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 22.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에서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까? 우선 어려운 도덕적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 내면에서 어떻게 도덕적 사유가 자연스레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옳은 행위에 대한 견해나 확신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근거가 되는 원칙을 찾는다. 그다음 원칙에 반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이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다.
이렇나 긴장에 직면했을 때, 옳은 행위에 대한 판단을 재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조정하기도 하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조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성의 영역에서 행동의 세계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근간을 형성한다.
2025. 07. 30.
<청춘의 독서, 유시민>에서
푸시킨의 육신은 러시아인의 피를 받았지만 정신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세례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략했다가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이 전쟁을 러시아 사람들은 '조국 전쟁'이라고 한다. 이때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를 추격하여 서유럽으로 간 한 무리의 청년 장교들이 있었다. 평민 출신 병사들과 사선을 넘나들면서 고락을 나누었고, 서유럽에서 난생처음 자유의 공기까지 마시고 돌아온 청년 장교들은 혁명적 지식인들과 함께 차르 전제정치와 농노제도를 철폐하고 러시아를 입헌군주제, 공화제 또는 연방제 국가로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를 만들었으니, 역사는 이들에게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푸시킨은 비밀결사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데카브리스트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알렉산드르 1세에 이어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한 1825년 12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1세는 낭만적 청년 장교들의 '철없는 반란'을 즉각 진압해버렸다. 120여 명의 주모자들이 재판에 넘겨져 다섯이 사형당하고 나머지는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았다. 주로 귀족 출신 청년 장교와 지식인이었던 데카브리스트는 "너무 일찍 피어난 봄꽃"이었으며 "한겨울에 날아든 제비 떼"였다. 그들은 변함없는 위세를 떨친 제정러시아의 엄혹한 정치 상황 앞에서 참혹하게 꺾이고 스러졌다. 그러나 그들의 반란은 머지않아 찾아들 혁명과 내전의 예고였다. 문명의 흐름을 거역하고 변화를 거부한 제정러시아는 결국 볼셰비키 혁명과 적백 내전의 불지옥에 던져지게 된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념, 낙후하고 퇴락한 조국 러시아를 살리겠다는 애국심, 체제를 전복하는 사업에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순진무구함, 전제 왕정과 계급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체제에 반기를 든 자기부정, 데카브리스트의 비극적 최후는 이런 요소들이 버무려진 역설의 미학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푸시킨의 문학과 삶은 그 일부였다.
2025. 06. 12.
<처음 하는 사회학 공부, 박한경>에서
저발전 상태의 사회는 인구의 극히 일부가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때 교육 기회가 확장되면 저소득층 자녀들이 문맹에서 탈출하게 되고,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 양질의 직업을 갖게 되어 소득이 높아지고, 대규모 상승 이동이 일어나 중산층이 형성된다.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교육이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에 순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측면도 있다고 여러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2025. 06. 06.
<로봇시대, 인간의 일, 구본권>에서
오스트리아 작가 에른스트 피셔는 일찍이 "기계가 점점 더 효율적이고 완전하게 될수록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된다."라고 예견한 바 있다. 불완전하고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만든 작품 또한 마찬가지로 창작자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이는 예술작품이 갖는 아우라는 그 예술적 경험이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인데, 가장 중요한 맥락은 그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인생과 의도라는 얘기다.
그래서 인간의 약점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계와 구별되는 최후의 요소다. 기계는 설계하는 대로 작동하고 우리는 사람의 결점과 단점을 벗어나기 위한 의도로 기계를 설계한다. 부정확한 인식과 판단, 감정에 의한 변덕스럽고 비합리적인 행동, 망각과 고통 같은 사람의 속성을 기계에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은 우리가 기계에 부여하지 않을, 이러한 부족함과 결핍의 존재다. 하지만 거기에 로봇 시대 우리가 가야할 사람의 길이 있다... 똑똑한 기계와 경쟁하려 하기보다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속성 그리고 그로 인한 세상의 변화를 아는 것이 먼저다.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힘은 감정과 호기심을 말한다. 기계가 따라갈 수 없는 사람만의 특성인 사랑과 호기심은 감정적 결핍과 지적 결핍에서 나온다. 감정과 호기심은 우리를 따듯하게 해주는 마법의 불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불쏘시개와 연료로 만들어버리는 치명적인 에너지라는 시인의 통찰은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은 어떻게 사람다울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2025. 05. 16.
<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에서
저 같은 생물학자에게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가 뭐냐고 물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 이게 왜 어마어마한 성공일까요? 자연계의 모든 동물을 다 모아본들 식물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입니다. 지구는 식물이 완벽하게 장악한 행성입니다. 무게로 가장 성공한 집단이 식물이고, 숫자로 가장 성공한 집단이 곤충입니다. 이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두 집단이 만나 서로 잡아 죽여서 성공한 게 아니고, 손을 잡았다는 겁니다.
2025. 05. 12.
