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상 의학자문위원회 신설에 대한 의견서
직업성 질병 판단은 의학자문이 아니라 규범적 판단 체계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견서]
1. 제출 취지
중대재해전문가넷은 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하여 의견을 제출한다.
직업성 질병에 대한 신속하고 공정한 판단은 피해 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넘어 노동자의 안전권을 보장하고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다. 직업성 질병 판단은 노동자의 몸을 통해 일터의 위험을 확인하고, 사업주의 예방 책임을 분명히 하며, 동일한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직업성 질병 판단은 협소한 의학적 인과관계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며, 노동조건과 예방의무, 사회적 보호 필요성을 함께 고려하는 규범적 판단 체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중대재해전문가넷은 의학자문위원회 신설안의 재검토와 함께 직업병 인정기준에 대한 정기적 심의 및 독립적인 규범판단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한다.
2. 산재보험에서 직업성 질병 판단은 의학적 판단이 아니라 규범적 판단이다
산재보험은 업무상 재해를 입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험제도이다. 따라서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은 질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의학 연구와 동일할 수 없다. 산재보험의 목적은 질병의 원인을 100%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손상이 업무와 어느 정도 관련성을 갖는지를 사회보험의 관점에서 판단하여 보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역시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는 자연과학적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제반 사정을 종합한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규범적 판단의 문제라고 지속적으로 판시해 왔다. 업무상 질병 판단에서는 의학적 진단과 병인론뿐 아니라 노동시간, 작업환경, 노출 수준, 사업주의 예방조치, 역학적 근거, 사회적 보호 필요성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과로사, 정신질환, 직업성 암, 생식독성 질환, 근골격계질환과 같은 직업성 질병은 단일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으며, 장기간 누적된 노동조건과 작업환경의 영향 속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병에 대한 판단은 본질적으로 규범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3. 직업성 질병 판단은 피해구제를 넘어 중대재해 예방의 출발점이다
직업성 질병에 대한 신속하고 공정한 판단은 단지 개별 노동자의 보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일터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확인하고, 같은 위험에 노출된 다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산재 인정이 지연되거나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루어질 경우 질병을 발생시킨 노동조건과 유해요인은 드러나지 않는다. 사업장의 위험은 그대로 유지되고 사업주의 개선 의무 역시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동일한 위험요인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게 유사한 질병과 사망이 반복될 수 있다.
과로사, 직업성 암, 생식독성 질환, 정신질환, 근골격계질환 등은 장기간의 노동시간, 인력 부족, 조직 운영의 문제, 유해물질 노출, 예방조치 미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 이러한 질병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사후 보상이 아니라 사업장의 구조적 위험을 드러내고 중대재해 예방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직업성 질병 판단은 노동자의 몸에 나타난 손상을 통해 일터의 위험을 읽어내는 사회적 제도라고 할 수 있다.
4. 노동자의 안전권 실현을 위해서도 규범적 판단이 필요하다
노동자의 안전권은 사고나 질병이 발생한 뒤 보상받을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전권에는 위험을 알 권리,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건강손상이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공정하게 조사받을 권리, 그리고 동일한 위험으로부터 다른 노동자들이 보호받을 권리가 포함된다.
직업성 질병 판단이 지나치게 엄격한 의학적 증명에 의존하거나 과학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배제될 경우 노동자는 자신의 질병이 왜 발생했는지 알 기회를 잃게 된다. 또한 동일한 작업환경에 있는 노동자들 역시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보상 문제를 넘어 노동자의 안전권에 대한 침해이다.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건강손상을 통해 위험을 발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의학적 사실판단을 넘어선 규범적 판단 체계가 필요하다.
5. 중대재해 예방체계와 직업성 질병 판단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과로사와 직업성 질병은 개인의 건강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안전보건관리 실패와 노동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적 재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과로사는 대표적인 중대재해이며, 직업성 질병 역시 노동자가 일터에서 입는 중대한 건강손상이다.
