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서울시립대 지원금이 기존 서울시 제출 예산 대비 100억원이나 삭감되었다. 의회에서 학교의 방만한 운영을 꼬집으면서, 전임시장이 만들었던 반값등록금 정책을 폐지하고 학교 자체 수입금을 늘리라고 하였다. 시립대의 정상화를 바란다는 말을 들으면서, 뭔가 지금의 상태가 썩 정상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려 여러모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감상적인 이야기와 별개로 100억원의 예산 삭감으로 인해 내 인생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궁금하여 임용 후 처음으로 학교의 세입세출을 확인하였다. 지방자치단체 지원금에 대한 세출결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러니까 '시서울의 지원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다.
유아교육: 어린이집 운영
인건비: 비전임교원 인건비, 교직원 복지 지원
교육활동: 입학지원, 교무학사, 유학생, 취업/창업
학술활동: 학술연구 지원, 연구기관 지원
교육복지: 장학금, 학생활동 지원, 후생복지
환경개선: 시설 확충, 실험실 개선, 강의실 개선
교육행정: 도서관/정보화시스템/기관 운영
보조금: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
뭐 이런데 쓰인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항목은 학생들을 위한 지원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의 입장을 바꾸어 쓰면 "학생에 대한 지원을 더 이상 무지성으로 퍼 줄 수는 없다. 그러니 너희가 돈을 잘 벌어서 매꾸도록 해라."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합리와 효율, 그리고 2023년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공평'의 개념 안에서는 뭐 아주 잘못된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이러한 효율 위주의 정책은 보통 약자들에게 가장 극단적인 피해를 준다. 학교 안에서 나는 비교적 강자의 위치인지라 100억 예산이 삭감되어도 치명적인 문제는 없겠지만, 저런 사소한 지원이 꽤 든든한 힘이 되는 존재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끔씩 상담을 해 보면 여전히 학자금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모자란 친구들이 종종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을 이제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시의회의 말처럼 돈을 잘 벌어서 매꾸면 되겠지만, 그 전에 돈이 없더라도 시간과 정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혹시 없을지, 나아가 만약 강자들의 소유를 나누자고 했을 때 나는 과연 선뜻 그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맨 처음 월급이 깎이면 어쩌나 같은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다. 깊은 반성...
온갖 선거에서 항상 마음이 끌리는 쪽은 소위 군소후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매 선거마다 후보들이 별로라고 떠들어 댈 뿐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보다야, 차라리 '답답해서 내가 뛴다'라는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낫지 않나 싶어서, 라고 하지만 사실은 웃겨서 좋은 것 같다(죄송합니다).
군소후보들은 언더독 입장에서 눈길을 끌어야 하기도 하고 실현가능성을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허무맹랑한 정책들을 마구 제안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과격함과 황당무계함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행간을 보면 오히려 눈치 보느라 고생이신 거대정당의 후보들에 비해 호방하기도 하다. 또한 유급휴가 30일이나 농민수당, 육아휴직 보장, 국회의원 무보수 명예직, 청소년 노동3권 보장과 같이 생각보다 유의미한 정책이나 공약도 꽤나 많다. 극우 후보의 공약에서 지자체의 재정 자립도 강화나 지방기업의 규제 면제 같은 내용을 확인하는 것도 썩 신기한 일이다.
학교에서 정부 지원과제를 수주하기 위한 사업 제안서를 쓸 때면 아무래도 규모나 네임밸류 면에서 이른바 명문대 라인에 비해 언더독인 경우가 종종(사실 자주) 있다. 그럴 때에는 역시나 아주 급진적인(?) 내용을 제안서에 포함하게 되는데, 사실 작성하면서도 '이런게 과연 가능할까요?' '돈 문제는 일단 되면 생각하죠...' 라는 식이 된다. 그러니까 군소후보들이 만들어 내는 정책 역시 이러한 맥락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사업비를 유치하기 위한 부풀려진 제안서라고 할 지라도 그 근본은 분명히 학교와 구성원의 발전을 염두에 둔다. '우리가 못 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니 이렇게 해 보겠다' 뭐 이런 개념인지라, 사실 제안서 제출 말미가 되면 '혹여나 우리 사업 수주에 실패하더라도 여기 적은 몇 개는 해 봅시다. 제도를 바꾸는 데 돈이 엄청 드는 건 아니잖아요?' 같은 다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안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 하고 살지만, 실제로 탈락한 제안서에 담은 급진적인(?) 정책 몇 가지를 작게나마 실천하는 학교들은 추후 사업을 수주하기도 한다더라.