<처음 읽는 음식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에서
거대 식품 기업이 양산한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반조리 제품이 다채로워지면서, 먹고 싶을 때면 언제나 간단히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국과 밥, 반찬 모두 편의점에서 사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자레인지로 해동하고 가열하면 음식이 완성되었다. 가족은 이제 함께 식사하기보다는 편할 때 각자 따로 식사하는 경향이 늘었다. 가족의 유대감을 유지시켜 주던 식사의 형태가 변하자 가족이라는 형식 그 자체도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와 신뢰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요리라는 공동 작업은 전자레인지로 인하여 쇠퇴하였고, 혼자 밥을 먹게 된 인간은 고립되었다. 인류가 키워온 식탁이라는 무대는 그 위상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2025. 04. 16.
<보이지 않아도 보는 것처럼, 정진균>에서
일 년에 한 번 우물 청소를 하는 날이면 나는 사다리를 타고 우물 안으로 내려갔다. 사다리를 한 단 한 단 내려갈 때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커다란 돌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는데 마치 우리 집의 모든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물물이 발에 닿을 만한 곳까지 내려오면 끈이 연결된 커다란 통을 이용하여 물을 다 퍼내고 바닥에 떨어진 찌꺼기들을 청소했다.
우물 밑바닥은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인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우물 청소를 하다가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보이며 무척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우물물은 다 퍼내어도 며칠 지나면 다시 차올랐다. 온 가족이 매일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쓰는데도 우물에는 항상 물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우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땅을 깊게 파내야 한다. 땅으로서는 우물이 상처이고 아픔이다. 그러나 우물은 상처의 가장 밑바닥에 깨어진 돌조각이나 흙먼지가 아닌 사람들을 살리는 물을 저장하고 있다.
2025. 04. 11.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 일상의 언어들-김이나의 작사법, 김이나>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선생님의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하겠다. 마침 이 곡의 뮤직비디오를 나와 여러 곡을 잡업한 황수아 감독이 연출해서 현장에도 놀러갔다. 햇볕이 꽤나 따가운, 구름이 거의 없는 날이었다. 선글라스를 써도 눈이 부신 그런 날. 여느 촬영장에서 그러듯이, 컷 사인이 나면 스태프가 달려가서 우산을 받쳐드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우산을 거부하셨다. 이미 햇볕에 눈이 익숙해졌으니 감정몰입하는 데만 집중하고 싶다고 하셨다.
또하나, 황수아 감독은 립싱크하는 부분을 촬영할 때 몇 테이크는 꼭 가수가 실제로 노래하길 원하는데, 이는 노래를 직접 불러야 목의 핏줄이나 입 모양이 생생히 잡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가수의 목 관리나 피로도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매 테이크마다 이것을 요구하진 않는다. 그게 정상이기도 하고. 그런데 선생님은 또 거부하셨다. 어차피 노래는 연습해둘수록 좋기 때문에, 이참에 연습도 충분히 하고 싶으시다는 게 이유였다. 신인가수들에게서도 쉽게 보지 못하는 노력하는 뒷모습을, 나는 조용필 선생님으로부터 보았다.
연차가 쌓여도 그 위치에 계속 머물 수 있다는 것은, 남들보다 몇 배씩은 더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 역시도 짬밥이 좀 생길수록 요령을 피우게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조용필 선생님과 함께한 뮤직비디오 현장에서의 이 에피소드들로 인해 다시 초심을 잡았다. '초심보단 요령'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아무리 경계해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사람을 파고든다. 오래 일하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2025. 04. 03.
<구의 증명, 최진영>에서
함께 걷는 밤길은 고요하고도 따뜻했다. 담이와 걸을 때도 좋았지만 우리 사이에 노마가 있으면 묘한 안정감이 더해졌다. 긴장은 잦아들고 이상하게도,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기분. 어두운 밤이 그런 우리를 감싸안는 느낌. 함게 있는 것만으로도 착해지는 것 같았다. 함께 걸으며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고 겨울에는 붕어빵을 사 먹었다.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과 밤바람에 들떠서 무엇을 사 먹을 생각도 못했다. 노마가 집에 들어가 문 잠그는 소리까지 듣고, 담을 들여보내며 내일 보자 인사하고, 집에 돌아와 대충 씻고 누우면 일어나야할 시간까지 네다섯 시간쯤 남아 있곤 했다.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
2025. 03. 27.
