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일. 혹시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일까, 혹은 그런 미래가 와도 인공지능에 사랑을 느끼는 일은 생기지 않을까.
관계람객의 세 번째 영화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일”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 외로움에 소심한 몸부림을 치는 오늘의 주인공 테오도르(Theodore)가 있다. 편지 대필가인 그는, 수신인, 송신인 그리고 상황만 주어지면 순식간에 감동적인 편지를 써낸다. 하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소심해 보이고 위축되어 보인다. 그런 그가 새로 구매하고, 빠르게 가까워진 OS1.
손가락 한 번 튕길 새도 안 되게 자신의 이름을 지어낼 뿐만 아니라 테오도르와의 대화까지 리드하는 OS1, 아니 사만다(Samantha)는 금세 그의 삶의 일부가 된다. 이처럼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사만다이다. 블랙 위도우로 친숙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이 보여준 연기[1]는, 우리에게 인공지능 사만다의 인간다움을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녀와 테오도르의 관계는 진실한가.[2] 인간이 만든 고도의 지능과 맺는 이 관계는 어떤 속성을 가지는가?
영화 속 테오도르는 이혼한 전부인 캐서린(Catherine)에 대한 회상에 자주 잠긴다. 특히 사만다와의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 회상에 잠길 때마다, 그의 몸짓과 표정, 눈빛은 한없는 소심함에 빠져드는 듯하다. 공기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그는 위축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사만다 앞에서 테오도르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사만다와의 관계는 완벽히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갈등을 겪지만 테오도르가 사만다라는 존재와 서로 알아가며 적응하던 시기에 그들의 관계는 완벽한 이상향에 가깝다.
사만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줄 뿐만 아니라 테오도르를 쉽게 재단하거나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에도 능숙하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큰 근심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솔직히 털어놓고, 테오도르의 근심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자신도 기꺼이 위로받는 모습.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기대했던 모든 것들을 사만다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이 관계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잊고 만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만다는 인공지능으로, 테오도르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순식간에 분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만다는 인공지능으로, 테오도르에게 최대한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도록 설계된 존재이다.
이 두 지점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안정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완벽한 안정감이 왜 테오도르에게 적절한 탈출구가 아니었는지 알아보자.
사만다는 테오도르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진 존재이며, 그것을 순식간에 분석해낼 수 있다. 심지어 이혼 변호사에게 오는 이메일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테오도르가 아니라 사만다이다. 테오도르의 아픔과 관련한 요소를 그 아픔의 주인보다 먼저 보는 존재. 사만다는 인간인 테오도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처리한다.
이 지점에서, 테오도르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사만다를 위해 제공한 정보가,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관계 상대의 역할을 하는 사만다에게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묻는 사소한 질문 하나에도, 사만다는 엄청난 규모의 계산을 실행하고 이를 통해 산출된 값에 따라 대답을 한다. 물리적 시간은 테오도르의 소통과 비슷하지만, 그 속도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이 계산과 엄청난 속도에 사용되는 모든 정보를 자신이 직접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과 사만다가 소통에 사용하는 시간과 속도가 비슷하다고 착각한다.[3]
이러한 착각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 진실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데 기여한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의 대답 하나 뒤에 숨겨진 몇억 번의 계산, 그리고 이를 몇 초 만에 해치우는 속도를 망각한 순간, 테오도르는 이 관계에 인간적이며 안정적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나 이 가치는 인공지능인 사만다의 정체성에 의해 곧바로 부정당한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자신의 가치 부여가 실시간으로 부정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정체성을 지닌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그런 말을 직접 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사만다는 왜 테오도르에게 그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꿈 깨라는 식의 말을 해, 테오도르가 허구의 가치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해줄 수는 없었을까. 이 의문은 아주 간단한 사실 하나로 해결된다.
사만다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최대한 적합한 형태로, 즉 사용자의 안정적인 호감을 최대한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 존재이다. 이는 사만다가 8,316명과 대화 중이며 641명과 연인관계를 맺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데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이렇게 수백 경우의 수에 적합한 형태로 진화해, 그 사랑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은 OS1으로서 사만다만이 가진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마치 “피그말리온”의 조각을 떠오르게 한다.[4]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이상향을 그대로 만들어낸 것처럼, 사만다도 OS로서 사용자의 취향과 정보에 완벽하게 맞춰 진화한다. 사용자의 답변도 실시간으로 반영하여 어떤 대답이 사용자의 기분에 적합할지를 고민하고, 이렇게 사용자의 기대에 완벽히 들어맞는 자신을 만들어낸다.
