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書の最初の一語であるヘブライ語の「ベレシート($\text{בְּרֵאשִׁית}$)」とギリシャ語の「エン・アルケー($\text{ἐν ἀρχῇ}$)」は、単なる時間的な始まりを超え、神の壮大な神殿建築計画を内包しています( 神殿の本質とは、かしらなるキリストと、その体に連なる聖徒との有機的な一体化にあります。= キリストとの連合 )
ベレシート(ヘブライ語の破字分析):
ベート($\text{ב}$): 神殿、家
レーシュ($\text{ר}$): 始まり、頭
アレフ($\text{א}$): 神
シン($\text{שׁ}$): 分析、反芻
ヨッド($\text{י}$): 広げられた手
タヴ($\text{ת}$): 完成の印
意味:「聖所の始まり。その頭(かしら)であられる神が、神ご自身을解き明かされることで、時間の中に生きる存在たちに手を伸ばして渡してくださる、完成の印(しるし)。」
「イエスを産む」ということは、ヨハネの黙示録に登場する「女が鉄の杖を持つ男の子を産む」事件のことを指します。それは、私が全く何者でもないという、この肉的な自己が完全に否認される過程を経て、結局イエスだけを信じるようになることを「子孫を産む」と言うのです。しかし、それは私に何か能力があるからではなく、神の約束によってそのようになったのであり、それが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産んだ事件なのです。理解できますか?
つまり、私がこのイサクを産んだこと、すなわち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ったこと、そして新しくイエスの中で神の長子となったことが、神様によって、全的な恵みによって私に許された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を知ること。それが、全的に神様が恵みとして信仰を私に与えてくださり、プレゼントをくださって成されたことなのだと知ることが、自分の心臓に刃を突き立てることなのです。
「私はダメなのだな」……これが全的な自己否認の絶頂であり、それがイサク、すなわち「私」を殺す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それがアブラハムとイサクの物語であって、決して私たちに献身を強要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皆さんのような朽ち果てる体を、神様がなぜお受けになるというのですか? え? 皆さんが神様のためにできることが何がありますか。イエスを信じることでしょう。「神の仕事とは何か」と問われ、「イエスを信じることだ」と仰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それなのに、私たちは神様の仕事を「手伝って差し上げよう」としきりに言うのです。一体どんな仕事で、どうやって手伝おうというのですか?
ニューヨーク、ニュージャージーの集会に行ったら、宣教師の方々がとてもたくさん来られていました。コスタリカからも、ユカタンからも、コートジボワールからも。そんな国もありますか?(笑) ともかく、その宣教師の方々がどうやって来られたのか、私は驚きました。ユカタンのような場所にいる韓国人宣教師だけで30人以上になるそうです。ところが驚いたことに、その宣教師の方々が私たちの教会の本と説教を持って、週に一度集まって聖書勉強をしているというのです。その方たちが聖書をそのように学び、そこで本当の正しい宣教をするのだと考えたら、私の胸が躍りました。コスタリカから来られたある宣教師は、説教を聴きながら「自分は一体この50年間何をしていたのか」と、そこにひれ伏して号泣し、一時間も涙が止まりませんでした。「自分はこれまで何をしていたのか。自分は異端の中の怪物(魁首)だった」と……そんなことが起きているのです。
