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이야기

서울커뮤니타스 순례 2023.11.18 (토)

명동 역사성

명동이라는 공간은 일제강점기 중심지역이었다. 그래서 보통 중앙이라는 지역명으로 표기하였고 오늘날에도 그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가 중앙우체국 건물이라고 하는 중앙은 그런 의미이고 혼마치라는 일제강점기 중심가로를 의미하기도 했다.  명동을 중심으로 돈이 모이다 보니 그곳에 식민지를 수탈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고, 북쪽 창고 북창동과 남쪽 창고 남창동을 두고 있었다. 명동은 저항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가 있었고,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에서 예배를 보려는 이완용을 척살을 하려던 곳도 있다. 

무엇보다 명동은 제주4.3의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단이 주류였던 영락교회와 이화여대 출신 미군정 통역하는 사교클럽인 낙랑클럽의 김활란과 같은 사람이 중심이된 금란교회가 주축이었고, 이들은 미군정의 지지를 받아 좋은 명동땅을 차지할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많은 부를 쌓을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청계피복에서 사업장을 가지고 봉재공장을 운영했다. 젊은 소녀를 환풍기 없는 방에서 잠을 자지 못하는 주사를 놓고 밤새도록 노동을 시키고 소모품처럼 써온 사업주들도 이곳 출신이 많다. 전태일은 이러한 사업주들의 굴레에서 어린여공을 구하고자 사업계획을 세웠지만 그꿈을 이루지 못하고 쓸모없던 노동법전과 함께 자신을 태웠다. 그리고 그는 명동 성모병원에서 숨을 거두웠다.

명동은 문인들의 아지트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활동하던 대표적 문인으로 이상, 박인환, 공초 오상순선생, 그리고 명동의 돈키호테 시인 김관식과 신경림과 같은 포용성이 있는 시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모윤숙과 같은 친일 시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 시인들이 머무르는 공간을 제공하는 메세나 기업과 같은 동방살롱이 있었고, 언제난 외상값을 마다하지 않고 무료로 김치안주를 제공하는 최불암선생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주점이 있었다.  또한, 명동에는 청년 문화와 음악이 시작되기도 했다. 청개구리와 같은 포크송 모임이 나타나며, 양희은, 김민기, 등 대학생 싱어송라이터 들이 나타나면서, 노찾사 등으로 이어졌다.

서울커뮤니타스 - 명동을 만나다

강북에서 만나는 명동 문화예술인

박경리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현 통영시 문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금이'로,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45년 진주공립고등여학교를,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불행한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박경리의 부모도 어린 나이에집안 어른들이 정해준대로 결혼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다. 박경리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때때로 어머니의 강요로 아버지 집에 가서 경제적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에 대한 분노는 그녀를 극단적인 고독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다 보니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고 한다.

박경리의 문학 활동은 김동리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김동리의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되었고, 박경리의 작품은 '현대문학' 지에 추천되어 등단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불신시대'와 '김약국의 딸들' 등으로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토지'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69년 그녀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써냈다. 사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일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집필에만 몰두했으며, 1부를 쓰던 중 암 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 장편 소설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토지를 집필하던 중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딸이 결혼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15일 밤 9시 40분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는데, 김훈의 수필 중에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제목으로, 김지하 시인이 풀려났던 그날 추운 겨울 바람 속에 생후 10개월 된 손자를 업고 나와 택시를 대절해 놓고 사위를 기다리던 박경리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글로 담아낸 소품이 있다. 하지만 김지하는 교도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 온 차를 타고 가버려 길이 엇갈렸다고. 김지하가 석방된 2월 15일은 백기완 시인도 함께 석방되었는데, 교도소에서 백기완이 6년 전에 국민투표 법 위반으로 벌금 10만원 형을 선고 받은 전과가 있는데 그걸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고 하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금 모금을 하는 와중에 교도소 정문 앞 광장까지 와서 만원 짜리 몇 장을 꺼내서 옆에 있던 대학생에게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라며 준 다음 대절해온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쓴 이 소설은 광범위한 역사적 배경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박경리는 2008년에 서울 아산병원에서 별세했으며, 대중과 문학계에서 큰 애도를 받았다.


