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성애자의 커밍 인 (Coming In)

아로아

내가 무성애자란 단어를 안 건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5년 이상은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성소수자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밖에 몰랐지만 무성애자의 정의를 보고 이게 딱 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성애자, 그 중에서 도 무낭만적 무성애자(Aromantic Asexual). 다른 사람에게 성적 끌림은 물론 연애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지금까지 연애 감정이나 성적 끌림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했 으니 이 단어가 나를 가장 잘 정의하는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내가 무성애자인건 잘 알았지만 진지한 고민은 하지 않았었다. 혹시 아닐 수 도 있잖아?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나 했다. 친구들이랑 하는 연애 얘기에는 적당히 다른 남자애들을 좋아하는 척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어떻게든 대학교에 왔고, 내가 좋다는 사람도 만나봤다. 그리고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깨달았다. 연애란 건 정말 못할 짓이라는 것을. 그 사람은 내게 호감이 컸는지 카톡도 자주 보내고 약속도 많이 잡았지만, 나는 그런 것 하나하나가 답답했다. 그래서 2주 도 안 지나서 연락을 끊었었다.

그 때부터 진지하게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 정체성에 대해서. 가까운 네이버 카페부터 저 멀리 AVEN(Asexuality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 현 세계 최대 의 무성애 커뮤니티)까지 진지하게 모든 글을 탐독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에게 진지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호감을 가져본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나는 확실히 무성애자란 것이었다.

연애 감정이나 성적 흥분 모두 그때까진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냥 남들도 다 나랑 같으려니 하고 살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들 사랑할 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구나. 난 그걸 글로 처음 알게 되면서 충격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애들이 연애 얘기를 할 땐 흥미가 진짜 안 갔는데, 그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시스젠더 이성애자와 나의 간극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느꼈다.

무성애자랑 유성애자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봐도 성적 끌림은 없고, 예술 작품을 볼 때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거기에 더해서 나 같은 에이로맨틱은 호감 가는 다른 사람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던가 하는 연애 감정도 없다. 아무리 친해져도 친구 사이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단단히 틀린 것이었다.

몇 주 동안 충격에서 허우적거리다가 LINQ 페이스북을 보고 연락해 LINQ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성 소수자 동아리’에 들어가게 될 거라곤 어렸을 땐 상상도 못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웃기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내 비밀을 다 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LINQ 가입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인생을 살지는 모른다. 끝까지 독신으로 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