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Ocean's delay> 2024. 04.17.
누구나 아는 것처럼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씩 뜨고, 보름과 보름 사이에는 달이 뜨지 않는 그믐이 있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밀물과 썰물은 달의 인력으로 생기는 것이고, 보름과 그믐은 달이 우리의 앞에 있거나 뒤에 있는 것이니 바다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것이라 보름날과 그믐날 밀물과 썰물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각은 같다.
하지만, 달의 공전속도는 지구의 자전속도보다 약간 느리기 때문에, 하루가 지날 때마다 밀물이 시작되는 시간은 48분씩 지연된다. 매일 48분씩 15일이 모이면 720분이 되는데, 720분은 12시간이다. 그러니 보름달이 뜬 날로부터 15일이 지난 그믐날에는 밀물과 썰물이 시작되는 시간은 똑같은 것이 아니라 12시간, 하루의 절반만큼 지연된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우리에게 보름날의 바다와 그믐날의 바다를 보여주면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 하루에 밀물과 썰물은 두번씩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주기가 12시간이고, 그래서 12시간이 지연된 것을 구분해내지 못한다.
달은 15일 동안 가장 환한 모습에서 가장 어두운 모습으로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도록 되어 있고, 바다는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15일의 시간이 더 지나면, 달은 다시 가장 밝은 모습이 되고, 바다도 다시 똑같은 모습이 된다. 둘 사이에는 24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New routine in NZ> 2024. 02. 11.
뉴질랜드에서 산 2024년에 쓸 사무용품. 단조롭지만 가볍지 않은 서양 사람들 특유의 문구 스타일은 불필요한 생각들을 diet 시키는 것 같다. 아침에 딸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커피숍에 들러 새로 산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연구소로 출근.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Ruakura 연구단지로 들어서면 긴 역사를 짐작하게 하는 숱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깨끗하고 맑은 파란 하늘이 쏟아진다. 이곳의 여름은 한국처럼 습하지 않고, 캘리포니아처럼 따갑지 않다.
파란 하늘이 사방의 창으로 보이는 뉴질랜드의 도서관은 평화로운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꽤 괜찮은 곳인 듯. 불필요한 것을 먹고, 소란한 만남을 갖고 , 의미없는 생각에 나를 소모했던 생활과 습관을 버리고 싶다. 나를 위한 가장 평범한 일들을 가장 온전하게 하면서.
<,> 2024. 01. 07.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인생에 쉼표가 필요하다는 류의 책들을 몇 번 읽었던 적이 있었으나, 내용이 공감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냥 휴식도 아니고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이라는 책이 있길래 약장수한테 만병통치약 산다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오해였다. 작가는 쉬지 못하는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었고, 책은 여행과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결국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갈망하지만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발견한 책 뒷편의 추천의 글에 눈이 멈춰 버렸는데,
"박 작가님,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은 `글 쓸 때'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책도 기다릴게요. - 이금희 (방송인)"100퍼센트 공감되는 이야기. 누가 나에게 TV에 나오는 사람 한 명과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이금희 아나운서를 만나고 싶다.
<여름으로> 2023. 12. 31.
다시 겨울을 마주하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겨울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구 남쪽 반대편에 있는 나라로 해외연구년을 신청해 놓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머리 속에서 연결되었다. 미루어 놓은 겨울까지, 나는 내가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기나긴 삶의 겨울 속에서도 꽃망울이 차오르고 있음을 살피고 견딜 수 있는 인내심과 용기를, 미리 불러온 여름이 나에게 선물해 주기를 바란다.
<Snow curtain> 2023. 12. 16.
BK21 사업이 계속 지원을 받게 되었다. 뜻있는 동료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의 도움 덕으로 7년을 온전히 채워 대학원생들이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으로, 꿈을 꾸고 미래를 설계해나갈 시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실험실에서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학회를 떠나며 들뜬 학생들을 보며, 지쳐 눈꼬리가 내려 앉은 학생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걱정들이 쌓여갔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한숨을 지었는지 모른다.
