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월간참여사회 1-2월호 여는글

글.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태어날 때 세상을(鄭) 편안하게(康) 살아갈 놈(子)이라고 얻은 이름인데 아닌 것 같아 분한 마음이 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줄곧 일상의 재구조화를 꿈꾸며 사나보다.

성탄 전야지만 촛불시민들은 어김없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웠다. 2016년을 보내는 마지막 날에도 그 자리, 광장에는 간절한 마음의 촛불이 붉게 일렁였다.

촛불시민들은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벌써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멀었으니 눈비가 내려도 지치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내 광장을 지키자고. 그래서 내가 있고 네가 있는 이 나라, 이제 좀 사람답게 사는 새 나라로 함께 만들어 가보자고. 이처럼 서로에게 희망을 확인하며 하나가 되는 순간을 짧지 않은 인생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경험하게 될까?

광장의 힘은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켰고, 헙법재판소가 최순실씨 등 비선조직이 국정을 농단했는지, 대통령은 권한을 남용했는지,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는지, 국민의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했는지(세월호 참사), 재벌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는지를 물으며 탄핵 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10번의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촛불이 이어지면서 크고 작은 토론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후배는 ‘우리는 왜 촛불을 들었는가?’라는 토론에서 ‘양심의 움직임에 따라’라고 응답했단다. 대통령은 국정을 농단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중대 범죄자이고, 나는 이 나라의 주권자로서 박근혜퇴진의 촛불을 들고 광장을 지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웃는다. 맞는 말이다.

바로 그 광장의 촛불 행진 사이에 양심을 지키는 또 하나의 몸짓이 있었다. 참여연대 상근활동가 홍정훈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이다. 집총을 거부하고 전쟁을 반대하기 때문에 그를 ‘양심에 따른 반전주의자’라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가 택한 '양심에 따라 행동할 자유’는 정신적 기본권 중에 가장 근원적인 권리다. 이 내면적 절대적 자유는 그 무슨 이유로도 제한할 수 없다. 홍정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이 양심의 자유에서 도출된다. 대한민국에서 병역의무란 병력을 확보하여 국방력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헌법상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조치인 만큼 그 목적 또한 정당하다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병역의무자가 입영을 거부하면 병역법 제88조의 ‘병역기피죄’로, 입영 후 집총을 거부하면 군형법 제44조의 ‘항명죄’로 처벌받게 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그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다. 국제 앰네스티에 의하면, 1950년부터 지금까지 1만 8천 8백여 명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형사 처벌받았다고 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병역의무의 이행’은 이처럼 헌법상 법익이 충돌하고 있는 문제다. 헌법가치가 갈등관계에 있어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둘 다 보장이 어려울 경우, 양자택일만이 해결방안이라 할 수 있는가?

2016년 7월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에 응한 변호사 1,297명 가운데 80.5%(1044명)가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했다. 12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헌법소원을 심판중인 헌법재판소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형사 처벌하는 것은 보편적 인권인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각각의 헌법가치가 공존하며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UN은 세계인권선언과 자유권규약상의 양심의 자유를 통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권을 인정하고 체약국에 이를 권고하고 있다.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도 여러 나라다. 그러나 우리 법원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판단은 아직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추웠던 겨울날 광화문에 선 한 청년의 외침을 들으며 대체복무가 병역의무 이행과 같은 크기의 가치가 있고, 대체복무의 인정 여부를 공정하게 판정할 기구를 구성하여 심사절차와 심사기준을 마련하는 제도가 도입되어야 할 시기를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바뀌는가?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의 고통이 우리의 희망으로 외쳐질 때 세상은 어느새 변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더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