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산촌전시
광화문, 종로, 인사동, 명동 등은 서울의 근 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곳이다. 비록 우리가 바쁜일상이지만 서울내 역사성을 알아가는 일은 우리가 현재를 의식이 있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의식없는 노예가 될 것 인가 아니면 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누구인지 자각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인사동 산촌 전시는 그동안 길위의 인문학을 전체를 돌아보고 우리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돌아보는 전시회라고 할수 있다.
전시기간 촬영영상
갤러리산촌 전시기간 93 세 피아니스트 연주가 있었는데 이분에 대해 방송취재에 전시회공간이 나옵니다.
전시기획 목적
우리가 사는 공간속 기억을 되살려서 역사 의식과 시대정신을 일깨우고 이를 통해 인문학적 삶을 사는 시민 공동체를 이루고자 합니다.
전시주제
지난 2년간 함께 길을 걸으며 그 장소속에 숨겨진 역사적 맥락을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길을 걸으며 잘 알려지지 않고 잊혀진 인물들과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또한, 길위의 인문학이라는 본질처럼 우리가 길을 걸으며 알게된 역사와 인문학 관점에서 아직 한국사회가 도달하지 못한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고자 했다
일시 : 따뜻한 봄날 (2024.4.5 ~ 4.13 AM 11:00 ~ PM 10:00)
전시특징
전시기획 측면에서 15분은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집단지성의 시간개념이고 25는 태양의 서커스 빅탑 공연장의 최적 관람거리는 25미터를 넘지 않게 한다는 현장 집단소통의 공간개념 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세분의 초대작가 전시와 함께 길위의인문학 1.435 전시를 합니다. 길위의 인문학은 사진과 영상을 전시 하되.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이 매우 일상적 폼보드 재료와 함께 시위 및 집회 컨셉을 넣고자 합니다. 시민 누구나 예술을 창조하는 삶에 다가설수 있음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시회 자체만이 아닌 QR 코드로 길위의 인문학이 걸어온 과정을 이해할수 있도록 하고 스스로 장소를 찾아 갈수 있도록 안내를 해 놓았습니다. 또한, 전시기간 중간중간 세미나를 통해 참여하는 공론장으로 전시회를 추진합니다.
2024년 4월 9일 강좌(68혁명과 포스트모던 ) - 김철회
권용택 작가, 이향재 작가 (갤러리 2층)
권용택 작가와 이향재 작가는 부부 작가이다
권용택 작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동인 ‘새벽’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민중미술과 사실적인 화풍의 작품을 선 보여왔다. 현재는 ‘생태주의 미술’에 천착하여 자연을 캔버스의 중심에 두고 있다.
이향재 화가는 1992년 수원환경미술전을 시작으로 환경과 생태 미술 작업을 이어왔다. 평창문화예술재단의 찾아 가는 미술지원사업 일환으로 ‘이향재 전, 우연히 마주치는 미술’에 참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중이다. 최근 개막한 ‘강 원키즈트리엔날레2023’ 전시 코디네이터로도 참여했다.
김영란 작가 (갤러리 별실)
김영란은 한국에 자생하는 꽃을 통해 얻어낸 따뜻한 서정성과 은유를 화폭위에 35년여 수채화로 그려내고 있다. 꽃뒤의 배경은 경험하고 사색했던 지난 시간과 한국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다
개인전 33회 / 초대전및 그룹전 400여회 / 대한민국 미술대전및 각종 공모전 10여회 심사
현: 한국미협 수채화분과 이사
박상희 작가 (갤러리 1층)
박상희ㅡPark sanghee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FRANCE Paris에서 수 년간 작업하고 귀국. 금호미술관, 아트사이드, 블루스퀘어 복합문화공간 NEMO(한남동 삼성전자홀)프랑스 문화원, 서울과 프랑스,러시아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하였다.
2023년 공감Empathy, 한일작가전 CAAG갤러리 등 250여회의 그룹전을 하였다.
