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s Website:https://sites.google.com/view/ict-joseph
내가 3년동안 몰던 탱크 M47 모델이다.세계2차 대전 당시 전쟁의 영웅 패턴장군의 이름을 따서 패턴 M47이라고 호칭하였다. 3년동안 M47탱크 조종수로서 엔진의 피스톤 작용(흡입, 압축, 폭팔, 배기)에 대한 과정, 트랜스 미션의 이상유무, 전기장치, 통신 장치등에 대한 정비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또한 각종 전장장치등에 관한 메뉴얼은 영어로 되어 있었으며 한국어로 변역된 것이 없었다. 장교, 하사관, 사병들의 실력으로는 영어 메뉴얼을 제대로 읽고 이해해는 자가 없었다. 간혹 ROTC장교가 배치되어도 ROTC장교역시 4년 대학을 다녔지만, 탱크에 관련된 전문용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장교가 없었다. 매우 기술적으로 취약한 상태였으며, 고장이 나면 메뉴얼을 읽지 않고 감으로 고장수리하는 상태였다. 보통 엔진의 치명적인 고장이 나면 후송을 보내는 조치를 취했으나 이 역시 후송조치를 취하면 부대장의 고가에 영향을 미치므로 자체정비를 해야만 하는 탱크 부대장이나 전차장, 조종수들은 부담을 가질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신제품을 구입하면 메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숙지하는 습관이 남아있다.
[에피소드]: 당시 탱크정비 감독은 미군에서 실시하였다. 미군정비감독관이 점검방문하러 왔을때이다. 부대장이 부대원들에게 영어를 할수 있는 병사들을 호출하였다. 나는 그때 갓 대학입학하자마지 휴학하고 온상태에서 영어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과감히 미군 감독관통역과 설명을 하겠다고 나섰다. 미군감독관은 정말 꼼꼼하게 메뉴얼데로 점검하였다. 그런데 많은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당시의 무슨이야기인지 알라듣지도 못하면서도 용감하게 질문의 뜻도 모르면서 'Yes"를 남발하였다. 점검이 완료된후 부대장(신?종대위)이 점검상태가 어떠하였느냐고 물었을때 나는 잘 받았다고 답했으나, 몇개월후 점검상태결과 매우 불량한 것으로 통보가 왔다.
제원은 810마력, 60톤, 무쇠두께 12인치, 24기통이다. 기갑조종수가 되기위해 광주기갑학교에서 죽도록 기합(낮에는 쇠파이프로 머리맞아가며 교육받고, 휴식시간에는 맨발로 제식훈련, 밤에는 줄빳다 맞는 일...) 가히 동물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현장에서 직접 조정, 정비하면서3년을 보낸것인 내 인생의 좋은 경험이요 극한 상황에서도 물리적으로 견딜수 있는 인내심을 보유하게된 자산이다.
1971년 21사단 66년대 초청받아 덕석교회(최운택목사) 성가대 초청받아서 찬양(당시 본인이 성가대 지휘, 둘째줄 우측 3번째 조석팔, 다섯번째 이형태, 6번째 조성용)
앞줄왼쪽부터--> 최영철, 고영숙집사, 천봉례사모, 포병대상사부인, ?, 최선하권사(김문배장로사모), 이형숙선생(이형태누님), 최춘배선생, 김동조선생
뒷줄 왼쫀부터--> 이형태선생, 이동현선생, 장국태, 엄상환, 이유환, 최운택전도사, 김형권, 황인복, 조석팔
21사단 전차부대 근무하면서 민간인교회(덕석교회)에서 성가대 지휘, 담임목사, 최운택목사, 성탄절 "축성탄" 글씨 본인작품, 전방부대 민간인 교회는 전기불이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밤에 등불(호야불)을 켜고 예배를 드렸음,
주일날에는 피곤한 탱크부대훈련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였다. 점심용 라면을 개인별로 배부받아서 교회에서 함께 끓여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70년 강원도 양구군 동면 덕곡리에 위치한 덕석교회는 주로 군인가족과 군인들로 구성되었었다. 저녁집회 예배시에는 석유로 태우는 등불(일본말로 호야라고 불렀음)을 켜고, 겨울에는 연탄난로를 피웠음, 23세 젊은 나이에 즐거운 추억이다.. 당시에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지휘하고 있는 모습)
1971년 12월 성탄절기념사진, 강원도 양구 동면 덕곡리에 위치한 전차부대옆에 위치한 덕석교회
뒷줄 왼쪽 조석팔, 김동조, 김형권, 이유한, 이형태
중앙 왼쪽 천복례사모, 이형태선생 누나, 김옥화, <미상>
앞줄 왼쪽 군상사부인, <미상>, 최운택전도사, <미상>, <미상>
축성탄 글씨는 본인의 작품, 당시 성가대 지휘(탱크부대 근무하면서 민간인교회 출석하여 예배드림)
1971 덕석교회 성가대 첫번째줄 오른쪽 최선화선생, <?>,<포병부대 상사부인>, 천복레사모, 두번째줄 첫번째 김옥화, 이형태선생누나, 세번째 줄 첫번째 조석팔, 김형권 , 조성용, 이형태, 네번째 김문배, 이유한,...
