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 다변화: 전성기란 따로 없다
이화정 2040 여성 시청층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시리즈의 경우, 여성 캐릭터의 연령대 또한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른, 아홉>(JTBC), <스물다섯 스물 하나>(tvN)처럼 나이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많이 등장하고 있고, <구경이>처럼 20대와 4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 <스카이캐슬>(2018), <부부의 세계>(2020)가 인기를 얻으며 <그린마더스클럽>(JTBC), <마인>(tvN)처럼 30~40대 이상의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나원정 <서른, 아홉>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영화 <싱글즈>(2003)였습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도 그렇지만 당시 미디어가 그려낸 스물아홉, 서른의 여성 모습은 체감상 현재 서른아홉, 마흔 정도인 것 같아요. 특히 <서른, 아홉>의 경우 실제 마흔을 목전에 둔 배우들을 캐스팅한 게 흥미로운데, ‘드라마계의 제왕’이라 할 만한 손예진 배우가 그간의 필모그래피 중 ‘워맨스’를 연기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을 그린 걸로는 <나의 해방일지>(JTBC)나 <우리들의 블루스>(tvN)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나의 해방일지>는 특히 ‘일하는 여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고, <우리들의 블루스>는 거의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정은 배우가 연기한 은희 캐릭터가 흥미로웠는데, 그간 드라마가 여성의 폐경을 매우 심각한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선 자연스러운 삶의 한 단계로 그리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이렇듯 최근 드라마 시리즈의 경우 과거와 달리 다양한 연령층 묘사를 세밀하게 하고 있는데 이것 자체로 반가운 일 같습니다. 일하는 여성과 관련해 <그 해 우리는>(SBS)에서 김다미 배우가 연기한 20대 후반의 국연수가 사회초년생의 어수룩한 모습이 아닌 똑 부러지는 팀장 캐릭터로 그려진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진명현 <서른, 아홉>과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이하 <지헤중>, SBS)는 세 여성의 워맨스, 시한부 이야기 등 상당히 유사한 설정을 갖고 있지만 흥행에선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일하는 여성에 대한 묘사의 디테일 차이, 사랑과 우정에 대한 균형 감각의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캐릭터의 나이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지헤중>의 여성 캐릭터 모두 서른여덟으로 설정돼 있지만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어리고 예쁘게 그려집니다. 전작인 <미스티>(2018)에서 전문직인 앵커의 삶을 훌륭하게 그려냈던 작가의 작품이라 직업 묘사에 소홀한 이번 드라마의 태도가 더 의아했습니다.
최지은 제 오랜 버릇은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등장인물 소개를 읽는 건데, 오래 지속해오다 보니 조연 캐릭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드라마를 판단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잣대가 됐습니다. 작은 역할을 소모적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부터는 맘 편히 드라마를 보기 어렵더라고요. <지헤중>의 경우 주요 캐릭터 중 한 명을 과도하게 미숙한 인물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 캐릭터들이 전반적으로 미성숙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 일조한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구경이>와 문소리 주연의 <미치지 않고서야>(MBC)가 흥미로웠습니다. 각각 사별과 이혼으로 혼자가 된 40대 여성이 주인공인데 둘 다 아이가 없거든요. 이 경우 캐릭터가 취하는 행동의 동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미치지 않고서야>의 경우는 아픈 아버지를 모시는 집안의 가장이기 때문에 회사라는 전장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구경이>는 완전하게 혼자이기에 게임에 빠진 히키코모리, 또 흥미와 재미를 위해 사건을 추적하는 캐릭터로 구축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서사가 늘며 중견급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늘었습니다. <이상청>의 경우 김성령 배우가 메인롤로 전면 등장하는데, 지상파에서라면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혹은 시어머니 역할에 머물기 쉽지만 여기에선 독특한 전사를 가진 여성 정치인으로 등장해 위엄과 위트를 두루 겸비한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합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호명되며 중년 여성 배우의 기회도 함께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나원정 전성기가 지났다고 생각한 여성 배우들이 다시 호명되는 현상도 흥미롭습니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넷플릭스)에서 민혜진 역을 맡은 김현주 배우가 그런 경우인데, 특히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인 SF 영화 <정이>에서 인간 병기로 다시 등장합니다. 올해 5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강수연 배우 역시 <정이>에서 과학자 역할로 복귀할 예정이었고요. 연상호 감독이 극본을 쓴 드라마 <방법>(tvN)에서 조민수 배우를 활용한 면도 같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연급 여성 캐릭터가 다채로워진 것도 맞지만, 조연급으로 시선을 넓혀보면 여성 배우들이 활약할 여지가 훨씬 더 넓어진 것 같습니다.