<이토록 찬란한 어둠, 김문정>에서
모두가 절박해서였을까? 간절해서였을까? 여러 난관을 넘으며 시작된 무대 위에서 배우와 스태프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전부 쏟아 부었다. 공연은 걱정이 무색하게 기대 이상으로 별 문제 없이 잘 흘러갔다. 제작진과 배우 모두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고 자신했던, 둘리가 고길동에게 쫓겨나 담벼락에 기댄 채 '라면 송'을 부르던 장면에서는 연주자와 배우 모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연습할 때 모두 깔깔댔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웬걸, 관객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왜지? 준비가 허술한 게 티가 났나? 누가 지적한 것도 아닌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식은 땀이 솟고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어쨌든 공연은 계속됐고, 둘리가 엄마와 재회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아이들 모두가 열광했다. 사실 그 부분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스토리와 음악에 개연성이 부족한 듯해서 바꾸고 싶었지만 원작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크게 손댈 수는 없었고, 바꿀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그대로 두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제작진으로서는 의아했지만 관객과 제작진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뜨거운 반응을 얻은 건 딱 그 공연 뿐이었다. 나머지 본 공연은 전부 제작진의 예상대로 매회 '라면 송' 장면이 가장 인기 있었고 엔딩은 좀 김이 빠졌다.
특별공연과 본 공연의 관객 반응이 달랐던 이유가 있었다. 특별공연의 관객은 보육원 친구들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길동의 집에서 쫓겨나 담벼락 아래에서 둘리와 친구들이 노래하는 건 현실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연히 웃음이 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리가 엄마를 만나는 장면은 개연성이 있든 없든 아이들에게는 희망이자 바람이 이루어진, 기쁜 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던 순간 가슴 한쪽이 찌르르했다. 어른이 돼서 두루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관객은 모두 같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2025. 03. 16.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에서
"퍼포먼스는 달라요. 저는 직접 만나요.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죽음과 애욕을 보죠. 제가 그날 그들의눈 속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제 작업은 즉석에서 바뀌어요. 예술의 목적이 결국 아름다움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라면,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모든 예술은 가짜고 타협이고 부질없는 불멸에의 욕망, 그 찌꺼기들이지 않아요? 즉흥 퍼포먼스에 대한 모든 공격은 참된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2025. 02. 26.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김창완>에서
언니, 오빠들 다 유치원 가고, 학교 가고 난 동네 어린이 놀이터는 철 지난 휴가지처럼 한가로웠습니다. 유모차를 밀고 가던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미끄럼틀 옆에 세우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어머, 예쁘기도 해라. 우리 아기, 이것 좀 보자. 정말 예쁘지?" 하길래 엄마 손끝을 따라가 보니 하얀 꽃이 돌 틈에 피어 있었습니다. 아기는 엄마만 쳐다봅니다. 엄마가 아무리 예쁜 꽃을 보여주려고 해도 아기는 엄마만 쳐다봅니다. 문득 신이 있어서 예쁜 걸 가리키며 인간에게 보여주려고 하는데 우리는 신만 쳐다보는 건 아닌지, 혹시 신의 손끝이 가리키는 꽃이 인간이 아닐는지, 오늘 아침 놀이터 풍경이었습니다.
2024. 10. 09.
<글의 품격, 이기주> 에서
사람의 첫인상이 대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듯, 첫 문장은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기관차처럼 문단을 이끌어나가는 견인력을 발휘한다. 특히 소설의 경우 주인공의 독백이나 상징적인 사건을 도입 부분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른다"는 간결하고 강렬한 첫 문장이 박혀 있다. 첫 페이지에서 이를 접한 독자는 엄마의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짐작하는 것은 물론, 이야기가 어떤 분위기로 흘러갈지를 어렴풋하게 상상하며 소설을 읽어나가게 된다.
작가가 직면한 현실이 첫 문장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도입 부분에 200번 넘게 수정한 문장을 깃발처럼 꽂고 영토를 확장하듯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 고기를 잡는 노인이며, 84일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패배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여전히 그는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바다로 향한다. 산티아고의 처지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에 헤밍웨이가 직면한 상황은 꽤 유사하다.
2024. 08. 17.
<좀머 씨 이야기, 쥐스킨트> 에서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면 뭔가 홀가분해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만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2024. 06. 25.
<공부보다 공부그릇, 심정섭> 에서
데이비드 홉킨스는 '신체운동학 (Kinesiology)' 이론을 통해 사람의 의식 세계를 수치화한 '의식지도'를 세상에 소개했다. 의식지도는 사람의 의식이나 영적인 에너지 수준을 1에서 1000까지의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어 수치심의 에너지 레벨은 20이다. 죄책감은 30, 무기력은 60, 슬픔은 75, 두려움은 100, 욕망은 125, 분노는 150, 자부심은 175이다. 여기까지가 부정적인 에너지이고, 에너지 레벨이 200인 용기를 지나면 긍정 에너지의 영역이 나온다. 용기는 200, 자발성은 310, 수용성은 350, 이성은 400, 사랑은 500, 기쁨은 540, 평화는 600, 깨달음은 700-1000 수준이다. 700 이상은 거의 성인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2024. 05. 17.
