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의 배경은 도시의 대화재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진행되는 세자매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인들에게 화재라는 것은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1812년 모스크바 대화재 관련된 아픈 추억이 있기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주요 증상 중 하나인 '과각성(Hyperarousal)' 반응이 이 3막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심리가 불안정해지면서 자신들의 숨겨두었던 이야기, 민감해진 감성으로 인한 갈등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의 갈등이 폭발하고, 숨겨둔 사랑의 고백을 하는 장면이 벌어집니다.
작품의 배경이 1900년이고 모스크바 대화재는 88년전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6.25한국전쟁을 기억하듯 그들에게는 큰 상처이자 아픈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체홉은 그러한 배경을 이 작품의 3막으로 활용했습니다.
1812년 모스크바 대화재
1812년 모스크바 대화재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화재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대육군(Grande Armée)이 도시에 입성한 직후 발생하여, 도시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1812년 9월 14일, 나폴레옹의 군대는 보로디노 전투 끝에 러시아의 옛 수도인 모스크바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텅 빈 유령 도시를 마주했습니다. 러시아 군대는 후퇴했고, 27만 명이 넘는 주민 대부분도 도시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입성한 직후 도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 불길은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약 4일간 격렬하게 타올랐습니다.
모스크바 대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지만, 크게 세 가지 가설로 나뉩니다.
러시아의 고의적 방화 (초토화 전술)
가장 유력한 설은 러시아 측이 의도적으로 도시에 불을 지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동계 숙영이나 보급품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초토화 전술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표도르 로스토프친(Fyodor Rostopchin) 백작이 소방 장비를 모두 치우고, 경찰과 석방된 죄수들에게 명을 내려 주요 건물에 불을 지르게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프랑스군의 실화
일부 초기 보고에서는 프랑스 군인들이 숙영을 위해 피운 모닥불이나 약탈 과정에서의 부주의로 인해 불이 시작되었다고 추측했습니다.
혼돈으로 인한 자연 발생 (톨스토이의 관점)
레프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화재가 특정인의 계획이 아니라 군대가 물러나고 시민들이 패닉에 빠져 도시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인 혼돈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던 도시가 약탈과 무질서 속에 방치되면서 작은 불씨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는 것입니다.
화재는 모스크바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도시의 약 **4분의 3(75%)**이 소실되었습니다.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불길이 빠르게 번졌습니다.
수천 채의 석조 건물을 포함해 1만 채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교회가 불탔습니다.
다만 견고한 석조 요새였던 크렘린궁은 대부분 화재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모스크바 대화재는 나폴레옹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보급 차단: 나폴레옹은 점령한 수도에서 보급품과 겨울철 숙영지를 확보하려 했으나, 잿더미만 남은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헛된 기다림: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항복이나 평화 협상을 제안할 것이라 믿고, 불타버린 모스크바에서 약 5주(한 달)간을 허비했습니다.
비참한 후퇴: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이 닥쳐오자, 나폴레옹은 10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급품 부족, 추위, 그리고 러시아군의 끊임없는 괴롭힘 속에서 프랑스 대육군은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으며 후퇴했습니다.
이 모스크바 대화재와 이어진 참혹한 후퇴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