その方たちと一緒に食事をしたのですが、一様に仰ることはこうです。「そうです。私たちが行って何かをしようとした時は、常にそれが自分たちの『義』として積み上がってしまいましたが、本当の神の仕事、すなわち自分たちが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り、聖書を学び、福音について悩み、自分たちが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ると、本当の神の仕事が発生して、神の民が生き返ってきたのです」と。それが「仕事」なのです。 それなのに、何の「献身」をしようというのか分かりません。献身をしようとすること自体、「私は神様に捧げられるほどの価値がある」ということが前提にな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神様は正直に言って、皆さんの祈りもお受けになりません。祈るべき内容さえ分からない者たちがする祈りを、なぜ神様が受け取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か? 神様は、その内にある「言葉にできないうめき」をもって祈る聖霊の祈りだけをお受けになるのです。
それなのに、自分たちが祈ってどうなったとか、祈ったらああだこうだ。祈りとは、「私は神の前で、絶対に自分の力では何もできない者です」ということが前提となるものでしょう。何かできる力があるなら、なぜ祈るのですか。一生懸命努力すればいい。磨きをかけ、体力を鍛えて、やってみればいい。それなのに私たちは、祈りをあたかも自傷行為の手段のように、「私はこれほど一生懸命祈り、生活に支障が出るほど、飯まで抜いて祈っているのに、神様は聞き入れてくれないのか」と言います。
見てください。私は今週が収穫感謝日であることも知らずに外に出たら、人々が(笑)「収穫感謝日なのに何もしないのか」と言うので、「今日が収穫感謝日なんですか?」と聞きました。そうだと仰るので、「じゃあうちの教会はどうしよう?」と思いましたが、考えてみれば元々何もしていなかったから、まあいいかと(笑)。感謝の題目を話したり何だりしていますが、収穫とは何ですか? 収穫とは、モリヤの山でアブラハムがイサクの心臓に刃を突き立てる、すなわち自分の心臓に刃を突き立てるその地点が「収穫」なのです。
収穫とは、この地に植えられた神の民が、地から切り離されて引き上げられることが収穫なのです。完全に死ぬことが収穫だというのです。 だとすれば、厳密に言ってキリスト教徒の収穫感謝祭は、この世で自分が望むものが一つも与えられなかったとしても、世のものは一つも収穫できなかったとしても、それによって自分が地から少しずつ切り離されていく経験をしている人こそが、収穫を感謝できる人なのです。神様は何と仰いますか? 私たちは祈るべき内容も分からず、ただ何を神様に要求すべきかも分からないのに、私たちの弱さを、私の内におられる聖霊が助けてくださると仰るでしょう。ならば、私たちの内にある「弱さ」とは何でしょうか。私たちが本当に祈るべきことを祈らず、見当違いなことを祈るのが私たちの弱さなのです。私たちは分からないのですから。では、それを「助ける」と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これを聞き入れないでください、神様!」……これが聖霊の祈りなのです。聖霊が私たちの内で言葉にできないうめきをもって私たちの弱さを助けるというのは、「こいつらは祈るべきことを知らずに見当違いな祈りをしているから、神様、これを聞き入れないでください」というのが、私たちの内での聖霊の祈りなのです。神様が聞き入れられる祈り。
それなのに、一生懸命一年間、神様が収穫をさせてくださって、「ああ、今回はこれだけ感謝献金をたくさんしたから、来年の一年も必ずお願いしますよ」。これでしょう? 賄賂を贈っているのと何が違うのですか、収穫感謝献金が。(他の教会は書き入れ時なのに、うちの教会はいつもチャンスを逃す(笑)。強調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なのに……そうすれば一年間、収穫するものをさらにたくさんくれると言うのに……)。 一体何を感謝しているのかというのです。結局、礼拝堂の中で皆、巫堂(ムーダン)のお祓いをしているのです。それがシャーマニズムでなくて何ですか? 無俗信仰(アニミズム)。知りもしない絶対者に裏金を渡して、自分が望むものをたくさん手に入れること。そうではないというのです。
このように、私たちが約束の子孫を産むということは、結局「神様、この子孫は私が産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ね」と告白すること、これが信仰の絶頂です! だから使徒パウロは最後に「私は罪人の中の怪物(魁首)です。I’M THE WORST」と言って死んだのです。そこへ向かう道、それが神を信じ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か? 彼らは神の恵みを知っているのです。皆さん、なぜ父親は放蕩息子に指輪をはめてやりましたか? それは印鑑です。父親の印鑑。その家のすべてを任せたということです。指輪は一つしかありません。それなのに、なぜ放蕩息子にそれをはめてやるのか。彼が何をしたというのですか。