<니니코라치우푼타, 구병모> 에서
수없이 흥행에 실패한 SF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들, 그 어느 장르보다 고난도의 특수분장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대체재가 넘쳐나는 영화들 사이사이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 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던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 (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2024. 04. 30.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작가가 되기 전, 재즈 카페 '피터캣'의 주인으로 7년을 일했는데 작가로 성공해서 먹고살만해져도 재즈 카페 운영을 바로 접지 않았다. 일상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작가라고 으스대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한동안 두 직업을 병행했다. 훗날 전업 작가가 되어서도 재즈 카페 주인장으로서의 힘겨운 육체노동을 경험한 것이 글쓰기의 기본 뼈대가 되어주었다며 그 경험을 긍정한다.
2024. 03. 25.
<빌리 엘리어트/ 하이데거의 '있음'과 '있는 것'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이왕주> 에서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가 '있는 것들의 있음에 대한 놀라움' 때문에 평생을 그 문제에 대한 숙고로 바쳤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먼저 '있는 것'과 '있음'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도대체 문젯거리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있는 것'과 '있음'을 나눠보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에서 생각을 멈추고 '있음'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으며, '보이는 것'에만 시선을 던지고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것'에 미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빌리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피아노 위에는 빌리네 가족이 행복했던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사진틀 안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밝게 미소 짓는 저 어머니는 지상에 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있는 것'으로서의 어머니는 죽음으로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머니의 '있음' 마저 없어져버린 것인가. 금발, 시원한 눈매, 미소 짓는 입술, 투명한 피부. 빌리가 기억하는 이 어머니의 모습, 이 '있는 것'으로서의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어머니의 존재는 모두 끝장나 버린 것인가. 이 영화는 마치 '없는 것' 처럼 존재하는 어머니를 만나려는 빌리만의 특별하면서도 처절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있음'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어린 빌리는 이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배움에 의해서, 순간적인 깨침에 의해서 혹은 종종 거부할 수 없는 끌림에 의해서 알게 된다. 빌리는 이 거부할 수 없는 끌림에 의해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왜 빌리는 발레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는가.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끌림 탓이다. 빌리에게 발레에 빠져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가. 그것은 마음속에 간절히 어머니의 '있음'과 만나려 했기 때문이다.
그 '있음'으로 다가가는 데는 비범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생각하듯, '있는 것'을 만나듯, '있는 것'을 처분하듯 '있음'을 대할 수는 없다. '있는 것'과 '있음'이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거기에 이르는 방식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빌리 엘리어트에게 그것은 발레였다. 그러나 빌리에게 통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통할 수는 없다. 또 어쩌면 왕립 발레 학교 학생으로서 빌리 엘리어트에게 발레의 의미는 이제 '있음'과 만나는 것이랑 상관없는 것으로 변질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시를 쓰는 것,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것 등이 이런 특별한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시인, 예술가, 철학자가 '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 간절한 마음, 겸허한 사랑이 '있음'에 다다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지 않겠는가.
2024. 03. 19.
<인생의 열 가지 생각, 이해인 >에서
저는 '명랑 수녀'로 남고 싶습니다. 수녀회는 규칙이 엄격해서 근엄하고 엄숙한 태도로 살 것, 즉 '수녀다움'을 교육받지만, 살아볼수록 하느님을 향해 가는 세상은 생명력 넘치는 발랄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수행은 침울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밝고 명랑한 태도가 기도와 연결되고, 명랑한 투병 생활이 곧 저의 삶이 됩니다.
그렇다고 마냥 웃고 지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비 수녀시절 이야기인데요. 어머니가 보내주신 소포를 받고 너무도 반갑고 좋아 나도 몰래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때 같은 방 안에는 어머니를 여읜 자매가 있었는데, 깜빡 잊고 소포에만 빠져 있었던 거지요. 그날 오후, 철없이 기뻐했던 저를 돌아보면서 자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론 얼마나 슬펐을까요. 공동체 안에서는 기쁨을 덜 드러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려면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겠지요.
2024. 02. 19.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여행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여행의 방향을 결정한다. 예술가에게 상처를 입혀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가한 상처가 걸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는 방식이다. 부서진 크레용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다. 그 부서진 크레용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해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하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삶인데도.
2024. 01. 14.
<나는 너랑 노는 게 제일 좋아, 하태완 >에서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마음속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수없이 휘청이고 굳건하기를 반복하는 삶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고통이 앞서지 않은 행복의 쾌락은 없으니만 못하다. 이 세계에 발 디디고 겪는 모든 고난은 행복의 밑거름이요, "품고만" 있던 찬란한 별과 비로소 마주하기 위한 자잘한 장애물일 뿐이다.
문득 감정 조절의 강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건강한 마음, 매사에 밝은 기분, 슬픔의 배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울과 고독과 쓸쓸함 같은 감정들을 떨쳐내도록 강요받고 있다고요. 하나 그 감정들에 동요될 때 이뤄지고야 마는 것들을 생각하면 슬픔에서 파생된 감정들을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낮고 어두운 곳에 닿아서야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어떠한들 다 괜찮은 겁니다.
