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s Website:https://sites.google.com/view/ict-joseph
1975 CDC 엔지니어들과 함께
1976.5 CDC Cyber 6600 시스템 엔지니와 함께 (나는 졸업은 76년2월이나, 취업은 75년 9월 28일 미국 컴퓨터 회사 시스템엔지니어로 발탁되었다. 탱크병으로 제대하고 복학하니 머리가 완전히 돌이 되었다. 언어는 폭군에 가까운 거칠은 용어를 사용하였고 교재 내용의 하얀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인것으만 보였다. 당시에 주간잡지 Times를 구입해서 읽을 려고 해보니 첫장부터 단어실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읽지를 못하였다. 주간잡지 한권을 읽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다행히도 영문법은 탱크부대에서 고된훈련을 받으면서도 메들리를 12번정도 읽어 두었기 때문에 영문법에는 어느정도 자신이 있어으나 어휘실력이 부족하니 이를 보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오늘날 처럼 인터넷이나 영어방송도 접할수 없는 시절이여서 1년이 지나서야 겨우 주간잡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터포이트) 출신의 알세머중령을 형으로 부터 소개받아 언어의 훈련을 받으면서 미군용으로 발간되는 성조지를 읽으라고 권고하여 주어서 발전하였다. . 영어를 중1,2,3,고1,2,3 , 대학교양 1, 무려 7년동안 영어를 배웠지만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고 내 발음 자체가 녹음을 해보니 무슨 발음이지 내 자신도 식별이 곤란했다. 그러나 발음을 교정해주고 영어학습방법을 알으켜준 미 육사출신 알세머중령덕분에 Times지와 성조지를 지속적으로 읽고 AFKN을 듣는 훈련 덕분에 미국 컴퓨터회사의 입사시험 영어면접에서 무사히 통과하였다.
최초로 CDC Cyber6,600 컴퓨터 시스템을 접하면서 디지털논리회로, 프로그래밍 기법 등의 실무를 미국인 엔지니어로 부터 배우게 되었으며 컴퓨터에 관련된 많은 지식을 얻게 됨으로서 컴퓨터 시스템 엔지니어로 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45년 넘게 컴퓨터를 접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기술발전을 보면서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이 IoT, Cloud Computing, AI(인공지능), 5G 등에 대한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디지털 컴퓨터기술을 기반으로 한 핵심기술이 우리것이 없고 모두가 외국산이라는 것에 대하여 엔지니어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이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반성과 함께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정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대형컴퓨터 회사 CDC, IBM, UniVAC 등이 대표적이 였 으나, CDC와 UniVac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고. IBM만 살아 남았다. IBM도 1980년초에는 강력한 소형 애플 PC출현으로 회사의 경영위기를 겪었으나 아슬아슬하게 회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기업이나 개인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
1980 Columbus Ohio, 샤론우드 침례교회 Bob Wiley목사님, 나와 헤어질때 공항까지 마중나오셨던 분이다. 플로리다교회로 가신후 나와 서신교환이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소식이 끊어졌다.
1980.5 BTC Columbus at Ohio, Instructor Course열공하는 장면
1980. 캔터키공원, 밴후서 두딸과 함께
컬럼버스Willow Court , 집앞
OSU 에서
샤론우드교회 Skinner Clipper씨 처가집에 초대
1980.6뉴욕 허드슨강 보트 선상에서
컬럼버스 집앞 단풍나무앞에서
1980.6 링컨센터 앞에서
바이블 스터디 멤버(Sandy)
바이블 스터디 멤버들
1980. 켄터키 밴후서부부,
1981 LME, Debugging Program coding
1981 Visiting Royal Palace with Engineer
1982 프랑스 CGA알카텔사, Relational DB설계과정
HIPO구조로 설계된 RDB
1983 몰고다니던 Misubish Galant 앞에서 , 이때는 배도 약간 나왔음(Butter 등, 기름진것 많이 먹음)
