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니은씨의 일상

니은

#졸업

예상 밖으로 빨리 졸업을 했다. 정들었던 사람들도, 동아리도, LINQ도 내버려둔 채 학교를 떠난다. 아... 이제 뭐하지?


#집

일단 오랜만에 집에 왔다. 워낙 학교에 눌러붙어 살았던지라, 아들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며 엄마가 정말 기뻐하신다.


#구직

좋은 자리가 있어서 자소서를 썼다. 학교 다니면서 학업을 1순위로 놓고 살진 않았었는데, 틈틈이 해온 게 있어 내세울 만한 것도 있긴 하더라. 학교 생활, 나의 생각, 다짐 등을 덧붙여 진솔하게 써냈다. 물론 커밍아웃은 빼고.


#휴식

면접 후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사이, 엄마랑 동생이랑 서울 나들이를 많이 다녔다. 안 가본 곳도 많이 가보고 셀카도 찍고… 이렇게 좋아하시는 것을 왜 그동안 못 해드렸을까?


#합격

하도 연락이 안 와서 체념하고 있었는데 웬걸, 합격이란다. 꿈만 같은 일이다.


#입사

생각해보니 얼마 못 쉬었는데, 벌써 입사다. 그치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학교에서 했던 것보다 잘 해봐야지.


#회사

어렸을 때 회사는 위계질서가 있고 꽉 막힌 곳일 거라 상상해서 막연히 걱정하곤 했는데, 내가 다니는 회사는 유연하고 젊은 곳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곳의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나 또한 열심히 해서 기여하고 싶다.


#스물후반

신입 교육 동기들도, 새로운 팀원들도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것: 연애사. 아무리 말랑말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회사라도, 한국인 특유의 오지랖은 어디 가질 않는다. 포항공대 모솔이라 하니 졸지에 천연기념물이 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소개팅 제안은 거절, 거절, 거절. 나도 참 둘러댈 줄도 모르면서 뚝심 있게 버티기는 잘한다.


#탐색

졸업도 했고 서울에 왔으니 누군가 만나보긴 해야겠는데, 방법이 많지 않다. 내가 이성을 좋아했다면 소개팅 한 번쯤 해볼 수도 있고, 사내 커플이라도 좋았겠는데, 오늘날 한국에 살고있는 성소수자에겐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반면 서울의 성소수자 인권단체나 커뮤니티는 규모가 꽤 커서, 모르는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있는데 비집고 들어가는건 (적어도 내겐)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이었다. 결국 종종 어플로 말 걸어보다 만나는 게 전부다.


#이상형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생각이 얕지 않고, 밝고 따듯한 인상이면 좋겠다. 서로 의지할 수 있고, 인생을 살면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물론 어플에선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열심히 톡 나눠보고 괜찮다 싶으면 일단 만나서 더 얘기해보고 한다.


#게이친구

이야기 나누다 보니 동종 업계 사람이라서 한 번 만나보았다. 처음으로 벽장 밖으로 나와 게이를 만나봤다는 동생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순수한(?) 아이도 만나보았고 나보다 나이 한 살 더 많은, 축구 좋아하는 형도 만나보았다. 그렇게 오프라인으로 만나본 게 대여섯 명쯤 되는 것 같다. 고백 비슷한 것을 받았다 거절 비슷한 것을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은 몇 번 만나보다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동종 업계(같은 과) 동생 둘은 서로 소개해주고 연락하면서 종종 보고 있다.


#팀

팀 사람들과는 많이 친해졌다. 일 얘기 하는 것도 제법 재밌다. 근데 같이 일하는 팀에 나랑 나이대 비슷한 분들은, 종종 술자리 가면 여전히 집요하게 여자친구에 대해 묻곤 한다. 아... 싫다. 좋은 분들이라서 같이 놀까 하다가도, 두 번 나갈 거 한 번만 나가곤 한다.


#회사동기

같은 조에서 교육 같이 받았던 동기들과는 많이 친한데, 다른 조는 사실 말을 많이 못 나눠본 경우도 많다. 교육 끝나고는 각각 부서로 흩어졌지만, 종종 연락하고 지낸다. 우리 조 동기들이랑은 단체 톡방으로 매일 잡담도 한다. 그리고 저녁밥을 회사에서 먹게 되면 꼭 같이 먹는다. 학교로 치면 분반 친구들 같다.


#만남

어플에 같은 동네 사람이 있길래 만나보자고 했다. 내가 만나자고 해 놓고 일 조금 늦게 끝나서 약속 시간에 늦어버렸고, 갑자기 비 쏟아져서 우산도 빌려 쓰고, 같이 저녁 식사 하는데 메뉴도 잘 못 골라서 적당히 아무거나 먹어버렸다. 나보다 한 살 많고, 같은 업계에서 일하지만 직군은 다른 듯했다. 이쪽 사람 만나본 적은 많지 않다고 했다. 요즘 운동 열심히 한다고 해서, 운동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만남_cont.

