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국가주석인 마오쩌둥 주석이 사망 후 2년이 지난 1978년, 중국은 혁명과 공산주의라는 사상학습에 경제가 피폐해졌고 일본·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와 같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신흥국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 뒤처지게 됐다. 잠깐이지만 북한의 국민들이 중국인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기도 했다. 마오쩌둥 이후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중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1976년 9월 9일 중국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인물의 생애가 끝난 사건이 아니다. 현대 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방향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분수령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하고 약 30년간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했다. 그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은 중국 사회를 통합하고 현대화를 목표로 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경제적 실패와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중국은 그의 유산을 재평가하며 새로운 길을, 특히나 경제적 관점에서 모색했다.
문화대혁명이 진행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은 사회적·정치적 격변기를 맞았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이 주도한 이 혁명은 자본주의와 전통적 요소를 제거하고 '진정한' 공산주의 이념을 수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혁명은 중국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쳐, 심각한 혼란과 쇠퇴를 불러왔습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습니다. 같은 해 6월 1일 인민일보는 자본주의적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을 촉구했고, 이는 대규모 정치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7월 27일, 홍위병은 마오쩌둥에게 혁명적 조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8월 8일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공격하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반혁명과 우파에 대한 투쟁을 호소했습니다. 같은 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우파에 대한 투쟁은 인민의 영혼에 닿는 혁명이며 중국 공산주의 혁명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내용이 골자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은 경제적인 안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이 촉발한 사회적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1957년부터 시작된 반우파투쟁으로 도시 노동자들 사이엔 극좌문화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상하이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문예 창작자들은 극좌문화의 작품들을 쏟아냈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 작품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 중국 정부는 '2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대폭 수정하며 '대약진운동'의 상처를 극복해냈습니다. 1961년과 1962년, 산업 생산 가치가 두 배 증가하고 농업 생산은 35% 늘어났으며 철강 생산량도 껑충 뛰었습니다.
다만 경제적 성과는 당시 공산당 지도층에게 우려를 가져다줬습니다.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며 이데올로기에 변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의 배경은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 내 이데올로기 변화를 막기 위해 문화대혁명이 발생했습니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이어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은 '십년 동란'(十年動亂, 십년의 혼란)으로도 불립니다.
중국 정부의 첫 번째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산업과 농업 사이 성장 불균형, 비효율성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 경제 정책 유연성 결여와 같은 여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중국의 두 번째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됐습니다.
두 번째 5개년 계획의 목표는 크게 5가지였습니다. △ 중공업에 초점을 맞춘 산업 건설을 지 및 사회주의 산업화 기반 다지기 △ 사회주의 변혁을 계속하며, 집단 소유와 인민 소유의 지분을 확대 △ 산업, 농업, 수공업, 교통, 상업 촉진 △ 인재 양성, 과학연구를 강화해 사회주의 경제 및 문화 발전의 요구 충족 △국방 강화, 국민의 생활 수준과 문화 인식 향상 등입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시작부터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정부의 행정력이 경제계획을 아우를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정부가 제 기능을 못 하자 중국엔 빈부·도농 격차 등 최악의 경제 불균형이 찾아왔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원인은 폭력에 기반한 농업 집단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왜곡된 평등주의가 인민공사화운동을 통해 퍼져나가 산업 생산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은 중국의 대약진운동 기간 실행된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마오쩌둥은 참새가 인민이 먹을 소중한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저 새는 해로운 새'라고 지적했습니다. 며칠 후 '전국농업발전강요'라는 총 40개의 정강이 포고되는데 여기의 27번째 항에 '제사해'가 포함됐습니다. 제사해는 말 그대로 참새, 모기, 파리, 들쥐 등 네 가지 해로운 동물을 제거하는 운동입니다.
아울러 중국사회과학원은 이 네 가지 동물이 인민에게 미치는 위험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특히 마오쩌둥이 직접 지적한 참새는 매우 위험한 동물로 분류됐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전 인민이 참새를 잡는데 동원됐습니다.
2024년 01월 19일: 1950년대 중국 대약진운동은 왜 실패했나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경분쟁까지 불거지며 양국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했고,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경제원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중국은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소련식 경제모델에도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됐습니다. 소련식 경제모델은 공업 발전에 필요한 자본을 농촌과 농민 계층으로부터 조달합니다. 그런데 1958년 중국의 농촌 경제는 사실상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약진운동은 농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한다는 목표를 갖게 됐습니다.
2023년 12월 14일: 중국 대약진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나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제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이 끝나갈 무렵 중국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된 흐름을 보였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산업과 농업 성장 간의 불균형, 비효율성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 경제정책 결정 과정의 유연성 부족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중앙 집중화된 산업 중심의 소련식 공산주의가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산업화 초기 중공업 중심의 발전 전략을 채택한 소련에 비해 1956년 당시 중국의 산업구조는 훨씬 낙후됐기 때문입니다.
