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1594년 12월 13일
사망:1646년 8월 1일(51세)
업적:조선의 무관이자 외교관이다. 명청교체기에 명나라를 위해 여러활약을 벌였으나, 조선의 정쟁에 휘말려 사망했다.
병자호란:임경업은 1594년에 충주에서 태어났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속리산에서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자주 했었는데, 어느 날 한 양반이 그곳을 지나가려고 놓여 있던 지게를 치워 달라고 했었다. 임경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영을 함부로 부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나으리께서 길을 돌아가 주십시오.”라고 말했대. 처음엔 당황했던 양반도 “장차 자라서 큰 장수가 되겠구나.”라며 기분 좋게 길을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실제로 임경업은 벼슬길에 올라 군량과 무기를 잘 관리해 성실함을 인정받았어. 뿐만 아니라 이괄의 난을 진압하며 거침없이 승승장구 했었다.
조선의 제 16대 왕(재위 1623~1649). 광해군 때의 중립 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총융청 .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북 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신설했다.
<동사보편>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 . 송준길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 때문에 정막 싰을수 없는 치욕이 되었다.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1636년 12월 여전히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써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1637년, 1월 2일에 조선에 국서 를 보내 항복을 받아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에게 무릎을 꿇고 치욕 스런 항복을 하였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28일~1637년 2월24일 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자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의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 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나라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병자호란, 그 후
1636년, 백마산성에서 나라를 지키던 임경업은 청나라가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비를 철저히 했어.
하지만 청나라는 이곳을 피해 한양으로 곧바로 향했고,
한양은 열흘 만에 무너지고 말았지.
임금과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했지만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어.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는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하고 그때마다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삼배구고두례’의 의식까지 치렀지.
이 소식을 들은 임경업은 땅을 치며 슬퍼했다고 해. 그 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할 때 수시로 조선에 병사들을 요구했어. 조선의 대표 장수로 손꼽히던 임경업도 임금의 명을 받아 청나라에 갔지만 청나라를 돕고 싶지 않았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거든.
때문에 명나라 군사들과 연락을 취해 가짜 전쟁을 하곤 했단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누르하치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은 명나라
와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병자호란 관련 동영상
공부방찐천재- 후금과 청나라의 침입 정묘호란•병자호란
병자호란.정묘호란 병자호란 요약 노래
출처:어린이 백과, 네이버 백과 사전, 유튜브,현대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