덕석교회 청년부, 뒷줄 중앙에 모자쓰고 있음
저녁부흥회때 특송
71년도 유년주일학생들과 함께, 앞줄첫번째 조석팔, 이유환, 조성용, 뒷줄 오른쪽 이동현병장,
1971년 강원도 양구군 동면덕곡리 , 2번째 신축한 새성전, 광주기갑학교( EMBC 434기) 졸업후 가평 5전차대대를 거쳐 강원도 양구군 21사단 전차부대 조종수롤 36개월 근무 , 군부대의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덕석교회를 통하여 많은 신앙의 훈련을 받은 곳이다.
1969, 논산훈련소 28년대 4월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8주 거쳐 6월에 광주기갑학교 (1969.6-10) EMBC434기로서 낮에는 교육, 저녁에는 제식훈련, 밤새도록 기합받고 낮에 교육기간동안 졸면 탱크 쇠파이프로 머리를 치면 머리가 툭 튀여 나와서 터지기 직진이였다. 68년 김신조사건이후 군훈련은 매일 유격훈련에 준하는 생활을 하였으니 실로 혹독하였다.
1969..6-10 농구화는 선반에 올려놓고 맨발로 다니게 하였다. 처음 10일간은 상처로 인하여 의무대에 자주 갔으나, 이역시 2주 정도 지나니 발에 꾸덕살이 베었다. 인간은 훈련하기 나름인 것을 알겠되었다. 동료들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앞줄 중앙에 유하은, 뒤줄 왼쪽 첫번째 박풍진(매우 걸작품이였음)은 기억에 남는다.
왼쪽 조석팔상병(1호자 조종수), 2번째 최창록일병 (2호차조종수,)
M47 탱크 조종수 왼쪽에 있음, 무쇠덩어리로서 무게는 60톤, 무쇠의 두께는 전면이 12인치, 휘발유 250갤론(50갤론 5통), 항속고리는 180Km, 시속 60마일(96Km/hr), 무전기는 진공관으로된 ANGRC-78무전기, 포탄은 80발 탑재, 1700야드 명중(명중율이 매우 높음, 그러므로 당시 동해안 간첩선을 탱크가 거의 명중 시켰다.), 탱크 옆에 붙어 있는 캘리버 30으로 1700야드에 있는 꿩의 머리도 명중 시킬수 있다.
M47 조종수석 내부, 야간에도 적외선라이트로 조종이 가능하다.