진명현 최근 가장 활약한 조연을 들라면 저는 주저 없이 배해선 배우를 꼽고 싶습니다. <이상청> <해피니스>(tvN), <구경이> 등 다양한 드라마에서, 어떻게 보면 다소 전형적일 수 있는 캐릭터를 배우가 가진 힘으로 돌파해낸 경우 같거든요. 또 <스카이캐슬>을 거쳐 다시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김서형 배우가 <마인> 같은 드라마에서 성소수자로 큰 비중으로 재현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변화였고, 용감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화정 로맨스물이라 하더라도 여성 주인공의 직업에 대한 묘사가 불충분할 경우 시청자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게 확연히 달라진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전성기가 지났다고 여겨졌거나, 다소 나이가 많은 여성 배우들이 활약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났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에 반해 유명 배우들이 드라마에 도전해 흥행에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원정 그런 점에서 제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건 <지리산>(tvN)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이후 김은희 작가에게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공개된 드라마였고, 전지현이라는 톱스타의 복귀작으로 관심이 컸죠. 그가 연기한 서이강이란 캐릭터는 한때 레인저로 활약했으나 사고로 장애를 얻은 인물로 등산을 할 수 없기에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우영우>처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지만 이 경우는 결코 귀엽거나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작품이 어둡거나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으면 흥행에 참패하는구나 싶었습니다. 한편 고현정, 신현빈의 <너를 닮은 사람>(JTBC)은 그간 보기 어려웠던 두 여성 캐릭터의 대결이 흥미로웠던 반면 그 가운데 버티고 선 시댁, 남성들 간의 권력 구도는 그간 흔히 봐오던 것으로 두 배우가 제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극의 답답한 전개를 돌파하긴 어렵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최지은 과거와 달리 최근 몇 년 사이 드라마 시리즈에서 ‘여성 원톱’이 늘다 보니 톱스타들의 흥행 성패가 자주 얘기되지만 사실 저는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연예 기사에서 드라마가 고전한 걸 두고 ‘전지현, 고현정, 전도연의 실패’로 기술하는 게 어쩐지 마음에 걸립니다. 실제 남성 톱배우에게도 저런 수사를 쉽게 쓰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거든요. 때문에 시리즈의 흥행 책임을 오롯이 배우에게 돌리는 프레임은 지양했으면 합니다. 다만 요즘 시청자들은 무겁고 답답한 걸 정말이지 못 견디는 것 같습니다. <스카이캐슬>처럼 캐릭터 간 팽팽한 구도가 주를 이루는 드라마라 하더라도 중간중간 유머를 섞어야 하는 것처럼요. 저는 <지리산>과 <너를 닮은 사람>도 관객의 이러한 성향과 결이 달라기 때문에 흥행에 저조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명현 저 역시 <지리산> <너를 닮은 사람> <인간실격>(JTBC)은 전지현, 고현정, 전도연의 실패가 아닌 인기 작가 유보라, 김은희, 김지혜의 실패였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들 드라마는 시청률이나 화제성은 낮았더라도 연기적으로는 썩 훌륭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뭉뚱그려 ‘배우의 실패’로 귀결되는 건 좀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