산재보험에서의 직업성 질병 인정은 해당 사업장에 존재하는 위험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인정된 사례는 위험성평가 개선, 노동시간 관리, 유해물질 관리, 건강감시 강화, 안전보건관리체계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물론 산재보험의 상당인과관계 판단과 중대재해처벌법상 형사책임 판단은 서로 다른 제도이다. 산재보험은 피해구제를 위한 사회보험이며,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의 의무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형사법 체계이다.
그러나 양 제도는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산재보험이 직업성 질병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인정할수록 사업장의 위험은 더 명확하게 확인될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중대재해 예방정책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6. 의학자문위원회 신설은 규범적 판단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은 의학자문위원회를 신설하여 업무상 질병 판단 과정에서 의학적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직업성 질병 인정은 의학적 사실판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영역이다. 의학은 질병의 발생 원인과 경과를 설명하는 학문이지만, 사회보험의 보호 범위와 책임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법과 제도의 영역이다.
특히 과로사, 정신질환, 생식독성 질환, 직업성 암과 같이 과학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의학적 자문보다 오히려 노동조건, 노출상황, 예방의무 이행 여부, 사회적 보호 필요성을 종합하는 규범적 판단이 중요하다.
의학자문위원회가 사실상 직업병 인정 여부를 좌우하는 구조가 형성될 경우 업무상 질병 판단은 협소한 의학적 인과관계 판단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이는 대법원이 확립해 온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규범적 판단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산재보험의 사회보장적 기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해외 사례를 보더라도 직업병 제도의 핵심은 개별 사건에 대한 의학적 자문 자체가 아니라, 업무관련성을 예측 가능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인정기준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 영국은 지정질병 제도를 통해 일정 질병과 직무·노출조건이 충족되면 업무관련성을 추정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독일 역시 직업병 목록과 함께 새로운 과학적 근거가 확인된 질환에 대하여 목록 외 인정 경로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의학자문위원회가 개별 사건에 대한 의학적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인정 여부를 좌우하는 구조로 운영될 경우, 업무상 질병 판단은 더욱 협소한 의학적 판단으로 수렴될 우려가 있다.
7. 필요한 것은 의학자문위원회가 아니라 독립적인 규범판단 체계이다
직업성 질병 판단에서 필요한 것은 의학적 자문기구의 확대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이 참여하는 독립적이고 상설적인 규범판단 체계이다.
노동자 대표, 사용자 대표, 직업환경의학 전문가, 산업안전 전문가, 역학자, 산업위생 전문가, 독성학자, 법률가 등이 참여하여 업무관련성을 종합적으로 심의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또한 이번 재입법예고 과정에서 삭제된 직업병 인정기준 심의 관련 규정 역시 복원되어야 한다. 직업병 인정기준은 산업구조 변화와 과학적 근거 축적에 따라 지속적으로 개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정기적 심의는 제도 운영의 핵심 기능이다.
이번 개정안은 새로운 위원회라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나, 그 위원회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인정기준 개선에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설계는 충분하지 않다. 그동안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는 선진국 제도의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운영원리와 철학은 충분히 내재화하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직업병 인정체계 역시 같은 한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위원회가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첫째, 집행기관으로부터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임상의학뿐 아니라 직업환경의학, 역학, 산업위생, 독성학, 법률·제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다학제적 구성이 필요하다. 셋째, 직업병 인정기준의 개선을 위한 상설 연구지원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넷째, 직업병 인정기준을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그 근거와 결과를 공개하는 절차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영국의 산업재해자문위원회와 독일의 직업병 의학전문가자문위원회는 모두 독립적인 전문가 검토와 연구지원 체계를 기반으로 인정기준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따라서 정책전문위원회 또는 이에 준하는 기구가 직업병 인정기준을 정기적으로 검토·심의하도록 시행령에 명시하고, 의학자문위원회 역시 개별 사건 판단이 아니라 인정기준의 개선과 과학적 근거 축적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
8. 결론
직업성 질병에 대한 신속하고 공정한 판단은 피해 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넘어 노동자의 안전권을 보장하고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다.