고마운 많은 축하의 메시지들 가운데 나는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아무도 그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함박눈이 내렸다. 연극의 다른 전개를 약속하며 내려오는 커튼처럼, 인생에 깊은 의미로 남을 이 날을 오랫동안 선명히 기억할 수 있게 막이 내린 것만 같아서 큰 위로가 되었다.
<누구인들 그때 고단하지 않았다고 회상할 사람이 있을까> 2023. 11. 25.
석사, 박사과정을 보냈던 연구실의 이름은 양자광학 실험실이었다. 지금은 오래된 티가 나지만, 아마도 그 시절에는 광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라면 모두 탐내고 선점하고 싶은 실험실 이름이었을 것이다. 우리 실험실은 지하에 있었는데, 작은 진동에도 예민한 광학실험의 특성 상 지하에 있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대학에도 광학실험실은 지하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하에서 화공약품까지 써가면서 실험을 하고 있었으니 공기가 무척 안 좋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러한 악조건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연구에 청춘을 매진하던 사람들이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책상 위에 Reference 논문들을 Topic 별로 분류해서 올려두고 연구하다가 생각날 때마다 찾아보았고, 새 논문을 읽을 때마다 차곡차곡 포개어 놓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논문 뭉치들만큼 성장해갔던 것 같다. 논문을 읽는 것도 좋았지만 나는 실험실에 앉아 있는 것이 참 좋았다. 지금도 여러 일과들 중에 그걸 제일 좋아한다. 실험실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미시적인 세계로 똑똑 노크를 보내면 돌아오는, 첫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신호들을 해석하기 위해 골똘히 몰입했었던 시간이 참 좋았다.
내가 살던 반지하 방은 달동네 가장 높은 곳에 있었는데, 늦은 밤 지친 몸으로 계단을 오르면, 오늘 했던 실험은 결과가 왜 그렇게 나왔을까,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결과는 맞는데 이해를 못한 것일까, 내일 실험을 어떻게 해봐야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온통 실험 생각으로 가득했다. 방에 누워서까지 계속 생각이 끊이지 않다가 탁 하고 떠오른 생각에 한숨도 안자고 다시 실험실에 나왔던 적도 여럿 있었다. 물론 대부분 그 예상은 맞지 않았고, 새로운 수수께끼가 다시 나타나는 일이 많았지만 그렇게 한 걸음 씩 쉼없이 떼어가는 사이 나는 꽤나 멀찍이 걸어갔던 것 같다.
박사과정 때는 일주일에 이틀은 밤을 새는 생활이었다. 특히 토요일 밤에는 거의 밤을 새워 실험을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와야 한다는 부담이 없고, 모든 장비를 나 혼자서 쓸 수 있고, 교수님이 찾으실 리가 없고, 산학협력단에서도 학부사무실에서도 전화가 올 리도 없는, 친구들이 술먹자고 부를 리도 없는, 오롯이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계가 11시, 12시를 가리킬 때까지는 아직도 밤이 길게 남아 있다는 것이 무척 든든했었고, 3시가 되면 이제 뭔가 오늘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찾아왔고, 5시를 향해 가면 머리가 마비되어 1시간 전에 했던 생각을 하고 또 하기를 반복했다.
5시 30분이면 406번 마을버스 첫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그걸 타고 가끔씩 용두동에 있는 24시간 운영하는 홈플러스를 갔었다. 경동시장 정류장에 내리면 부지런한 상인들이 피운 기분 좋은 한약재 냄새가 거리에 이미 퍼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의류 코너에서 평범한 옷을 사고, 식료품 코너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반찬들을 사고, 밤새 팔리지 않고 남아있던 김밥과 치킨 또는 머리고기 같은 특별한 음식을 샀다. 집에 돌아오면 라면을 하나 끓이고 차가운 김밥과 특별한 음식을 찬 방바닥에 앉아서 먹었다. 그리고 비로소 침대에 누우면, 온 몸이 치즈같이 녹아서 침대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기분 속에 잠이 들었다.