1982 아일랜드 더블린, With colleagues for SW Design course
82. CGA알카텔 , 당시의 하드디스크 용량이 부족하여 Reel Tape에 데이터를 저장 및 Backup을 수행하였다(Reel Tape삽입장면),
1983. LME 스위칭시스템 SW프로그램 점검중....)
1984.3 귀국직전
1984.4 귀국시 싱가포르 타이거 맥주공장 방문
1984.10.29-31 삼성반도체 통신종합연구소 조직개발교육(용인삼성연수원), 두번째줄 왼쪽에서 5번째 조석팔연구4실장(성결대부총장 역임), 앞줄왼쪽 4번째 고동진사원(삼성전자 사장역임), 앞줄왼쪽 7번째 이주형소장(삼성전자 전무 및 기술총괄 역임), 맨 뒷줄 왼쪽 4번째 김영철대리(삼성전자 전무역임),
해외에서 4월에 귀국하여 삼성반도체통신연구소에 5월에 입사하였다. 그런데, 근무분위가 정말 이상했다. 출근 시간은 있는데 퇴근시간이 없었다. 모두가 퇴근할 생각은 하지않고 식당으로 가서 식사하고 들어와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였다. 업무의 효율도 엄청 떨어지는 것같았고 외국인 회사의 특징은 오전 8시~오후4시는 철저하다 근무시간에는 화장실 가는 것 이외에는 오로지 업무만 하는데... 명색이 삼성이 국내에서는 최고의 기업이라고 명성이 자자하지만 내 눈에는 모든 것이 마땅치 않았다. 몸으로 때우는 회사이구나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으니 ..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나도 분위기에 젖어서 10년이란 세월동안 삼성연수원 등 많은 훈련과정을 거쳐 삼성맨의 정신을 지니게 되었다..(그 뒤, 대학으로 옮겨 오니.. 이 또한 별세상이였다. 교직원들이 내 눈에는 모두가 관료조직화 되어 있는 듯하였으며 업무 효율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한국대학의 관료 조직화 되어 있는 장벽을 무너뜨려야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
1985.5.23~25 연구원 특별교육 (용인 삼성연수원),
첫줄 왼쪽 첫번째 서진구(삼보컴퓨터 사장 역임),
둘째줄 첫번째 박창규,
셋째줄 왼쪽에서 1번째 천경준(삼성전자 부사장역임), 2번째 조석팔(성결대 부총장 역임)
맨 뒷줄 왼쪽 3번째 강형구, 4번째 홍공식, 5번째 강성일부장,
1985 센프란시스코 출장시 이종조카 태환, 영상이를 만나 함께..
1985. 센프란시스코 출장 이종조카 태환이를 만나 함께, 금문교에서
1985년 센프란시스코 출장, 금문교에서 잠시
1987년 7월 과학기술대상 수상장면(매경정진기언론문화재단)
87.7 수상자 가족 (아내와 함께 )
198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연구소 실장들(왼쪽 부터 한영철, 이성규, 조석팔, 신동석, 문배성) , 1984년 4월에 해외에서 귀국하여 대우와 삼성에서 오라고 하였으나 삼성으로 결정을 하였다. 당시 삼성 반도체 통신 연구소장이신 이주형소장님께서 강력하게 삼성반도체통신연구소에 근무토록 권고하여주셨다. 삼성에 근무하면서 나에게 공부(석사, 박사과정을) 할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삼성반도체통신연구소 이주형연구소장님과, 강진구사장님, 정용문사장님 그리고 함께한 화상연구실 연구원들께 감사를 드린다.
정용문사장께서는 팩시밀리 연구개발을 완료한 후 나에게 사업화를 위해 구미공장 사업본부장으로 권고할때에 내가 박사과정중임을 확인하시고 가전에 근무하던 이기태 담당을 강욱진담당대신에 사업본부장으로 발령받도록하였다. 이 또한 정용문사장님의 배려로 나는 무사히 박사과정을 마칠수 가 있었다.
한편 이기태담당은 나중에 무선사업부로 옮겨서 사장을 거쳐 부회장까지 오른후 은퇴하였다. 한편 삼성전자의 핵심프로젝트는 HTDV, 팩시밀리, 카폰이였다. HDTV는 가전연구소에서 팩시밀리와 카폰은 반도체통신연구소에서 집중적으로 추진하는 제품 즉 1사 1품 제품으로 등록하여 관리하였다. 팩시밀리 개발 책임은 조석팔실장, 카폰개발책임은 신동률실장이 담당하였다. 제품개발이 성공하기까지 연구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가정에 아내와 아이들은 돌볼 시간도 없고 밤낮으로 연구소에서 살면서 주경야독을 하며 공부하면서 제품연구개발에 몰두하였다. 당시 함께 고락을 함께한 화상연구실의 60여명의 연구원들의 수고와 노력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말없이 뒷바라지 하면서 아이들과 함게 수고한 아내에게 고마움과 감사를 보낸다. 시간이 허락하면 내가 경험한 R&D의 노하우를 정리하여 기록에 남겨 보고자 한다.
에피소드1 ): 당시에 강진구사장이 주재하는 연구개발전략회의가 매달 연구소에서 개최되었다. 사장앞에 판매 담담임원, 연구소장 및 연구실장, 사업담담 임원들이 함께한 회의에 연구소와 마케팅사업부서와는 전쟁하는 장소였다. 마케팅 부서는 매출액을 연구소 신제품에 할당하여 놓고 매출이 부진할시 연구소 신제품개발이 늦어서 부진하다고 핑계를 된다.
