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꺼풀 벗겨내기

J.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뭔데? 여친 생겼냐?”

“여친은 무슨. 내가 지금 여친 사귈 때냐.”

“그렇긴 하지, 그럼 뭔데?”

“나 남자친구 있어.”

지난 주, 이렇게 또 한 명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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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Denial Closet1”이었다. 다만, 의도적이라기보다도 관성적이고 무의식적으로 그래왔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적 지향을 비롯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불행하게 생각했던 적도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함께 놀기 바빴고, 공부하느라 여유가 없었고, 주어진 사회적 틀에서 요구하는 것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면 너무 무책임한 요약일까. 어쨌건 그렇게 나는 5년 전까지 여성과 교제하며 이른바 “평범한2”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결국 네 번째 이성을 사귀던 시기에, 이 사회에서 “편하게” 살아가려 했던 나 자신을 뒤집는 순간이 찾아왔다. ‘언제까지나 나 스스로를 모른 채, 외면한 채 살 수는 없겠구나. 이렇게 살면 안 돼.’ 정말 하룻밤 사이에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국 학교를 떠나 잠시 스스로를 정리하며 삶의 판을 새롭게 짜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게 1년3을 보내고, 완전히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졌다.

2013년 11월 15일, 잊을 수 없는 첫 커밍아웃. 내 방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어쩌다 보니 “나 남자 좋아해”란 말을 처음 한 날. 그 첫 날의 기억은 술 때문인지 몽롱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오랜 고민을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감추어진 모습을 밝혀 왔다. 분반 친구들은 이제 내가 게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고등학교 친구들 상당수도 마찬가지이며, LINQ를 비롯한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다 합하면 이제는 150명은 너끈히 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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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커밍아웃을 계속해 오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게 있다면, ‘내 삶은 그저 내 삶대로 흘러갈 뿐’ 정도? 커밍아웃이란 결국 나를 한 꺼풀 벗겨내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행위인데, 그 한 꺼풀의 차이로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 수 년에 걸쳐 쌓아 올려 온 나의 타인에 대한 모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내가 게이인 걸 알았다고 해서 친한 친구가 내 곁을 떠날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애초에 친한 친구가 아니었을 것이고, 친한 친구였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편안히 받아들이자는 거다.

물론 내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닌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진 뒤에 커밍아웃을 시작했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종교 특히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고,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핵심 가치로 삼는 우리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점만으로도 내 주변에서 아주 오래된 경전의 한 구절에 짤막히 나오는 말을 근거로 나를 태생부터 죄지은 사람 취급하거나 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반면, 커밍아웃은 내 외부 환경보다도 내 스스로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나 자신이 성소수자로서 사회적 소수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걸 언제나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남성이 사회에서 ‘차별’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상황은 거의 없다. 그리고 불과 5년 전까지 내가 그랬다.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인지하지 못 했으나, 거기에 악의가 있었다기보다 순수하게 그러한 차별에 무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무지야말로 소수자의 인권을 짓밟는 ‘악의 평범성4’의 한 발로라는 것을 안다. 또한 이와 같은 소수자 감성 덕분에 언제나 내 견해가 부족할 수 있고 수정·보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을 한층 더 깊게 느끼고 있다.

더 나아가 커밍아웃 횟수가 늘어 갈수록 이것이 단지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에 대한 적극적 변화를 추동하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파급력 있는 행위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지점은, 바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순간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커밍아웃은 내가 바로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소수자 인권운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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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게 이래저래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편견보다는 포용을, 거부보다는 인정을, 혐오보다는 사랑을 보여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숨김없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듯, 나 역시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관계를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된다. 그들이 성소수자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않도록, 내가 바로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드러내면서.

물론 나의 이런 커밍아웃에도 아쉽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한 적이 거의 없고, 직장에서 한 것도 아니며, 아직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이 남아 있다.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간다는 심정으로 든든한 후원군을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만약 어느 순간 나를 거부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예전이었다면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아보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면서 신속하기까지 한 좋은 리트머스 테스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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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참 어렵게 마무리한 글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쓰기로 한 글을 엎어버렸고, 주제가 두 번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서 LINQ 내부적으로 정한 원고 마감 기한을 열흘 넘게 넘겨버렸고, 내부 퇴고 회의에도 글을 올리지 못 하여 따로 친구들에게 글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첫 문장을 쓰고 이 문단을 쓰는 일주일 사이에 또 4명에게 더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다. 커밍아웃 숫자에 소위 ‘부심’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 숫자를 늘려나감을 통해 작게나마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커밍아웃을 고민하고 있다면, 자신의 한 꺼풀을 벗겨내는 이러한 변화에 함께해 봄은 어떨지 조심스럽게 권유해보고 싶다.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LINQ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좋겠다.

덧붙여, 오랜만에 나를 만나게 될 모든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미리 예고를 드린다.

“나, 게이야.”

1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인(denial)하면서, 벽장(closet) 속에 숨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

2 시스젠더(cisgender)이자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인, 즉 사회적 다수의 입장에서

3 그 1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한 편 써내려갈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으므로 본고에서는 생략한다.

4 이와 관련해서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을 참고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