皆さん、神の国というものが、何かそのような生産性や、余剰の獲得、余剰の創出、これが目的ならば、それは旧約の律法主義でしょう。「一生懸命努力してやってみろ」と。ならば長男に印鑑を渡すべきです。彼は一生懸命やって、本当に父親が喜ぶような(実際には父親はそれを喜んで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が)、世俗的に見れば律法的に完璧に生きた人ではないですか。そして死ぬほど働いたというのです、家で。しかし、死ぬほど働いたことを盾に、父親を弾劾するではありませんか。「お父さん、私はこれほど働いたのに、なぜお父さんはあ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ですか」と。 つまり、律法(法)を持って仕事をした者は、必ず自分が属している場所を法で治めるようになります。しかし、法は常に格差と疎外階層を生み出すことになるのです。だから父親が……そこは何ですか? そこが地獄です。しかし息子は、次男は恵みを知る者です。「私は何もしていないのに、お父さんが恵みで自分を救ってくれた」と、恵みを知る者にその国を任せるのです。だから神の国は「恵みの国」であって、「報酬(報い)」で治められる国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私たちに見せているのです。だから放蕩息子が印鑑を受け取るのです。
それなのに、私たちは「健康な教会」「健全な教会」という名の下で、改革主義は何を育てようというのですか?「長男になろう」としているでしょう、今。皆、骨折って努力して長男になろうと。「恵みを知れ」と言うと「長男になろう」と。 そうではありません、皆さん。私たちは絶対に神の前で、自分の価値を主張できない者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だんだんと、だんだんと。それがイサクを捧げる仕事です。
1620年9月、イギリスから清教徒35名と一獲千金を狙う商人たちを合わせ105名が、新大陸アメリカへ向けて出発し、66日目にアメリカに到着した。 彼らのうち清教徒の牧師であるウィリアム・ブリュースターが、彼らだけのためのメイフラワー誓約を作り、彼ら全員を統率した。
清教徒たちがアメリカに到着した時は冬であったため、食べるものがなく、寒さに震えながら人々は死に始めた。 彼らは先住民の穀物倉庫に入り、穀物を盗んで空腹を凌いだ。 彼らが新大陸に到着して真っ先にした行動は、教会の建設でも教育施設の設置でもなく、食料の窃盗であった。
その時、近くにいたワムパノアグ族の先住民たちが清教徒たちのいる場所へ包囲網を狭めながら観察したところ、清教徒たちは飢え、裸同然で、ほとんど死にかけていた。 先住民たちは彼らをことごとく全滅させることもできたが、清教徒たちのそのような姿を見て哀れに思い、食料や寝具などを届けてやり、翌年の春には種を与えて農業の仕方を教え、耕す土地を与え、海で魚を捕る方法を教えた。 その年の秋に豊作となり、清教徒たちが感謝祭を捧げる時、先住民たちは鹿5頭、野生の七面鳥、各種の特産物を届けて祝福した。
イギリスからは、さらに多くの移民が入ってき始め、食料と土地が不足し始めた。 白人たちは先住民の代表たちを招待して毒殺し、その首を跳ねて高い棒に吊るした。 それを見た先住民たちは、リーダーもおらず白人たちが恐ろしくて遠くへ去ってしまい、白人たちは空いた土地を占領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 自分たちが寒さと飢えで死にゆく時に恵みを施してくれた先住民たちに対し、悪をもって報いる白い色の悪魔たち。
(評壇文化社、趙燦善(チョ・チャンソン)牧師著『キリスト教罪悪史(下巻)』より要約)
このように始まったのが、収穫感謝祭という起源である。 アメリカで白い悪魔たちが作った収穫感謝祭というものが、韓国の地に伝来し、ここでも盛んに行われている。私たちの固有の農耕社会に由来した秋夕(チュソク)でもなく、あのような人間とも思えぬ悪魔のような行動を犯して誕生した収穫感謝祭というものを、韓国の教会もそのまま踏襲し、礼拝堂の十字架の前に豪華に供え物をするのを見ると、紙榜(チバン、位牌)を書いて食べ物を並べた祭祀膳(チェササン)と何が違うのか。 違う点があるとすれば、紙榜の代わりに十字架があるだけであり、お辞儀をする代わりにその前で踊り歌う、出し物をすることだ。 この地球上で収穫感謝祭を守っている国は、アメリカと韓国だけだそうだ。いや、韓国人が移民して建てた韓人教会と、韓国人宣教師が開拓した教会にだけ存在するというのだ。