공약 역시 '시켜주면 하겠다' 정도의 조건부 약속이므로 후보 입장에서는 떨어진 뒤에는 모른 척 하고 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시민의 입장이라면 본인이 지지한 공약에 담긴 의미와 철학을 개인적 삶의 풍경에서 작게나마 실현해 보는 것이 누구를 찍었느냐보다 중요한 것도 같다. 당장 무보수 명예직으로 지낼 순 없더라도 어깨에 한껏 들어간 뽕은 빼야 할 것이다. 물론 김재연 동무의 주 4일제는 지금이라도 당장 실현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당선 가능성이 없는 군소후보에게 가는 표를 사표라고 하지만, 이처럼 한 표의 의미가 단순히 한 명을 찍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삶에서의 실천이라 한다면 사표와 지지자의 당선 여부는 어쩌면 크게 상관이 없는 게 아닐런지. 오히려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 때문에 누군가를 지지하면서 60대 이상의 투표권을 박탈하자는 말을 진지하게 하거나, 후보자 측근의 비리가 싫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가라로 근무일지를 적어 야근수당을 살뜰히 챙겨가는 풍경이야말로 진정한 사표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싫어하는 후보를 뽑았더라도 시간약속을 잘 지키고 차선을 변경할 때 깜빡이를 켜는 사람이 더 좋다.
12월 초는 전국 각지의 모든 교수들이 연구비를 받기 위해 제안서를 쓰는 시즌이다. 나 역시 군소후보의 마음으로 허황된 연구 계획들을 잔뜩 적고 있는데, 이 중 몇 가지는 연구비를 주지 않아도 꼭 하고야 말리라 결심해 본다. 물론 실제로는 연구비를 받아도 안 하겠지만...(한심).
처음 학교에 들어가면 교수회에서 환영회 같은걸 한다.
나 때는 코로나 중이라 아주 소규모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때 전기과였나에서 시니어 교수님 한 분이 오셨었다. 그 때에 교수님께서 해 주신 여러 말씀 중에도 여전히 기억에 나는 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자문을 받지 마십시오. 제가 교수 생활을 잘 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지금껏 지키고 있는 것 하나는 제가 잘 모르는 것은 절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였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무언가를 잘 아는 것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우선은 (1)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들어본 내용이고; (2) 어깨 너머로 들어본 것들이니 해 보면 못 할 것 같지는 않고; (3) 모른다고 하는 것이 왠지 쪽팔린데다가; (4) 모르는 걸 안다고 하면 따라오는 리워드들이 생각보다 달콤하다. 잠깐의 전문가 행세를 하고 나면 따라오는 돈과 명예라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건강한 마음, 돈과 명예로부터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용기와 기백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보니 단순히 전문가만이 아닌 인간 모두가 평생에 걸쳐 가꾸어야 할 덕목인 것도 같네요.
그저 전문가가 되기 위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나에게도, 너에게도 가장 좋은 선택이다.
우선 내 입장에서는, 내가 잘 하는 분야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알지도 못 하는 걸 대충 안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의 말은 점점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안다고 했을 때에는, 역시나 좀 더 믿음직할 수 밖에 없다(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당연하지만 너에게도 좋은 일이다. 일단은 뭔가 거절당한 것이 묘하게 기분 나쁠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설픈 풋내기의 흉내가 아닌 진정한 스페셜리스트의 정수를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치기들의 황당무계한 의견과 무모한 자신감이 지금껏 얼마나 큰 사회적 비극을 초래해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일이다.
콘크리트 재료 분야에서 아주 유망한 교수님께서 교각의 전단 설계에 대한 용역을 요청 받으신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나도 할 줄은 알지만 수업시간에 가르쳐 본 정도입니다. 저보다는 다른 분이 더 잘 하실겁니다." 하면서 거절하셨다고 한다.
나는 콘크리트를 전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각의 전단설계 적정성을 검토하라고 한다면 왠지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방서 몇 개를 참고하고, 설계자료 몇 개를 뒤적거리면서 어설프게나마 따라하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콘크리트 수업을 십수년간 해 오신 그 교수님이라면 당연하지만 꽤나 능숙하게 해내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님은 본인이 하기 보다는, 더 잘 하는 사람을 추천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귀찮아서였을수도 있지만(죄송), 어쨌든 이러한 결정을 통해 해당 용역은 전단 외길인생을 걸어온 교수님께서 하셨다고 하니 여러모로 잘 된 일이다. 해당 교량의 이름을 밝히긴 어렵지만, 그 후로 그 교량을 지나갈 때 만큼은 왠지 모르게 안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문가라면 (1) 내가 아는 것만을 안다고 하고; (2)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며; (3) 더 잘 하는 사람을 기꺼이 소개시켜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돈이나 명예 때문에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폭력이자 살인이 될 수 있다.
