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배우들이 배역에 몰입한 나머지 힘든 시간을 겪곤 한다. ‘메소드 연기’ 이후 일상으로 회복하기까지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식의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연기로 커리어 하이를 찍고 우리의 곁을 떠나간 안타까운 히스 레저가 있다. 히스 레저는 굉장한 몰입력으로 역할에 완벽히 빙의하여 역대 최고의 조커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오죽하면 그의 광기 넘치는 ‘조커’ 연기가 그를 자살로까지 내몰았다는 루머도 돌았을까. 이렇듯 배역 몰입과 일상 복귀는 ‘메소드 연기'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한 배우가 있다면? 아니, 오히려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역할의 삶이 자신의 일상이라고 생각했다면?
<패왕별희>는 정신없이 바뀌는 시대상에 따른 예술의 존재 가치를 평생을 경극 ‘패왕별희'의 ‘우희'역에 바친 ‘뎨이'를 중심에 두고 그가 겪는 변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에는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뎨이 자신의 이야기, 변화하는 역사의 이야기, 샬루와 주산의 이야기, 주샨과 뎨이의 이야기 등……
모든 이야기를 다루고 싶지만, 우리는 이 중에서도 뎨이 그 자체에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뎨이가 배우로서, 우희로서, 그리고 ‘뎨이’로서 가지는 의미를 말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아바타> 에서는 개인이 가진 여러 개의 아바타와, SNS 속 아바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충돌, 그리고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들을 영화 <패왕별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화 내내 뎨이는 샬루에게 패왕과 우희는 평생 함께라며, 샬루를 향한 집착을 보인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뎨이가 사랑한건 누구였을까, 실존 인물이자 평생을 함께 연기한 ‘샬루’일까, 혹은 연극 속 ‘패왕’이었을까?
샬루는 뎨이가 처음 온 날에도, 사부님께 혼나는 날에도, 항상 방패가 되어준, 평생의, 그리고 유일한 친구였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에게도 버려지고, 연극학교에서는 허구한 날 궂은 소리를 듣는 뎨이를 한결같이 감싸준 샬루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을 것이다.
게다가 한 연극을 몇 십 년 동안 같이 한 파트너였으니, 우정 이상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예사는 아니었을지도. 하지만, 뎨이는 그저 스토리에 충실했을 뿐이고, 따라서 ‘우희’에 이입하여 ‘패왕’을 사랑했다는 가설도 배제할 수 없다.
경극 ‘패왕별희’의 줄거리 상, 우희는 끝까지 정조를 지키며 패왕을 위해 죽는다.[1] 목숨을 바친 사랑이었기에, 뎨이는 일분일초가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라며 ‘우희’와 ‘패왕’은 끝까지 함께여야 한다는 점을 샬루에게 줄곧 상기시킨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희 역할만을 맡으며 살아온 뎨이로서는, 어쩌면 ‘패왕’을 사랑하는 우희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극장 주인이 계약을 맺고자 연극 학교에 방문한 이런 중대한 날, 뎨이는 고질적으로 하던 실수를 해버린다. ‘나는 본디 계집으로서~’ 라는 대사를 그만 ‘나는 본디 사내로서~’ 로 잘못 연기한 것이다. 주인공이 실수를 보인다는 것은 연극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과도 같기 때문에 주인은 실망하며 돌아선다. 스승이고 학생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악한 그때, 샬루가 눈물을 머금고 달려가 뜨거운 담뱃대로 뎨이의 입을 지지며 윽박지른다. 이후 뎨이는 얼빠진 얼굴로 연기를 정상적으로 마무리하고, 다행스럽게도 극장과의 계약이 성사된다.
만약 계약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뎨이가 샬루를 뿌리쳤다면 사부의 화풀이와 체벌은 아이들의 대장 격인 샬루의 몫이였을 것이다. 뎨이 역시 이를 모르지 않기에 눈을 질끈 감고 샬루의 눈물어린 윽박에도 순순히 입을 벌리고 저항하지 않는다. 뎨이는 결국 샬루를 위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다. 샬루의 고문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읊는 ‘나는 본디 계집으로서…’ 라는 대사가, 정신적 거세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뎨이는 샬루가 아닌 다른 배우가 패왕을 연기했대도 마찬가지로 사랑했을까? 혹은, ‘패왕별희’의 플롯과는 별개로 인간 ‘샬루’ 그 자체를 사랑했을까?