직업성 질병 판단은 노동자의 몸을 통해 일터의 위험을 확인하고, 사업주의 예방 책임을 분명히 하며, 동일한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직업성 질병 판단은 협소한 의학적 인과관계 판단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며, 노동조건과 예방의무, 사회적 보호 필요성을 함께 고려하는 규범적 판단 체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중대재해전문가넷은 의학자문위원회 신설안의 재검토와 함께 직업병 인정기준에 대한 정기적 심의 및 독립적인 규범판단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한다.
2026년 6월 15일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건강정책포럼, 노동권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동연구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사회건강연구소, 시민건강연구소, 예술인연대,
문체부는 예술인의 목숨보다 정치를 우선하는가?
- '무대 사망 사고' 책임자, 박혜진 국립오페라단 단장 임명 강행을 규탄한다 -
[성명서]
지난 2023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이 이끄는 오페라 ⟨마술피리⟩ 리허설 도중 출연진이 하강하는 무대장치(400kg)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투병하던 성악가 고(故) 안영재 님은 끝내 2025년 10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 사고는 우리 예술계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며, 무대 안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킨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사고 이후의 대응은 그 무게에 걸맞지 않았습니다. 책임 문제는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고, 유족과 현장 예술인들이 납득할 만한 사과와 설명 또한 이루어지지 않은채 책임자들은 책임 회피로 일관해 왔으며 현재 법적 소송이 진행 중입니다.
이번 인사는 예술계 전반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으며, 무대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안전한 무대’는 선택이 아니라 전제입니다. 이를 보장하는 일은 정책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입니다. 생명과 직결된 사고의 책임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이번 인사는, 현장 예술인들에게 깊은 불신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또 다른 위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박혜진 씨를 국립오페라단 단장으로 임명한 것은 대한민국 예술인의 안전권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이자, 고인과 유족을 향한 잔인한 2차 가해입니다.
예술인의 생명과 안전은 어떠한 경우에도 후순위가 될 수 없다. 이에 중대재해전문가넷은 다음과 같이 강력히 요구합니다.
우리의 요구
1.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오페라단 단장 임명을 즉각 재고하고 철회하라.
2. 책임자는 유족 앞에 책임있는 태도로 사과하고, 고(故) 안영재 님 사고 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에 임하라.
3. 문화체육관광부는 무대 안전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대책 을 마련하라.
예술은 신뢰 위에 서 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무대 위에 지속 가능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무대 위 안전은 뒷전이어도 권력만 있으면 성공한다"는 최악의 선례가 남지 않길 바라며, 중대재해전문가넷은 무대 안전의 원칙이 바로 세워질 때까지 끝까지 시민, 예술단체들과 연대하여 문제 제기를 이어갈 것이다.
2026년 4월 7일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건강정책포럼, 노동권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동연구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사회건강연구소, 시민건강연구소, 예술인연대,
아리셀 참사 항소심, 왜 더 무거운 형이 필요한가
[성명서]
오는 3월 27일 아리셀 중대재해 사건에 대한 항소심 결심공판이 예정되어 있다. 이 사건은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 가장 많은 23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중대산업재해 사건인 동시에, 위험의 예견 가능성과 결과 회피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이를 통제할 안전보건관리체계가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한 예방 가능했던 참사였고 그랬기 때문에 제1심은 피고인 아리셀 대표이사 박순관에게 징역 15년, 피고인 아리셀 운영본부장 박중언에게 징역 15년 형을 선고하였다. 