PS: 어제 몇백억짜리 과제를 구성하는 분들과 저녁을 먹으며 '지진 취약도 곡선 그릴 줄 알지요?' 라는 질문을 듣고 집에 오는 길에 들었던 생각입니다. 더 잘 하는 분을 소개시켜 드려야 하는데, 혹시 할 줄 아시는 분?
모름지기 호의나 친절, 베품 같은 것은 남을 위해서여야 하지만, 세상에는 '나를 위한 호의'라는 것도 존재한다. 가령 상대방은 굳이(심지어 전혀) 원하지 않는 선물을 기어코 하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한국의 결혼식 역시 이러한 '나를 위한 호의'의 전시장이 아닐까요.
왜 굳이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호의를 베푸는가 하면, 아마도 베푸는 즐거움 그 자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느끼게 되는 정서적 만족감이라는 것이 이러한 '나를 위한 호의'를 이끌어 내는 아주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기저에는 '이것이 상대방에게 좋을 것이다'라는 아주 강력한 확신이 존재하는 듯 하다.
사실 모든 호의가 순수히 남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베푸는 자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완전히 결락시켜 버린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꽤 많은 선의의 행동들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호의라는 것도 나름 세상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데 있어 꽤나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절한 밸런스이다. 호의를 받는 상대방이 느끼게 될 즐거움과 곤란함의 크기, 거기에 더하여 호의를 베풀기 위해 소모되는 나의 비용과 이를 통해 얻게 될 정서적 효용을 정교하게 비교해 봐야 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느끼는 만족에 비해 상대가 느끼는 부담과 불편이 너무 크다면, 가끔은 아무리 좋은 뜻의 호의라 해도 과감히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가장 최악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호의이다. 상대방은 전혀 즐겁지 않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무언가를 기어코 좋은 것이라며 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이 있다. 값비싼 식사나 선물을 자기 멋대로 가져와서는 한사코 거절해도 막무가내이다.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고마운 인사치레라도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봐 막상 해 보니까 좋잖아'라며 으스대곤 하는데, 아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람과 사람을 멀어지게 하는 많은 요인이 존재하지만, 나만을 위한 호의는 정말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 얘깁니다...
경제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 아침마다 <손에 잡히는 경제>를 듣고 있다. 그 중에서도 1부(?)에 해당하는, 각종 경제 소식을 전해주는 코너가 대략 20분 남짓이라 출근길에 듣기에 참 좋다. 물론 1년이 넘게 듣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재산만 꾸준히 줄고 있는데, 뭐랄까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으면서 살을 빼겠다고 홈트레이닝 영상을 보고 있는 기분... 사실은 그냥 재밌어서 듣습니다.
아마도 경제학이란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통해 현재의 상황이 촉발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학문인 듯 하다. 실제 수많은 천재들이 과거의 현상을 적절히 해석할만한 괜찮은 이론이나 모델들을 많이도 개발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똑똑이들이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괜찮은 모델과 적절한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미래의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냐는 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어제의 이슈는 미국의 금리인상이었고 그 덕에 인터넷 세계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집값이 폭락하네 아니네로 열심히들 싸우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몇 가지 현상만으로 집값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집값이 이럴것이다' 라고 단언하는 사람은 아주 천재나 바보일텐데 그 정도의 천재가 고작 유튜브를 하고 있을리는 없지 않은가. 나는 사실 2024년의 집값은 커녕 다음주의 이마트 흙대파 가격조차 제대로 맞춰본 적이 없다.
실제 경제를 손에 쥔 사람들은 집값이 오르든 떨어지든 돈을 버는 것 같다. 아마도 집값을 예측하는 신묘막측한 능력보다는 시시각각 역동적으로 변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역량이야말로 경제를 손에 잡는데 있어서 훨씬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경제학이란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현재의 상황을 빠르고 적절하게 수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맞나요?).
그리고 이는 어떠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인간관계라고 해도 나와 다른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누군가와도 적절히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이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년의 연구 트렌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나만 모르는 것도 같지만), 무엇이 트렌드가 되든 내 것을 잃지 않으며 적당히 따라갈 수 있는 기민함이 필요하다.