70년 이전까지는 탱크부대 유격훈련이 없었다. 김신조 사건이후 유격훈련이 시작 되면서 탱크부태에도 유격훈련을 받도록 명령이 내려왔다. 처음 유격장에 도착했을때 탱크병 중사가 유격조격에게 권총으로 덤벼서 훈련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보고된후 조사를 거쳐서 재훈련을 받게 하여 마치 개처럼 두들겨 맞고 지옥훈련을 마쳤다. 유격훈련을 마치고 부대원들과 함께...(당시의 유격훈련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 가까운 훈련이 였음.....) 앞줄 오른쪽 고공길하사(제주도), 3번째 조석팔상병,뒷줄 오른쪽 장덕수 병장,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음....고공길하사는 먼저 제대후 나와는 서신도 몇번 주고 받았다. 그러나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본인이 몰던 M47전차 앞에서, 우측에 정비하는 장면에 맨 선두 김상수일병(조수), 박병길상병(포수), 조석팔병장(조종수), 설용운일병(탄약수), 본인이 가장 고참...
- 탱크병은 중장비를 다루므로 밤마다 빳다를 치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항상 긴장되어 있어야 하는 상태..).
- 새벽 1시에 깨워서 기합 내지는 줄빳다를 치는 행사... 때로는 밤12경에 깨어 영하 23도정도 되는 눈덮인 운동장에 팬티바람으로 집합하여 낮은 포복, 쪼그려뛰기 등으로 기합받던 일.... 쪼그려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기합받던 일... 쫄병때 조종수는 권총 M45을 소지하고 있지만 보초를 설때는 무거운 M1소총메고 새벽 1, 2시경 영하 20~23도를 오르내리는 겨울, 1시간 30정도 보초을 선다. 보조를 서는 것이 아니라 헬맷과 소총은 내려놓고 1시간 반 정도를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해야 추위를 견딜수가 있었다(만약 순찰에게 걸리면 바로 영창아니면 죽도록 빳다 맞아야 한다.). 실로 혹독한 극한의 훈련을 겪었다.
- 전차포 사격장에 포를 쏘는 순간 조종수 석에 앉아있는 본인의 헬맷이 흔들리며 귀가 먹먹하여 한참동안 들리지 않는 굉음, ...열악환 환경에서의 극기 훈련은 내 인생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에피소드) 각 부대에 배치된 쫄병때 일이다. 중사가 자기 내복을 엄동설한 겨울에 빨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당시에는 흘러가는 개울에 얼믐을 깨고 물을 받아서 빨아야 하기 때문에 보통일이 아니었다. 군대는 명령이니 어떤 방법으로든 세탁을 해야한다. 나는 개울에 얼음을 깨고 찬물에 내복을 비눗칠해서 워커발로 몇번 밟아서 세탁을 하였다. 그리고 그 옷을 해볕에 말렸다. 문제는 내복이 비눗물이 제대로 행궈지지 않아서 엄청난 얼룩자욱으로 물들어 져 있어다. 그런데 나에게 세탁물을 맡긴 중사가 맡긴세탁물 달라고 하여 건조된 세탁물을 가져다 주었다 . 순간 그 중사의 얼굴이 찌그러 지더니 사정없이 구둣발로 조인트를 차면서 욕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로는 나한테 세탁물을 맡기지 않았다(결국 얼을물에 비누칠한 세탁물을 구둣발로 밟아서 세탁하는 방법이 그 중사에게는 불합격이지만 나에게는 성공적인 것이였다...)
기갑가, 지축을 울리며 학힌길 박차고 ....
1971년 23세 젊은 나이 ,꿈많은 청년이였다.
71년 탱크 부대 크리스쳔 동료들, 주일날 교회 출석후 부대에서 가져온 라면 끓여먹고 닭싸움으로 후식, 왼쪽 이동현병장, 조성용, 조석팔, 이유한, 최영철
71년 탱크부대 동료 조성용과 함께, 주일예배후 개울가에서 가재 잡던 일...
70년 탱크부대 막사 앞에서, 얼굴이 갸름하면서 매우 날카롭게 생겼다.
1970년 탱크 정비복을 입고, 전차의 연료통의 물을 빼기 위해서는 탱크 밑바닥으로 낮은포복하여 천정을 쳐다보면서 낫트를 돌려서 뺀다. 그러나 낫트 순간적으로 빠져서 휘발류가 온몸을 적셨다. 이때 겨우 낫드를 잠기고 밖에 나와서 바람이 부는곳을 향햇다. 만약이때 담배불 같은 화기가 있을 때는 심각한 화사을 입게 된다.