항소심은 그 책임을 더욱 엄중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아리셀이 생산한 리튬1차전지는 제조과정, 그리고 완제품의 화재와 폭발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튬1차전지는 금속 리튬을 사용하는 까닭에 수분, 열, 충격, 내부 단락 등에 높은 반응성을 보일 수 있어, 통상의 2차전지보다 화재·폭발 위험을 더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는 고위험 제품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경영책임자에게는 리튬1차전지 공정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하여 위험을 사전에 식별하고, 그에 상응하는 공정관리, 안전교육, 대피계획, 작업통제체계를 갖출 책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아리셀 참사의 핵심은 중대재해처벌법 제4조 제1항 제1호가 요구하는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알려진 사실관계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생산과 납품을 우선하면서도 위험성이 높은 공정에 비숙련 노동자들을 투입하였고, 화재·폭발 위험에 상응하는 교육과 훈련, 비상대피체계 확보, 재해 발생시 작업중지나 원인조사에 관한 체계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은 예측 불가능한 돌발사고가 아니었고, 제품의 본질적 위험성을 알고도 경영책임자가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군다나 희생자 23명 중 절대다수인 18명이 이주노동자였다는 점은, 한국 사회의 위험이 취약계층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가장 위험한 공정과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이 언어, 고용, 체류지위에서 취약한 이주노동자에게 집중되고, 그 결과 안전교육·위험정보·대피체계에서의 배제가 곧 생명의 배제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단순한 관리 부실을 넘어, 이주노동자의 생명을 더 값싼 것으로 취급해 온 노동시장 구조와 시민권의 위계를 보여주는 사회적 참사이다. 여기에 더하여, 피고인들이 무허가 불법파견 업체를 통하여 이주노동자를 파견받은 것은 이주노동과 비정규직의 취약성만 악용한 것으로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어둡고 부끄러운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리셀 참사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이며 그 책임 또한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다. 이토록 의무위반이 명확하고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큰 사건에서도 형이 감경된다면, 앞으로의 산업현장에는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지 않고, 보다 낮은 임금의 이주노동자를 사용하다 사망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괜찮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위험이 크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예방 기능을 약화시키고 유사한 참사의 반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항소심 법원은 참사의 규모, 위험의 예견 가능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미수립 정도, 참사 이후 드러난 책임회피적 태도를 종합하여, 피고인들에게 더욱 무거운 형을 선고함으로써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의 기준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2026년 3월 23일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건강정책포럼, 노동권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동연구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사회건강연구소, 시민건강연구소, 예술인연대,
[성명서]
울산 온산공단 DN오토모티브에서 노동자 115명 중 99명(86%)이 혈중 납 10㎍/㎗를 초과하고, 25㎍/㎗ 이상도 다수 확인됐다는 사실은 “선진국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관리 미흡”이 아니라, 공장 안에서 사람의 몸이 납 저장고가 되도록 방치된 시간이다.
더 심각한 것은 특수건강진단을 앞두고 킬레이션(중금속 배출) 주사를 반복 투여해 혈중 납 수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려 했다는 의혹이다. 이는 산업재해 예방이 아니라 은폐이며, 건강진단 제도를 악용해 감독을 회피하려는 조직적 조작이다. 또한 노동자에게 충분한 설명이나 동의 없이 ‘치료’를 가장한 처치를 했다면 의료윤리 위반이자 인권침해이며, 부작용 위험을 감수한 대상자는 오롯이 노동자다.
이 사건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한국 산업보건 체계의 구조적 결함이 있다. 기업이 특수건강진기관이나 작업환경측정기관을 선정을 사실상 좌우하는 이해 상충 구조,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자율 규제를 강화하는 국제적 흐름과 배치되는 사업주의 태도, 그리고 이를 감독할 기관의 느슨한 현장 점검과 사후 조치 부재가 겹치며 “법적 기준을 지켰다”는 면죄부를 주는 꼴이다.
사실 노동자는 작업중지와 작업환경 개선명령을 촉구하며, 검진 전 약물 투입 정황을 공개했다. 우리는 묻는다. 노동자의 혈중 납이 비정상적으로 누적되는 동안, 감독기관은 무엇을 했는가. 따라서 우리는 정부·수사기관에 다음을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의 요구
1. 고용노동부는 즉시 작업 중지 명령과 전면적인 작업환경 개선명령을 발동하라. 환기, 집진 시설 상태, 오염구역 밀폐 및 분리 여부, 작업복 세탁, 샤워와 휴게시설 보장 등 제반 사항을 점검하라.