연극을 하면서도 술집에 다니고, 결혼을 하는 등 일상생활을 잘만 하는 샬루와 달리, 뎨이는 좀처럼 연기와 일상을 분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죽했으면 샬루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냐’며 고개를 저었을까.
공연예술에는 배우들이 활약하는 ‘무대’와 역할을 내려놓고 자신으로 돌아오는 ‘백스테이지’가 있는데, 현실도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회 속에서 보여지는 나의 외면이 ‘무대’라면, ‘백스테이지’는 오로지 ‘나’에게만 보이는 내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된다.
하지만 뎨이에게는 ‘백스테이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무대’ 속 설정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백스테이지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편’과 ‘어항’이 뎨이의 이런 상태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중반, 감옥에 있는 뎨이를 면회 온 주샨이 ‘너와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샬루가 쓴 편지를 전달하는 장면 직후에 뎨이는 공허한 표정으로 아편대를 문다. ‘백스테이지’, 즉 패왕과 우희 역할을 벗어나 각각 ‘샬루’와 ‘뎨이’로서 존재하는 ‘현실’이 있음을 인식한 후부터, 이를 잊기 위해 아편에 손을 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아편을 끊고 괴로워하는 뎨이 옆에는 어항이 하나 놓여있는데, 어항 속에 갇혀 사는 금붕어와 ‘우희’에 갇힌 뎨이는 꼭 닮아있다. 어항 유리 너머로 보이는 뎨이의 몸부림이 마치 물 밖으로 나와 팔딱거리는 금붕어마냥 애처롭다. 연극에서 벗어나면 뎨이는 곧 죽을거란 걸 암시하는 듯, 참으로 절묘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뎨이는 샬루와 마지막 패왕별희를 연기하던 도중, 패왕의 검으로 자결하는 우희의 마지막처럼 샬루의 허리춤에 있던 칼을 빼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백스테이지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뎨이로서는, 무대 위 ‘우희’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지속이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모두들 뎨이에게 이제 그만 ‘우희’에서 벗어나서 인생을 살라고 말한다. 철저히 ‘우희’의 아이덴티티만을 고수하는 뎨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애처롭고 딱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생을 하나의 극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주문을 하는 우리도 과연 배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다. 저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의 저서 ‘자아연출의 사회학’ 역시 사회를 하나의 무대로, 개인은 그 위의 공연자로 규명한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관객의 시선, 또는 사회의 관찰에 의해 정체성이 형성되고, 그 정체성을 타인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삶은 연극과 달리 플롯도, 대본도 없다. 그 대신 각자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규범이 주어지는데, 이는 연극의 ‘배역’과 흡사하다. 무대 위, 그러니까 외면에는 타인에게 보이고픈 ‘나’가 존재하고, 백스테이지, 즉 내면에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있을 것이다.[2]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하든 간에 남들이 나에게 갖는 인상과 그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알 길이 없다. 나는 영영 내가 생각하는 나도, 타인이 생각하는 나도 될 수 없기에,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나’라는 사람이려니 하고 살아갈 뿐.
인생이라는 연극에는 배역 뿐만 아니라 장면도 주어진다. 어떤 장면은 없던 마음도 생기게 하고, 어떤 장면은 있던 마음도 사라지게 한다. ‘그리운건 그때일까 그대일까' 하는 말이 있듯이, 돌아보니 그저 분위기가 좋아서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진심을 숨기고 정반대로 행동한 적도 있지 않은가. ‘분위기가 그렇지만 않았어도’, ‘그 자리에 그 사람만 없었어도’, 하는 순간순간의 장면이 없었더라면, 내 마음과 반대되게 보이려 했던 그 무수한 노력들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만약 이 모든 것들이 ‘극적 연출’에 불과하다면, 과연 ‘진정한 모습, 진정한 관계’란 어떤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것들이 존재하기나 하는건지, 많은 생각이 든다. 항상 인간은 자신의 모습에 진실되어야 하고 일관된 모습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 클리셰로 고착된 세월만큼, 실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하에 용인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뎨이라는 인물은 그저 영화 속 등장인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뎨이와 유사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리플리 증후군’이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인 양 믿는 정신적 증상을 뜻한다. 정식 병명은 아니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 에서 따왔는데, 거짓말로 가짜 인생을 꾸며낸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알랑 들롱이 주연인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맷 데이먼 주연인 ‘리플리’로도 만들어졌다.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처한 현실보다 부풀려서 허구의 모습을 만들곤 하는데, 이렇게 거짓말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거짓말이 실제 모습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어, 더욱 현실로 돌아오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문제는 SNS가 발달하게 됨에 따라 이런 증후군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SNS에는 어떠한 개인정보나 사진도 검증 없이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원하는 모습의 가면을 쓰기 더욱 쉽고, 덕분에 이들은 타인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호화로운 생활을 올리며 자신이 그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한다.