2005년, 대부분은 구경은 커녕 들어도 못 본 flexible display 시제품을 만들어서 과제 최종 발표 때 전시를 해야 했는데 대학원 선배와 동기 친구와 석 달을 밤낮으로 잠도 못자고 고생하여 만들었다. 성남에 있던 참여기업에 실험하러 새벽과 밤 버스를 타고 다녔고, 부품 구한다고 청계천을 돌아다녔었고, 시제품 가공한다고 용두동에 있던 공업소에 앉아서 죽치고 있기도 했다 (가끔 사장님이 커피를 시켜주시기도 했다). 발표 하루 전날까지 한숨을 못 자고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전시를 무탈히 치렀는데, 그날 짜장면을 먹다가 잠이 들어서 손에서 젓가락을 놓쳤던 기억도 난다.
다음날 전국 일간지에 일제히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개발에 대한 기사가 배포되었다. 이제 막 LCD가 CRT를 대체하고 있던 시절에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대한 내용은 말그대로 대서특필할 일이었고,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고생했던 동료와 우정이 무척 깊어지고 좋은 추억이 되었다.
박사학위를 받기 몇 달 전, 날씨가 좋았던 봄날 오랜만에 학부 때 몸담았던 한국화 동아리방에 들러 무심코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생각이 깊고 속이 깊었던 국문학과 선배님이 그림을 보시더니 그 사이 인생이 깊어졌구나라는 말씀을 해주셨었다. 대학원 시절, 무척 고단했지만 온통 몰입된 채 한참을 걸었고, 긴 여정에서 외려 편안해졌다.
피곤함이 역력한 모습인데 공부하려고 참고 애쓰는 학생들을 보면 그만 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만, 연구를 하는 일이 곧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 되겠지 하는 바램으로 애써 생각을 정리한다. 진지한 삶의 의미를 찾고, 비로소 봄날의 온화한 볕이 마음에 그리고 인생에 환하게 들기를 기원한다.
<Back to back mind> 2023. 11. 07.
간조 때 바다 끝자리까지 나가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소리를 크게 내지를 때가 있다.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막힌 것 하나 없는 바다 아래로 소리는 이내 잠겨버리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목소리가 나지 않는 가위눌림에 빠진 기분이 닥쳐온다. 그런데 똑같이 답답할 때 음악을 큰 소리로 들으면, 내지르지 않고 그저 들은 것인데, 마음이 뚫리는 기분이 든다. 담배를 태워 뿌연 연기를 들이마시면 마음 속이 탁해져야할 것 같은데, 오히려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오래 전에 읽었던 우나무노의 <안개>에서, 자살하려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본능적으로 방어하다 살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 후 자살의 욕구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었다. 자살 욕구는 좌절된 살인 욕구라고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처음부터 감정을 등지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거울 속에 비친 좌우가 바뀐 나의 모습을 내 모습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반대로 음영진 감정을 나의 감정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밀어낼수록 숨차게 들어오는 감정은, 어쩌면 내 등에 등을 대고 살고 있는, 내가 오른손을 들면 같은 편에 있는 왼손을 들고 내가 왼손을 들면 같이 오른손을 드는, 반전된 감정의 자아 탓인지 모르겠다.
<너의 이름에는> 2023. 10. 09.
아프리카 동부의 어느 부족은 아이의 생일을 정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난 날이나 잉태된 날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속에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이 맨 처음 떠오른 날을 생일로 정한다고 한다. 그날로부터 아이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에서>.