박경리는 1965년부터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해서 토지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는데, 그 때 박경리가 살던 집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그 집이 택지 개발지에 들어가게 되자 1998년 흥업면 매지리의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미래캠퍼스 내의 청송관(인문예술대학 건물) 옆에는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청송관 내부에는 북카페 토지라는 공간이 생겼다. 북카페 안에는 박경리의 유품 일부도 전시되어 있다.

공초 오상순

오상순(吳相淳, 1894년 8월 9일 ~ 1963년 6월 3일)은 대한민국시인, 수필가이다.공초 오상순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본 도시샤(同志社)대에서 공부했고, 1920년 황석우, 남궁벽, 변영로, 염상섭 등과 문학 동인 '폐허'에 참여했습니다. 한때 보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선불교에 심취해 방랑객으로 전국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공초라는 호는 이 무렵부터 사용했습니다.  

해방 이후 그는 변영로, 박종화, 양주동, 이헌구와 민족 계열의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했습니다. 6·25전쟁으로 모든 것이 다 불타고 무너지고 부서졌을 때 그는 다시 선인(仙人)의 모습으로 서울 명동에 나타났습니다. 

오상순의 ‘청동다방 시대’라고 해도 좋습니다. 당시 명동은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연극인이 모여들었고 동방싸롱, 갈채, 청동다방은 가난한 문학예술인들의 근거지가 됐습니다. 한국 문학예술의 ‘살롱시대’가 바로 명동에서 펼쳐졌습니다. 

공초는 매일같이 청동다방에 들러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터줏대감처럼 머물렀던 공초는 다방을 찾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내밀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게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취미 삼아 모은 청동다방의 '낙서첩(落書帖)’은 그대로 한 시대의 귀중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살아 생전에 시집 한 권도 내지 않고 초연했던 그가 청동다방의 낙서첩에 그렇게 열을 올렸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명동의 청동다방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청동문학(후에 청동산맥으로 개칭)'이라는 낙서첩에 한두 개의 글 구절을 남겼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시인 공초의 이 새로운 작업은 십년의 세월 동안 무려 195권의 '청동산맥'을 이루었습니다. 

공초의 청동산맥은 해외 문단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분량도 방대하고 그 내용도 다채롭습니다. ​


오상순의 작품 세계와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허무를 극복하고 현실에서 해탈한 도인에 가깝다. 죽음의 번민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오상순의 진면목을 확인할수 있다. 

EBS드라마 명동백작에서 공초 오상순은 청동다방에서 많은 문인들의 좌장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본다.

그 스스로 담배에 관해 언급한 글도 여러편 있을 정도. 그에게 담배는 곧 문학이었던 셈이다. 전쟁이 끝난뒤 1954년께부터 그는 늘 파이프를 물고 명동의 청동다방에 나타났다. 생전에 시집한권 내지 않은 그가 남긴 유일한 문학집이 바로 청동다방에서 만든 「청동문학집」이다. 공초가 다방을 찾는 손님들에게 노트를 내밀어 사인과 함께 아무글이나 쓰도록 한 일종의 사인북. 이 사인북에는 박종화·변영로·조지훈·이은상·김소운·구상·이원섭·이근배·펄벅 여사 등 국내외 문인에서부터 나이어린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수백명의 시와 단상등이 적혀있다. 또 남아있는 편지들의 수신처가 모두 명동의 다방들로 쓰여 있어 그의 명동시대를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해방직후부터 공초를 따랐던 이원섭시인은 『청동다방에는 문학지망 소년·소녀, 사업가, 정치가, 협객등 연령, 직업, 신분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며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고 등을 도닥거려준 공초의 훈훈한 인품에 반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63년 6월3일 작고하기까지 10여년간 「누구라도」 다방에 찾아와 끄적인 청동문집은 모두 195권. 이 가운데 46권이 건국대에 소장돼 있고 수십여권은 동료문인들이 나눠 소장중이다.


1963년 6월 3일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향년이 70세였다.

이라 하면 수주(변영로)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 하면 공초(오상순)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라는 유행어가 한때 1950년대 중반에 서울 항간에서 난무했는데 이는 당시 시인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가 알아주는 애주가였고 시인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이 알아주는 애연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