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수박주스

중학생 때, 친구들과 모이면 이야깃거리의 반은 여자였다. 공감을 못 했던 나는 맨 처음엔 더럽다고 생각했고, 내가 아직 순진해서 그런가 생각했고, 마지막엔 애써 관심을 가져보려 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되었고, 결국은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척하며 지냈었다.

그 뒤 얼마 후부터는, 끌리는 사람만 보면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성에 눈을 뜬 건가! 맞다. 하지만 보통의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눈을 돌리듯,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 내 시선은 어느새 그쪽을 향해있었다. 미웠다. 다른 사람들처럼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는 나의 눈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게이인가? 라는 생각을 쉴 새 없이 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내가 성소수자라고 알려줬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마음을 굳게 닫고, ‘내가 소수자일 리 없어!’, ‘나도 평범하게 살 수 있어!’ 라고 나 자신을 세뇌하기에 이르렀다. 이성애자들, 흔히 말하는 일반들의 일반적인 사회에서 소외되기 싫었던 나는, 기어이 여자친구를 만들고야 말았다.

맙소사. 정말 미안했고, 헤어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매일같이 수십 번 고민하는 사이 긴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녀 생각이 났고, 그녀와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 나는 엉엉 울었다. 그렇게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확신한 나는, ‘내 눈이 멋진 남자들을 쳐다보는 건 그저 동경이구나, 내가 키 큰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건 그저 포근한 품이 필요하기 때문이구나.’ 라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렇게 난 일반들의 사회 속으로 스며드나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사랑했던 여자친구와 이별한 난, 남들이 그러하듯 넋 놓고, 슬퍼하고, 흉보고, 그러다 잊어버리고는 요새 또 문득 그녀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나는, 멋있는 남자들을 보면 눈이 돌아간다.

단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더는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거다. 친구를 속여도 일주일 넘게 싱숭생숭한 내가 나를, 그것도 평생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요새는 또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남자를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원빈과 이나영이 같이 지나가면 이나영만 보고 있을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또 여자도 좋아하는 것 같다. 난, 여자친구와 후회 없이 사랑했으니까. 아니, 사실 이제는 둘 중에 어떤 성별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좋아하는 것이지 싶은데, 남자친구는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결국엔 잘 모르겠다.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을 답답해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 자신을 성적 취향 스펙트럼의 특정 지점에 딱 꽂아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여자를 좋아하든지, 남자를 좋아하든지, 하다못해 ‘나는 남자를 60, 여자를 40 만큼 좋아해!’ 이렇게라도 말이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싶다고. ‘나는 이 사회의 일반적인 구성원으로서 여자를 좋아하자.’, ‘나는 게이니까 남자를 좋아하자.’ 가 아니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자.’ 라고. 한때는 세상 눈치 보며 여자를 좋아하려 노력했고, 또 한때는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두고 내 감정을 의심했다. 이제는, 남들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기에 앞서 남의 눈치를 보고 심지어는 자신의 눈치를 본다. 나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당당하게, 순수하게 사랑해보려고 한다. 세상에 눈치 볼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사랑까지 눈치 보며 할 필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