연구소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신제품과 매출을 바로 연관짓는 것은 마케팅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다보니 전쟁이다. 연구소는 정해진 개발일정에 신제품이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제품이 생산으로 연결되기 까지는 그 절차가 산넘어 산이다. 그래서 사장이 지켜 보는 가운데 연구실장이 연구제품개발 완료시점이 늦어질때 이를 방어하는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당시에 나는 무선연구실 신동률실장과 나는 대조적이였다. 신동률실장은 사실 그대로 일정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하는 유형이였고 나는 강진구 사장의 심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연에 대한 보고를 다소 1, 2주 지연(실제는 6개월 내지는 1년지연)이 될 지는 모르지만 맞출수 있다고 주장하는 보고를 하곤하였다. 그러나 돌아서면 지연되었다. 그러나 지연이 않되게 하는 방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럴경우 마케팅에서 공격이 들어와도 이를 당당하게 대처하면 강진구사장은 이미 지연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추진하고 자 하는 의지에 고객을 끄덕이며 막아주었다.
그러나 신동률실장은 사실그대로 보고하다가 강사장께서 당장 집어치우고 내려오라고 야단칠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당시 연구소 연구실장 중에서 나는 브리핑 잘하는 "브리핑 조"로 소문이 났다(당시 핵심개발 제품에 대한 회사의 관심은 매우 컷다. 회사 비서실 감사팀은 우리나라의 감사기법으로서는 명성이높았다. 감사는 거의 기회손실에 대한 감사로서 비서실 감사를 7, 8회 받았지만, 모두 마케팅부서의 전략 부재로 대응한 나의 전략이 주효하였다.)
강진구사장: 강진구사장님은 오늘날 삼성이 IT분야에 세계적인 기업이 되도록 하는데 있어서 신화에 나오는 영웅같으신 분이시다. 삼성의 가전제품, 삼성전기, 삼성정보통신, 삼성반도체를 일으키시는데 맨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하신 분이시다. 당시의 대한반도체를 인수하여 삼성반도체를 일으키는 과정, 매탄동 벌판을 개발하는 삼성전자공장을 세우는 과정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시다.
너무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선대 이병철회장으로 부터 잠시 제제를 받으셨으나 이건회회장께서 강진구 회장의 탁월하신 리더쉽과 경영마인드를 이해하여 다시 삼전전자를 총괄토록하여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서 진두지휘토록 하였다. 강진구회장과 같으신 추진력과 지략을 가지신분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삼성전자는 기대할수 없었을 것이다. ,
에피소드2): 이주형소장께서 강진구사장주제 회의에서 연구소개발제품의 일정이 늦어짐(생산부서, 엔지니어링 부서등의 원인이 겹쳐서 늦어짐)에 따른 비난을 받고 열을 받아서 팩시밀리 담당인 나와 무선 카폰담당인 신동률실장에게 전화하여 당장 구미로 같이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연락이왔다. 당시연구소는 부천에 소재하고 있었다.
부천에서 구미까지는 약 3시간정도 걸린다. 점심을 먹는둥 마는 둥 하고 신동률실장과 나는 이소장님이 오기를 대기하고 있었다. 소장님차가 연구소에 도착했을때 나는 순간 꽤가 났다. 이소장께서 잔소리하기 시작하면 몇시간을 반복하는 스타일이므로 나는 신동률실장을 연구소장님과 함께 동석하도록 뒷자석으로 안내하고 나는는 앞자리 운전기사 옆에 앉았다.
그 이유는 잔소리 하실때 멀리있으면 소리가 제대로 안들리므로 전달이 않된다. 그래서 나는 앞자리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적중하였다. 승용차를 타자 마자 잔소리를 하기시작하는 데 옆자리에 앉은 신실장을 향해 구미공장에 도착할때 까지 무려 3시간을 잔소리를 하시지 않는가. ...나는 그때 무사히 그 잔소리를 피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앞줄 이광호이사는 경영전략 발표회중 타부서의 협조의 어려움으로 업무추진에 차질을 보고하자 당시 강진구사장께서 호통치며 당장 내려오라고 야단치며 남자가 상대의 *ㅂ알을 당겨서라도 일이 되도록해야지 무슨 변명이냐고 야단을 치며, 보고를 중단토록 하였다(즉, 안되면 되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변명이나 부정적인 보고는 통하지 않았다). 아마 그 이후 이이사의 직무가 변경된것으로 알고있다.
1987. 세계를 제패한 삼성 팩시밀리 개발제품 설명회 , 연구실 앞에서 제품을 설명하는 조석팔실장 맨 앞 컵을 들고 있는 안남신과장, 구경하는 문배성부장,
1984 TDX팀, 오병록, 곽호영, 강원모,강우식,이창엽,박용수, 최덕수, 김승훈, ....강원모연구원, 강우식연구원은2017년 인하대학교 학술발표시, 인하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엄청반가웠다.. 이 팀연구원들은 1985년 구미 국설교환기 사업장으로 내려가고 나와 헤어졌다.