인터넷 상에서 허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사이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재미삼아 올린 몇 개의 사진이 예상치 못한 관심을 받자, 더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고, 이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허구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 이외에 타인의 신분을 도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SNS에 기재된 타인의 신상정보와 사진들을 무단으로 도용하여 자신의 프로필을 꾸민다. 사진이 낯익어서 찾아봤더니 남의 사진이었더라, 는 등 웃지 못할 고발들이 인터넷에 허다하게 존재한다.[3]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면 모를까, 대부분의 경우는 로맨스 스캠 등 심각한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로맨스 스캠’은 이상적인 연인 또는 배우자의 모습을 만들어내어 이성에게 접근하고, 돈을 뜯어내는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다.[4] 멋있고 잘 사는 모습에 반해 여생을 함께 약속했지만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니.
SNS 속 호화스럽고 부러움을 살 만한 모습을 보고 모방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결국 우리 사회는 리플리가 또다른 리플리를 낳는 무한궤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지만, 과연 이런 사람들의 삶을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저 마음대로 프로필을 꾸미고, 삶의 부분을 선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SNS는 수백명, 수만명과 소통할 수 있어 장점이라지만, 그 너머의 진짜 얼굴을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맨 얼굴을 알기 힘든 마당에 급속도로 발전하는 SNS를 보고 있자니, 사람들 간 물리적 거리는 극복해도 심적 거리는 오히려 떨어뜨려놓는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보면 뎨이는 ‘리플리 증후군’의 완벽한 예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의 전제는 매우 다르다. 먼저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은 거짓말로 시작하고, 거짓말임을 자각하고 있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기에, 본래 가진 가면을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가면을 그려넣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언증’과도 유사한 면을 띠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들킨 순간 발끈한다. 감추고 싶었던 원래 가면을 들켰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자기 최면 걸듯이 어느 순간 자신이 꾸민 삶이 거짓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뎨이는 ‘리플리 증후군’이 아니다. 뎨이는 거짓말로 시작하지 않았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점으로는 그렇다. 한번도 자신을 ‘우희’라는 이름으로 지칭한 적도 없고, 자신의 삶이 거짓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뎨이에게는 우희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곧 ‘우희’요, ‘우희’가 곧 뎨이이기 때문에 그는 ‘우희’라는 두 번째 이름을 쓸 이유가 없다. 우희역에서 그만 나오라는 핀잔을 듣고 발끈하기는 하지만, 이는 치부를 들켜서가 아니다. 뎨이에게 우희는 거짓말이 아닌, 인생이다. 따라서 우희 역에서 나오라 함은 곧 뎨이가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무례한 언행인 것이다. 실제로 공연예술계의 종사자들은 일상생활마저 연기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관리를 기울인다.[5] 어떻게 보면 자기기만이라고 할 정도로 우희 캐릭터를 고수하는 뎨이는 그저 훌륭한 직업정신을 가진 연극인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뎨이를 그저 허언증 환자, 정신착란을 겪는 불쌍한 이로 보기에는 많은 오해와 비약이 있다. 뎨이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그가 예술에 대해 갖는 진심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충성심'이라는 단어로 묘사할 수 있다고 본다. 영화 중 공산당이 집권세력이 되었던 시기에, 당의 이념을 반영한 경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원들의 주장에 반대하며 뎨이는 ‘경극은 경극으로 남아야 한다.’라는 소신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경극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는지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변질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내내 고개를 높게 들며 고고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극에 충성스러운 뎨이는, 우희이라는 옷을 자신의 피부로 만듦으로써 그 충성심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