2024. 01. 07.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에서
선생님의 삶은 지나온 과거나 먼 미래에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나간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감정의 괴물인 나라면 족히 몇 달을 잡고 늘어질 만한 사건이 닥쳐도 이금희 선생님 (아나운서)은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금이 좋으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러다 인연이 다 되면 또 후회 없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미움과 슬픔뿐만 아니라 후회, 삐뚤어진 애착과 같은 감정들도 선생님의 사전 속에는 들어갈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금희 선생님을 볼 때마다 세상만사에 통달해 언제나 웃고 있는 도인과 같은 모습이 겹치고는 했다.
"맞아요! 선생님을 뵐 때마다 가장 부러웠던 게 그거였어요. 30대가 된 지금도 전 감정 조절이 안돼서 죽겠다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작가가 된 것 아니겠니?"
듣고보니 그 역시 맞는 말이었다.
2023. 12. 29.
<너의 때가 온다, 박노해>
너는 작은 솔씨 하나지만
네 안에는 아름드리 금강송이 들어있다
너는 작은 도토리알이지만
네 안에는 우람한 참나무가 들어있다
너는 작은 보리 한 줌이지만
네 안에는 푸른 보리밭이 숨쉬고 있다
너는 지금 작지만
너는 이미 크다
너는 지금 모르지만
너의 때가 오고 있다
2023. 12. 17.
<할머니의 노란꽃, 박용재> 뭉클했던 날들의 기록- 안도현 엮음 에서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사는 할머니 두 분이 길에서 만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잔설이 남은 산언덕에는 봄꽃들이 막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할머니 두 분이 길가 바위틈에 핀 꽃을 두고 서로 질문과 답을 건넸다.
"여보게, 혹시 저 꽃 이름이 뭔지 아시나?"
"아이구, 꽃이잖소. 꽃."
"꽃? 그건 나도 알지. 근데 내가 천치야, 꽃도 모르게?"
"꽃을 꽃이라는데 역정을 내시기는?"
"역정은 무슨. 난 다만 진짜 꽃 이름을 알고 싶어서 그렇지."
"나 저 꽃 이름 예전에 알았었는데 뭐드라."
"어서 생각해봐요."
예전에 꽃 이름을 안다는 할머니는 머리를 만지며 꽃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시간이 흐르자 꽃 이름을 질문한 할머니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건넸다.
"난 갈래. 아는 체 하긴, 자기도 모르면서..."
"아, 조금만 기다려봐요. 보채기는..."
꽃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할머니는 꽃향기를 맡고 쓰다듬으며 이름을 생각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꽃 이름 알아내면 내가 맛있는 국수 살께"
그러면서 국수를 사겠다는 할머니는 꽃을 바라보며 "꽃아 꽃아, 네 이름이 뭐니?"라며 물으며 꽃 이름 안다는 할머니를 힐끔거렸다. 그 순간 꽃 이름 안다는 할머니가 불현듯 생각난 듯 화들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저 꽃 이름."
"그래 뭐요? 알아냈소?"
"노란꽃이야 노란꽃."
그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키우며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아 맞다야, 노란꽃이다야 노란꽃."
"이쁘지요, 이 꽃"
"아이구, 꽃 이름 알아내느라 애썼네."
두 할머니는 노란꽃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서로 손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날 이후 그 꽃은 두분에겐 영원히 `노란꽃'으로 불렸고 그 꽃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서 웃곤 했다.
사실 노란꽃의 이름은 `영춘화 (迎春花)'였다. 봄이 옴을 일찍 알려주는 작고 귀여운 노란색 꽃잎이 앙증맞은 꽃이다. 영춘화를 노란꽃이라 말한 할머니는 그 꽃의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질문하는 할머니의 자존심을 세워 드리려는 배려감과 존재의 일체감을 위해 일부러 노란꽃이라 불렀다. 시골길에서 한 할머니가 영춘화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노란꽃으로 호명한 마음씨가 봄꽃보다 더 곱다.
2023. 11. 22.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이야기, 신하영>에서
모소대나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4년 동안 고작 3 cm 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해요. 하지만 5년이 되는 해부터는 매일 30 cm씩 짜라 15 m가 훌쩍 넘어 울창한 숲을 만든다고 합니다. 4년 동안 지면이 아닌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며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죠. 이 이야기는 사람에게도 뿌리를 내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띄는 성장은 없지만 높이 도약하기 위해 내실을 다지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실이 없어 매번 좌절하는 사람이 많죠. 저 또한 노력에 비해 부족한 결과에 고개를 숙인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뿌리를 내리는 중이지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앞에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절대로 겁먹지 마세요. 이렇게 근간을 다지다 보면 높은 곳에 올라가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텝니다. 모든 걸 쉽게 해낸 사람은 쉽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조금 늦더라도 튼튼한 삶을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습니다. 과정을 어여쁘게 여기면 충분히 역전 가능합니다. 그 기대에 콧김을 불어도 좋아요. 머지않아 당신의 시간이 올 테니까요.