1987-cofax개발자축
1985 x-모델팀과 함께: 최종관팀장(후, SBM사장역임), 조석팔실장, 전선아 ,김수철(후, 자이로그 지사장 역임), 김동률, 강무순, 임남섭.... 지금쯤 무엇들 하고 있는지..
x-model팀(최초 개발모델)과의 추억: 화상연구실 야외 단합대회를 갔을때의 추억이다. 어린이 대공원근처에서 함께 놀고 식당에서 회식을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당시에 김수철, 김동률, 최종관대리가 기억이 난다. 김동률이가 바람을 잡더니 테이블에 소주를 갑자기 병채로 마시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대리가 술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했을때 김수철이와 김동률이가 나에게 와서 부장님, 걱정하지마시고 댁으러 가세요 하면서 나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으나, 혀가 꼬부라 져서 횡설수설했다. 당시 x-모델개발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소주로 풀었다. 책임을 진다는 김수철, 김동율이 횡설수설하면서 나한테 술쥐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호통을 쳤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최종관대리를 내 차(포니2)에 태우니 완전히 몸이 느러져서 뒷자석에 태우는데 엄청 고생했다. 주변 여관 몇군데 들어갔으나 술취정하는 것을 보고 퇴짜 맞고 겨우 한 여관을 찾아서 숙박을 시키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그다음날 최대리가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았을 까봐 걱정이 태산이였다. 그런데 아침에 정상으로 출근하는 것이 아닌가.. 어제는 화가났지만, 아침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어제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엄청 반가웠다.
1988.8 Cofax-2000 개발성공 성공축하 인사, 왼쪽 일본기술자 미즈다, 이주형소장, 조석팔 실장, (앞에 전선아 연구원, 김형채연구원의 모습이 보인다)
이주형소장; 이소장님은 인하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으로서 전형적인 엔지니어이시다. 기술적인 문제해결과정에서 함께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제공하시며 상하의 격의없이 토론하고 머리를 맞데고 고민하는 소탈한 분이셨다. 강진구사장님으로 부터 업무추진에 있어서 인정을 받으신 분이시다. 새로운 기술에 대하여 매우 도전적이시고 연구소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도전의식이 매우 강하였으며 연구개발 아이템의 발굴 등, 사업화와 연결시키는 노력과 그 혜안은 탁월하셨다. 그 이후 삼성전자 기술총괄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셨다. 이 소장님으로 부터 R&D 추진과정에서 많은 Knowhow를 전수받았으며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주셨던 고마운 분이시다. 당시 해외 (일본 등)기술 동향 파악 , 해외기술자 유치, 해외프로젝트 계약 등의 일로 함께 다니던 일 , 연구소 개발 제품을 구미사업장에 넘겨준후 연구원들과 함께 회식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1987 화상연구실 야외 소풍, 앞줄 왼쪽부터 윤남일, 황운중과장, 김석근,< 김종인 >조석팔실장,최종관, < 박상길>, 김학수, 박창규, 김수철, 정성순, 유용준,이윤태, 김민영, 왼쪽에 서있는 오정환, 김규창,장주욱,신동률,<이종화>,최돈철, 이상용, 조규문, 박기웅, 김영철, <최건영>.장기수 유태훈, , 정영화, 조중연, 김재명, <곽두신> , 김필숙, 박유일, 이들은 나와 함께 회사를 집으로 생각하면 밤낮으로 제품개발에 몰두앴던 연구원들이다. 지금은 모두가 무엇을 하는 지 궁금하다. 서로가 헤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며 살아 갈것이다. 언제 다시 만나서 지난날 고락을 함께 했던 일들을 회상하며 회포를 풀고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당시 삼성인재개발연구원에서 외부 교수(성균관대교수)에게 의뢰한 삼성에서 간부급 이상으로 일하다가 삼성을 떠나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분석한 결과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70%이상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소개하였다. 삼성을 떠나서 느낀것은 훌륭한 연구원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을때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인것 같다.