딸의 이름을 지을 때 나중에 크면 이야기 해주려고 아래 글을 써놓았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 북수원 IC-영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로 운전하여 출퇴근했었다. 북수원 IC는 수원에서 의왕으로 넘어가는 아주 완만한 고개 위에 있었는데, IC 입구 바로 앞에 휴게소가 있었다. 고속도로도 아닌 곳에 휴게소가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지지대 쉼터"라고 붙여진 그 휴게소의 특별한 이름에 특히 궁금함이 생겼었다. 언젠가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 정조 임금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아버지의 무덤 수원 융릉을 찾았다고 한다. 이른 아침 궁을 나서 의왕을 지나 수원으로 넘어가는 그 고개에 다다르면, 가마꾼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완만한 고개 너머 융릉 자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정조는 가마꾼들에게 왜 이리 더디게 가느냐, 더디 가지 말고 어서 가자고 재촉을 했다 한다. 그리고 하루 내내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다시 그 언덕을 넘을 때는 가마꾼들에게 왜 이리 급히 가느냐, 더디게 더디게 가라고 일렀다 한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언덕은 한자로 더딜 지 (遲) 자를 겹쳐 지지대 (遲遲臺)라 불리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기의 이름을 지으려고 밤마다 누워 늦게까지 고민을 하다 잠들곤 했었는데, 정조의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동네에서 딸의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훗날 딸에게 그런 아빠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름에 자기의 생명이 시작된 곳을 담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름에는 본관은 있지만, 정작 자신이 처음 시작된 곳은 없다.
생각은 했지만 그런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어서,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가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면 좋을까라는 생각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은,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변해도 쉽게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가치와 진리를 찾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슬기로울 서 (諝)에 근원 원 (源)을 써서 서원이라 이름을 지었다. 빨리 변하는 세상에 휩쓸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원리를 찾는 슬기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랬다.
그런데 이름을 짓고 나서 번뜩하는 것이 있어 한자 사전을 열어보니 수원이 한자로 水原이 아닌가. 둘을 합치니 원 (源)이 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생명이 시작된 곳을 이름에 담았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이듬해 난 직장을 수원에서 전주로 옮겨 딸은 전주에서 태어났고, 나를 따라 전주 이씨가 되니 이름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태어난 곳도 담기게 되었다. 사랑하는 딸의 이름 이서원에는 생명이 시작된 곳, 아빠의 바램, 태어난 곳이 나란히 들어 있다.
<학술대회 발표 경험 Story> 2023. 09. 26.
2월, 오랜만에 학생들과 함께 강원도에서 개최된 학술대회를 다녀왔다. 동행한 학생들 가운데 두 명은 처음 참여하는 학술대회인지라 마음가짐과 자세를 공유하려 나도 오랜만에 구두발표를 학회에 자청하였다. 내 발표 외에 동행한 나머지 학생 한 명의 구두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새 학기에 박사과정으로 진학할 예정이라 좀 더 책임감을 갖게 할 생각으로 발표를 하게 하였다.
학생의 발표는 오후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세션이 열리기 전 격려를 해주려 앉아있는 테이블을 찾아가보니 새카맣게 되어 앉아있었고, 학생들에게 학술대회 발표가 매우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을 한동안 잊고 지내왔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에서 근무한지 어느 새 10년이 넘으며 많은 것들이 나에게는 무뎌졌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는 똑같이 울렁거리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대학원생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발표를 해왔지만 발표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여러 생각으로 머리 속이 엉망이 된 채 발표를 시작하곤 한다. 심장은 왜 아직도 항상 그렇게 쿵쿵 뛰는 것인지.