오래전부터 신과 인간, 종교와 우상, 그 갈등과 충돌 사이의 부조리와 존재에 대한 의문을 입체와 사진과 그림 등의 다양한 형상으로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해인사 와불과 시인 천상병 동상 및 시비 등을 제작하였으며 서울대학교.중앙대학교 대학원등에서 강의하였다.
현대공간회 회장 등 역임. 현재 서울-Paris 소나무회 회원이며 강화도에서 작업하고 있다.
걸어가며 역사를 만나다 <Walk and encounter history>
길위의 인문학으로 전시회는 2022년 부터 2023년 까지 17회 이상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2022년 서대문 형무소를 시작으로 지승룡 도시문화연구소장님의 해설을 통해 명동, 충무로등 많은 곳을 다니며 그곳에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여러 행사를 하면서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역사와 인문학, 그리고 예술이 만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길을 걷고 차를 마셨을 뿐인데 어쩌면 서울이 프랑스의 르 프로코프’(Le Procope) 처럼 많은 대중과 지식인이 모이는 공론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이란 공간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과거 서울이란 공간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 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알아 가는 과정을 통해 인문학적 통찰을 얻게 됩니다.
The exhibition, Humanities on the Road, contains stories about the road walked more than 17 times from 2022 to 2023. Starting with Seodaemun Prison in 2022, we traveled to many places such as Myeongdong and Chungmuro to discover the hidden history there through commentary by Ji Seung-ryong(Director of the Urban Culture Research Institute). Sometimes, as we walked down the street together and participated in various events, it became a space where history, humanities, and Art met. By simply walking down the street and drinking tea, Seoul has become a public forum where many people and intellectuals gather, like Le Procope in France. Modern people who live busy lives in Seoul are indifferent to the past history. Through the process of learning about past and present history while walking along the road, we gain humanistic insights.
길위의 인문학 교실 1.435 <Humanities Classroom on the Road 1.435>
1.435는 열차 바퀴폭이기도 하며 말의 엉덩이 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1.435가 상징하는 폭은 사람들만 다닐수 있는 좁은 골목길 입니다. 이런 골목길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겨져 있습니다. 충무로 골목길을 다니면서 과거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허름한 생가터를 마주하게 됩니다. 또한, 종각근처에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했던 장소가 있습니다. 그가 어린시절 지낸 충무로 지역은 조선시대 통역관으로 외국과 교류가 많고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남인들의 마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길을 걸으면서 이순신 장군처럼 권력중심 주류에 있지 못했지만 역사속 중요한 역할을 해온 영웅들의 배경을 알고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간 역사에서 배우게 되는 인문학이고 그들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책이 아닌 길위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435 is also the width of a train wheel and comes from the width of a horse's rump. In other words, the width symbolized by 1.435 is a narrow alley where only people can pass. There are many people's stories left in these alleys. While walking through the alleys of Chungmuro, you will come across the shabby birthplace of Admiral Lee Sun-sin from the Joseon Dynasty. Also, near Jonggak, there is a place of declaration where General Lee Sun-sin participation in war with a no military rank. We learn that the Chungmuro area, where he lived as a child, is a village of realistic and progressive southerners group who had a lot of exchanges with foreign countries as an interpreter during the Joseon Dynasty. As you walk along alleyways in seoul, you will learn about the background and understand the lives of heroes like General Lee Sun-sin, who were not in the mainstream of power bu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history. This is the humanities that we learn from spatial history, and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them, we need to remember the history on the road, not in books.
대한제국 근대화 문명을 열다 < Opening of the Korean Empire’s modernization civilization >
명동을 다니다보면 한국전력 관계된 건물이 많고 광화문에는 케이티(구 한국통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대한제국 시대부터 도입된 한성전보총국이 있었고, 한성전기회사가 이미 설립되었습니다. 한성전보총국이 있었기에 김창수(백범 김구)선생님이 일본군 장교를 살해고 사형당할 뻔한 사항에서 고종의 전화로서 사형을 멈출수 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에디슨이 전구회사를 만들고 10년도 안되어 대한제국에 도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 된것이 아닌 조선 스스로 노력이 있었습니다.
