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이야기
굴궐의 서쪽인 서촌은 현재 행정동으로 청운효자동과 사직동에 이르는 동이다. 이중 우리는 효자동과 체부동을 이야기한다.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청운효자동
경복궁을 포함한 효자동과 통인동등을 포함한 궁 위쪽
사직동
사직단을 포함한 경복둥 아래쪽을 사직동이라고 함
청운효자동 역사 및 인물
청운동
정철 집터: 조선 중기의 문신 송강 정철의 집터이다. 청운동 12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청운초등학교 앞에 표지석이 있다.
정선 생가 터: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집터로, 인왕제색도의 풍경이 여기서 그려졌다. 52세까지 거주하였다.[11]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표지석이 있다.
백운장(白雲莊) 터: 조선 말기의 문신 김가진의 집터에 1915년 일본인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지은 요정으로, 개업 당시 명칭은 청향원(淸香園)이었으나 1929년에 이름을 바꾸었다.[12] 1962년 9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에서 이 일대를 구입하여 지금은 포교원이 들어섰다.[13]
운강대(雲江臺) 터: 조선 중기의 문신 조원(趙瑗)의 집터이다.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
청송당(聽松堂) 터: 조선 초기의 문신 성수침의 집터이다. 청운동 89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기상업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14]
백세청풍(百世淸風)·대명일월(大明日月) 각자: 송시열이 썼다고 전해지며, 청운동 52-58번지에 위치한다. ‘대명일월’ 각자는 현재 소실되었다.
무릉폭(武陵瀑)·도화동천(桃花洞天) 각자: 청운동 1-1번지에 위치한다.[15]
신교동
선희궁(宣禧宮) 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사묘인 선희궁이 위치하던 터로, 선희궁은 1908년에 현재의 칠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신교동 1-1번지에 위치한다.
후천(后泉)·감류천(甘流泉) 각자: ‘후천’ 각자는 ‘선희궁 뒤편의 샘’ 또는 ‘왕후의 샘’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감류천’ 각자는 선희궁 뒤 산기슭에서 흘러나오던 샘물의 이름으로 보인다.[16]
궁정동·세종로
조선의 정궁으로 태조 이성계가 지어 임진왜란때 불탄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240여동의 건물이 훼손되거나 경매되었다. 현재 경복궁 복원 사업을 실시하는 중이다. 세종대로에 위치한다.
칠궁: 조선의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궁정동 1-1번지에 위치한다. 육상궁,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다. 이 중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신 곳으로,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청와대 안가 터: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기도 하였던 안가가 위치하던 곳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개장하였으며, 궁정동 55-3번지에 소재한다.
낙송루(洛誦樓)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흡이 1682년 지은 건물이 있던 터로, 현재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였다.[17]
백악신사(白嶽神祠) 터: 1395년에 백악산신(白岳山神)을 모신 사당을 현 북악산의 정상부에 설치하였다.
대은암(大隱岩)
세심대(洗心臺)
악록(岳麓)·쌍계동(雙溪洞) 각자: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며, 하나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악록’ 각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창흡의 집터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17]
명옥천(鳴玉泉) 각자: 청와대 내부에 위치한다.
성암(醒巖) 각자: 청와대 내부에 위치한다.
이쾌대 집터: 화가 이쾌대가 1939년 초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정착한 한옥으로, 궁정동 16-3번지에 위치하였는데, 1990년대 초 도로 개설로 철거되었다.[21]
효자동
쌍홍문(雙紅門) 터: 효성이 지극한 조원을 기려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던 터이다. 효자동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신익희 가옥: 신익희가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 숨질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효자동 164-2번지에 소재한다.[22] 서울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창성동
사재감(司宰監) 터: 왕실의 어류, 육류, 소금, 땔나무, 횃불 등의 일을 맡던 기관으로, 창성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체신관리양성소(遞信管理養成所) 터: 일제강점기에 통신 요원을 양성하던 기관으로, 창성동 117번지에 위치하였다.