2. 특수건강진단 과정과 약물 투여 의혹에 대해 사업주, 특수건강진단기관, 연계 의료기관, 작업환경측정기관까지 포함하여 문제가 없었는지 전방위 수사를 개시하라.
3.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 여부를 ‘면밀한 조사와 수사’로 규명하라. 집단적 건강이상과 제도 왜곡 정황이 제기된 만큼, 경영책임자가 유해위험요인을 인지, 통제할 의무를 다했는지, 안전보건관리체계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는지, 은폐·축소 지시가 있었는지 끝까지 밝혀야 한다.
4. 노동자 요구 사항을 즉각 수용하라. 노동조합이 지정, 추천하는 의료기관에서 정밀진단을 실시하고, 특수건강진단기관, 작업환경측정기관을 조합 추천 업체로 변경하며, 형식적 산보위를 해산하고 정상적인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하라.
우리는 ‘선진국’이라는 말이 노동자 현장에서 빈말로 확인되는 현실을 더는 용납하지 않는다. 납은 협상 대상이 아니고, 건강은 비용 항목이 아니다. 즉각적인 작업중지, 전면수사, 책임자 처벌, 제도개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다음 공장·다음 노동자의 몸에서 반복될 것이다.
2026년 3월 3일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건강정책포럼, 노동권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동연구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사회건강연구소, 시민건강연구소, 예술인연대,
삼표그룹 총수‧대표이사에무죄 판결에 대한
중대재해전문가넷의 입장
[성명서]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처법’이라고 함) 시행 후 이틀 만에 삼표시멘트 양주사업소 채석장에서 토사 붕괴로 세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은 중처법 위반(산업재해치사) 혐의로, 이종신 당시 삼표산업 대표이사는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재해 발생 이후 4년여만에 선고된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정도원 회장과 이종신 전 대표이사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실질적인 경영책임자에게도, 안전 관련 총괄 책임을 져야 하는 대표이사에게도 중대재해에 관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은 이번 판결은, 산업재해에 관한 기업의 책임에 법원이 얼마나 관대한지, 중처법을 얼마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고받고 지시했지만 ‘경영책임자’는 아니라는 논리 – 경영총수에게는 권한만 있다는 것인가
법원은 ‘경영책임자’의 범위와 판단기준을 소극적으로 판단했다. 중처법 내용과 입법과정에서의 ‘경영책임자’ 논의내용에 비추어 보면, 중처법이 정하고 있는 ‘경영책임자’는 ‘기본적으로’ 대표이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이사가 아닌 자를 ‘경영책임자’로 인정하려면 대표이사 아닌 자(이 사건에서는 정도원 회장)에게 실질적‧구체적으로 법인의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다는 점, 그로 인해 대표이사가 중처법에 규정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였다는 점 등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에 의하더라도, 정도원 회장이 부문별로 정례보고를 받았고 각 부문별 대표자나 담당 임원 등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법원은 정도원 회장이 참석했던 월간실적회의, 경영관리회의 등의 각종 보고나 회의가 그룹 차원에서 부문별 실적 또는 현안 등을 공유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를 두고 정도원 회장이 삼표산업의 경영책임자로서 경영상 주요 현안 등을 보고받고 안전보건업무를 포함한 사업을 총괄하여 경영상 결정을 내리는 절차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정도원 회장이 각 부문별 대표자나 담당 임원 등으로부터 직접 보고받고 지시하였다고 해서, 삼표산업이나 골재부문의 사업을 총괄하였다거나 삼표산업을 운영하였다는 점, 나아가 이로 인해 이종신 대표이사가 중처법에 규정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삼표그룹의 규모, 조직에 비추어보면 정도원 회장이 중처법에 규정된 의무를 구체적‧실질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판결문에서 의하더라도, 정도원 회장은 각 부문별로 보고받고 필요한 지시를 해왔다. 구체적인 증거로 보고와 지시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도원 회장은 삼표그룹에서 절대적인 지위에서 경영을 총괄해 왔다. 