2023. 10. 09.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에서
삶의 지혜는 불행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건강한 씨앗을 심는데 있다. 그것은 그만큼 생명의 원천을 신뢰하는 일이다. 역경은 씨앗의 껍질을 벗겨 내는 바람 같아서, 우리 존재의 중심부만 남긴다. 그러면 그 중심부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청춘을 보낸 지금, 나는 깨닫는다. 나는 늘 스승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지만, 나에게 깨달음을 선물한 스승은 인생 그 자체였다. 청년 시인이었을 때 나는 삶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가졌는데, 그 질문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떠난 여행은 나에게 특별한 삶을 선물했다.
2023. 10. 04.
<우리가 잃어버린 것, 서유미>에서
경주는 자신이 두 달 동안 시간을 보냈던 카페를 새삼스레 다시 둘러보았다. 여전히 미지의 시간을 지나는 중이고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지만 여기서 보낸 한 시절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건 분명했다. 어둠 속의 푸른 잎들은 다행히 꼿꼿하고 싱싱해 보였다.
2023. 09. 30.
<타인의 집, 손원평>에서
"있잖아,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만약이란 없어. 그건 책임지지 못할 꿈을 꾸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한가지는 말할 수 있지.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고." 형이 나를 바라봤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는 기쁘게 되는 거야."
2023. 09. 25.
<진이, 지니, 정유정>에서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거야.
'진이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어머니다운 당부를 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너는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짧게 작별하자고 했다. 3일 장을 치르지 말고 곧장 화장해서 바다로 보내달라고 했다. 당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했다. 연민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죽을 힘을 다해 살았던 당신 삶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대신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내 딸이어서 미안했고, 내 딸인 게 고마웠다고 했다.
2023. 09. 16.
<원더풀 사이언스, 나탈리 앤지어 저/김소정 역>에서
과학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이다. 가장 정교한 발톱으로 문제를 공격해 느낄 수 있고 음미할 수 있는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는 기술이다.
2023. 09. 13.
<완전한 행복, 정유정>에서
"그럼 우리 도시락 나눠 먹을까?" 그녀는 "네" 했다. 아버지는 운전석 등받이 뒤에서 보온병과 도시락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아침에 먹고 남은 밥과 반찬이었다. 아버지는 보온병 뚜껑에 뜨거운 물을 따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밥이 차니까, 이거 마시면서 먹어." 봄방학 내내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픽업트럭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던 도시락은 그녀 안에서 꽃이 되었다. 그땐 그걸 몰랐다. 기나긴 삶의 겨울이 지나고 눈보라가 멈춘 후에야 그것이 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치거나 죽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2023. 08. 26.
<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 심재휘>에서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 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한평생은 그런 것이다.
2023. 08. 05.
<자기만의 빛, 미셸 오바마>에서
물론 뜨개질이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뜨개질은 인종차별을 종식하거나 바이러스를 파괴하거나 우울증을 치료해주지 않는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거나 기후변화를 늦추지도 못한다. 망가진 그 무엇도 치유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작다. 너무 작고 사소해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에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 있다. 큰 문제 옆에 작은 문제를 두면 다루기가 좀 더 쉬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모든 것이 크게 다가와 두렵고 막막할 때, 과도한 감정과 생각에 빠지거나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버거울 때, 일부러 작은 것부터 찾아가는 법을 배웠다. 나의 머리가 거대한 재앙과 파멸만 걱정하고 있을 때, 스스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마비되고 동요될 때, 나는 뜨개바늘을 집어들고 두 손에 모든 걸 맡긴다. 나지막이 달각이는 소리와 함께 그 혹독한 순간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면서.
2023. 07. 23.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원>에서
법의 잣대로 볼 때는 `소설 쓰시네요'라는 말이 얼마나 비웃는 얘긴가. 법으로 보면 소설이 가소롭겠지만, 소설계에서 보면 법이야 말로 웃기는 말장난이야. 소설이 진리에 더 가깝지. 법은 내일이라도 바뀌어. 지역에 따라 달라져. 여기선 불법이 저기선 합법이지. 그게 무슨 진리인가. 그런데 소설로 쓰여진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리나>는 러시아 전쟁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마치 내 비극의 가정사처럼 느껴지거든.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인데도, 내 형제자매 같지. 그게 기호계의 힘이야. 그래서 나는 답답하다네. 과학 하는 사람, 정치 하는 사람, 경제 하는 사람이 문학을 알아야 해. 교양으로 인문학 하라는 게 아니야. 인문학은 액세서리가 아니라네.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네. 죽은 물고기는 배 내밀고 떠밀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도 위로 올라간다네.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게 등용문이야. 폭포수로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원하는 데로 가지.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야. 그냥 떠밀려갈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역류하면서 가고자 하는 물줄기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네.
