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Ocean's delay> 2024. 04.17.

<New routine in NZ> 2024. 02. 11.

<,> 2024. 01. 07.

<여름으로> 2023. 12. 31.

<Snow curtain> 2023. 12. 16.

<누구인들 그때 고단하지 않았다고 회상할 사람이 있을까> 2023. 11. 25.

<Back to back mind> 2023. 11. 07.

<너의 이름에는> 2023. 10. 09.

<학술대회 발표 경험 Story> 2023. 09. 26

2월, 오랜만에 학생들과 함께 강원도에서 개최된 학술대회를 다녀왔다. 동행한 학생들 가운데 두 명은 처음 참여하는 학술대회인지라 마음가짐과 자세를 공유하려 나도 오랜만에 구두발표를 학회에 자청하였다. 내 발표 외에 동행한 나머지 학생 한 명의 구두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새 학기에 박사과정으로 진학할 예정이라 좀 더 책임감을 갖게 할 생각으로 발표를 하게 하였다.

학생의 발표는 오후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세션이 열리기 전 격려를 해주려 앉아있는 테이블을 찾아가보니 새카맣게 되어 앉아있었고, 학생들에게 학술대회 발표가 매우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한동안 잊고 지내왔다는 것을았다. 대학에서 근무한지 어느 새 10년이 넘으며 많은 것들이 나에게는 무뎌졌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는 똑같이 울렁거리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대학원생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발표를 해왔지만 발표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여러 생각으로 머리 속이 엉망이 된 채 발표를 시작하곤 한다. 심장은 왜 아직도 항상 그렇게 쿵쿵 뛰는 것인지.

 

내 인생 첫번째 학술대회 발표는 석사과정 2학기가 끝나가던 겨울방학, 전남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광학회 동계 학술발표회였다. 발표주제를 두고 지도교수님과 상의를 했는데, 내용이 긴 것 같으니 둘로 쪼개서 발표를 하자고 하셨다. 하늘같으신 교수님 말씀에 거절을 못해서였는지 무지한 배짱이었는지 첫 학회에서 두 개 발표를 연달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학회 발표일 전국에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어 대부분의 연사가 발표장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학회에서 이틀 뒤 다른 세션 끝에 시간을 만들어줄 테니 발표를 하겠느냐 묻는 전화가 왔다. 지도교수님과 상의 후 이틀 뒤 발표를 수락하고 부랴부랴 학회장을 찾았다. 전날 밤 연습을 수도 없이 해서 눈을 감고도 발표자료를 손으로 그려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쿵거리는 심장을 달래면서 학회장에 앉아 맨 마지막이었던 내 발표 차례를 기다리는데, 발표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더니 내 발표가 시작되는 시각이 되자 좌장과 행사를 진행하는 노란 조끼를 입은 아르바이트생 2명만 남고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폭설로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은 학회에, 분야가 다른 발표가, 당일 맨 마지막에, 학생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누구도 관심이 없었.

인생의 첫 학회 발표에서 청중이 한 명도 없다니. 발표는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를 해야한다니. 좌장도 아르바이트생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뒷문으로 한 명이 들어오는데, 놀랍게도 실험실을 오래 전 졸업하신 선배님이셨다. 선배님 지인 한 분도 따라서 들어오셨다. 자상한 표정으로 발표를 하라고 권하셨고 나는 그렇게 2개의 발표를 연이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하늘도 돕지 않았던 첫 발표였지만 한편으로 그날 선배님이 다른 강연장도 아닌 그곳에 찾아오셨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내 한 평생 가장 많은 근심 걱정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했던 발표는 박사과정 2년차 여름에 대구 EXCO에서 열렸던 IMID에서의 구두발표였다. 그 시절 유행이었던 어학연수는 커녕 해외 어디에도 다녀와 본 적 없는 촌놈었던 나는 준비하는 3달 내내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한숨 지으며 지냈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있었다면 영어 발표하는 영상을 참고해서 스크립트라도 짜기가 수월했을텐데, 그때는 구글도 없던 시절이었다. 작 더 큰 걱정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였다. 질의 응답시간에 무슨 말인지 몰라요..라고 쳐다만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자꾸만 머리속에서 그려져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나름 세운 대책이 국제어학원의 CNN 청취 수업을 신청하여 듣는 것이었다. 국제학회발표 질의 응답에 대한 대책으로 CNN 청취 수업이라니. 발표 몇 일 전 지도교수님 앞에서 리허설을 했고, 지도교수님은 지하 1층에 있던 연구실이 바닥을 뚫고 지하철까지 내려갈 것 같은 한숨소리로 평가를 대신하셨다. 그때 지도교수님께서 꾸지람 대신 해주신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이 “단어를 또박또박 이야기해라”는 것이었다. 졸업 후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내면서, 그리고 이후 숱한 영어발표 경험을 해가면서, 그리고 학생들과 영어로 랩 미팅을 하는 지금까지, 지도교수님의 말씀이 참 좋은 말씀이셨다 싶다.

연습했던 대로-비록 문어체 문장이 온통이었을 스크립트를 실수 없이, 때로 청중과 눈도 마주쳐가며 발표를 마쳤다. 드디어 질의 응답시간, 앞쪽에 앉아있던 갈색 곱슬머리의 외국인이 질문을 했다. 나는 그날 내가 무슨 답변을 했는지 한 단어도 기억을 못한다. 다만, 그 질문을 했던 사람이 이제는 고인이 된 우크라이나 물리연구소의 Yuriy Reznikov 박사님이었다는 것 만을 기억한다.

