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아르피아, 파니룸, 메이플스토리. 이름만 들어도 추억이 솟아나는 이 단어들에서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한때 우리는 “아바타”에 열광해 있었다. 싸이월드에서 내 방을 꾸미려면 도토리라 불리는 화폐 단위를 사용해야 했다. 메이플스토리에는 요즘도 실제 돈을 가진 어른들이 경매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 돈은 게임의 화폐 단위로 변환되어 사용되고, 실제 경매에 참가하는 것은 게임 속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제 “아바타”라고 발음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2009년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가 떠오른다. 그런데 영화 제목에 한눈 팔려, 단어의 원래 뜻을 놓치고 있지 않았나. Avatar라는 단어는 Merriam Webster Dictionary에 따르면, 다음의 뜻을 가진다. [1]
an incarnation in human form
an electronic image that represents and may be manipulated by a computer user
인간의 형상을 한 화신, 혹은 자신을 대표하는 디지털 이미지. 사전 상 후자의 뜻이 가장 마지막에 표기되어 있다. 디지털 세상의 역사가 인간 역사에서 차지하는 지점을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단어의 의미를 통해, 영화 <아바타> 속 아바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시작으로, 아바타라는 단어가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 삶과 맺는 함의를 차례로 풀어본다.
실제 영화 <아바타> 속에도 다양한 아바타들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나비(Na’vi) 족 형상을 한 일종의 생체 수트(suit)이다. 이는 인간의 DNA 합성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나비 족의 신체와 정말 닮았지만 완벽히 같은 것은 아닌, 인간들이 영혼 링크(link)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수트이다.
또다른 아바타로, 전투 로봇이 있다. 마일스(Miles) 대령을 비롯한 군인들이 사용하는 대형 전투 로봇은, 그 안에 인간을 조종사로 삼는다. 기계는 조종사의 행동을 따라한다. 그러나 로봇의 힘과 크기, 강도로 인해 조종사의 가벼운 주먹질도 위협적인 무기가 된다. 이 같은 전투 로봇도 조종사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 그리고 인간 형상을 닮은 도구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바타로 이해할 수 있다.
원래 형이 참가해야 했을 아바타 프로그램에, 제이크가 합류한다. 그레이스 박사의 근심과 함께, 제이크는 첫 링크를 경험한다. 여기서 편의를 위해, 인간의 모습을 한 제이크를 “인간-제이크,” 제이크의 정신이 링크했던 아바타으로 생활하는 제이크를 “나비-제이크”라 구분해 지칭하겠다.
인간-제이크와 나비-제이크를 일종의 아바타로 정의할 수 있다. 앞서서 언급되었듯이, 아바타는 인간과 닮은 형상을 가졌으며, 그들을 통제하는 조종사의 존재가 필연되어야 한다. 인간-제이크와 나비-제이크도 이 속성을 갖고 있다. 조종사로 기능하는 것은 제이크의 정신이다. 링크로 연결되어 이동하는 제이크의 정신[2]이 두 아바타의 조종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제이크는 두 가지 아바타 사이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제이크와 나비-제이크 사이를 이동하고, 결국 인간-제이크를 떠나 나비-제이크에 정착하는 큰 변화를 이룬다. 하지만 이렇게 아바타 간의 경계를 건너 변화를 이룬 것은, 영화가 설정한 진보된 인간의 기술력 덕분이 아니다. 만약 기술력 덕분에 제이크가 새로운 아바타에 정착했던 것이라면,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노엄(Norm) 같은 동료도 나비 족으로 인정받거나 스스로를 완벽한 나비 족으로 여겼을 것이다.
제이크가 아바타 사이의 경계 융화를 이루어낸 데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원하는가?
원한다면, 내가 이 아바타를 조종해도 되는가?
각 질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제이크의 정신은 각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거쳤을지 추측해본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원하는지를 묻는다. 즉, 옮겨 갈 아바타의 모습이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나”에게 어울려야 함을 의미한다. 제이크의 입장에서, 나비-제이크는 제이크가 원하는 것 혹은 그런 기대에 어울리는 아바타였을까.
이 지점에서 제이크의 신체적 장애가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강력한 장치로 기능한다. 다른 아바타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달리, 제이크는 두 다리를 쓸 수 없다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다. 이 때문에, 제이크는 인간-제이크보다 두 다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나비-제이크에 더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마일스 대령도 나비-제이크가 가진 매력과 비슷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은 아바타 간의 이동이라는 변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질문은 아바타 간 이동의 시발점으로, 이 질문에 대해 “네”라고 대답한 뒤에야 개인의 정신은 두 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제이크는 나비-제이크를 원했다. 그의 신체적 장애를 보완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는 아바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제이크도 마일스 대령이 약속한 신체적 장애 극복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둘 모두 제이크의 신체적 장애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3] 따라서, 인간-제이크에게 제이크가 원했던 모습이 전무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 지점에서 아바타 변경에 최종 기준이 되는 것은 두 번째 질문이다.