If you walk around Myeong-dong, there are many buildings related to Korea Electric Power Corporation (KEPCO), and in Gwanghwamun, there is KT (Korea Telecom). In this background, there was the Hanseong Telegraph Bureau, which had been introduced since the Korean Empire, and the Hanseong Electric Company had already been established. There is anecdote about presence of the Hanseong Telegraph Bureau. which Dear Kim Chang-soo (Baekbeom Kim Gu) was almost executed for killing a Japanese military officer and could stop execution by a phone call from King Gojong's stop excution message. Less than 10 years after Edison created the light bulb company, it was introduced to the Korean Empire. Therefore, Joseon did not modernize by Japanese colonial period, but its own efforts.
경성의 레지스탕스 < Gyeongseong Resistance>
일제식민지가 진행되면서 '레지스탕스'(저항세력) 대 ‘콜라보’(사익추구세력·친일부역세력)로 나뉘어졌고 경성 레지스탕스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명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나석주의사 와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척살하려던 이재명 의사의 의거터인 명동 성당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상옥의사는 효제동 74번지에는 일본경찰과 일대천으로 싸움을 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또한, 강우규의사는 고령에도 새로 부임한 총독을 폭살하기 위해 의거를 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경성 레지스탕스들을 삶과 투쟁을 기억 합니다.
As Japanese colonialism progressed, it was divided into 'Resistance' (resistance forces) and 'Collaboration' (self-interest-seeking forces, pro-Japanese forces), and the Gyeongseong Resistance met their end in Seodaemun Prison. You will come across the Myeongdong Cathedral, the site of the assassination of Dear Lee Jae-myeong, who tried to kill traitors like Lee Wan-yong, who sold out the country, along with Dear, Na Seok-ju, who committed suicide by throwing bombs at the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in Myeong-do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Dear. Kim Sang-ok met his end after a fierce fight 1:1000 with the Japanese police at 74 Hyoje-dong. In addition, Dear Kang Woo-gyu took action to assassinate the newly appointed Governor-General from Japan even in old ages. As we walk along the road, we remember the lives and struggles of the Gyeongseong Resistance.
해방공간을 열다 <open a space for liberation >
명동이 교류의 공간이었다면 종로 지역에는 독립 운동과 해방을 맞이하여 변화 열망이 들끓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YMCA와 승동교회, 대각사, 천도교 가 모인곳은 3.1혁명을 준비하고 실행해온 본산지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하고 이를 보도하는 여운형 선생의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사건은 매우 유명한 사건입니다. 종로에는 이를 주도했던 여운형 선생의 조선중앙일보 건물도 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일제 패망을 예상하고 해방에 대한 준비를 위해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해방의 순간까지 노력해온 지식인들의 삶을 만날수 있습니다.
If Myeong-dong was a space of exchange, the Jongno area was also a space where the desire for change was seething in the wak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liberation. The place where the YMCA, Seungdong Church, Daegaksa Temple, and Cheondogyo Church gathered can be said to be the headquarters where the March 1st Revolution was prepared and implemented. It is a very famous incident tha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on Ki-jeong won the marathon at the Berlin Olympics and Yeo Un-hyeong's Chosun JoongAng Ilbo erased the Japanese flag and reported on it. In Jongno, there is also the building of Chosun JoongAng Ilbo, led by Yeo Woon-hyeong, who led the effort. Yeo Woon-hyung predicted Japan's defeat and created a National Foundation Preparation Committee to prepare for liberation. We can meet the lives of intellectuals who have constantly worked hard to reach the moment of liberation in the space called Seoul.