첫번째 발표, 2004. 02. 13, 한국광학회 동계 학술발표회, 전남대학교
내 인생 첫번째 학술대회 발표는 석사과정 2학기가 끝나가던 겨울방학, 전남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광학회 동계 학술발표회였다. 발표주제를 두고 지도교수님과 상의를 했는데, 내용이 긴 것 같으니 둘로 쪼개서 발표를 하자고 하셨다. 하늘같으신 교수님 말씀에 거절을 못해서였는지 무지한 배짱이었는지 첫 학회에서 두 개 발표를 연달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학회 발표일 전국에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어 대부분의 연사가 발표장에 도착하지 못하였고, 학회에서 이틀 뒤 다른 세션 끝에 시간을 만들어줄 테니 발표를 하겠느냐 묻는 전화가 왔다. 지도교수님과 상의 후 이틀 뒤 발표를 수락하고 부랴부랴 학회장을 찾았다. 전날 밤 연습을 수도 없이 해서 눈을 감고도 발표자료를 손으로 그려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달래면서 학회장에 앉아 맨 마지막이었던 내 발표 차례를 기다리는데, 발표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더니 내 발표가 시작되는 시각이 되자 좌장과 행사를 진행하는 노란 조끼를 입은 아르바이트생 2명만 남고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폭설로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은 학회에, 분야가 다른 발표가, 당일 맨 마지막에, 학생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인생의 첫 학회 발표에서 청중이 한 명도 없다니. 발표는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를 해야한다니. 좌장도 아르바이트생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뒷문으로 한 명이 들어오는데, 놀랍게도 실험실을 오래 전 졸업하신 선배님이셨다. 선배님 지인 한 분도 따라서 들어오셨다. 자상한 표정으로 발표를 하라고 권하셨고 나는 그렇게 2개의 발표를 연이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하늘도 돕지 않았던 첫 발표였지만 한편으로 그날 선배님이 다른 강연장도 아닌 그곳에 찾아오셨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걱정을 했던 발표, 2006. 08.23, IMID, 대구 EXCO
내 한 평생 가장 많은 근심 걱정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했던 발표는 박사과정 2년차 여름에 대구 EXCO에서 열렸던 IMID에서의 구두발표였다. 그 시절 유행이었던 어학연수는 커녕 해외 어디에도 다녀와 본 적 없는 촌놈이었던 나는 준비하는 3달 내내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한숨 지으며 지냈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있었다면 영어 발표하는 영상을 참고해서 스크립트라도 짜기가 수월했을텐데, 그때는 구글도 없던 시절이었다. 정작 더 큰 걱정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였다. 질의 응답시간에 무슨 말인지 몰라요..라고 쳐다만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자꾸만 머리속에서 그려져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나름 세운 대책이 국제어학원의 CNN 청취 수업을 신청하여 듣는 것이었다. 국제학회발표 질의 응답에 대한 대책으로 CNN 청취 수업이라니. 발표 몇 일 전 지도교수님 앞에서 리허설을 했고, 지도교수님은 지하 1층에 있던 연구실이 바닥을 뚫고 지하철까지 내려갈 것 같은 한숨소리로 평가를 대신하셨다. 그때 지도교수님께서 꾸지람 대신 해주신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이 “단어를 또박또박 이야기해라”는 것이었다. 졸업 후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내면서, 그리고 이후 숱한 영어발표 경험을 해가면서, 그리고 학생들과 영어로 랩 미팅을 하는 지금까지, 지도교수님의 말씀이 참 좋은 말씀이셨다 싶다.
연습했던 대로-비록 문어체 문장이 온통이었을 스크립트를 실수 없이, 때로 청중과 눈도 마주쳐가며 발표를 마쳤다. 드디어 질의 응답시간, 앞쪽에 앉아있던 갈색 곱슬머리의 외국인이 질문을 했다. 나는 그날 내가 무슨 답변을 했는지 한 단어도 기억을 못한다. 다만, 그 질문을 했던 사람이 이제는 고인이 된 우크라이나 물리연구소의 Yuriy Reznikov 박사님이었다는 것 만을 기억한다.
