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천주고
1️⃣ 종교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천주고
나는 문득, 신앙이란 과연 언제 한 사람의 내면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결심처럼 찾아오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하지 못한 채 삶의 가장 이른 자리에서부터 조용히 스며드는 것인지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신앙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환경이자 우연으로서 내 삶을 감싸고 있었던 듯하다. 부모님의 영향 아래 모태신앙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쩌면 내 존재의 출발점부터 신앙이 하나의 배경이 아니라 삶의 기초였음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나는 특별한 이유를 또렷이 설명할 수 없지만, 대전 판암동의 성당을 매주 토요일 30분씩 걸어가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순한 발걸음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 곧 보이지 않는 영적 힘에 대한 어린 영혼의 응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장된 확대 해석이라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그 시절이 행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성모’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경험 역시 내게는 상징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곳은 단순히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보호가 삶 속에 자연스레 언어와 분위기로 스며드는 자리였다. 수녀님이 6년동안 담임 선생님이셨던 환경은 나에게 고급스러운 질서와 절제, 그리고 겸손을 배울 수 있는 축복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 시절 나는 신앙을 거창한 교리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인간의 삶이 눈에 보이는 질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감각, 그리고 은총은 일상 속에 조용히 임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수용하고 있었던 듯하다. 결국 지금의 내가 지닌 종교적 영향과 신념은 어느 한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기억과 정서, 그리고 공동체의 숨결 속에서 점진적으로 굳어져 온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신앙은 내게 단지 물러받은 신앙(inherited faith)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되새김되고 내면화된 삶의 방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내가 걸어왔던 그 오래된 성당 안에서의 길은, 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내게 건네신 부르심의 길이 아니었을까. 내가 주님을 찾은 만큼 주님도 나를 찾고 계시지는 않았을까 말이다.
나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인간에게 종교는 왜 필요한가. 과연 종교는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심리적 장치에 불과한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묻는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의 결핍과 지향을 함께 성찰하게 만든다. 아마도 종교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으나, 끝내 생로병사와 상실, 죄책과 무의미의 문제 앞에서는 스스로를 완전히 구원하지 못한다. 이때 종교는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높은 질서와 의미 앞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하는 인간만 부여잡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곧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초월을 사유하게 만드는 내면의 문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종교는 삶의 의미를 묻도록 만든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과 소유가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분주하게 살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일어난다. 종교는 이러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게 하며, 존재를 보다 깊은 차원에서 해석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인간을 단지 기능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갈망하는 영적 존재로 이해하게 만든다.
종교는 또한 공동체를 필요하게 한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관계 속에서 무너지고 또 관계 속에서 회복된다. 믿음의 공동체는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과 불안을 함께 짊어지게 하며, 삶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울타리가 된다. 여기서 종교는 개인의 사적 위로를 넘어, 서로를 수용하고 책임지는 공동의 윤리로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종교는 단지 하늘을 향한 일이 아니라, 곁에 있는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배우는 훈련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깊이 말하자면,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결국 자기 자신만을 주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동시에 길을 잃는다. 욕망을 따라 살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영혼이 평안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종교는 자기부인의 언어를 가르친다. 내 뜻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나보다 크신 뜻 앞에 자신을 낮추고 순종할 때 비로소 존재의 질서가 회복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이 점에서 종교는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방황하는 자아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영적 정향(定向)일 수 있다. 천주교에서는 매주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올소이다."라고 읊는 것 또한 이러한 관점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물론 종교가 언제나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종교성은 배타와 위선, 맹목을 낳기도 한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외형적 열심보다 내면의 진실함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신앙은 자신을 의롭다 여기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부족함과 죄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는 겸허의 길이자 겸손을 이해하는 행위여야 한다. 결국 종교는 인간이 약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너무 깊은 존재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 있고, 보이는 세계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다. 종교는 그 공허를 값싼 확신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핍을 통해 초월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어쩌면 종교란, 삶의 모든 질문에 즉시 답을 주는 체계가 아니라, 끝내 혼자서는 다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의 무게를 하느님 앞에 조용히 내려놓게 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 말못할 각자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짊어지고 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본다.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결국 인간이 주님의 사랑 없이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2️⃣ 우리에게 발생한 문제 중에 우리가 해결 못하는 것들은?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과연 인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제도를 만들고, 지식을 축적하며 많은 난제를 극복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제들은 여전히 인간의 능력 바깥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것은 단지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유한성과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죽음을 늦출 수는 있어도, 끝내 제거할 수는 없다. 누구도 자신의 생을 영원히 붙들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근본적인 무력감을 경험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자신이 주재자(主宰)가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생명은 관리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완전한 소유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인간은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 이미 내뱉은 말, 이미 저지른 잘못, 이미 떠나보낸 관계는 아무리 후회해도 완전히 처음과 같아지기는 어렵다. 우리는 사과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고, 회복을 위해 애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를 되감아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죄책과 회한 앞에서 자주 후회를 남기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용서와 수용, 그리고 은총의 질서와 사랑일 것이다. 인간은 또 타인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상대를 설득할 수는 있어도, 상대의 내면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사랑을 강요할 수도 없고, 신뢰를 명령할 수도 없으며, 떠나려는 이를 붙들어 둘 수도 없다. 관계는 언제나 나의 의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때로 깊은 고독을 남기지만, 동시에 타인을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존재로 존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다. 이성이 있음에도 욕망 앞에서 흔들리고, 선을 알면서도 악을 행하며, 결심한 길을 끝까지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외부의 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면의 분열인지도 모른다. 자기부인(自己否認)은 그래서 단순한 도덕적 구호가 아니라, 무질서한 자아를 바로 세우기 위한 깊은 영적 훈련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완전한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또 하나, 인간은 삶의 모든 고통의 의미를 끝내 다 해명하지 못한다. 어떤 아픔은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어떤 상실은 설명으로도 위로되지 않는다. 왜 어떤 이는 부당한 고난을 겪는지, 왜 선한 이에게도 눈물이 허락되는지, 왜 기도했음에도 침묵이 이어지는지, 우리는 명확한 답을 갖지 못한다. 이 침묵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종종 멈춘다. 어쩌면 신앙은 모든 해답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해답 없는 자리에서도 견디며 바라보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대개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와 맞닿아 있다. 죽음, 죄, 상실, 관계의 한계, 내면의 분열, 고통의 신비. 이러한 것들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없고, 오히려 겸허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는다. 해결할 수 없음은 인간으로서의 포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 존재를 향해 시선을 들게 하는 하나의 계기일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인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부름받은 존재가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누구를 의지할 것인지를 배우도록 부름받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붙들고 있는 이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은, 실은 나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영적인 부름이 아닐지 말이다.
3️⃣ 2025년 12월, 성가정과 하느님의 축복을 위하여
🔆종교와 신념 그리고 믿음🔆
2025년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된 암사동 성당
크리스마스
2025년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된 암사동 성당
나의 성모 마리아님
박주륭 이사악 대건안드레아 신분님께 받는 혼배 성사
정말 감사한 신부님.
2025년 1월 19일 박현숙 윤리안나 대모님과 김영석 마태오 대부님과 함께한 혼배성사와 이자벨라와 올리비아🤍
기도할 때 듣는 그레고리안 첸트, 당신의 삶에 평화와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4️⃣ 우리 주변에 있는 이콘과 축복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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