収穫感謝祭は聖書的なものではなく、初期のアメリカ人たちが自分たちの死の直前に生き返った記念日に過ぎない。 ある牧師や牧師に追従する信者たちは、「収穫感謝祭は聖書に出てくる収蔵節(仮庵の祭り)を守るものだ」と大声で反論するだろう。 ならば、なぜ収蔵節だけを守り、過越祭(過ぎ越しの祭り)は守らないのか? チャン・ギルジャ(神様の教会)では、必ず過越祭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っているそうだが! あなたたちもチャン・ギルジャたちのように、旧約のすべての節気を守るなりすればいい……。 収蔵節が一年の農業に感謝して守るものだと言うなら、過越祭は罪の奴隷であったエジプトからサタンの象徴であるパロの手から救い出し、乳と蜜の流れるカナンの地へと導き出した、収蔵節と比較できないほど大きな節気ではないか? また、プリム祭(ピュリム)はどうなのか? サタンを象徴するハマンの手からユダのすべての民が絶滅させられようとした瞬間に、そのハマンを殺し、すべてのユダの民が救いを受けた、とてつもなく大きな事件のある節気ではないか。
イエス様の恵みで生きる今の時代は、いかなる節気や、日や、行為や、場所や、儀式や、形式や、衣服や、(牧師、長老、勧士、執事といった)職分の権威、これらを問い詰めず、日々自分の内におられる神様と同行する生活を送ることこそが「主日」であり「礼拝」であり「祈り」であり「感謝」であり「愛」であり、これが神を信じる信仰であり、イエス様が私たちに教えられたことである。
「だから、食べ物や飲み物のこと、あるいは祭日や新月、安息日のことで、だれにもあなたがたを批評させてはなりません。」(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2章16節)
예수를 낳는다는 건
그게 계시록에 나오는 여자가 철장을 든 아이를 낳는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거는 내가 전혀 아무 것도 아닌,이 육적자아가 다 부인돼있는 과정을 겪고 결국예수만 믿게 되는 걸 후손을 낳는다 그래요. 그런데 그게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렇게 되었다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나은 사건이란 말이에요.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까 내가 이 이삭을 낳은게 예수를 믿게 된게 그리고 새롭게 예수 안에서 이제 하나님의 장자가 된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전적인 은혜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전적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믿음을 나에게 주셔서 선물을 주셔서 된 것이다를 아는 게 내 심장에 칼을 꽂는 거란 말입니다.
난 아니구나 이게 전적인 자기부인의 절정,그것이 이삭,나를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지. 절대로 우리에게 헌신을 강요하거나. 여러분이 이 썩을 몸뚱아리를 하나님이 왜 받으십니까? 예?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요. 예수 믿는 거잖아요.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그러니까 예수믿는 거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자꾸 도와드리겠다 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일로 어떻게 도울 거냐구요.도대체가?