Reznikov 박사님이 그때 나에게 질문을 해주었던 것은 나에게는 연구자로서 또 한 번의 큰 행운이었다. 요즘 들어 더욱 남달리 느껴지는 인연이라는 것이 그 분과 있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기업체에 근무를 하며 함께 연구과제를 수주하기도 하였고,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우정을 쌓기도 하였다. 내가 영어 논문 작성이 아직 많이 서툴렀던 부산대 연구교수 시절, 투고했던 논문의 review 결과가 왔는데, reviewer가 내 논문에 영어 문법 첨삭을 해서 주었다. 나는 그것이 Reznikov 박사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나에게 베푼 호의였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꿈을 꾸게 했던 발표, 2007. 05. 22, SID, 미국 Long Beach 컨벤션 센터
지금이나 그때나 디스플레이 분야 세계 최고 권위의 학회는 미국에서 개최되는 SID였다. 연구비 사정이 빠듯하여 언감생심이었던 학회였는데, 지도교수님께서 선뜻 논문을 내보라고 제안하셨고, 다행히 포스터 발표로 제출한 논문이 accept되어 드디어 30살 평생 처음으로 해외를, 그것도 미국을 가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생전 처음 가본 SID 학회장에서 깜짝 놀랐던 것이 있었는데 세상에 그렇게 큰 강연장이 있는 것을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논문에서나 보았던 기라성 같았던 학자들이 한 강연장에 촘촘히 앉아 있었고, 그때 다짐을 했었다. 내가 다음 번에는 꼭 이 넓은 강연장, 세계 최고 권위의 이 학회장에서 저 별들 같은 학자들 앞에서 구두 발표를 해보아야겠다, 학회가 마치는 마지막 날 빈 강연장을 둘러보며 다짐하고 돌아왔다.
그해 11월 미국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로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구하여 가게 되었고, 다음 해 2008년 5월 20일, SID에서 구두 발표를 하였다. 발표의 완숙함은 한참 부족했지만, 사진 속 표정을 보니 자신감은 꽤 있었던 모양이다. 2009년과 2010년에 San Antonio, Seattle에서 개최된 SID에서 3년 연속 구두 발표를 하였고, 2010년에는 생전 처음으로 발표가 끝나고 난 후 사람들에게서 발표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보았다. 국내, 국제 학회를 통틀어 발표 마치고 칭찬을 받아본 것이 그때가 비로소 처음이었고, 10년이 걸렸다.
격려가 되었던 발표, 2011. 10. IMID, 일산 KINTEX
누구나 인생의 부침을 어느 순간이고 겪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 힘든 때가 찾아왔었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준비를 하기 위해 잠시 부산대학교 윤태훈 교수님 연구실에서 연구교수로 의탁하며 지내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IMID 초청강연을 제안해 주셨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고, 출장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곧 너의 생일인데 집에 오지 않겠느냐. 음력 생일을 어려서부터 썼기 때문에 매년 내 생일이 언제인지 감이 없이 지내는데 발표일이 생일이었다.
그때 윤태훈 교수님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은 나보다 7, 8살 씩 어렸지만 유난히 정이 많고 속이 깊고 따뜻한 친구들이었다. 내가 전북대에 직장을 잡고 한 번도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옮길 생각도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 부산대에서 지내며 느꼈던 그 따뜻하고 속 깊은 우정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환경의 전북대에서도 학생들과 그런 관계를 만들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지낸다.
학회에서의 발표는 썩 잘하지도 못했고, 외국인 학자 한 명이 십자포화 질문을 쏘아대는 통에 마치고서도 기분이 별로였다. 터덜터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학생들이 아이스크림 케잌과 꼬깔모자를 깜짝 준비를 해서 축하를 해주었다. 이듬해 나는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그 이듬해 전북대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지내고 있다. 그때 부산대에서 지냈던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인생을 살아갈 큰 용기를 얻었고, 현재까지 이렇게 큰 탈 없이 지내고 있는 것은 모두 윤태훈 교수님과 그때 정겨웠던 학생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보람이 되었던 발표, 2017. 05. 25, SID, 미국 LA 컨벤션 센터
윤태훈 교수님의 추천 덕분으로, 대학원생 시절 그렇게 선망하였던 SID에서 초청강연을 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제는 흰머리가 많아진 그 옛날 나에겐 별들이었던 학자들 앞에서, 그리고 지도교수의 발표를 호기심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똥그랗게 쳐다보고 있던 나의 대학원생들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연구한 내용으로 초청강연을 하였다. 인생에 오랫동안 남다른 의미로 남을 발표였다.
