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화의 저널리즘 - 뉴스에 대한 은유#
일상적 유용성에 근거한 실제적 강점으로 인해 저널리즘이 지적인 자극이나 시민의 대화 그리고 공적인 토론을 위한 더 나은 포럼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p 23)
대화를 지향하는 저널리즘은 뉴스를 객관적으로 전달되는 생상물로 정의하지 않고 관계적으로 의미 협상의 사회적 과정으로 정의한다. (p 24)
저널리즘은 실질적으로 소통의 분야가 돼야 한다.
자크 라캉은 '공허한 말'을 아무것도 말하려고 하지 않는 말이 아니라 "아무도 청하지 않거나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메시지"라고 정의했다. (p 35)
저널리즘이 형식적으로 되는 정도만큼 그 수용자도 수동적이 되거나 소원해지거나 결국 냉소적이 된다.(p 36)
현대 저널리즘의 중요한 협동적 역할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37쪽)
페라로티(1988) "대중매체는 매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며, 따라서 자아도취의 역할로 전락할고 말았다"(42쪽)
3. 뉴스와 현실#
미 국의 뉴스에 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주장은 그것이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뉴스는 공정할 수 있고 또 공정해야 마땅하지만 뉴스가 입증 가능한 사실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적 편향을 배제한다는 의미로는 객관적이지도않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 뉴스를 이러한 객관적 틀에 가둠으로써 그 내용과 표현은 강력하게 제약되고 공공저널리즘이 장려하는 대중의 참여도 위축되거나 평가절하된다.(49쪽)
뉴스를 정의하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시의성, 근접성, 중요성, 갈등성, 현저성, 인간적 흥미 등을 되풀이 한다.(50쪽)
뉴스는 중요한 것에만 초점을 맞춰왔으며 공식적이고 권위적이며 유명하고 전문적인 것을 규정했다. 왜 정치지도자의 결장 수술을 뉴스가 되고 교사의 수술은 그렇지 않은가?
우 리는 모든 세상일을 뉴스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행위나 담화에 중요성을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하는 일 곧 인간의 조건이나 인간의 상화이 뉴스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발언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사람들은 대화의 일부가 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있따. 이는 부분적으로 뉴스의 정의와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전통적인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57쪽)
대화의 저널리즘은 다원주의 저널리즘이다.
뉴스나 다른 어떤 인간적 소통도 과연 객관적이거나 편향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면의 보도는 편향성에 대한 비난에 대비한 언론인의 보신 정책이며 자동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객관적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측면이 사회적 이슈에 관해 취할 수 있는 모든 입장을 대표할 수 없다.
미 국 뉴스에서 객관성을 가장하여 인위적으로 극단적인 입장 간에 균형을 잡는 것은 토론을 장려하기보다는 의견을 양극화하고 고착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한 객관성은 뉴스 사건을 대상과 상품으로 변화시키고 사건과 그것에 관한 뉴스를 소원하고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활기차고 개입적인 뉴스는 참여를 고무시키고 촉발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공정성의 가치를 깎아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인이 독자를 개입시켜 뉴스의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기사를 만드는 여러 접근이나 활동 및 시각을 실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68쪽)
엔트만 "경제가 간결성, 단순성, 예측가능성, 시의성 등 뉴스의 창출을 지배하는 가치를 구성한다"(68쪽)
역 피라미드 형식과 그것의 광범위한 수용은 결과적으로 보도될 수 있는 것을 규정하고 본질적으로 철학적 차원에서 실증주의적이며 순수하게 모더니즘적인 세계관을 답습한다. 역피라미드 모델은 인간의 이야기들이 복수의 상호 연결된 원인과 결과를 가진 의미의 망이 아니라 단서적인 순서의 행동과 사건에 대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73쪽)
경제적 모델과 언론적 모델의 뉴스
언 론적 모델에 의해 산출된 기사는 종종 미래 지향적이고 복잡하며 반드시 시의성이나 인간적 흥미와 같은 전통적인 효율성의 뉴스가치와 결하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 기사는 언론사와 독자에게 똑같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보상이 곧장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배닛은 뉴스가 민주주의에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뉴스가 피상적이고 시각이 좁으며 편향적이고 선전을 담고 있으며 설명적인 가치가 적고 비판적 논쟁이나 시민의 활동을 위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