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그림자

알감자

또래 퀴어 친구들보다는 다소 느린 데뷔 때문이었을까. 5년 전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학내 인권단체와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들였을 때, 나의 열정은 압축됐던 용수철을 풀어 놓은 것처럼 솟아올랐다. 억지로 일반 연기하면서 살지는 않기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살자고 몇 년에 걸쳐 힘겹게 결심한 만큼 다른 친구들은 나처럼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러한 세상이 도래해 우리의 후배들이 “당신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어떤 일을 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적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매일 게이로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글을 썼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즐거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섹슈얼리티 세미나에 참여해 다양한 전공의 친구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공부한 내용을 듣기도 하고 나 역시 생판 모르는 분야의 논문을 찾아가며 공부한 내용을 친구들과 나누었다. 내가 직접 활동가가 되거나 정치인이 되어 세상을 바꿀 능력은 되지 않지만,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내 주변 사람들에게만큼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게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를 꿈꾸었고 이 역시 성소수자 사회를 위한 작은 기여가 아닐까 생각했다. 또한, 내가 커서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되면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장학 기금을 마련하겠다는 작은 꿈도 함께 품게 되었다.

한 친구는 어느 날 이러한 내 다짐을 듣고는 왜 퀴어 사회에 대한 부채 의식과 의무감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러한 의문을 품는 것이 더 의아했다.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게이 커뮤니티에서 활동했고, 학내 인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5년이 흐른 지금 그가 왜 나에게 그런 의문을 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하루 별다를 것 없는 대학원생의 쳇바퀴 도는 삶. 북어 대가리처럼 딱딱하게 마르고 굳은 내 뇌에선 (전공 이외의) 깊은 사유와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피곤한 작업일 뿐이다. 모든 게 귀찮다. 최근 3년간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실험한 내용을 프로그레스 레포트와 랩미팅 발표를 위해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새벽까지 랩에서 일하고 방에 들어오면 인터넷으로 가십 기사나 뒤적거리다 잠이 들고, 몇 시간 뒤 다시 천근만근 눈꺼풀을 들어 올려 출근하는 일이 하루 일상의 전부. 기세 좋게 2015년 회지 기획에는 글을 두 편이나 써주겠다고 약속해놓았건만 초안 제출기한은 개껌처럼 씹어먹은 채 교정 기간마저 지난 지금에서야 한 편이나마 써야겠다며 머리를 쥐어 싸매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내려놓는 것이 꼭 변기 위에 앉은 변비 환자마냥 힘겹다. 머리 식힌다는 핑계로 스포츠 경기는 꼭 챙겨 보고, SNS로 누구누구 잘생겼다며 쓸모없는 수다 떠는 것은 좋아하지만, 학내에 팽배한 남성 중심적, 호모포비아적 분위기가 이 회지에 응답하는 물리적인 행동으로 표현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어렵사리 모인 우리들의 작은 모임이 어떻게 하면 지속해서 학내에 작은 울림이라도 줄 수 있을지, 아니 당장 지금이라도 우리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따위의 실질적인 고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포대숲에선 호모포비아를 존중해달라는 글이 넘쳐 흐르며, 길거리에 나가면 항문섹스도 인권이냐는 목사들이 바른 성문화 정착을 외치지만 나는 SNS로 세상에 미친놈 많다며 껄껄 욕 한마디 하는 게 전부일 뿐 그들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적은 없다. 작년 여름엔 퀴어문화축제가 가까운 대구에서 열렸지만, 포항에 온 뒤로는 퀴어집회에 나가본 적이 없으며, 그곳에 모인 퀴어들이 나를 대신해 어떤 욕을 먹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그때 나는 ‘왜 야한 복장으로 과한 퍼포먼스를 벌여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안 먹어도 되는 욕을 먹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박원순 시장이 “그런 거 뭐 하러 만드느냐,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느냐” 며 자신의 공약이었던 서울시 인권헌장을 스스로 집어 던지는 순간에도 나는 “박원순이 하는 일이 늘 그런 식이지.” 하며 비웃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무지개농성단이 엄동설한에 서울 시청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우며 시장 접견을 요구하던 그때, 몇몇 링큐 회원들을 포함한 전국의 성소수자들이 그들을 응원하며 후원비를 이체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난 10원 한 장 돕지 않았다. 내 통장 잔액이 2만 원뿐이니 돕고 싶어도 돈이 없다는 아쉬운 자위를 했지만, 용돈을 쪼개 천 원씩 입금하던 중고등학생들의 소식 앞에선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순수하지만 열띤 정치 토론을 벌이던 젊은이들이 18년 후 혁명이 두려운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동숭동에 모였다는 시를 읽으며 옛사랑을 추억해본다. 아직 위에서 말한 그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5년 만에 나는 지치고, 차갑고 뻣뻣해졌다.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라 논문은 한 편이 아쉽기만 하고 학위는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고민을 해도 모르겠고, 안다고 해도 당장 해결될 일도 아닐 테지만 내게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솔직히 이런 생각 자체가 귀찮고 버겁다는 것이다. 앞길은 여전히 컴컴한데 시계는 벌써 이 새벽이 다 지났단다. 다시 또 하루, 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