오랜만의 만남이라 톡으로 연락을 계속 했다. 업무 시간에도 종종 연락하고, 며칠 간격으로 만나서 더 얘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이 딱히 겹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이해심 많고 의사소통 원만하고, 성격 모난 데 없고, 가끔 귀여운 면도 있었다. 한 달쯤 계속 연락하며 만나다 보니 이 사람이랑 사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은 꼭 고백해봐야지, 했던 날에 용기를 내서 대뜸 고백해버렸다. 물론 마음의 준비 빼고는 특별한 준비도 없었고, 상대도 몸 둘 바를 몰라 웃픈 표정이다. 그치만 다행히 수락해줬다. 그리고는 한적한 공원에서 같이 이런저런 소감이나 생각도 나눠보고, 손도 잡아봤다. 둘 다 서툴긴 하지만, 이제부터 1일이다.


#동기모임

가끔 단체로 모이자는 얘기가 나온다. 아직 서먹한 분들이랑 친해질 수도 있고 해서 처음엔 잘 나갔다. 근데 아직 어색한 사이일 때 자기소개 하듯이 묻고 답하는 그것이, 그 뒤에도 꼬치꼬치 캐묻는 그것이 참 찝찝하고 귀찮다.


#학교친구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다. 굳이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내가 그런 쪽 관심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니, 만나면 다른 재밌는 이야기 할 것도 충분히 많았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애초에 마음이 맞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만 가깝게 지낸 것이기도 했다. 다수가 모인 집단, 조금 더 ‘평균’에 가까운 사람들이랑 비교해보면 그렇다.


#애인

같은 동네라 금세 가까워졌다. 장난도 늘고, 서로 감추는 것도 거의 없어졌다. 성격도 참 잘 맞는 것 같다. 내 애인 님은 마음 한 구석 예쁜 데가 있어서1 잘 지켜주고 싶다. 품에 안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다.


#서로의_친구

같이 만나서 있을 때가 많지만, 친구들 만날 일 있으면 꼭 만나보라고 등 떠밀곤 한다. 나도 종종 만나곤 하니까. 형(이라고도 부른다)은 게이 친구가 없대서 만나보라고도 했다. LinQ 친구들도 몇몇 같이 보고, 여기서 만난 동종 업계 게이 친구들도 같이 만나봤다. 내 친구들을 소개해주면서 같이 이야기할 거리도 늘어가는 기분이다.


#부모님

같이 살면 좋겠단 생각을 자주 하는데, 형은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다. 외박도 1주일에 한 번. 매주 외박하는데 어떻게 잘 둘러대나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은 이제 ‘결혼’이나 ‘며느리’ 같은 키워드도 종종 입에 올린다. 아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니까 믿고는 계시는데, 걱정 반 기대 반을 은근 드러내고 계신다. 평생 숨기는 건 말이 안 되고, 언젠가 말씀 드려야지 결심은 했는데 아직 엄두가 안 난다. 30대가 되면 좀 달라질까?


#인간관계

시간 약속을 할 때면 확실한 우선순위가 생겨버렸다.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은 예전보단 덜 보게 된다. 만나서 시시껄렁한 얘기나 하면서 내 연애사에나 집착하는 사람들2에겐 신물이 났다. 연락 자주 못 해서 아쉬운 친구들도 꽤 있는데, 점점 그런 관계는 의미 없다고 느끼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좀 보자고 불러도 이유를 만들어가며 거절하거나 불참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나에겐 이런 것도 좀 필요했는지 모른다.


#적응

옆 팀 분들이 오랜만에 또 술 한 잔 하러 가자고 하신다. 이런 자리 요즘 자꾸 빠지기만 한 것 같아 오랜만에 한 번 나갔다. 여자친구 질문이나 소개팅 제안 같은 건 그냥 적당히 들어 넘겨야지 했는데 웬걸, 역시나 한 분이 슬쩍 물어본다. 그랬더니 옆에 분이 “에이 뭐, 니은 님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는 거겠죠.”라고 넘기신다. 그 순간이 왠지 너무나 뿌듯했고, 그분들한테 고마웠다. 이제 이 분들을 굳이 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일상

오늘 하루도 빡빡했다. 출근해서 열심히 일을 했고, 팀원들이랑 스터디도 하고, 퇴근하고는 운동도 하고, 형이랑 오랜만에 전화도 한 통 했다. 요즘 주 중에는 둘 다 일 하랴 운동 하랴 바빠서 전화 한 통이 어렵다. 주말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정신 없이 굴러가니 활기찬 느낌은 든다. 그리고 지금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상이 참 소중하다고 느낀다.

1 LINQ주: 얼굴, 몸, 목소리, 성격 어디 하나 빼놓을 곳 없는 분이란 것을 제가 보아서 잘 알고 있다.

2 LINQ주: 주로 LINQ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