행운을 기원하며🍀,
대학원생 때부터 지금까지 학술대회 발표들을 경험하면서 의지와 무관한 불운을 만나기도 했고, 많은 난관과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한 적이 많았다. 이만하면 발표를 좀 하는 것 아닐까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미처 내 역량으로 풀어낼 수 없는 상황이 예외없이 나타났었다. 하지만 그 과정 중 뜻밖의 행운이 함께 찾아왔었고, 그 행운이 지금까지 나에게 쉼없이 용기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연구자의 길을 들어선 나의 대학원생들, 날마다 많은 고민들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고 있을 그대에게도 분명 그 행운이 깃들 것이며, 오랜 시간 당신의 심장에 용기를 불어넣어줄 것임을, 꼭 그런 일이 당신에게도 생길 것이니 조바심내지 말라는 당부를 전한다.
<행운의 향기> 2023. 09. 14.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오니 은은한 향기가 나서, 어제 잠시 켜놓은 양초 향이 남았나 했더니, 10년 전 임용되었을 때 선물로 받아서 아직 용케 키우고 있는 난초가 꽃을 피웠다.
오늘 BK사업신청서 제출을 하였는데, 행운의 Signal이었으면 싶다.
<딸의 필통> 2023. 09. 08.
3년 전에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서너달쯤 되었을 때, 필통을 열어보니 지우개 보관하는 망이 찢어져 있어서 학교 다닌 지 아직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상했나 물었더니, 지우개 꺼내기 불편해서 가위로 잘랐다고 해서 딸을 한참 쳐다보았었다.
연필 캡을 열어보니 심이 다 뭉특하길래 연필깎이로 깎아주었는데, 왜 뾰족하게 만들었냐고 야단을 쳐서 연필을 잘 깎아야 글씨를 잘 쓸 수 있지 않냐고 했더니, 자기는 심이 동그랗게 되어야 글씨가 부드럽게 써져서 좋다고 해서 또 한참 쳐다보았었다.
학용품이 상할까봐 조심조심 썼었고, 사각사각 글씨가 써지는 느낌이 좋아서 매일 네 자루씩 뾰족하게 깎아다녔던 나로서는, 새 필통에 하트를 딱 그려놓은 얘가 정말 내 딸이 맞나 싶은 순간이었다.
<낚시를 하는 이유> 2023. 06. 04.
초등학교 4학년 때 밤낚시를 처음 해보던 날 깜깜한 바다에 미끼를 꿰어 넣었더니 곧 후두둑 물고기가 무는 것에 심장이 쿵쾅뛰었다. 그건 흔히 말하는 손맛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깜깜한 바다 속으로 내가 보낸 신호에 거침없이 돌아온 응답에 놀란 탓이었다. 사람은 신호를 주고 받는 통신, 소통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있고, 낚시는 그 속성을 지니고 있다.
낚시는 장소에 따라 계류낚시, 담수낚시, 바다낚시로 나눌 수 있고, 방법에 따라 맥낚시, 루어낚시, 찌낚시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바다 & 찌낚시의 조합을 가장 좋아한다. 깜깜한 밤에 조명을 밝힌 찌를 연결해서 먼 바다를 향해 던지면, 찌는 별똥별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밤하늘을 날아 바다 가운데 툭 떨어진다. 깜깜한 밤하늘을 향해 날린 작은 빛은 꼭 막막한 인생에서 무엇인가 찾아보려는 시도 같고, 바다에 떨어져 생각하지 못한 조류를 타고 흔들리는 모습은 매일 불안한 속 마음 같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 예상이 맞아 물 속으로 찌가 사라지는 걸 보고 용기를 내어 살아간다.
낚시의 어떤 점이 좋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정유정의 <7년의 밤>에서 술꾼에게 술을 왜 마시냐고 묻는 것은 공동묘지에 가서 왜 죽었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낚시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바닷가에 갯바위가 몇 개가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perimentalist> 2023. 05. 24.