2023. 07. 22.
<종의 기원, 정유정>에서
그럼에도 결코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걸 예감한 순간이었다. 평생토록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던 순간이며, 내가 누구인지 자각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2023. 07. 08.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백수린>에서
하나둘씩 빛이 차오르는 이웃들의 창문을 보며,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게 하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 이따금씩 생각을 해본다.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의 많은 비밀들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통제하려 한들 삶에는 수많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는 것을 안다. 그 틈을 채우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는 자리마다 놓인 뜻밖의 행운과 불행, 만남과 이별 사이를 그저 묵묵히 걸어나간다. 서로 안의 고독과 연약함을 가만히 응시하고 보듬으면서.
2023. 06. 30.
<여름의 빌라, 백수린>에서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문득 나는 내가 교복을 입고 그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날들로부터 그리 많이 멀어지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논밭을 가로질러 바람이 불어오면, 창가의 커튼이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는 범선의 돛처럼 부풀던 교실.
2023. 06. 22.
<내 마음에 별이 뜨지 않은 날들이 참 오래 되었다, 주용일>에서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속에서 뜨고 지던 별들이며 노래들을 생각한다. 사랑, 평등, 신, 자유, 고귀함 이런 단어들이 내 가슴에서 떴다 사위어가는 동안 내 머리는 벗겨지고 나는 티끌처럼 작아졌다. 새들의 지저귐처럼 내 마음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노래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동안 내 영혼은 조금씩 은하수 저쪽으로 흘러갔다.
2023. 06. 1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에서
희진은 그림들을 나란히 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동안 희진은 문자 언어의 형태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형태가 아니라 색의 차이, 색의 패턴을 보아야 했던 것이다.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만약 이 그림들이 무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면, 그들이 형태가 아닌 색상의 차이를 의미 단위로 받아들인다면, 루이들이 예술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록해오고 있었다면.
루이는 희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진의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있었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2023. 06. 06.
<7년의 밤, 정유정>에서
남편은 생물학적으로는 세 살, 정신적으로는 열세 살쯤 연하인 어린애였다. 야구 말고는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덩치 큰 미숙아였다. 야구를 그만둔 후부터는 하루가 멀다고 술에 취해오는 술꾼이 되었다. 그런 인간의 목을 잡아다 취직시키고, 세상이라는 정글에서 사는 법을 가르치고, 남편이랍시고 간수해오면서 그녀는 온갖 직업들을 두루 섭렵했다. 식당종업원, 마트 캐셔, 간병인, 학교 급식 아줌마... 결혼 12년 만에 장만한 이 집은, 그녀에겐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33평이라는 수학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강은주는 지니처럼 살지 않았다는 근거였다. 자신의 개 같은 인생과 맞붙어 싸웠다는 삶의 증거물이었다. 아들 서원의 미래에다 거는 엄마의 약속이었다. 너만큼은 맨주먹으로 정글에 뛰어들지 않게 할 것이라고.
44년 전 오늘, 남자가 태어나던 날에도 눈이 내렸다고 했다. 13년 전 오늘도 눈이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남자의 어깨와 세상이 모두 부서진 그해 겨울, 세번째 어깨 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서른한 번째 생일에, 환자복 위에 파카를 걸치고 간호사 몰래 병원을 빠져나온 오후에, 남자는 여섯 살 난 아들과 놀이공원에 갔다. 동물원은 문을 닫았고, 사파리 기차는 플랫폼에 정차해 있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아들에게 얼음이 든 자판기 콜라를 뽑아주었고, 그때 하늘은 사막처럼 노랬고, 납빛 구름 아래로 눈바람이 불었고, 가로수들은 비올라처럼 울었고, 아들은 노천 게임기에서 뽑은 웃는 해골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해골을 받아 쥐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황량한 광장에는 남자가 부는 보귀대령의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아들은 팔을 크게 흔들며 남자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2023. 05. 27.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에서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해설, 강지희 (문학평론가)> 상대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실려 있는 이 말에는 꿈결을 걷는 듯한 나른한 달큰함이 있다. 그러나 소설은 이 달큰함이 진희가 품고 있던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무지로 인해 가능했던 것임을 곧 드러낸다. 자신이 느끼는 안도와 행복의 풍경이 언제나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을 철저히 밀봉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임을 선연하게 의식하는 예민한 윤리, 이 서늘한 거리 감각이란 최은영 소설의 요체이자 매력이다.
2023. 05. 27.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정여울>에서
그 사람의 부분만을 알지만, 그 사람의 전체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훌륭한 교육자의 필수 덕목이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에게서 위대한 교육자의 싹을 발견해 내는 슬론 교수의 날카로운 지성이 반짝인다. 영문과 교수 슬론은 학부생 스토너의 서류와 성적표를 바라보며 스토너에게 묻는다. 기록에 따르면 자네는 농촌 출신일 텐데, 그렇다면 학업을 마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냐고, 이런 질문을 받자 스토너는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아니라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스토너 자신도 스스로의 확신에 놀란다. 아버지가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아들을 대학에 보낸 것은 최첨단 농업기술을 배워오길 기대했기 때문인데, 스토너는 아버지 몰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고 싶었다. 슬론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농사꾼의 아들 스토너가 문학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를 따로 불러 진로상담을 해준 것이다. 스토너는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만, 자신조차 스스로의 재능을 모르고 있었다.