1987화상연구실소풍, 뒷편 파란모자쓴사람 조석팔실장임
1987추석고향길떠나는 연구원들 환송식, 삼성기술원앞 왼쪽 <마태식>, 서석환, 여민기(현 AM텔리콤 사장), 조석팔실장, 김석근, 박유일,김무연, 이종화 여민기 과장(현 AM텔리콤 사장)은 리더십과 업무추진력이 이 탁월하였으며 그 성실함과 업무처리의 유연성 등은 매우 뛰어났다. 지금 AM텔리콤 사장으로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다)
1987삼성기술원연구실, 정보통신연구소 연구4실(조석팔실장)
1987.9 일본 신주꾸, 워싱톤호텔앞, 김영철과장(삼성전자 전무역임), 조석팔실장(성결대학교 부총장 역임), 일본 하루미 출장은 하루미에 있는 비지니스 쇼장에 가면 낮에는 신제품동향조사, 밤에는 새벽2,3시까지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당시의 IT분야의 일본기술은 한국보다 2년정도 앞서 가고 있었다. 청춘을 바친 날들이다. 김영철과장은 주어어진 업무에 매우 성실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그 추진력 또한 대단하였다. 역시 바쁜가운데서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삼성의 전무로 은퇴하였다.
1988. 신제품 개발 축하 파티, 3번째 중앙 조석팔실장, 특이한 것은 당시에 다른 연구실에서는 신제품개발시 막걸리 돼지머리 같다놓고 절하고 거기에 축하러온분들이 돼지입에 돈을 물려주고 하는 것이 잔치분위기였다. 나는 크리스쳔이다 보니 대신에 오랜지, 콜라, 샴페인을 갔다고 놓고 파티했다.
1988-팀워크숍 연구원들 격려차 방문, 이름이 몇몇만 기억난다. 왼쪽 오정환, 이상희,<?> 정성순, 조석팔실장,<유임기> 황운중과장, 박기웅,윤남일, 이윤태,<김한신>,<이춘홍 >,<정연화, 방두진코플>. 황운중과장은 업무추진에 있어서 머리회전이 빠르다. 감탄 스러운 것은 얼핏보기에는 매번 노는것 같아 보이는데 그 결과는 날카로움과 예리한 판단력 등 참으로 놀라웠다. 지금은 절실한 크리스쳔이다. 또한 당시 박기웅대리는성실하며 돌진력과 부서에 애착이 매우 강하였다. 구미사업부 이기태 이사(삼성전자 부회장역임) 와 박기웅대리와의 사이(회사에서 대리와 담담(이사급)의 직급 차이는 하늘과 땅사이의 관계였지만 이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연구소 대표로 공장에 내려가서 연구소를 대변하고 공격하는 발언의 돌진력은 대단하였다. 연구실장인 나로서는 매우 든든한 동료 연구원이였다.
1988 아내 기술원 방문
1988. 일본메이텍 으로 부터 파견된 기술자 미즈다와 함께 자체개발한 팩시밀리 모델 앞에서..., 미즈다에게 배운것이 많다. 일본인들의 집념과 근성. ADF마찰계수 실험과정에서 온도 40도 습도 85% 챔버안에서 우리연구원들은 20분정도를 못견디고 나온다. 그러나 미즈다는 1시간이상 실험의 결과를 확인할때 까지 반복하는 집녑...놀라웠다.
단지, 아쉬운점은 시행착오적인 접근으로 상품개발에 몰두하였다. 일본이 80년대에는 상품개발이 세계에서 제일이였다. 그러나 현재 젊은 후배들이 IT분야에 일본을 추월하는 것은 시행착오적인 접근이 아니라 이론적인 면을 먼저 정립하고 이를 확인하는 논리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쉽다..
1987일본NTT연구원들 삼성기술원방문,이태경, 유병주, 조석팔, 김영철, 유병주연구원은 나와 즐거운 추억을 지니고 있다. 유병주연구원은 일본에 근무한경험이 있고 일본에 능통하였다. 나와 함께 일본 EPSON사, 동백물산을 함께 다니면서 업무겸 즐거운 여행경험을 지니고 있다.
1987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해변, 수출부 김택희 부장과 함께 미국 시장 탐방및 ISDN세미나에 참여차 방문
1987년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 컨퍼런스참가.오른쪽:김택희수출부부장(삼성전자 중국총괄, 전무역임), 조석팔실장(성결대 부총장 역임)
1987 미국오란도, 왼쪽 조석팔실장,박재욱부장(전 한솔전무), 오인식부장(전 모토롤라사장)
1987.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해변가 조약돌을 바라보면서...
1987 미국오란도 출장: 왼쪽부터 오인식부장(전 모토롤라사장), 박재욱부장(전 한솔전무), 조석팔실장(전 성결대부총장), 배병관담당(전, 삼성전기사장, 코액스사장), 구석본대리, 배병관담당은 해외바이어 들과의 계약하는데 노련하였다. 나와는 업무관계로 매우친밀감을 형성하였다. 학교로 이동한 후에서 자주연락하고 하였다. 오인식부장은 당시의 수출부장으로 서 회의때 "삼성팩시밀리를 수출하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라"고 고추가루를 뿌렸으나 그러나 수출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성팩시밀리는 그 이후 세계를 제패하였다.
