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동 이야기

서울커뮤니타스 순례 2023.10.29 (토)

장충단은 조선의 현충원이었다,

2023년 2월 19일 장충단 남산골 코스를 개발하고, 참여연대 서울커뮤니타스의 2차 답사로 선정되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조선 현충원이었던 자리를 보면서 항일 독립전쟁에 대한 외교적 접근을 해온 여러 시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후 한국 자본권력과 공적권력과 유착 관계를 우리는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최초 국립현충원 장충단과 최초 재벌 집성촌

장충단은 남소영터로 고종이 직접 무명용사와 애국지사들을 위해 조선 최초 국립현충원으로 그 위상을 갖고있었다. 일본은 식민지화하며 장충단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유곽시설을 만들었고 해방 이후 권력자들의 집성촌이 되어 한국 현대사를 왜곡시킨 역(逆 거스를 역)해방구였다.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을미사변 · 임오군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 · 열사를 제사지내던 제단. 공원.)


헤이그 특사 사건

헤이그 특사 사건(海牙特使事件, 문화어: 헤그 밀사 사건)은 1907년 고종이 당시 개신교감리교회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특사로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관 이위종과 이들을 도울 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였던 사건이다.  

고종은 표면상으로 헐버트를 파견한것처럼 보이게 위장 했기에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이상설의 경우 사전에 망명을 가서 이를 준비했다고 한다. 헐버트는 프랑스와 러시아에 조선의 참여를 타진했지만 오히려 헐버트의 활동을 서구 제국주의 국가는 일본에 알렸다고 한다.

1907년 고종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 하고자했다. 헤이그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을사늑약이 불평등 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러시아는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이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당시 자유언론운동 문화가 있던 유럽에서 기자들의 취재로 그들의 목소리가 여론으로 형성되었다. 그중 윌리엄 스테드 에 의해 단독인터뷰(한국인의 호소)가 있었다.  (을사조약은 기존 국제조약과 충돌되어 을사조약은 무효다 라고 인터뷰하고 연설 -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 거증조항(상대국에 문제 발생시 상대국을 적극적으로 돕기로함) 을 미국 루즈벨트를 만나려고 하게 함 -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 가스라태프트 밀약 체결)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죽고난후 이상설, 이위종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등 유럽 각지를 돌며, 독립여론 형성을 위해 뛰었다. 이로인해 이토히로부미는 고종 퇴위 및 순종 즉위를 시키고,궐석재판에서 이상설 사형, 이위종,이준에 무기징역을 선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상설은 미국으로 넘어가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조미수호조약 책임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1년동안 미국에 있는 교포를 대상으로 독립군 기지화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국 안창호와 연관된 공립협회가 주축이 되었고, 공립협회의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척살하려 했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연해주로 이동해서 최재형, 이범윤의 의병활동을 지원하면서 , 이범윤쪽에서 활동한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척살 했다. 또한, 이상설은 연해주 일대에서 최초의 독립군정부를 결성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군대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일본 눈치보던 러시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리고, 함께 이상설을 따라 프랑스·영국·미국을 순방한 다음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위종은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군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 로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국제사회 질서를 정하는 회의에서 독립을 외치다

페치카 난로

MazM: 페치카 / MazM: 페치카

평가:

9

11640


출시 연도:

2020

유형:

혼합 장르 중편소설

플랫폼:

안드로이드, iOS

지속:

10~30시간

장르:

드라마, 공포, 모험

작가:

MazM/씨앗 재배

언어:

러시아인

태그:

외국인 개발자 , 1인칭 내레이션 , 주인공 남자 , 난로

추가된 날짜:

2021년 12월 2일 02:45

마지막 업데이트 날짜:

2021년 12월 2일 02:45




국제전쟁의 규칙을 법으로 정하는 만국평화회의 2차(1907)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또는 헤이그 회담(Hague Conventions)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이다. 

네덜란드는 17, 18세기에 해양 진출이 활발해져서 신흥 해양강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때에,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로티우스를 배출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 평화 회담이 열리게 된다.

1899년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채택된 《육상전 법규와 관례에 대한 조약》(Convention respecting the Laws and Customs of War on Land)과 여기에 《육상전 법규와 관례에 대한 규칙》이 더해졌다.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개정되어 오늘 날에 이르고 있으며, 《헤이그 육상전 협정》, 《헤이그 육상전 법규》 등으로도 불린다. 교전자의 정의와 선전포고, 전투원, 비전투원의 정의, 포로, 부상병의 취급, 사용해서는 안될 전술, 항복, 휴전 등이 규정되어 있지만, 현재는 각 분야에서 보다 세부적인 다른 조약에 그 역할을 양보한 것도 많다.

일본에서도 1911년 11월 6일 비준되었고, 1912년 1월 13일에 《육전 법규 관례에 관한 조약》으로 공포되었다. 다른 국제 조약뿐만 아니라 이 조약이 직접 비준국의 군사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협약 비준국이 제정한 법률에 따라 규제되었다. 3차 회담은 1914년에 열리기로 되었지만, 1915년으로 재조정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1차세계대전 종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 회의 (1919.1~1923.7)

파리 강화 회의(영어: Paris Peace Conference)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이 패배한 동맹국에 관련하여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린 회담이었다.32개국에서 온 정치가들과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연맹 창립과 같은 중요 결정을 비롯하여 패배한 5개국과의 조약 체결,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해외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위임통치하는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수립, 독일에 대한 보복, 그리고 민족경계를 반영한 국경 재수립 등이 이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주요 결과는 1919년 6월 28일에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체결이었다.[3] 조약의 제231조에 따르면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성이 전쟁에 대한 죄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시야는 독일에게 굴욕감을 주고, 독일에 대한 광범위한 보복조치에 대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회담을 통제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가 회의를 주도했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145회 이상 만나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고, 이후 다른 사람들이 이를 승인했다.[4] 회담은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었고, 마이클 네이베르크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공식적인 평화 과정은 로잔 조약이 체결되던 1923년 7월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5]




길위의 인문학 서울커뮤니타스 순례 이야기 2-장충동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제 강점기 3.1혁명시기 파리강화회의에 유학자들의 독립청원서를 모아서 제출한 사건으로 유학자들의 선비정신으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 사건이었다. 이후 군자금을 모으려 국내에 돌아 왔지만 냉담한 분위기를 알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김구와 함꼐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의거를 진행했다. 이후 독립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었고, 일제의 옥살이를 하면서 고문에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창시개명도 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해방후에는 이승만의 독재에도 항거하면서, 성균관대학교를 건립했다. 전쟁중에는 북한으로 전향도 거부했으며, 전쟁중 이승만을 비판하고 이승만의 정치깡패에게 당하기도 하고, 투옥당하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아온 박정희에 대해서도 외면하는등 죽는 순간까지 모든 삶을 투쟁속에 살아온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 였다.

외국의 군대가 철수하지 않으면 우리 한국엔 평화가 없으리라.
아아, 슬프다 일성과 승만 같은겨레요 형제간이로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승만 시대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1958) ,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1959),  김구, 이준, 안중근기념사업회, 김구살해 진상규명위원회등.  1962년 84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의 삶은 독립전쟁부터 반독재 민주화, 외국군대의 철수와 자주화, 통일운동등 뚜렸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 우리시대 역사적 사명과 과제까지 우리가 추구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영원한 선비

이승만과 대척

군부독재 불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