경제도 사람도 연구도 손에 넣지 못 한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어쩌다 보니 논문을 쓰는 일이 직업이 되었으니, 넓은 의미에서는 글쓰기로 밥을 벌어먹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글쓰기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을 (거의 최초인 듯 한데) 본격적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1년에 잘 해야 겨우 4-5권 남짓 읽는 주제에 감히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할 생각은 없지만, 여하튼 어떤 형태로나마 창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책에서 감탄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는 그의 꾸준함이다. 하루키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런닝을 하고 마치 직장인처럼 정해진 시간동안 무언가를(그야말로 뭐가 됐든) 썼다고 한다. 무려 수십년 동안 꾸준히. '아 논문 좀 써야 하는데~' 라며 말만 늘어놓을 뿐 정작 워드 프로세서조차 켜지 않는 날이 대부분인걸 생각하면 이런 꾸준함이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 좀 더 감탄한 쪽은 탈고의 과정이다. 하루키는 장편소설의 집필을 마치면 주변 사람들에게 검토를 부탁하는데 지적을 받은 부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친다고 한다. 심지어 그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아 물론 이런 경우 당연히 지적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뭐라도 고친다는 것이다. 장편소설의 집필을 마친 사람이란 여러 의미에서 제정신이 아니므로 그나마 제정신인 사람들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논문을 쓰고 피어리뷰를 받아보면 생각보다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녀석은 전혀 모른다"라는 생각까지 들기도(건방진 태도이지만 이 곳은 아무도 보지 않을테니 감히 적어본다). 그러나 연구를 막 마치고 논문을 겨우 작성한 사람 역시 제정신일 리가 없다. 본인의 연구에 완전히 빠져버려 도무지 그 안에 있는 비정합성을 객관적으로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어느 부분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있다면, 어쨌든간에 그 부근의 무언가가 조금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리뷰어가 지적한 부분을 고치고서 무언가 나아지는 경우를 나는 꽤 많이 경험하였다. 엉터리 같다고 생각한 요청에 어쨌든 꾸역꾸역 설명을 추가하다 보면 내 머릿속에만 있는 내용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썩 내키진 않지만 리뷰어가 하라는 대로 어떤 설명을 지우고 보면 보통은 실제로 사족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라도 어쨌든 뭐라도 고치고 추가하다 보면 미묘하게나마 흐름이 매끈해진다. 게다가 보통은 리뷰어에게 납작 엎드리는 쪽이 여러모로 편하니까(라고 하면 너무 해이한가요).
대학원 시절에 지도교수님이 내가 쓴 논문을 이해하지 못 할 때에 이따금 답답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 때마다 교수님은 "내가 잘 몰라서 오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에 이 논문을 나만큼 열심히 읽는 독자는 없을거다. 그러니까 나도 이해시키지 못 한다면 아마 리뷰어도 이해하지 못 할 거고 전 세계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같은 말씀을 해 주시곤 했다. 연구란 매우 주관적이고 때로는 제멋대로여도 좋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겠다는 입장이라면 어쨌든 최대한 친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에서 어쨌든 리뷰어의 지적에 납작 엎드려 성실히 답변하는 중인데... 아무리 그래도 가속도를 두 번 적분한 것이 변위라는 것에 대해 참고문헌을 달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PS: 대학원 시절 옆 연구실의 엄청 유명한 교수님은 엉터리 같은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마치 내 옷차림을 다그치시듯 짧고 단호하게 답변서를 쓰셨는데(질문이 6줄인데 답변은 1줄 남짓이었다), 이런 것 역시 참 멋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가야 할(가고 싶은) 학회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 적어본다. EMI 같은데 갈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왠지 내가 하는 수준의 연구를 발표해서는 계란을 맞을지도... 세계 풍공학 학회인 ICWE와 유럽의 동역학/진동 학회인 EVACES의 날짜가 꼭 붙어있는데 심지어 장소도 피렌체와 밀라노. 이 정도면 '둘 다 신청해서 이탈리아 한 번 훑고 가세요' 라는 것 같다. 태용씨와 하던 와류진동 식별에 대한 연구가 어째 멈춰버렸는데, 학회를 빌미로 다시 공부도 좀 하고 논문도 쓰고 구라파 멋쟁이 형님들과 친분도 쌓으면 참 좋겠는데.
사실 그런 것보다도 아주 작은 연구과제가 내년 2월이면 끝나는데 어떻게 참가비를 구할지 걱정이다. 학생 때 영혼을 담아 '돈이 없습니다' 식으로 편지를 썼더니 Travel Grant를 주기도 하던데, 37살에 그러기엔 좀 어렵겠지요.
EMI 2023, June 6-9, 2023, Atlanta, Georgia
ICWE 2023, August 27-31, 2023, Florence, Italiy
October 15th, 2022: Abstract submission opening
December 15th, 2022: Abstract submission closing
February 20th, 2023: Notification of abstract acceptance
April 10th, 2023: Early bird registration fee
EVACES 2023, August 30 to September 1, 2023, Milan, Italy
September 30, 2022: Abstract submission
November 30, 2022: Abstract notification of acceptance
January 15, 2023: Full paper submission
March 15, 2022 : Full paper notification of acceptance
April 15, 2023: Early-bird registration
May 15, 2023: Registration for the inclusion of papers in the proceedings
후일담: EMI는 못 갔지만 나머지 두 학회는 발표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