1987 미국라스베가스, 왼쪽 두번째 최훈전무, 박제욱부장(마케팀) 조석팔실장(연구소), 신성규연구원(연구소)
1988.12.28 신라호텔 만찬장, 삼성정보통신연구실장부부초대(왼쪽에서 2번째 신동률실장, 3번째 조석팔실장 부부)
1989 일본하루미 전시장, 일본 하루미 전시장은 기술동향 분석 을 위해 매년 2, 3회 방문하였다.
1989일본요꼬하마연구소, 왼쪽김영철과장(삼성전자 전무역임), 하성한전무, 조석팔실장(성결대 부총장 역임), 바바사장 직원,뒷편바바사장(전, 도시바 근무)
1990-4-베르린장벽이 1989년에 무너진후 2번째 방문, 무너진 베르린장벽을 오르는 장면
1990-4- 베르린, 무서진 장벽 시멘트 벽돌 을 기념으로 구입하기 위해 고르고 있는 조석팔실장
1990.4 베르린 동상앞에서 있는 조석팔 실장
1990-4 베르린 베르린 장벽이 무너진 후 방문
1985 메르린 장벽무너지기(1989년)전에 방문, GTE연구원과 삼성연구원과 같이, 맨 왼쪽 조석팔, GTE연구원, 김일환부장(수출부), 맨 오른쪽 공태호(구미사업부)
1989.9 뉴미디어 대상 시장,
1990-2-27 보고타 시청앞 광장, 보고타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수출부 김택희부장과 함께 출장가서 보고타 공항에서 김택희부장의 가방분실 사건,
이때의 추억: 김택희부장은 뉴욕 삼성지점장으로 5년 근무하고 국내수출부로 돌아와서 근무할때이다. 외국에 대한 경험도 많았다. 둘이서 김택희부장과 나는 비행기 안에서 서로 주고 받은 대화가 보고타가 네타바이(쓰리군)가 심하니 조심하자고 다짐을 하고 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아서 출구에 나오자 보고타 지점장이 마중을 나왔다.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는 중에 순간 어떤 여성이 김택희부장의 뒷편에 뭣이 묻었다고 손짓하여 옷에 캐쳡이 뿌려져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김택희부장 007가방(가방안에 비행기표, 패스포트, 현금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항경찰에 신고(돌아올때 까지 찾지 못함)하고 보고타 지점장이 프랑스 푸죠를 새로 구입했다고 시승식 겸 한국인식당에 가서 식사하고 나와서 차를 타는 순간 새차 푸죠의 백미러를 누군가 떼어 가버렸다. 이 이후 호텔에 가서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 도둑이 나타날까바 가방을 끌어안고 잠을 설쳤다.
1990-2-27, 아르헨티나 시청앞 광장
1990.2.17 보고타 안내직원과 함께
1990.5. 모스코바 붉은 광장앞에서, 왼 쪽 수출부 김일환부장, 조석팔실장
1990.5.20 - 5.27 소련이 붕괴(붕괴: 1991년 12월 26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지도부 해체하고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서 승계하고 모스크바 그렘린에 마지막으로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국기가 게양됨)되기전에 한국대표단 쏘련 MOC 대표단과의 만남, 삼성대표단 정용문사장, 오증근이사(기획팀), 유의선이사(국설), 한영철이사(PABX), 이용복이사(특수사업), 김일환부장(수출부),조석팔실장(연구소), 정무관부장(삼성독일지점장), 배승환과장(수출부), 한국대표: 정용문사장, 러시아대표: 코르네체프차관, 방문목적: 러시아 통신성과 삼성간의 협력방안 협의 , 오른쪽에서 두번째 조석팔실장의 모습이 보임, 당시의 쏘련은 공산주의 사회이다 보니 사설교환기의 개념이 없었고 모두가 국설이였다. 그리고 MOC회의에 참여하는 대부분이 KGB소속으로 구성되 있었던 것을 감지하였다.
