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르증후군과 <세자매> / 카를로 로벨리와 <세자매>
체홉의 <세자매>에는 군의관 체부뜨긴이 주저리 떠드는 얘기들이 극 전체를 감싸는 얇고 위태로운 막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세자매를 둘러싼 사랑, 불륜 그리고 죽음이 때로는 가슴 아프게 때로는 가슴 설레게 만드는 가운데 이상한 파장 혹은 잔광같은 느낌으로 체부뜨긴의 말이 떠돌아다닌다.
체부뜨긴은 어쩌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면서 '다 마찬가지야' 라는 말을 달고 다닌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혹은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라는 질문에 인간은 아직도 확실한 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마샤는 왜 사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하고, 올가는 머지않아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그것만 알 수 있다면 이라고 간절하게 외치는 지도 모른다.
체부뜨긴의 ‘다 마찬가지’ 라는 말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며 삶의 열정도 사라진 노인의 혜안인 듯 패배자의 넋두리인 듯 그렇게 돌아다니며 우리들을 괴롭힐지 모른다.
1874년 프랑스 의사 줄스 코타르는 자살 충동을 느낀 후 병원에 입원한 여성이 자기에게는 뇌도 신경도 가슴도 위도 내장도 없으며 썩어가는 몸뚱이에 피부와 뼈만 있다고 단언하는 경우를 보고했다. 이를 코타르 증후군이라 했고 워낙 희귀한 증상이었는데, 2015년 인도의 의사들이 보고한 한 여성의 사례에 의하면 이 여성은 암이 자기 뇌를 좀먹어 자기는 죽었다고 주장했고 검사를 해보니 뇌는 거의 정상이었으나 눈 몇 센티미터 뒤쪽 뇌섬엽겉질이라는 부위에 손상을 발견했다. 이 영역은 몸 전체에서 신호를 수신한 다음 우리 내부의 감각에 대한 의식적 자각을 생성하는데, 갈증이나 오르가슴 혹은 방광이 불편할 정도로 차올랐을 때 활성화된다고 한다.
살아있음을 자신이 직감하는 데는 뇌섬엽겉질로 유입되는 신호가 결정적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영역의 손상으로 우리 내부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면 그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뇌는 현실을 꿰어 맞추게 되고 자신을 죽었다는 것 말고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Carl Zimmer, 생명의 경계, 46쪽)
시간대를 감안해서 추론해보면 체홉은 코타르증후군을 알고 있었고, 매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증상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타인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증상. 당시에는 희귀한 증상으로 보고되었을 사례가 체홉의 직관으로 문학적으로 승화된 것은 물론이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증상의 원인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즉,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감각과 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감각되어지고 인지되어야 한다면, 의사가 됐지만 군의관이 된 뒤로 학습과 변화를 게을리한 체부뜨긴과 한때 찬란했지만 구습만 남아 아무런 ‘차이’가 없는 러시아 제국은 코타르증후군 환자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왜 막을 열자마자 시계종이 울리고, 캐릭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시간을 물어보고, 어머니의 유품인 시계가 고장나고, 군의관의 오래된 시계는 알람이 고장날까?
왜 베르쉬닌과 뚜젠바흐는 미래에 대한 철학논쟁을 늘어놓고, 안드레이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을까?
우연히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책을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시간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녹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로벨리는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로서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에 따르면 시간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합니다.
로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을 구분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없다, 즉 변화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네요.
뉴턴 이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거 같긴합니다.
하지만 그 옛날에 사람들이 시간이라는 것을 얘기할때는 변화하는데 걸리는 간격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겠지요.
반면 뉴턴은 변화가 없어도 흐르는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고 가정한 것이고 그 이후 인류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 달나라도 가게 된 것이겠지요. 즉 절대적인 시간의 존재를 가정하고 변화를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인슈타인에 이르러서는 위의 두가지 시간의 의미가 통합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이 1916년이라고 하고 작가는 그 전에 생을 달리했으므로 더 어려워진 시간의 개념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시간에 대한 관점 차이(?)를 세자매의 사랑과 운명을 통해서 작품에 끊임없이 녹여내고 고민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더군다나 술주정뱅이 군의관의 허무주의에 가득찬 시니컬한 대사들과 독백들이 시간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해결되지 않았음을(아리스토텔레스나 뉴턴의 시간) 드러내는 것 같은 생각에 이르면 작가의 머리 속이 너무나도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시간의 문제는 존재한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하게 되고 그 변화는 인과론적으로 보입니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게 되고 이는 다시 시간의 흐름으로 관측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살료뇨이의 사랑을 거절한 이리나는 그 때문에 질투에 눈이 먼 살료뇨이가 결혼식 전날 남작을 죽게 만드는 비극을 맞이 합니다.
또 한편으로 베르쉬닌과 뚜젠바흐의 철학논쟁의 주제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시간과 캐릭터의 삶이 얽힌 것이 어찌 세자매 뿐이며, 심지어는 모든 예술이 시간과 연관을 맺지 않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을 한다면 그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살료느이는 썰렁한 농담꾼처럼 보이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역이 멀지 않다면 가까운 것이고 가깝지 않다면 먼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다른 하나는 9시에 온다는 것은 즉 온다는 얘기고 아직 9시가 되지 않았으니 안온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두가지 대사는 썰렁한 농담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어떤 관점을 갖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가급적 오차를 줄여서 시간을 활용하려고 하다 보니 거꾸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샬료느이는 9시가 됐느냐 안됐느냐는 사람들이 왔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시계 바늘의 위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까지의 거리가 먼 이유에 대해서 말할때도 단순한 언어유희 같은 말이지만 관점에 따라서 멀다 가깝다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듯 합니다.
끌루이긴도 이 집의 시계와 손목시계가 7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이건 주변 생활에서 시간의 차이는 흔한 것이고 절대적인 시간이 어디있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7분 차이가 나는 상황이면 누구 시계가 맞는 지 알 수 없을텐데 7분 빠르다고 얘기합니다.
결국 절대적 시간을 알 수 없는 인간은 주관적인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이고, 희노애락 또한 주관적인 것이 될 거라는 함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견해로는 전체 우주와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적인 우주(인간이 인지 가능한)에서 인간의 의식이 관찰하여 정의한,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현상에서 발생하는 변수라고 보는 듯 합니다.
물론 저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라 함부로 옮기기가 걱정스럽지만, 시간을 이해하는 로벨리의 제안(관점과 지표성)을 쫒다보니 그렇게 됩니다.
암튼 체홉의 세자매를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다보니 착각 혹은 해석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아주 흥미진진해지면서 때로는 격정에 휩싸이기도 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유경열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업화학과 82학번이며 공대연극반에서 활동을 해오다 직장생활을 거쳐 현재 안똔체홉극장에서 중견배우로 활동중이다.
주요출연작
<세자매> 체부뜨긴
<ENDGAME> 햄
<챠이카> 쏘린
<잉여인간 이바노프> 샤벨스끼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