2023년 11월 11일: 농업 효율화한 중국의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제1차 5개년 계획(1953~1957)' 당시 중국의 농업도 조직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1953년 가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곡물 및 기타 원자재의 구매와 유통을 독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정책은 부농과 곡물 상인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려서, 곡물에 대한 투기로 이익을 얻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곡물 생산량은 늘리고, 농업에 투입되는 인력과 자원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농업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농업에 자원을 원활하게 투입하고, 정부가 농산물에 직접 관여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농민들을 집단 단위로 묶어 관리하려고 한 겁니다.
2023년 10월 28일: 사회주의 기초 다진 중국의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과도기 정부 행정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행정위원회 산하엔 재정경제위원회가 있었다. 이 조직은 국가 경제를 계획하고 건설 관리를 담당했다. 천윈과 보이보의 주도 아래 재정경제위원회는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체제 구축에 핵심적이고 독점적인 역할을 했다. 이 위원회의 우선 목표는 국가 경제 질서 복원, 가격 안정, 화폐 안정, 계획된 경제의 관리 메커니즘 설정, 그리고 '제1차 5개년 계획' 준비였다.
2023년 10월 14일: 국공내전 후 폐허된 중국…강력한 통제로 경제 회복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본토의 기반이 모두 파괴돼 경제가 사실상 마비됐습니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는 바닥을 쳤고, 시장경제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통제, 통화 시스템 재건을 최우선 경제과제로 삼았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통화 체계를 통일하고, 신용을 강화했습니다. 아울러 지방 정부의 예산을 제한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면서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023년 09월 29일: 중국 공산당, 국공내전서 승리한 비결은?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경제개혁 이전 중국 경제 발전과정을 총 다섯 기간으로 나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8월부터 1949년까지의 중국 경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기본적인 목표는 중국을 현대적이고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표는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던 때부터 정해져 있던 목표였습니다. 또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에도 유지됐습니다. 경제 관점에서 이 목표를 분석해보면 산업화, 생활 수준의 향상, 소득 격차의 축소, 현대 군사 장비의 생산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2023년 09월 15일: "中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경제에 혼란 가중"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979년 이전 중국은 마오쩌둥 주석의 지도 아래 계획경제를 유지했습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개별 가정 농장을 묶어 공동생활체를 조직했습니다. 이 조치로 1950년대 중국은 공산주의적 경제기반을 성공적으로 다졌습니다. 산업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중국 정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물적·인적 자본에 대규모로 투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78년 중국 국영기업은 전체 산업 생산량의 약 75%를 차지했습니다.
2023년 09월 02일: "중국 경제 성장률, 개혁 정책 성패에 달렸다"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979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혁을 통해 지난 50년동안 중국은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기간 중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약 10% 성장했습니다. 중국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지속적으로 성장한 주요 경제 체제'로 세계은행에 기록됐습니다.
구매력평가지수(PPP)를 기준으로 봤을 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체가 됐습니다. 아울러 부가 가치 제조업, 상품 무역, 외환 보유액 등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을 이해하려면 중국의 대내외 경제 정책과 발전 전략의 현 위치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23년 08월 21일: 예견된 중국 경제 둔화... 미래 내다보려면[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50년 전 중국은 중앙 집중적으로 통제된 경제 체계를 갖췄습니다. 국제적으로 고립돼있었고, 비효율적이며 빈곤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1979년 무역·투자를 개방하고, 시장 경제로 전환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2018년까지 중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연평균 9.5%에 달했습니다. GDP가 약 8년마다 두 배로 불어났으며, 8억명가량의 인구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23년 06월 30일: 1992년 영국 금융시장 덮친 '검은 수요일'[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992년 9월 16일은 '검은 수요일'이라고 불립니다. 앞서 영국은 존 메이저 총리의 지휘 아래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했고,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영국이 유럽경제에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당시 1파운드는 2.95 서독 마르크로 교환비율이 고정됐습니다. 목표비율과 6% 이상 교환비율이 차이가 나게 되면 당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만약 파운드화가 2.773마르크 이하의 가치로 거래된다면 영국 중앙은행과 영국 정부는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2023년 05월 24일: 유로존 도입의 신호탄 '유럽통화제도'[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지난 칼럼에서는 지폐에 자국 위인의 초상을 포함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유럽환율조정체제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필자가 박사학위를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공부하기로 한 배경엔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유럽을 여행할 때 겪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화폐였습니다. 유럽대륙의 국가들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데, 영국은 파운드화를 사용했기에 유럽 대륙으로 여행할 때 마다 매번 화폐를 바꿔야 해 불편했습니다.
2023년 04월 27일: 영국 파운드화에 초상화가 들어간 이유[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960년 3월 17일,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그려진 첫 지폐(1파운드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지폐에 지도를 제외하면 그림을 넣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란은행은 여왕의 초상화를 지폐에 인쇄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자부심·정체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왕가의 문화·역사적 중요성을 부각시킨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023년 03월 30일: 전간기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까닭은?[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39년까지를 전간기라고 부릅니다. 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제1차대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가 '항구적 평화가 아닌 길어봐야 20년 정도의 휴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전간기의 유럽 정치와 외교는 매우 불안했습니다.