사고 발생 1년 전에 사업장 순회점검 결과를 보고받고 삼표시멘트의 산업재해 관련 취약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에 더하여, 정도원 회장은 삼표산업의 30%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삼표산업 2대 주주인 ‘에스피네이처’의 지분을 70% 이상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직함과 무관하게 의사결정에 관한 권한이 있는 경우 안전보건에 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중처법의 제정 취지였고, 그 취지에 비춰볼 때 정도원 회장은 중처법이 규율하고자 하는 ‘경영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법원은 ‘경영책임자’는 대표이사로 보아야 하고, 대표이사가 아닌 경우를 경영책임자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의 내용과 구조를 세밀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함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경영에 관여하고 실질적인 권한이 있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법원은 중처법의 입법과정을 살펴 ‘경영책임자’의 의미를 판단하였지만, 오히려 그 취지에 역행하는 해석으로 기업 총수에게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현장소장과 동일한 안전조치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논리 - 대표이사가 모든 안전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한편 법원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이종신 전 대표이사의 경우, 함께 재판을 받고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받은 현장소장과 동일한 정도의 안전조치의무와 업무상 주의의무를 부담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종신 전 대표이사로 취임해서 삼표산업 골재부문 대표이사로 근무해왔고 사고 전날을 포함하여 양주사업소에 수차례 방문하였을뿐만 아니라, 과거 양주사업소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사고가 발생한 설연휴기간동안 위험 작업을 중단하고 최소한의 생산체제만 유지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양주사업소의 안전상태와 안전 관련 의무에 대해서 자신의 지위와 경험상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였다. 그러나 법원은 양주사업소 현장소장이 안전보건관리책임자로 임명되어 양주사업소 안전보건관리를 총괄하였고 채석작업 관련 의사결정은 현장소장이 한데다가, 삼표산업에서 관리하는 골재사업장은 10개에 달하기 때문에 현장소장과 동일한 안전조치의무, 업무상 주의의무를 부담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삼표산업 내에서 양주사업소의 규모나 중요도를 고려할 때 야적장 하부에서 채석 작업이 진행된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사정만으로 양주사업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채석 작업이 진행되는지(하부 채석장의 하중이 증가하여 위험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점), 안전조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알면서도 방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사업주는 현장에서 물리적으로도 지위상으로도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위험한 상태에서 일하도록 직접 작업을 지시한 사실, 혹은 위험 상황을 알고 방치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어려운 지위에서 오히려 실질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전보건에 관한 사항은 경영 철학, 사업계획, 비용과 모두 맞물려있기 때문에 현장 실무자가 아닌 사업주가 책임을 져야 한다. 게다가 이 사건의 경우 대표이사가 골재 부문을 총괄하고 있었고 사고 현장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정 권한이 현장소장에게 있었다는 이유로 대표이사가 의무가 없다고 본 것은,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이 책임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권한이 있는 자는 처벌받지 않고, 실질적 권한 없이 실무를 맡고 있는 이들이 처벌받는 기형적인 구조가 되풀이된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함께 기소된 당시 삼표산업 안전보건경영책임자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2022. 1. 골재부문 안전보건경영책임자로 선임되었는데, 안전업무에 관한 전결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산안법이 정하고 있는 안전보건관리책임자에 준하는 업무상 주의의무를 부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골재부문 안전보건경영책임자로 선임된 후 삼표산업 전 사업소의 안전업무에 관한 전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각 사업소의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어떠한 안전조치가 필요한지, 안전조치를 다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선임 후 1달 만에 사고가 발생한 사정은 주의의무 인정 여부가 아니라 책임의 정도를 판단하는 요소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법원의 소극적인 해석은 사고에 대해서 삼표산업 본사의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였다.