원한다면, 내가 이 아바타를 조종해도 되는가?
이 질문은 옮겨가려 하는 아바타가 자신의 다른 아바타나 외부 세계와 정합하는지를 묻는다. 즉, 자신이 이미 가진 아바타들과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지, 그리고 옮겨 갈 역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제이크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보자. 제이크는 첫 번째 질문에 네, 라고 대답한 상태이다. 마일스 대령도 다리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제이크는 나비 족 나이티리와 유대를 쌓고 나비 족의 삶을 배우며, 그들의 가치에 점점 공감하게 된다. 이런 공감은 마일스 대령의 가치관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마일스 대령은 애초에 판도라 행성을 파괴하고 자원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비-제이크로서 배운 새로운 세계와 가치관에 대한 공감이 커갈수록, 인간-제이크가 가진 장점은 두 번째 질문에 의해 약화된다. 즉, 인간-제이크를 조종하기를 선택할 경우, 이는 나비-제이크의 가치관과 충돌하며,[4] 제이크가 유대를 쌓은 나비 사회라는 외부 세계와 정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제이크는 인간-제이크 대신 나비-제이크를 선택한다. 이미 불분명했던 두 아바타 간의 경계를 건너는 그의 모습에서, 아바타 간의 경계는 처음부터 분명한 것이 아니며 융화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아바타 간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아바타 개념을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로 확장해보자.
세상에는 수많은 아바타가 존재한다. 제이크처럼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진 아바타일 수도 있지만, 영화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이런 아바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제이크의 인간-제이크와 나비-제이크라는 두 아바타는 외형을 통해 직관적으로 구분되지만, 이 외형의 물리적 차이를 조금 더 세밀한 범위에서 생각해본다.
외형의 물리적 차이를 일상으로 가져와, 이를 세밀하게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아바타는 일상 생활 속 우리에게 필요한 혹은 요구되는 수많은 사회적 역할들이다. 우리는 사회적 역할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인간-제이크와 나비-제이크 사이처럼 극적인 차이는 아니지만, 차이의 존재는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이에 따라 아바타 곧 사회적 역할에 따라 서로 다른 행동이 기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인간-제이크와 나비-제이크 사이를 이동한 영화 속 주인공 제이크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영화 초반, 그레이스 박사가 처음 만난 제이크에게 죽은 형의 모습을 기대했다가 그가 아무 훈련도 받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한다. 이 장면에서 그레이스 박사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책임자로서, 제이크에게 박사 학위가 있던 형 같은 모습을 기대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반면, 나비-제이크에게는 에이와의 계시를 받은 존재의 모습이 기대된다. 나이티리를 비롯한 나비 족은 나비-제이크에게서 에이와의 계시를 받은 존재로서 잠재력이 있는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에 부족원이 받는 가르침을 제공한다. 만약 나비-제이크가 에이와의 계시를 받지 않았다면, 나이티리는 나비 족 전체에게 나비-제이크의 합류를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아바타, 사회적 역할을 제한 나머지 것을 생각해보자. 아바타를 빼고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역할을 빼고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영화 속에서, 나비 족 앞에 처음 섰을 때 제이크와 나이티리의 어머니(Mo’at)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Mo’at: It is hard to fill a cup which is already full.
Jake: My cup is empty, trust me.