뉴욕. 뉴저지집회 가니까 선교사님들이 그렇게 많이 오셨더라고요. 코스타리카에서도 오시고 유까딴에서도 오시고 코트티푸아루? 그런 나라도 있어요? ^^ 하여튼 그 선교사님들이 어떻게 왔냐면. 저는 깜짝 놀란 게 말이죠. 유까딴 같은 데 있는 그 선교사님들이 삼십명이상 된대요. 한국 선교사님만. 근데 세상에 ...그 선교사님들이 우리 교회 책과 설교를 갖고 일주일에 한번씩 선교사님들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대요. 아니 그분들이 성경공부를 그렇게 해서 거기에서 선교를 이제 진짜 올바른 선교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니까 어~ 제가 가슴이 뛰는 거 있죠. 코스타리카에서 오신 그 선교사님은 설교를 듣다가 내가 그럼 도대체 오십 년동안 뭐 한거냐구 여기 엎드려갖구 통곡을 하는데 한시간동안 울음을 그치질 않아요. 나는 그동안 뭐한거냐. 내가 이단 중에 괴수였다구 ...그런 일들이 일어나드라니까요?
그러니까 그 분들이 같이 식사를 하는데 일률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맞습니다. 우리가 가서 무엇을 하려고 했을때는 항상 그것이 다 자기들의 의로 쌓였는데 진짜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예수를 믿게 되자 성경을 공부하고 그렇게 복음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자기들이 예수를 믿게되자 진짜 하나님의 일이 발생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올라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일이라니깐요?
근데 무슨 헌신들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헌신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나는 하나님께 드려질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게 전제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솔직이 말해서 여러분의 기도도 안 받으세요. 아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는 기도를 뭐 왜 받냐구요? 하나님이.. 그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성령의 기도만 받으신다니까요?..
그런데 자기들이 기도해서 뭐가 됐다 그러구 기도했더니 어쩌구저쩌구. 기도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없는 자 입니다가 전제되는 게 기도잖아요. 뭔가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왜 기도를 해요. 열심히 노력을 하지. 갈고 닦고~.체력을 단련하여. 해보면 되지. 근데도 우리는 기도를 마치 무슨 자해의 수단으로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생업에도 차질이 있을 만큼 그리고 내가 밥까지 굶어가면서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안들어줘요?
그러니까 보세요. 내가 나는 이번주 추수감사주일인지도 모르고 나가갖구봤더니 사람들이 ㅎㅎ 추수감사주일인데 뭐 안하냐구 그러길래 어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에요? 그랬더니 그렇대요. 그래서 어 그럼 우리교회 어떡하냐? 아 근데 뭐 생각해 보니까 원래 아무 것도 안했었는데 뭐.어때요 ㅎㅎㅎ 그러면서 무슨 뭐 감사의 제목들을 이야기하고 뭐 하는데
추수라는 게 뭐예요. 추수라는 게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기 심장에 칼을 꽂는 그 지점이 추수인거예요.
추수라는 건 이 땅에 심기웠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땅에서 끊겨 올라오는 게 추수라고요. 완전히 죽는 게 추수라니깐요?
그러면 추수감사절은 엄밀히 말해서기독교인의 추수감사절은 이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도 안주어졌다 할지라도 세상의 것은 하나도 추수를 못했다 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내가 땅에서 조금씩 끊겨 올라가는 경험을 하는 그 사람이 추수를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뭐라 그래요? 우리는 기도할 바도 알지 못하고 그냥 무어를 하나님께 요구할지도 모르는데 우리의 연약함을 내 안에 있는 성령이 도우신다 그러죠. 그러면 내 안에 있는 연약함이 뭐겠어요. 우리가 진짜 빌어야할 바를 빌지않고 엉뚱한 말하는 것을 비는 게 우리의 연약함이란 말예요. 우린 모르니까 그럼 그걸 돕는다는 게 뭐겠습니까?
