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proud to be Gay

2014년 10월 30일. TV에서는 잊혀진 계절의 쓸쓸한 가락이 흘러나오던 시월의 끝 무렵,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던 글로벌 기업 ‘애플’의 CEO 팀 쿡이 커밍아웃을 했다. 경제주간지에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힌 글을 기고하는 방식으로 커밍아웃했는데, 이로써 팀 쿡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가 되었다. 팀 쿡의 글은 “I’m proud to be gay.” 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인용되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글을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한 줄로 요약해 보자면, “나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나의 정체성은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쯤이 되겠다. 물론 그 글에는 한 문장으로 담지 못할 맥락이 있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던 그가 커밍아웃을 하게 된 이유, 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여러 근거, 마지막으로 인권운동에 대한 애플 CEO로서의 신념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잘 정리하였다. 한 줄 요약만 읽으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니, 번역된 팀 쿡의 글 전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의 파격적인 행보와 카리스마가 흘러넘치는 글에 감동한 것도 잠시, 상처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악플을 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나도 모르는 사이 기사에 달린 댓글 들을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이제는 웬만한 악플에는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 무심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내리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댓글이 있었다. 그 익명의 네티즌은 팀 쿡을 포함한 불특정 동성애자들에게 “게이면 게이답게 조용히 살지, 뭘 그걸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느냐.” 하고 나무랐다. 글 좀 제대로 읽지… 분명 글도 읽지 않고 기사 제목만 보고 그런 댓글을 달았을 거다. 아니면 읽었어도 이해를 못 했거나. 그러다 문득 내가 팀 쿡의 글을 마음속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고,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에겐 쉽게 와 닿지 않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은 그 익명의 네티즌에게 쓰는 나의 이야기이자, 팀 쿡의 글에 대한 오마주(감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운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성적 지향 때문에 혼란을 겪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성적 지향을 인정하는 것과 이를 당당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내가 게이임을 알았지만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했고, 게이라는 사실이 정말 싫었다. 까마득한 미래의 결혼 및 육아 걱정, 내가 게이인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릴 부모님 걱정, 혼자 살다가 늙어 죽을 것이라 예상되는 노년 걱정 등 실체도 근거도 없는 별의별 걱정을 하며 나의 성적지향을 원망했다. 성적 지향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이성애자로 전향하고 싶었다. 성적지향뿐 아니라, 외모, 키, 능력 등에 대해서도 자존감이 낮았고, 이러한 모습으로 태어난 내가 너무도 싫어 모든 면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대학에 가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위안하며 포항공대에 입학했지만, 우리 학교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작고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주위의 선후배, 동기들은 나의 연애사 및 관심 이성에 대해 끈질긴 추궁을 계속하였고, 술자리에서 게이라는 소재는 조롱의 대상이 되며, 포비스 자유게시판에는 게이들을 모두 기숙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폭력적인 글이 올라왔다.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공대이기에 적어도 한 명쯤은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소소한 연애도 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한 학기, 두 학기가 지나도 주변에서 이쪽 사람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

그리고 LinQ에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엔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벽장에서 나가기를 주저했지만, 벽장 밖의 세상은 나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쪽 생활을 오래 한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다 보니, 그들도 한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힘든 시간을 지나왔더라. 그렇게 조금씩 나는 나의 성적 지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길진 않았지만 몇 번의 연애를 통해 내가 나름 괜찮은 사람임을 알았고, 주위 사람들의 오지랖을 진정으로 나를 걱정하고 아끼는 관심 어린 애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나의 성적 지향을 당당히 받아들이게 된 후,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기적 같게도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게이로 태어났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현재의 나, 그러니까 조금은 의젓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게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끔은 힘들고 외로워 울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기에 삶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함과 자신감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콤플렉스 속에 지내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타인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힘든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여러 걱정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렇기에 나는 지금 행복하고 이 행복이 너무나 소중하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게이인 게 자랑스럽다.

몇 달 전, 팀 쿡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사실은 단통법 영향이 크지만) 나의 낡은 아이폰을 아이폰6로 업그레이드했다. 비록 지금은 이 작은 책자에 필명 뒤에 숨어 글을 쓰고 있지만, 팀 쿡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글도 학교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