제이크는 자신의 존재를 “빈 잔”으로 정의한다. 이는 그가 나비 족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순간이다. 모아트(Mo’at)는 인간이 이미 가득 찬 컵이라 채우기 어렵다, 즉 자신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전해주기 어렵다고 얘기했지만, 제이크는 이에 반대되는 존재로 자신을 설명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던 수많은 아바타와 그에 요구되는 행동, 아바타를 제외한 본질을 이 장면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서 아바타를 제할 경우 남는 것은 “빈 잔”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이크는 이런 공(空)의 상태를 자신의 본질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에이와의 계시를 받을 수 있던 특별한 존재였으며, 모아트 또한 이런 제이크의 잠재력을 알아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바타는 이 빈 잔에 우리가 채우는 물이다.[5] 다만, 서로 다른 산에서 내려온 샘물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 관계 내에서 우리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역할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색의 물이 하나의 빈 잔에 채워지며 섞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페이스북 가입 시, 프로필에 이름과 사진을 등록한다. 사진은 선택 사항이지만, 이름은 필수이다. 직장, 출신 지역 같이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반드시 추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페이스북 프로필은 우리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즉 우리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정보로 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이런 정보는 우리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는 정보이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페이스북 가입 시 실명은 반드시 필요한 정보가 아니다. 페이스북 같은 SNS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설정하든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다. 특별한 인증 절차를 통해, 이것이 실제 우리 이름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6]
따라서 SNS는 사용자가 원하는 속성만을 선택적으로 공개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돕는다. 사용자가 가진 수많은 아바타에서, SNS는 그가 아바타의 일부분을 콜라주할 수 있게 한다. SNS를 통해 공개된 프로필은 새로운 아바타이다. 사용자가 기존에 가진 다양한 아바타에서, 원하는 부분만을 잘라묶어버린 새로운 형태이다.
더하여, SNS 생태계에서는 다른 흥미로운 일도 일어난다. Dolly Parton Challenge가 대표적인 예이다. Dolly Parton이 SNS에 다음과 같은 사진을 올리며 시작된 챌린지로, 이는 한 사람의 LinkedIn, Facebook, Instagram, Tinder 계정 프로필에 어울리는 사진을 골라 보여주는 챌린지였다.
이 챌린지에서 흥미로운 점은, 피사체는 모두 같았으나 각 SNS에 배치한 사진의 성격이 현저히 다르다는 데 있다. LinkedIn은 커리어를 위한 네트워킹 및 구인구직을 위한 SNS이기 때문에, 프로필 사진은 전문적이고 단정하다. 페이스북은 재미있고 가식 없는 일상을 공유하는 SNS로 인식되어, 편안하고 꾸밈 없는 일상을 살거나, 가족과 함께 하는 프로필 사진이 위치한다.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보다 상대적으로 가장된, 의도된 멋진 순간들을 공유하는 SNS이다. 따라서 이곳의 사진은 페이스북처럼 일상의 모습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멋지게 나온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틴더는 데이팅 어플인 만큼, 이성에게 매력적인 점을 강조한 사진이 위치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해당 SNS의 분위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프로필 사진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이는 유명 연예인들의 사진을 활용한 다양한 2차 창작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2차 창작이 가능했으며 유행이 되었다는 것은 해당 SNS에 어울리는 아바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SNS는 개인이 쉽게 자신의 아바타를 선택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함을 알 수 있다. 한 개인은 자신의 수많은 아바타, 그 아바타가 가진 여러 속성들 중 원하는 것만 골라내 SNS의 프로필을 구성할 수 있다. 또한, 해당 SNS에 어울리는 속성만을 뽑아 내 SNS 프로필, 즉 SNS 상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SNS라는 디지털 공간은 그들이 원하는 다양한 아바타를 보다 쉽게 드러내고 강조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SNS를 현실의 아바타를 숨기고 조작하는 매체라기 보다, 개인의 다양한 아바타를 드러낼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해야 한다. 숨기고 조작한다는 데에는, SNS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가졌던 현실 세계의 아바타가 본질적이라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얻은 결론에 따르면 본질적인 아바타는 없다. 개인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핵심 아바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빈 잔이며, 그 잔을 채우는 것이 수많은 아바타일 뿐이다.
SNS는 그 자체로 사용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스크린 타임을 늘리기 위한 구조로 제작되었지만, 그 디지털 공간에 우리의 아바타를 조각조각 흩뿌려 놓는 것은 우리 사용자들이다. 아바타를 분해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과정은 결국 개인의 “빈 잔” 안에 담을 새로운 향과 색, 맛의 물을 발견하게 돕는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빈 잔 안에 든 물은 점점 더 구성 성분이 복잡해진다. 즉, 멀티 페르소나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 아바타의 멀티 페르소나 형성이 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음은, 우리가 SNS 사용에 있어 가져야 할 경각심을 시사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디지털 세상의 아바타 형성과 재구성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SNS는 아바타의 분해와 조합 과정을 너무 쉽게 이뤄주기 때문이다. 그저 몇 번의 터치면, 제3의 아바타가 탄생해 있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게다가 프로필이 선택적으로 요구하는 객관적인 정보는, 사용자가 해당 프로필을 자신의 본질을 설명하는 아바타로 오인하게 한다. 그래서 SNS는 아바타의 콜라주를 “은밀하게” 돕는다. 그 은밀함은 사용자에게 득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SNS를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