스토너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 없던 자신의 막연한 미래를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내는 슬론의 통찰력에 깜짝 놀란다. 슬론은 스토너를 바라보며 자네는 교육자가 될 재목이라고,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냐고 반문한다. 스토너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라지 못한다. 교수님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슬론이 미소 지으며 말한다. 그건 사랑이라고. 자네는 문학과 사랑에 빠진 거라고. 스토너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에 휩싸인다. 스토너의 멈출 수 없는 사랑은 영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던 것이다.
2023. 05. 24.
<매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곽아람>에서
힘껏 살아보려 애써보지만 내 마음에도 역시나 빙점이 있다. 질투와 원망과 미움과 욕망으로 놀랄 만큼 차갑게 얼어붙는 마음의 어떤 지점들.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없어질수록 더 빈번하게 생기는 마음의 매듭. 얼어붙은 마음이 일그러지는 상태가 괴롭기 때문에, 그 얼음을 녹이는 걸 평생의 과제로 생각한다.
"히스클리프가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He's more myself than I am)." 누구나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그렇지만 때때로 어떤 상대는 나보다 더 나 자신처럼 느껴져서,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3. 05. 14.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원망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거였다... 그때 만난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그 수녀님은 아직 서원 (그리스도교적인 완전 덕을 쌓으며 살겠다고 스스로 하느님께 약속하는 것)도 받기 전인 예비 수녀님이었다. 그러나 학덕 높은 현자보다도,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일컬어지는 성직자보다도 더 깊은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 그건 깊다기보다는 아마 적절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2023. 04. 28.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백혜선>에서
그 뒤로는 한동안 무슨 짓을 해도, 또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대에서 잘못된 음이 손에 집히지 않았고 무엇을 치든 소리가 음악으로 돌아왔다.
영감은 일상생활의 바깥에서 아주 가끔씩만 그 귀한 얼굴을 내미는 법이다. 따라서 어떠한 제한 시간도 어떠한 데드라인도 없이 피아노를 치면서 영감이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아무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그러다 어느덧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평소의 일상생활에서는 던지지 못한 영감과 깨달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아들은 대략 이렇게 썼다. "엄마는 늘 연주를 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음악에서는 쉼표도 음악의 한 요소인 것처럼 말이다."
2023. 04. 25.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에서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2023. 04. 13.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에서
그렇게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우주로 떠나다니. 한아는 마지막 작별을 기억해내고는 치를 떨었다. 다이옥신 같은 새끼, 미세먼지 같은, 아니, 미세 플라스틱 같은 새끼, 낙진 같은 새끼, 옥시벤존, 옥티녹세이트 같은 새끼, 음식물 쓰레기 같은 새끼, 더러운, 정말 더러운 새끼, 밑바닥까지 더러운 새끼, 우주의 가장 끔찍한 곳에서 객사나 해라... 더 심한 욕을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어휘력이 딸렸다. 한아는 평소에 욕을 좀 연마해둘걸 후회했다.
2023. 03. 31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에서
네가 진정, 그 사람이 삶이 아픈 것이 네가 아픈 것만큼 아프다고 느껴질 때, 꼭 나와 함께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가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랄 때, 그때는 사랑을 해야 해. 두 팔을 있는 힘껏 벌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네 힘을 다해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해.
더 많이 사랑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만,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너의 성장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고, 너의 일의 윤활유가 되어야 한다.
2023. 03. 12
<쓸 만한 인간, 박정민> 에서
어영부영한 단어들로 영화 <변산>을 채우는 바람에 오해가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모두가 부끄럽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각자의 회로가 다 다른 만큼, 이 영화는 그 각자에게 온통 다르게 다가갈테다. 그 모든 회로를 충족시켜드릴 수는 없겠으나, 진심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쿵짝쿵짝, 때로는 바운스바운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사랑하고, 그들을 보고 있는 모두가 그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2023. 02. 24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림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2023. 02. 05.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로 가니, 이어령> 에서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진짜 공부일까. 유명한 물리학자 중에 Isidor Isaac Rabi 라는 유대인이 있다. 우리가 지금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편하게 길을 찾아다니는 것은 바로 이 학자의 덕택이다. 그가 언젠가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연구결과를 발표했을 때 기자들이 뛰어난 성과의 비결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항상 `얘야, 오늘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가 채마밭에서 가꾼 무, 배추라면, 약장수와 소금장수 이야기는 야생의 잡초 사이에서 캐낸 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