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알아버렸다

브케인

"내 아들이 세상을 순리데로 바른삶을 살지 않는다면 아비는 하루라도 살 이유가없다 늦지않았으면 조으련만~"

엄마랑 외갓집에 온 내가 새벽 2시 49분에 받았던 문자였다. ‘순리’와 ‘바른삶’이라는 단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다가, 새벽 3시 언저리의 보통의 술주정일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상을 하다가를 3시간 동안 반복했다. 아침에 ‘네 알겠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낸 뒤, 이후에 아무런 답장이 없어서 여느 때와 같은 보통의 술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저녁 6시에 온 문자를 받고 문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OO아 아비는 내아들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늘 생각하고있다 잘성장해서 고맙고 가슴 찡할때도 가끔있단다 사람이 테어나서 어린아이땐 많은사랑받고 자라면서 열심히학업에 열중해 졸업하고 조은직장얻고 예쁘고 선하고 현명한여성을만나 행복한가정을 꾸리는게 세상순리고 이치가아닌가?친구랑 우정을돈독게쌓고 사랑은 아름다운 이성이랑 뜨겁게 나누어야 예쁜 나의주니어도 얻게되고!!! 아비맘이 슬퍼진다 줄겁게 잘보내고 아비랑 술한잔하면서 진지하게 예기해보자"

사랑은 아름다운 이성과 뜨겁게 나누어서 예쁜 주니어를 얻어야 되는데 우리 아들이 그럴 것 같지 않아서 슬프다는 내용 만은 명확했다. 그렇다. 우리 아빠가 내가 남자를 사랑하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슬픈 확신이 든 후 곧바로 의문점이 생겼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 순리’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아빠라면 보통 단서를 가지고 저렇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고... 도대체 어떤 단서를 봤기에 아빠가 저렇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곧바로 여동생한테 문자가 왔다.

"오ㅃ바 방금 아빠가 전호ㅓ로 오빠 방 뒤졌대 근데 뭐 나와서 연락을 했다는데 뭐야"

일단 나는 집에 가서 설명해주겠다고 했지만 불안감에 휩싸일 동생을 생각해서 마음을 바꿔 조금 있다 전화로 설명하기로 다짐했다. 사실 동생한테 전부터 커밍아웃을 해도 괜찮을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봤는데 답변이 정말 진보적이어서 올해 안으로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커밍아웃을 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아무튼 동생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오히려 격려를 해주는 동생의 모습에 힘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아빠가 뭘 봤을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이 더 컸다. 다음 날 집에 가는 순간까지 내 방에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콘돔, 러브젤, 편지, 남자친구와 내가 그려진 캐리커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들킨 건 아닐까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얼른 집에 가서 내 방의 상태가 어떤지 봐야 했다. 그리고 혹시 남자친구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기념품이 없어지지는 않았는지 알아야 했다. 무엇이 방에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나는 상태에서.

집에 가서 당장 내 방을 확인했지만 아빠가 받았을 충격과는 달리 내가 외갓집에 가기 전의 상태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가방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놨던 러브젤과 편지가 없어졌고, 방의 물건들의 배치가 살짝 달라져있었다. 여기에 있어야 할 수첩이 저기에 꽂혀 있었고, 책이 꽂혀 있는 순서가 미묘하게 바뀌어있었다. 그렇게 살짝 바뀐 내 방은 내 방이 아닌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나의 기억들과 비밀들이 겁탈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내게 써준 편지를 행방불명으로 만들어버린 아빠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3일 동안 방청소를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충격과 모멸감을 참지 못해서’였고, 둘째는 ‘내가 모르는 단서거리가 나올까봐’였다. 그리고 아빠와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 어떻게 이야기할지도 생각했다. 일단 전해야할 메시지를 세 개로 정리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반백년 동안 믿어왔을 아빠에게 동성애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색다른 방식으로 우정을 쌓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결혼해도 괜찮겠다 싶은 여성이 생기면 결혼하겠지만 개인적인 성적 지향 때문에 그 여성이 안 나타날 확률이 다분할 뿐이니까 2번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최대한 나를 속이지 않으면서 아빠가 받을 부담이 최소가 되게 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아빠랑 나랑 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 자체가 다를 것이므로, ‘나는 남자를 사랑하며, 마음 맞는 남자가 있으면 그와 함께 백년해로할 것이다.’라고 직설을 날려도 오해는 반드시 생긴다고 생각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가장 줄이는 일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들과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는지, 적당한 타이밍을 못 찾으셨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빠로부터 저 문제의 문자를 받은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빠가 나에게 이야기했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걸 적자면 다음과 같다.

가방 뒤져서 젤이랑 편지를 발견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사람들은 남자가 남자 사랑하는 거 알면 인간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런데 넌 내 아들이니까 모든지 용서할 수 있다. 잘 생각해서 동성애를 잘 끊었으면(?) 좋겠다.

우선 내가 의도한 대로 메시지 전달하기는 실패했다. 남자끼리 서로 귀가 간지러울 만한 애칭부르는 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역정을 내셨기 때문에 아빠는 이미 아들이 남자와 연애한다는 것을 안 것 같았다. 그렇다면 1번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연거푸 2번 메시지인 “저는 결혼할 여자가 생기면 결혼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빠는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들 지금까지 착하게 잘 컸는데 왜 그런 거에 빠지게 되었느냐’고 이야기하셨던 걸 보면 아빠는 내가 동성애에 중독되어 가는 걸로 여기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2번 메시지를 이야기할 때마다 동성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여자와의 결혼은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난 없어진 러브젤과 편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래서 가방에서 보신 것은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묻자, 아빠는 흉측한 것들이니 당연히 버려야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남자친구가 정성스레 써준 편지들이 지금 냄새 나는 어딘가에 처박혀 있거나 불에 활활 타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한 줌의 재가 됐을 생각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당장 아빠와의 대화를 격한 모드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사렸다.

그렇게 아빠와의 심층 대화는 예상보다 평화적으로 끝났다. 물리적인 폭력은 물론, 극단적인 단어나 고성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무척 다행이었지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건 바르지 않기 때문에 아들이 동성애를 끊었으면 좋겠다는 입장 만큼은 견고했다. 물론 동성애는 틀린 것이 아니고 난 동성애를 계속할 것이라는 내 입장은 더 견고하다.

그래서 앞으로 아빠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삶이 더 피곤해질 예정이다. 예를 들어 남자친구와 여행을 다닐 때에도 아빠가 안심할 만한 다른 누군가와 여행한다고 하거나, 혼자 여행한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이젠 아빠가 의심을 풀 만큼 치밀하게 속여야 될 것 같다. 계속 동성애를 하고 있음을 아신다면 아빠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렇게 아들이 아빠를 속이는 진실게임이 지루하게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