나는 나를, 그리고 연구실의 대학원생들까지 합쳐 우리를, Experimentalist라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항상 자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던 행정적 업무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실험은 학생들이 하고 나는 학생들이 가져오는 실험결과로 논문을 쓰거나 써온 논문을 고치는 일만 하고 있었다. 바빠서 연구실적이 줄었다는 변명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아서 밤에 아이를 재우고 눈비벼 가며 애를 썼기에 논문 실적은 줄지 않고 꾸준했다. 20명이 넘는 대학원생들이 하나 빠짐없이 SCIE논문을 주저자로 쓰고 졸업했고, 다 취업을 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 나를 잃어버렸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길 위에 놓인 내 발이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서 있는 곳과 내가 보고 있는 곳이 다른 줄을 몰랐다. 나를 잃어버렸으니, 자연히 학생들도 잃어버렸다.
요즘 나는 다시 실험을 한다. 대학원생들이 내 눈치보지 말고 실험에 집중하며 생각할 수 있게 나는 주말에 한다. 잡념없이 오롯이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고 집중했던 시간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는 책에서 저자가 교수직을 그만두며 했던 고민들이 깊이 공감되었다. Professor라는 호칭은 종종 혐오스러울 때가 있지만, Experimentalist라는 단어는 나를 여전히 가슴 뛰게 한다.
<줄탁동시> 2023. 05. 20.
어렸을 적 저녁 나절이면 한꺼번에 피어나는 분꽃이 신기해서 어떻게 오므렸던 게 벌어지나 그 신비를 잡으려고 꽃봉오리 하나를 지목해서 지키고 있으면 딴 꽃은 다 피는데 지키고 있는 꽃만 안 필 적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었다. "그건 꽃을 예뻐하는게 아니란다. 눈독이지. 꽃은 눈독 손독을 싫어하니까 네가 꽃을 정말 예뻐하려거든 잠시 눈을 떼고 딴 데를 보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박완서>에서.
교육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이야기일테지만,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 적절한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일지라도 때마다 다르고, 그 때라는 것도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간에 시차가 크지 않아야 한다.
먼저 배운 사람은 껍질 속에 있는 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얼마나 준비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직관"이 있어야 하고, 희미한 소리로 껍질을 쪼기 시작할 때 나즈막히 놀라지 않을 만큼의 소리로 바깥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하고, 계속 바깥에 있다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할 듯. 그 중에서도 첫째는 신뢰인 듯.
<남색 양복> 2023. 05. 15.
올해 첫 강의 때 교과 소개를 하다가 내 사진이 떠 있는 슬라이드를 보고 "이 사진 옛날 사진 같아 보이니?" 라고 물었더니 많은 학생들이 주저함 없이 네! 라고 대답을 했었다. 예전부터 나이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누가 봐도 옛날 사진인 걸 자기 현재 모습이랑 똑같다고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 왔던 터라, 솔직하게 대답해준 학생들이 사실 고마워서 웃었고, 미안하다 사진을 바꾸겠다고 했다.
사진 속 입고 있는 저 양복은 지금으로부터 10년 반 전, 2012년 가을, 전북대학교에 공개강의 면접을 보기 위해 서수원 이마트에서 샀던 옷이다. 저 옷을 입고 면접을 보며 학부의 선배 교수님들 앞에서 성실함을 약속했었다. 저 옷을 입고 강의를 하며 좋은 학생들을 만났었다. 저 옷을 입고 대학원생들 장학금 벌러 먼 길 출장을 많이 다녔었다. 교만해져 모든 것이 하찮게 여겨지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저 옷을 입으면 마음이 다시 조용해졌다.
10년 동안 입고 세탁하는 걸 반복하며 다리미질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지 이제 옷깃 뿐만 아니라 이음새도 천이 맨들맨들하게 닳아 윤이 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탁소에 맡겨 깨끗이 씻고, 옷장에 잘 넣어놓은 다음, 20년 뒤 은퇴하는 날 꺼내서 한 번 입어보고 싶다. 이제 지난 10년의 시간과 작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