70년 탱크 앞에서
70년 탱크 정비하다가 잠시 휴식, 설용운 조수와 함께 정비하다가 몸을 푸는 동작...
제2소대 소대장 노고길 소위: 전남 영광출신의 노고길 소위, 그는 1970년도 제21시단 전차중대 2소대장이였다. 그리고 2소대 1호차 탱크 조종수 는 조석팔이였다. 노소위는 2소대 소대장이자 2소대 1호차 전차장이다. 나는 일등병 조종수이고 소대장 노고길 소위와는 절친한 관계였다. 부하를 사랑하고 깡도 있는 소대장이였다. 그는 헌병중사로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간보후보생(OCS)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우리부대에 배치되어 1호차 소대장을 하면서 나와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캐토릭 수녀분을 아내로 맞아 부대 근처 민간집에 거주하면서 출퇴근 하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배려를 하였다.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장교들 끼리 놀면서 저녁에 저가 아내와 함께 막걸리를 사오라고하여 심부럼을 자주 시켰으며 자기 집 단칸방에 나를 함께 재우곤 하였다. 쫄병 일등병인 나로서는 매우 큰 특혜였다. 부대 내부반에 가서 고참들의 괴롭힘(기합, 빳다 맞는 것 등)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다.
탱크부대 비상훈련중에 나는 조종미숙으로 헌병초소를 망가뜨렸다. 초소를 보던 헌병이 기겁을 하고 피하였으나, 부대를 귀대하는 과정에서 헌병백차가 바로 내 전차를 따라왔다. 그때 부대에 도착하자 마자 노소위는 탱크에서 내려서 헌병의 헬맷(백바기지)를 벗겨 두들기면서 " 너 놈들, 감히 전시중에 탱크에 시비를 걸어..." 하면서 고함쳐서 돌려 보냈다. 그 후 일주일 뒤 사단 헌병대에서 연락이 왔으나, 그런일 있은 적이 없다고 오리발무마 사킴
70년도에는 월남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차출명령이 내려왔다. 당시에 부대에 가장 쫄병인 내가 해당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탱크병은 전쟁시 보병과 함께 맨 전방에 배치됨으로 월남전에서 전투비행기의 네이팜탄 같은 포탄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거나 아니면 부상이 매우 심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노소위께 이야기를 하여 월남차출을 막아달라고 하여 차출되지않았다.
비상훈련중 노소위와 나는 탱크를 산골짜기에 정차여 놓고 PX에서 구입한 막걸리통(Cal 50에 담음)을 열어 밤새도록 마셨다. 그런데 문제는 술이 취한 노소위가 전차에 올라가서 무전기를 들고 "공구팔칠 넷쌈 둘하나, 독수리 나와라"하면서 반복적으로 술취정의 소리를 하니, 당시의 ANGRC-78무전기는 One -way통신방식이므로 한 사람이 사용하면 부대전체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 런데 중대장 신언종대위(대령으로 제대)가 탱크부대를 지휘할 수가 없었다. 노소위가 무전기를 잡고있으니 채널이 불통이었다. 부대장은 점검차 돌아다니다가 열을 받아서 바로 2소대 1호차 전차장이 술이취해서 횡설수설하는 장면을 확인하고 바로 그자리에서 "보직해임"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노소위는 바로 월남으로 파병되어 나와 헤에지게 되었다.
그외에도 나와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제대후 갈현동을 지나 대자리 방향의 중간지점에 댕크대대장(대위)로 근무할때 한번 찾아서 만난후로는 나는 복학하여 바쁘다고 만나지 못하고 나와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후 전남영광에서 경찰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영원히 만나지 못하였다. 아마 나이는 나보다 4살정도 많은 듯하다. 지금쯤 무엇을 하는 지 궁금하다.