권한의 크기만큼 책임을 지우고, 이를 통해 중대재해를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 중처법의 제정 이유이자 취지이다. 우리는 보고와 지시, 결정의 근거들이 확인되고 법원도 이를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영총수와 대표이사, 안전보건경영책임자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은 이번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항소심에서는 법원의 적극적이고 법 취지에 맞는 판단으로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고, 중대재해전문가넷도 이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다할 것이다.
2026년 2월 20일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건강정책포럼, 노동권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동연구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사회건강연구소, 시민건강연구소, 예술인연대,
[성명서]
2025년 3월, 창원 야구장에서 발생한 구조물 낙하 사고로 한 시민이 사망한 지 1년이 경과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사고의 정확한 원인, 책임 주체, 재발 방지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고조사 과정에서 유족의 참여와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으며, 사고조사위원회 운영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대재해 조사의 목적은 단순히 사고를 종결하기 위한 행정 절차에 있지 않다. 재해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물론, 그 배경에 존재하는 구조적·조직적 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통해 동일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의 안전 수준을 제고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조사기구의 독립성, 전문성, 투명성뿐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의 실질적 참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유족이 배제된 조사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칙은 항공기 사고 등 고위험 재난 분야에서 이미 국제적 기준으로 확립되어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항공기 사고 조사 과정에서 유족에 대한 정보 제공과 소통, 권리 보장을 국가의 책무로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는 조사 신뢰성과 재발 방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족의 권리 보장은 특혜가 아니라, 선진적인 재난조사 체계의 기본 요소이다.
해외의 경험 역시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1989년 영국 셰필드의 힐즈버러 축구장 압사 사고로 97명의 시민이 사망한 이후, 초기 조사와 사법 절차는 책임 규명에 실패하였고 유가족의 문제 제기가 장기간 이어졌다. 결국 영국 정부는 독립적인 재조사와 공공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유가족의 참여와 증언을 조사 절차의 중심에 두었다. 그 결과 사고의 구조적 원인과 공공기관의 책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대규모 집회 시설 전반의 안전 기준과 관리 체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다. 힐즈버러 참사는 유족을 배제한 조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진실을 가로막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상남도는 사고조사위원회 회의에 유족이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자신들은 단지 사무국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명시적 법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유족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법률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이는 법의 공백에서 비롯된 문제일 뿐, 유족 배제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사고조사위원회의 설치와 운영 여건을 조성하는 책임은 위원회 설치 주체인 경상남도에 있다. 사무국 역할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조사 과정의 공정성과 권리 보장에 대한 책임까지 면할 수는 없다. 법이 현실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일수록, 행정은 재량과 책임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중대재해 앞에서 지방정부가 져야 할 최소한의 책무이다.
이에 중대재해전문가넷은 경상남도와 국가에 다음과 같이 강력히 권고한다.
우리의 요구
첫째, 유족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하는 현 사고조사위원회의 운영 방식을 즉각 재검토할 것.
둘째, 현 사고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전반을 보완하거나 필요할 경우 재구성하여, 조사 주체로서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실질적으로 확보되도록 할 것. 특히 행정 조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조사 구조를 마련하고, 중대재해·시설안전·재난조사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조사 과정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보장할 것.
셋째, 조사 과정과 자료에 대한 유족의 접근권을 보장하고, 주요 판단과 결정 과정에서 유족의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적·절차적 장치를 마련할 것.
넷째, 조사 결과와 재발 방지 권고 사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관리할 것.
다섯째, 국가(국회와 관계 부처)는 중대 시민재해에 대한 조사와 처리 절차 전반을 예방 원칙에 부합하도록 개선할 것. 향후에는 제3자에 의한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사고조사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경상남도와 국가는 지금 내려야 할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책임을 회피하는 관리자의 태도가 아니라,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한 공적 책임의 주체로서의 결단이 요구된다. 유족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실 규명과 사회적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다. 중대재해전문가넷은 이 요구에 책임 있게 응답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2026년 2월 5일
중대재해 예방과 안전권 실현을 위한 학자·전문가 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노동건강정책포럼, 노동권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 모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민주노동연구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 사회건강연구소, 시민건강연구소, 예술인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