1990.5 레닌무덤 앞, 왼쪽 정무관부장(독일지점장), 조석팔실장(연구소), 정용문사장
1990.5 모스코바 왼쪽 첫번째 현지 삼성직원, 조석팔실장
1990.5 러시아 통신성 직원과 함께
1990.5 쏘련 통신성을 방문한 삼성대표단, 모스코바 강 뚝을 배경으로 ...왼쪽: 배승환과장(수출부), 김일환부장(수출부),오증근이사(기획실), 정용문사장(한솔 사장역임)), 유의선이사(국설), 정무근부장(독일지점장), 이용복이사(전략기획), 한영철이사(삼성특수 사업 사장역임), 조석팔 연구4실장( 성결대학교 부총장 역임)
1995년 5월30일~27일 : 당시의 모스코바는 공항에 내리는 순간 공산국가의 경제적인 몰락과 국가의 비참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모스코바 국제공항은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공항라운지가 엄청어두 컴컴하였다. 모스코바롤 출발하기 전에 대표단일행 은 몇가지 준비를 하였다. 현금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보르 양담배, 청바지, 여성 스타킹 등을 선물로 준비하여갔다. 공항에서 입국하는 과정에서 모크코바 삼성지점장 일행이 마중나와서 인사를 나눈후 준비해온 말보르 담배 한갑을 넘겨 받아 공항입국담당자에게 건내주니 복잡한 절차 없이 무사통과였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이동하는 과정세 창밖을 보는 순간 아스팔트 도로는 곳곳에 파여져 있고 차선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도로 주변에는 고장난 고물차들이 군데 군데 보였으며 시내에는 전차가 오가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4성급 호텔이 카페트가 썩은 냄새가 나고 엘리베이터는 반기계식으로 층별 보턴이 튀어져 나와서 매층마다 다시 누른곤 했다. 호텔 방안에는 침대가 베니야 판 같은 것을 깔려 있어 삐것소리가나고 화장실은 드럽통을 짤라서 목욕통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휴지는 마치 신문지 보다 두꺼운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표단 일행의 휴지는 독일지점장이 독일에서 가져온것을 사용했다.
호텔의 조식은 채소는 전혀없고 보리빵만 제공되는 형태였다. 저녁 6시 조금 지나니 모스코바 도시 전역이 캄캄하였다. 전기가 부족하니 가로등 및 가게 등의 불이 껴져 있으니 시내 전체가 캄캄하였다. 함께 간 대표단 일행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의 형태가 이러니 북한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8일간 머무는 동안 쏘련 통신성에서 안내하는 통신회사를 비롯하여 몇개의 회사를 방문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 라인은 돌아가지 않고 stop되 어 있었고 장비는 영국산 등 외국산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동작이 멈춘지 오래된 것 같았다. 그리고 화장실 비누는 마치 옛날 60년대에 양잿물을 받아서 비누로 사용하는 그런 비누였다.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낮에 근무시간인데도 통신성 직원들에게 술냄새가 풍겼고 보드카를 마시고 근무하는 것 같았다. 특이한것은 저녁에 스텐드바 가 있다고 하여 지점에서 안내하는 곳에 가 보았더니, 대형홀에서 춤은 스텐드 바를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발레를 구경하는 온 느낌이였다. 아침 저녁으로 가게에 식품을 배급받으로 온 사람들이 붐볐다. 식당도 몇군데 있었으나 식당주인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운영하다 보니 봉급받고 운영하니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없으니 손님에 대한 서비스 개념이 없었다. 머무는 동안 식사 티켓을 배부받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적이 몇 번있었으나 참으로 불편하였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제는 몰락될 수 밖에 없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였으나 그들의 얼굴은 평안함을 지니고 있는 듯하였다. 경쟁이 없으니 산업이 활성화 될 리가 없다. 인간의 본성은 욕심이므로 욕심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체제가 되어야 경제가 활동화 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이다. 8일간의 쏘련 모스코바 시내를 돌아보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체험하고 돌아왔다.
1990.5 러시아 통신성에서 삼성 팩시밀리 소개,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현금이 없어서 물물교환식의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특이한것은 회의내용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서의 전후 좌우를 매우 꼼꼼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이 우리와는 매우 대조적이였다. 통신성을 방문한후 러시아 항공기술자들 몇명이 삼성기술원에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중앙에서 조석팔실장이 제품을 설명 하고 있다.
1990.5 모스코바 북한평양식당앞, 삼성대표단 일행이 모스코바 평양식당방문 식사후 기념촬영, 모든 음식이 우리 입맛에 맞지않았음, 왼쪽부터 한영철이사PBX), 유의선이사(국설) 조석팔실장(연구소), 이용복이사(특수사업), 정용문사장, 정무근부장(독일지점장), 뒷편 오증근이사(기획)의 모습이 보임
1990. 3. 영상연구실 워크샵,
앞줄,왼쪽 김재호(현,부산대교수), 조석팔실장(성결대 부총장 역임) , 김서규, 김정국 , <유상윤>, <양승범>.강구수
뒷줄 왼쪽 서석환, 여민기 (현, AM텔리콤사장), <송봉석>, <황효현>, 이수열(현, 경희대교수), 이양연, 김정래,<온재경?>.<임남섭>,<정진관> 신성규,< ?>, <이현준>, 김동률,
*정진관연구원은 자동차 전장장치에 관심이 많았다. 박사과정시 김재호박사와 김종대박사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재호박사는 지금 부산대에서 교수협의회 회장도 하였고 절실한 크리스쳔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김종대박사는 한림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유상윤연구원은 예쁘장하였고 당시 황희융교수의 c언어책을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신성규연구원은 비디오텍스때 부터 팩시밀리 SW개발에 참여하였으며 머리회전도 빠르고 성품도 매우 좋았다. 연구원들의 특성과 개성을 다 소개할 수 없으나 모두가 영리하고 탁월하였다. 삼성을 나와서 대학에 서 교수와 처장보직을 하면서 느낀것은 화상연구실 연구원들이 강력한 man-power였다는 것을 실감하에 되었다.