2023년 03월 03일: 제 1차 세계대전 후 몬태규 노먼 시대의 영란은행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영란은행 총재를 맡은 몬태규 노먼 총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23년 02월 08일: '전비조달도 전략'…영란은행이 숨기고 싶던 이야기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지난 칼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란은행이 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2022년 12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의 영란은행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지난 글에서는 벨 에포크 시대의 영란은행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란은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22년 12월 06일: 벨 에포크 시대의 영국 중앙은행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지난 칼럼에서는 영국 중앙은행(BOE)의 첫 번째 여성 인력인 자넷 코트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벨 에포크 시대의 BOE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22년 11월 11일: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공식기록에 남은 英중앙은행 첫 관리직 여성인력
지난 칼럼에서는 영국 중앙은행(BOE)의 최종대부자 역할에 대한 논란을 촉발한 1866년 금융위기와 BOE의 대응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BOE의 첫번째 여성 인력인 자넷 코트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22년 10월 05일: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150년전 런던 금융 위기의 '교훈'
19세기 런던은 국제금융 자본시장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2022년 09월 05일: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이 서명 없으면 위조지폐라고?…英 '치프 캐셔' 뭐길래
아무리 지폐를 정교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위조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위조지폐와 진짜 지폐의 유일한 차이는 위조지폐가 완벽하고 진짜 지폐는 결점투성이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렇다면 위조지폐의 역사는 어떨까요.
2022년 08월 02일: [더 머니이스트-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화폐가 종잇조각으로"…영란은행, 화폐 발행을 독점하다
1694년 사업가들로부터 120만파운드의 기금을 조성해 만들어진 영란은행은 현재의 중앙은행과 형태, 업무 면에서 차이가 있는 은행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기점으로 발권력을 가지게 됐지만, 영란은행의 화폐는 법화가 아닌 은행권 형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2022년 07월 05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지폐 위조했으니 즉각 사형"…英 '파운드' 지폐 탄생의 비밀
영국은 혁명 프랑스와 전쟁을 수행하느라 많은 금을 지출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시중에 유통되는 금화는 부족해집니다. 금화 유통량이 줄어들자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상거래 활동도 저해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영란은행은 1797년 1파운드 지폐를 발행하게 됩니다.
2022년 06월 06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나폴레옹이 죽던 날, 사라진 은행법이 있다고?
1694년 영국 정부는 해군 재건 기금 조성에 필요한 120만파운드를 조달하기 위해 영란은행 지주회사를 정부 산하기관이 아닌 특허기업으로 설립했습니다. 초대 총재로는 존 허블런(John Houblon)이 취임했습니다. 이후 영란은행은 영국 정부의 국채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2022년 05월 02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전쟁 때문에 만들어진 영국 중앙은행
1694년에 설립된 영란은행(BOE)은 스웨덴 국립은행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중앙은행입니다.
2022년 04월 04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글로벌 금융위기' 한국은행은 어떻게 고비를 넘겼을까
우리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5.7%의 경제성장률을 경험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2022년 03월 07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IMF 외환위기' 한국은행의 위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국은행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역할이 변했습니다. 한국은행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3월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상합니다. 이에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합니다.
2022년 01월 31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개발도상국 시절, 한국은행은 어떤 일을 했을까
지난 칼럼에서 전시 속 한국은행의 역할과 화폐개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다면, 오늘은 한국이 개발도상국으로서 자리했을 당시 중앙은행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022년 01월 02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북한이 빼앗아간 금과 은, 한국은행은 어떻게 살아났을까
지난 칼럼에서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했던 금은괴의 행방에 대해 알아봤다면 오늘은 전시 속 중앙은행이 수행했던 역할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 피난으로 미처 챙기지 못한 16톤(t) 이상의 금과 은 그리고 다량의 조선은행권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빼앗깁니다.
2021년 12월 08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한국은행에 있던 금괴·은괴는 어디로 갔을까
일제 강점기 약 34년간 중앙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은행은 해방 후 미 군정청 소유로 넘어갔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되었습니다.
2021년 11월 03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은행은 어떻게 살아났나
한국은행은 통화정책과 물가 안정을 통한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입니다.
2021년 10월 02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한국은행, 정부와의 갈등 피할 수 없다고?
중앙은행은 화폐 발행 및 통화량 조절, 금융 안정을 위해 운영되는 은행입니다.
2021년 09월 20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기준금리' 결정하는 중앙은행, 이것까지 한다고?
저번 칼럼에서는 코인이 화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통해 화폐의 기능과 본질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2021년 09월 06일: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코인은 미래 화폐가 될 수 있을까?
2021년 코인 시장은 뜨거웠습니다. 올해 비트코인의 가격은 2배 이상 급등했고 이더리움은 그 이상 폭등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