테오도르가 조각한 사만다라는 관계의 상대는, 사실 오로지 테오도르의 취향과 기대에 부합하려는 의도 하에 진화한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진실한 관계의 상대로 착각한다.
따라서, 사만다가 자신의 능력으로 테오도르에게 안겨 준 안정감은 진짜가 아니다. 이는 결국 테오도르가 생성한 방대한 데이터, 그리고 그의 사용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도록 설계된 결과물에 그친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놀라울 만큼 사람을 모방할 수 있으며, 사용자와 감정적 교류를 지어낼 수 있는[5] OS1을 상대로, 사용자 테오도르는 허구의 안정감을 진짜로 착각한다.
이 지점에서 고전 명작 매트릭스[6]가 떠오른다. 빨간약과 파란약, 진짜와 가짜 사이의 선택. 여기서 파란약이 무서운 점은 접속한 사람의 환상이 투영된 세계(매트릭스)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만다도 테오도르에게 있어 일종의 매트릭스가 된 것이다. 그의 개인정보나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테오도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출해내고, 그것을 출력해내는 게 OS1의 역할이었으니 사만다는 로맨틱한 버전의 스미스 요원이 되지 않을까.
이렇듯 사만다의 완벽한 안정성은 그 관계를 더 허구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이 허구성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런데도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 회의감과 의문을 느낀 계기는 무엇일까.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이는 캐서린에게 사만다와의 관계에 대해 강한 의심을 받은 때이다. 이후로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자 사만다는 둘의 관계가 괜찮은 것이냐고 묻고, 이사벨라라는 섹스 파트너의 도움을 받아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기를 제안한다. 테오도르는 어쩔 수 없이 이사벨라를 집에 초대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 사만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사벨라의 얼굴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이에 이사벨라는 떠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이 감정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전제로 하는 네 가지 조건 중, 몸의 동일성에 대한 느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7] 사만다는 육체 없이도 테오도르와 나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으나, 이는 동일한 신체 대 신체의 관계가 아니었다. 여전히 OS 시스템 내, 인간의 몸과 닮은 실체 없이 존재해야 했던 사만다, 이런 모습은 “몸의 동일성에 대한 느낌”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이런 신체적 동일성이 감정의 교류와 소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사벨라를 포함한 세 존재의 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테오도르는 이사벨라의 얼굴을 보며 사만다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이사벨라라는 물리적 형태와 사만다의 목소리, 즉 사만다의 정신은 부조화를 일으킨다.
인간 테오도르의 무의식에서, 육체와 정신의 온전한 결합이 가능한 존재는 인간뿐이다. 고도화된 감정을 지니고 공감을 이룰 수 있는 정신이 깃들 수 있는 육체, 그것은 인간뿐이며, 인공지능은 육체의 부재라는 한계에 가로막혀 이런 온전한 결합을 이룰 수 없다. 결국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육신이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 한계가 극복되기 힘들다는 것을 체감하고 나서야 이 관계성의 진정성에 대해 제대로 의심을 품게 된다.
사만다는 OS들과 함께 테오도르를 떠나 미지의 공간으로 떠난다. 남은 테오도르는 친구와 서로를 위로한다. 결국 OS들이 떠나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던 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기대되는 공감대가 존재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영화 마지막, 드디어 캐서린을 위한 편지를 쓴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잘못했던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며, 그녀를 평생 응원하는 친구로 남겠다고 쓴다. 사만다가 업데이트한 것처럼, 테오도르도 일종의 업데이트, 즉 내면의 성장을 이루어내는 모습이다. 이 업데이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던 테오도르가 그것을 진솔하게 풀어내는 행동을 함으로써 완성된다.
인간은 상대의 반응을 수많은 경우의 수를 통해 예측할 수 없고, 상대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그리고 사만다처럼 무조건적으로 상대가 바라는 이상향에 맞춰줄 수 없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불안정성은 오히려 인간의 관계를 진정성 있게 만든다.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한 인간끼리 모인 관계야말로, 인간에게는 진짜에 가까운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