Reznikov 박사님이 그때 나에게 질문을 해주었던 것은 나에게는 연구자로서 또 한 번의 큰 행운이었다. 요즘 들어 더욱  남달리 느껴지는 인연이라는 것이 그 분과 있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기업체에 근무를 하며 함께 연구과제를 수주하기도 하였고,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우정을 쌓기도 하였다. 내가 영어 논문 작성이 아직 많이 서툴렀던 부산대 연구교수 시절, 투고했던 논문의 review 결과가 왔는데, reviewer가 내 논문에 영어 문법 첨삭을 해서 주었다. 나는 그것이 Reznikov 박사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나에게 베푼 호의였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디스플레이 분야 세계 최고 권위의 학회는 미국에서 개최되는 SID였다. 연구비 사정이 빠듯하여 언감생심이었던 학회였는데, 지도교수님께서 선뜻 논문을 내보라고 제안하셨고, 다행히 포스터 발표로 제출한 논문이 accept되어 드디어 30살 평생 처음으로 해외를, 그것도 미국을 가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생전 처음 가본 SID 학회장에서 깜짝 놀랐던 것이 있었는데 세상에 그렇게 큰 강연장이 있는 것을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논문에서나 보았던 기라성 같았던 학자들이 한 강연장에 촘촘히 앉아 있었고, 그때 다짐을 했었다. 내가 다음 번에는 꼭 이 넓은 강연장, 세계 최고 권위의 이 학회장에서 저 별들 같은 학자들 앞에서 구두 발표를 해보아야겠다, 학회가 마치는 마지막 날 빈 강연장을 둘러보며 다짐하고 돌아왔다.

그해 11월 미국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로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구하여 가게 되었고, 다음 해 2008년 5월 20일, SID에서 구두 발표를 하였다. 발표의 완숙함은 한참 부족했지만, 사진 속 표정을 보니 자신감은 꽤 있었던 모양이다. 2009년과 2010년에 San Antonio, Seattle에서 개최된 SID에서 3년 연속 구두 발표를 하였고, 2010년에는 생전 처음으로 발표가 끝나고 난 후 사람들에게서 발표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보았다. 국내, 국제 학회를 통틀어 발표 마치고 칭찬을 받아본 것이 그때가 비로소 처음이었고, 10년이 걸렸다.

 

누구나 인생의 부침을 어느 순간이고 겪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 힘든 때가 찾아왔었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부산대학교 윤태훈 교수님 연구실에서 연구교수로 의탁하며 지내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IMID 초청강연을 제안해 주셨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고, 출장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곧 너의 생일인데 집에 오지 않겠느냐. 음력 생일을 어려서부터 썼기 때문에 매년 내 생일이 언제인지 감이 없이 지내는데 발표일이 생일이었다.

그때 윤태훈 교수님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은 나보다 7, 8살 씩 어렸지만 유난히 정이 많고 속이 깊고 따뜻한 친구들이었다. 내가 전북대에 직장을 잡고 한 번도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옮길 생각도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 부산대에서 지내며 느꼈던 그 따뜻하고 속 깊은 우정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환경의 전북대에서도 학생들과 그런 관계를 만들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지낸다.

학회에서의 발표는 썩 잘하지도 못했고, 외국인 학자 한 명이 십자포화 질문을 쏘아대는 통에 마치고서도 기분이 별로였다. 터덜터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학생들이 아이스크림 케잌과 꼬깔모자를 깜짝 준비를 해서 축하를 해주었다. 이듬해 나는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그 이듬해 전북대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지내고 있다. 그때 부산대에서 지냈던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인생을 살아갈 큰 용기를 얻었고, 현재까지 이렇게 큰 탈 없이 지내고 있는 것은 모두 윤태훈 교수님과 그때 정겨웠던 학생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윤태훈 교수님의 추천 덕분으로, 대학원생 시절 그렇게 선망하였던 SID에서 초청강연을 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제는 흰머리가 많아진 그 옛날 나에겐 별들이었던 학자들 앞에서, 그리고 지도교수의 발표를 호기심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똥그랗게 쳐다보고 있던 나의 대학원생들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연구한 내용으로 초청강연을 하였다. 인생에 오랫동안 남다른 의미로 남을 발표였다.


대학원생 때부터 지금까지 학술대회 발표들을 경험하면서 의지와 무관한 불운을 만나기도 했고, 많은 난관과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한 적이 많았다. 이만하면 발표를 좀 하는 것 아닐까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미처 내 역량으로 풀어낼 수 없는 상황이 예외없이 나타났었다. 하지만 그 과정 중 뜻밖의 행운이 함께 찾아왔었고, 그 행운이 지금까지 나에게 쉼없이 용기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연구자의 길을 들어선 나의 대학원생들, 날마다 많은 고민들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을 그대에게도 분명 그 행운이 깃들 것이며, 오랜 시간 당신의 심장에 용기를 불어넣어줄 것임을, 꼭 그런 일이 당신에게도 생길 것이니 조바심내지 말라는 당부를 전한다.

<행운의 향기> 2023. 09. 14.

<딸의 필통> 2023. 09. 08

<낚시를 하는 이유> 2023. 06. 04.

<Experimentalist> 2023. 05. 24.

<줄탁동시> 2023. 05. 20.

<남색 양복> 2023. 0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