어 쓰고 지껄인다.
되돌아오는 시선을 회피하지 못한 채 갇힌다.
마주 대할 수 없다.
나는 두려움 앞에 선다.
어둡고 좁다란 통로에, 방앞에 선다.
되돌아오는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서있다.
아우슈비츠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 선다.
친구의 살아 있음에 안도하는 그녀 또는 그가 있다.
가장된 예술, 선미촌에 친구가 살고 있다.
낯선곳에가면 나는 의도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보인다. 얼굴과 차림새, 걸음걸이, 담배피우는 모습 그리고 까페앞에 앉아있는 사람들. 그리곤 풍경을 보게되고 익숙해지면 공간을 메우는 보도블럭, 팬스, 문고리, 현관과 차양, 쓰레기통, 재털이, 손잡이, 창문, 벽들, 골목을 그리곤 사람들을 본다.
초겨울같은 찬바람이 턱언저리를 얼얼하게 한다. 40분정도을 산책하다 몇일전에 갔던 까페에 앉았다. 젊은 남자가 반가워한다. 달달한 케익에 커피 한모금을 한다. 달다.
폴란드의 4일동안의 일상은 편안하다. 걱정과 근심이 사라진 상태로 놓여있다. 그러나 한가지 놓지 않아야하는 단어가 있다.<천박함> 현재의 나의 화두는 천박함이다. 서구의 합리성과 근대성이 무엇이라 정의할 재주는 되지못한다. 다만 반복해서 저지르는 나의 실수는 자본의 천박함을 따르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성을 가지고 싶어했던 제국주의 일본이 저질렀던 그 천박함을 말이다. '천박함'이라는 화두의 시작은 선미촌이었고 군함도, 제주도, 조선의 전영역에서 자행되었던 제국주의 일본의 강제노동과 비열한 착취로 이어졌다. 그리고 전주의 문화현장과 예술영역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언뜻 천박함은 고귀함이나 고급스러움의 반대말인듯하다. 과도한 치장, 졸부, 비열, 가난 등을 연상하게 된다.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천박함은 사전적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 가장된 고급스러움이나 가장된 정의, 가장된 도덕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속지 않고 타인을 속이고 있다고 믿는 이들. 이미 자신도 그 속음수의 한켠에서 벗어나 있지 못함을 끝내 모르는 이들. 온갖 핑계를 가져다 인간의 나약함을 설파하는 이들. 삶을 앞세워 어쩔 수 없음을 자신있게 말하는 이들. 그들의 얼굴과 차림새, 걸음걸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까페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기억해내야한다.
소촌아트팩토리(광주). 6조각의 거울, 수를 알 수 없는 빛줄기(Red, Blue, Green) 그리고 그의 신발, 5,011×2,350×2,620cm. 2018.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변방의 이름없는 그가 논하기엔 어려운 물음이다. ‘왜 예술인가?’ 이 또한 그렇다. 이 물음들은 구도로써의 질문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물음에도 매번 실패를 거듭한다. 목적은 실현되지 않은 채(그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유보가 반복되고 그는 반복되는 시선과 증폭되는 사건들 속에 휘말린다. 어쩌면 삶이란 드러내는 것이 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각화되는 것만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지 않을까? 드러내지 않기가 아니라 투명화하는 태도와 방법, 드러냄에 또는 드러내지는 것들에 맞서는 투명화 전략 그와 동시에 새로운 방식의 드러냄이 생성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