비극적 경계인으로서 지식인들 < Intellectuals on the Tragic borderline >
한국사회는 왜 지식인들이 없는 것일까요? 지식인들의 생각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남과 북 어디에도 지식인의 생각의 자유는 없습니다. 3.1 혁명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독립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3.1혁명에 영향 받은 지식인들은 더 이상 식민지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를 받아 들이려 했고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래된 우리 전통문화를 연구하기도 했고, 시대를 이야기 하는 음악인이고 시인이며 사상가 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해온 해방은 그들의 바램과 달리 냉전 이데올로기 갈등은 극심화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지식인들은 남한에서도 살수 없었고, 월북한 이후 북한에서도 숙청당하고 철저하게 외면 받았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는 사상의 자유를 꿈꿨겠지만 그들의 현실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외면당했던 비극적 경계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사회 지식인들에게는 생각의 자유가 다른방식으로 통제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Why are there no intellectuals in Korean society? The freedom of thought of intellectuals is important, but there is no freedom of thought for intellectuals in either the South or the North Korea. The March 1st Revolution aroused the passion for independence in many intellectuals. The intellectuals who were influenced by the March 1st Revolution were no longer the intellectuals accustomed to the colony. They tried to accept new ideological trends at the time and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y also studied our old korean traditional culture and were musicians, poets, and thinkers who spoke about the times. However, contrary to their wishes, the liberation they had been anticipating, the Cold War ideological conflict intensified. Because of this, intellectuals were unable to survive in South Korea, and after defecting to North Korea, they were purged and completely shunned in North Korea as well. They may have dreamed of freedom of thought in their liberated homeland, but their reality was that they were tragic marginals who were ignored by both South and North Korea. Even today, freedom of thought may still be controlled in different ways among intellectuals in our society.
문학인들의 공간 < A space for literary people >
명동, 종로, 혜화동에서 우리시대 문학인 역사를 보여줍니다. 해방후 친일청산이 안되고 이들이 혜택을 받은 곳이 명동지역이었고, 이들이 자본을 형성하면서 한국사회 금융, 부동산 경제 원형이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명동은 해방전후시대 지식인과 문학인들이 활동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여러 살롱문화가 있었습니다. 동방살롱, 문예살롱과 함께, 은성, 모나리자 등 많은 문화인들의 만남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종로에는 박인환의 마리서사 라는 서점이 있었고 혜화동에는 전혜린이 다니던 학림 다방이 있습니다. 명동에는 박인환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지난후 돈을 많이 벌었던 김동근 선생은 사회에 기어하는 마음으로 문학인들을 위한 공간인 동방살롱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명동이 상업화가 극대화 되면서 문학인들은 삼양동, 우이동, 정릉 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It shows the history of literature of our time in Myeong-dong, Jongno, and Hyehwa-dong. After liberation, the collaborator of Japanese imperialism were not liquidated and the area where they benefited was the Myeong-dong area, and as they formed capital, it is also where the prototype of Korean society's finance and real estate economy was born. Additionally, Myeong-dong was a place where intellectuals and literary figures were active before and after liberation. So, there were many tea salon cultures here. Along with the Oriental Salon and the Literary Salon, it was also a meeting place for many cultural figures, including Eunseong and Mona-Lisa. In Jongno, there was a bookstore called Park In-hwan Mari-Seosa, and in Hyehwa-dong, there was Hakrim Coffee Shop, where Jeon Hye-rin used to go. The stories of poets Park In-hwan and Kim Su-young are famous in Myeong-dong. And after the war, Mr. Kim Dong-geun, who made a lot of money, created the Dongbang Salon, a space for literary people, with a heart to serve society. but, as Myeong-dong became more commercialized, literary figures moved to Samyang-dong, Ui-dong, and Jeongneung.
장소 : 인사동 산촌 갤러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30-13 산촌 모나리자 갤러리
행사일정 : 전시기간 행사 일정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