진명여자고등학교 터: 고종 황제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재산을 기반으로 엄준원이 세운 학교로, 창성동 67번지에서 1989년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통인동
세종대왕 탄생지: 통인동 119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참여연대 (현 참여연대는 세종대왕 집터로 추정)
내시부(內侍府) 터: 왕실의 식사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문(守門)과 수직(守直), 청소 등을 맡던 기관으로, 통인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누상동
백호정(白虎亭) 터: 조선 시대 한양의 다섯 활터 가운데 하나로, 지금은 각자만이 누상동 27-12번지에 남아있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윤동주 하숙집 터: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져 윤동주는 1941년 5월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하였다.[23] 누상동 9번지에 있었던 집은 2000년 전후에 헐려 현재 3층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다.[24]
누하동
옥인동
육청헌(六靑軒)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항의 집으로, 1683년에 지었다.[25][26] 옥인동 47-73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27]
청휘각(淸暉閣) 터: 육청헌 마당에 있던 누각으로, 1686년에 지었다.[28] 청휘각을 짓고 30년 가량이 지나자 기울어져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업이 새로 지었고, 이후 김수근·김병국·김병교·김학진이 차례로 물려받았다가 민규호에게 넘어갔다.[29]
가재우물(稼齋-) 터: 청휘각 뒤에 있던 우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가재 김창업이 그 물을 마셨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29] 옥인동 47-376번지에 소재하나, 콘크리트에 뒤덮인 상태이다.[30]
송석원(松石園) 터: 조선 후기의 시인 천수경이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지은 집으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결성되어 일대의 여러 여항시인들이 참여하였다.[31]
벽수산장(碧樹山莊) 터: 윤덕영이 1910년 12월에 송석원 터를 사들여 1937년 준공한 대저택이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만 해도 ‘송석원’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벽수산장으로 이름이 변하였다. 1966년 4월 5일 전소되었고, 1973년 6월 철거되었다. 지금도 옥인동 47-27, 47-33번지에 대문 기둥 가운데 3개가 남아 있다.
박노수 가옥: 윤덕영이 지어 해방 이후 박노수가 거주하던 곳으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옥인동 168-2번지에 위치한다.
옥인동 서용택 가(玉仁洞 徐龍澤 家): 옥인동 47-133번지에 소재하는 한옥으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으나 해제되었다.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이었다.
인곡유거(仁谷幽居) 터: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52세부터 생을 마감하던 84세까지 살던 집으로, 옥인동 20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11]
북학(北學) 터: 옥인동 45번지에 위치하였다.
이여성 집터: 옥인동 56번지에 있던 이쾌대의 형 이여성의 집터로, 1938년에 이사를 온 2층 양옥이다.[21] 1940년대 초, 이화여전 학생들이 이여성의 고증으로 재현된 삼국의 옷을 입고 패션쇼를 한 곳이 이곳 2층 베란다였다.[33]
옥류동(玉流洞) 각자: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해지는 각자로, 1950년대에 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가 2019년에 다시 발견되었다.[34] 옥인동 47-360번지(필운대로9가길 44-5)에 있다.
이여성 (이여성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화가, 정치가, 언론인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명건이다.)
현엘리스( 현앨리스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맏딸로, 1903년 하와이에서 출생한 첫 번째 한국 아이다. 한국 이름은 현미옥이다. 사회주의 계열 비극적 경계인으로 남과북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노천명 가옥 ( 일제강점기 시인으로 친일반민족주의자로서 이화여대 출신 시인이자 낙랑클럽 출신으로 해방후 한반도 분단에 일조했다)
사직동 과 조선 지명
통의동
보안여관 : 1930년대에 개업하여 2006년 폐업한 여관으로, 서정주·김동리·오장환·김달진 등이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기도 하였던 장소이다.[11] 통의동 2-1에 소재한 그 건물은 효자로에 접하는 일본식 건축물인데, 독특하게도 건물 정면은 벽돌로 벽을 세워 전면의 삼면을 둘러 일반적인 벽돌집처럼 보이게 건축되었다.[12]
적선동
체부동
필운동
배화여자고등학교 생활관 : 서양식의 붉은 벽돌벽 및 기둥과 한국식의 기와 지붕이 혼합된 특이한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가 1971년부터 배화여고의 건물로 쓰인다.[14]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
홍건익 가옥 : 1930년대 중반 필운동 88-1번지에 건립된 한옥으로,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내자동
사직동
사직단 : 조선 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사적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황학정 : 고종 황제 때 경희궁 내에 세워졌던 사정(射亭)으로, 192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도정궁 터 : 덕흥대원군의 사저(私邸)이자 선조의 잠저(潛邸)였던 곳으로, 1913년 12월 4일 건물이 반 이상 소실되었다. 사직동 262번지에 위치한다.
김가진 집터
허견 집터
도렴동
도렴서 터 : 각종 염료(染料)의 제조와 염색작업을 맡던 관청으로, 도렴동 12번지에 위치하였다.
사역원 터 : 외국어 교육 기관이자 통·번역 사무와 실무를 맡던 관청으로, 도렴동 88번지에 위치하였다.
의영고 터 : 기름, 꿀, 황랍(黃蠟), 소물(素物), 후추 등을 맡던 관청으로, 도렴동 40번지에 위치하였다.
당주동
내섬시 터 : 여러 궁전(宮殿)에 대한 공상(供上),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안주, 왜인(倭人)과 여진인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포 등을 맡던 관청으로, 당주동에 위치하였다.
봉상사 터 :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맡던 관청으로, 당주동 128번지에 위치하였다.
세종로
신문로1가
신문로2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