왼쪽부터: 김정국연구원 결혼식 참석,이수열(현,경희대교수), 이양연,하태진,김재호(현, 부산대교수),조석팔실장, 김정국신랑, <?> 이영수, 임남섭, 정연하,<?>
1990.10.23 G4/비디오폰팀 워크숍, 앞줄 왼쪽 강무순, <?> ,<박계호> , 김종대과장(현, 한림대교수), 조석팔실장(성결대부총장), 김영철과장(삼성전자 전무역임), 정영화(남서울대 교수), 뒷줄 오른쪽 곽두신, 박유일, 정재문, 박상길, 조규문, 최건영, 이영수, 최도형, 유용준, 장기수, 조중연
1991.1.12미국 라스베가스 삼성전자 부스앞
1991.1.12미국 라스베가스, 왼쪽 조석팔실장(성결대부총장 역임), 이기태담당(삼성부회장 역임), 미국바이어,
1991.5.17 일본하루미 전시장
1992.1.9 미국 Rockwell사 간부들과 함께, 당시 팩시밀리 모뎀칩을 미국 Rockwell사 부품을 사용하였다. 오른쪽 첫번째 조석팔
전체 제료비 500불 정도에서 모뎀이 100불가격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뎀가격을 낮추어 구매하는 것을 협상치 위해 방문, 결론은 자체기술로 만든부품을 확보하기 전에는 가격을 낮추는 것은 어려운 것이였다. 그러나 미국 실리콘벨리 TTI사의 모델기술자(스텐포드출신 이란 기술자 하미드)를 스카웃하여 반도체와 협력하여 자체개발하는 방안과, National에 외주의뢰하는 것을 동시 추진한 결과 Rockwell이 이를 인지하고 추후에 가격을 $100에서 -->$8로 낮추어 주었다. (내가 S사를 떠나오기 직전에는 거의 $1에 가까운 으로 내려왔다고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반도체는 R&D개발 비용이 모두이다. 연구개발비용만 확보하면 Break/Even point 즉, 손익분깃 점으로 돌아서고 재료비는 돌값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윤만 남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993.10 삼성화상연구실 워크샵(경기도 양평콘도)을 마치고 이동하기 전에 촬영한사진이다. 연구소 침대깔아놓고 밤을 함께 지새던 연구원들, 지난날 젊음을 쏟아부어 고락을 같이 하였던 연구원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참많은 세월이 흘렀다. 오랜 세월이 지나니 이름이 하나둘씩 잊혀져 간다.
앞줄 오른쪽 박창규, 김종대,조석팔실장, 김서규,< 비디폰오팀?> , 이혜영, 김형배, 안희문, 조승진,<?>,<김규열>,<이진우sw>,<?>,<여직원 박기정>,<? >
2번째 줄오른쪽, <장동구>, <정우철>, 박기웅, <?>조중연,<?>,<?><?>황재식,<박계호>.박유일, 김학수, 김민영,함병식 ,
3번째 줄 오른쪽 <정재문>, <박인규회로>, <황효현> <강일권>, <이정철,>, < 남철현 >, 최건영, 장기수,<? > ,<?>, .얼굴은 아는데 이름이 가물가물... 이러한 모임은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1993.10 양평한하콘도 야외 캠프장에서 연구실 팀원들과 함께 장작불피우고, 수원에서 최상등급 조달한 쇠고기와 막걸리로 파티하면서 노랫방기구 갖추어 놓고 노래부르면서 흥겨운 시간 , 오른쪽 조석팔, 김형배, 김민영, <? 쇠고기 조달한 연구원>
1993.10 양평한하콘도 야외 캠프장에서 연구실 팀원들과 함께 장작불피우고, 수원에서 최상등급 조달한 쇠고기와 막걸리로 파티하면서 노랫방기구 갖추어 놓고 노래부르면서 스트레스해소하는 장면 , 왼쪽 조석팔, 뒷편 김윤수박사모습도 보임
1993. 10 앞쪽 조승진,뒷줄 첫번째 조석팔실장,함병식, <?> , 김민영,뒷줄 <?>,<?>
1993.10 왼쪽 조석팔,김종대, 유병주
1993.10 왼쪽 김서규,<?>,조석팔실장(성결대 부총장 역임),<?>, 김윤수박사(삼성전자 상무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