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괴물A

문득 고등학교 때 3년 내내 짝사랑 했던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 정도 좋아했으면 그 분도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수도 있을 테지. 그 분이 내게 심심해서 몸을 기댔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분과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었고, 실제로 나름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나를 특별하게 봐주시는구나! 물론 부질은 없었다. 그 분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채 나는 졸업을 하였다. 잘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괴물이다. 이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위와 같이 나 혼자 마음 속에서 써 내려가는 비참한 로맨스 소설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 로맨스의 대상들이 전부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불공평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로맨스, 달달한 썸 따위는 절대로 나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법칙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아서 이젠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이것은 노력이 해결해 줄 문제도 아니다. 아무리 손바닥이 닳고 닳도록 빌어도, 이번 생에는 저 사람과 설레는 연애를 하고, 불꽃 같은 사랑을 하며,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는 일 따위는 절대 불가능하겠지. 또한 이성 친구들과 마음 편히 놀고 싶어도,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사회적 시선이 나를 더욱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게 한다. 그러면 나는 친구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는 걸까? 조금만 친하고 가깝게 지내도 엮으려는 주변의 무리가 피곤하다. 심지어 저들의 연애 이야기는 낄 수조차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니, 나는 괴물이기 때문에 인간들과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유치한 정의를 내리고 말았다. 억울하다. 너무나 좋아하는데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 관심이 있는데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고충을 털어 놓을 상대가 없다는 것.

나에겐 용기가 없다. 주어진 안전한 울타리를 부수고 넓은 세상으로 도전하러 나갈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같은 성소수자들의 모임에 낄 용기도 없었고, 아는 성소수자도 없었다. 이런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출발선은 바로 커밍아웃이었다. 아무리 친하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 한들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첫 커밍아웃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사람이 나를 혐오하게 될지도 몰라 무서웠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그 후로 조금씩 나의 세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밤이 깊어지고 혼자가 되면, 자꾸 검고 무거운 감정의 기운이 올라온다. 나는 충분히 행복한 괴물인데, 근본적인 외로움은 해소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제는 나의 동족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사실 처음으로 커밍아웃 했던 분과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다잡고 당일 밤에 LINQ에 메일을 보낼 참이었다. 그렇다. 술 기운을 빌려야 할 정도로 나는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약속은 무산됐고, 그렇다고 이대로 흐지부지되자니 난 너무나 무섭고 막막하고 기댈 곳도 없어져서 괴로운 상태였다. 그래서 그냥 나 혼자 술 마셨다.. 혼술. 그리고 잔뜩 취해서는 메일을 보냈다. 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이젠 지쳤으니까. 언제까지고 인간들 틈에서 혼자 괴로워할 순 없으니까. 지금까지 괴로워한 정도면 이제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동족들을 만나, 더욱 행복해질 자격이 있지 않을까? 이제는 충분하다고 되뇌는데, 밤마다 명치를 두들기며 괴로워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다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젠 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경험을 하겠지. 이제는 이질적이고 외로운 괴물보다는, 사랑도 할 줄 알고 행복하게 사는 평범한 괴물A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