71년 탱크부대 식당앞 야외식탁에서, 당시에 모든 사병들에게 담배를 주기적으로 지급하였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내 한테 지급된 담배는 다른 동료에게 주었다. 그러나 당시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했다. 왼쪽 라인 4번째가 조석팔의 모습... 오른쪽 줄 3번째 바로 본인옆에 있는 오병주하사(embc동기),조성용는 나와 광주기갑학교 동기인데 나중에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부대에 나와 함께 근무하였다 . 인정이 얼마나 많은지 당시에 하사관 봉급받아서 PX에 가서 비싼 꽈배기 과자를 사와서 나에게 건내주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 친구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않고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이땅에서는 영원히 다시 만날수는 없를 것 같다.
71년 고기환상병, 조석팔일병, 고상병은 나와 친했다. 그는 제대후 남가좌동에 살았는데, 나는 제대후 2번 정도 만났으나, 그후 서로가 삶의 현장에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소식이 끊어졌다.
71 눈내린 야외에서. 왼쪽 앞 최창록일병, 뒷편 "하?" 하사(강원도 상동 출신, 태권도 유단자), 조석팔, ..눈덮인 산야가 아름답지만, 군부대에서는 때에 따라서는 지겹다. 탱크 및 부대 연병장의 눈치우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 뿐아니라 눈이 살짜 녹아서 살얼음이 된 상태에서 밤 영하 18~23도로 내려가는 매서운 추운 밤 팬피바람으로 집합하여 눈위에서 낮은포복으로 기합받는 일들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지금은 아마 그렇게 매서운 추위가 없을 뿐 아니라 훈련을 그렇게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1971 스피드 스케팅 선수에 합류(이유: 부대에서 열외로 되는 시간이므로 매우 좋은 기회였음), 왼쪽 사진 이중경일병과 조석팔상병과 함께 , 이중경일병은 당시에 유행하는 트위스트 춤을 비롯하여 다양한 스탠스바에서 유행하는 춤을 추었으며, 바람끼가 상당히 많고 재미있는 동료였다.
1971 스피드 스케팅 선수에 합류(이유: 부대에서 열외로 되는 시간이므로 매우 좋은 기회였음),
소대원들과 함께 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본인, 3번째는 중사인데 동료 하사관 최탁열상사의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 아마 그 아이도 50살이 넘었을 것이다.
1970년 어느날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이일호?? 일병(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음)과 상병 조석팔이 보초를 서다가 사신한장... 무슨 주먹을 불끈쥐고 있는 모습이 되게 웃기는 장면인듯
1971 부대원들과 훈련을 마치고...앞줄 맨 왼쪽에 조석팔상병, 뒷줄 오른쪽 김문배중사(정년후 교회 장로로 봉직)..당시김문배중사는 내가 부대에서 출석하던 덕석교회 성가대 최선하선생과 결혼했다. 결혼식순서( 등사,가루방) 작성 및 결혼식 웨딩반주도 조석팔 병장이 하였다.
3년동안 몰던 M47전차 모델.... 내가 제대할 무렵에는 전차의 엔진소리만 들어도 캬브레터의 고장인지, 프라그의 문제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용하는 각조도구 복스알, 양구, 뺀찌 등의 규격을 두 달달 외우고 있었다.
내가 몰던 M47탱크 모델이다. 세계2차 대전다시 전쟁의 영웅 패턴장군의 이름을 따서 패턴 M47이라고 호칭하였다.
조종석이 왼쪽에 있고 조수석이 오른쪽에 있다. 탑승인원은 4명으로서 조수는 여군이 사용하는 SMG총, 조종수는 권총 M45 권총사용했다(당시는 나는 권총을 눈감고 완전 분해조립이 가능했다). 조수석 앞에 CAL 30기관청이 설치되어 있고 포탑에 는 Cal 30기관총과 항공기를향해 쏘는 Cal 50이 설치되어 있다. 포는 105mm 직사포로서 1700야드 지점까지는 명중율이 99.9 %이다. 그래서 탱크는 조우전에서 먼저 보는 전차가 승리한다. 가장 겁을 내는 것은 전투기의 네이팜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