‘요거 들어주지 마세요,하나님!’ 이게 성령의 기도라니까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는 건 ‘쟤네들은 기도할 바를 몰라서 엉뚱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거 들어주지 마세요’가 성령의 기도란 말예요 우리안에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그런데 열심히 1년동안 하나님이 추수를 하게 해주셔서 오 요번에 내가 이렇게 감사헌금이나 이걸 많이.했으니까 다음에 한 해도 꼭 부탁해요. 이거지요? 뇌물주는 거지 뭐예요? 추수감사헌금이.응? (다른 교회 다 대목인데 그냥 우리 교회는 늘 대목을 놓쳐. ㅎㅎ 강조를 해야 되는건데 이거를...그래야 일년동안 확 추수할 거를 더 많이 준다 그러는데... )
그러니까 뭘 감사하는 거냐구요.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서 다 무당굿하는 거죠. 그게 샤머니즘이지 뭡니까? 무속신앙. 알지 못하는 절대자에게 와이로 줘가지구 자기가 원하는 거 많이 얻어내는 거요.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약속의 후손을 낳는다는 건 결국 하나님, 이 후손은 내가 낳은 거 아니네요.를 고백하는 거 이게 신앙의 절정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내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IM THE WORST. 그리고 죽은 거예요. 그리로 가는 길에, 그게 하나님을 믿는 거잖아요.응?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안대니깐요? 아니 여러분, 왜 아버지가 탕자한테 가락지 껴줬죠? 그거 인감도장이에요. 아버지 인감도장. 그 집안을 다 맡긴거 거든요? 반지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탕자한테 그걸 껴주냐구. 뭘 했다구.
여러분, 하나님 나라라는 게 어떤 그런 생산성이나 어떤 잉여의 획득,잉여의 창출 이게 목적이라면 이게 구약의 율법주의잖아요. 열심히 노력해서 한번 해봐. 그러면 맏아들한테 인감도장 줘야돼요. 걔는 열심히 해갖구 정말 아버지가 기뻐할 만한 -진짜 우리아버지는 그게 기쁜게 아닌데- 세상적으로 봤을 때 율법적으로 완벽하게 살아냈던 사람이잖아요? 그리곤 죽도록 일했대니깐요. 집에서. 근데 죽도록 일한걸 갖고 아버지를 탄핵하잖아요. 아버지 내가 이렇게 일했는데 왜 아버지는그렇게 일을 하십니까? 그런다니까요.
그러니까 법을 갖고 일을 한 자는 반드시 자기가 속해있는 곳을 법으로 다스리게 돼 있어요. 근데 법은 항상 차등과 소외계층을 만들어 내게 된다구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니까 거기가 뭐예요? 그게 지옥이예요. 근데 아들은 둘째아들은 은혜를 아는 자예요. 나는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우리아버지가은혜로 나를 구해줬다해서 은혜를 아는 자에게 그 나라를 맡기는 거예요. 그니까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이지 복으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탕자가 인감도장 받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건강한 교회 건전한 교회라는 곳에서 개혁주의는 뭘 키우재는 거예요? 맏아들이 되자죠 지금요. 다들 애쓰고 노력하여 맏아들이 되자.응? 은혜를 알라니까 맏아들 되자.
아니란 말입니다,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는 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점점점점. 그게 이삭을 바치는 일이에요.
1620년 9월 영국에서 청교도들35명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상인들을 합하여 105명이 신대륙 아메리카를 향하여 출발하여 66일만에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그들중 청교도 목사인 윌리엄 브루스터가 그들만을 위한 메이플라워 규약을 만들어 그들 모두를 통솔했다.
청교도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때는 겨울이니 먹을것이 없고 추위에 벌벌 떨며 사람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곡식 창고에 들어가 곡식을 훔쳐다 허기를 면했다.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행동은 교회 건설도 아니고 교육 시설도 아닌 식량 도적질이었다.
그때 근처에 있는 왐파노아족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이 있는 곳으로 포위망을 좁혀가며 살펴보니 청교도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그들을 모조리 몰살 시킬수도 있었지만 청교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불쌍히여겨 식량과 침구등을 가져다주고 그 이듬해 봄에는 씨앗을 주면서 농사 짓는법을 알러주고 농사 지을 땅을 주고 바다에서 고기 잡는 법을 알려줬다.
그해 가을에 풍년이 들어 청교도들은 감사제를 드릴 때 원주민들은 사슴 5마리, 야생 칠면조, 각종 토산물을 가져다 주며 축하해줬다.
영국에서는 점정 더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식량과 땅이 부족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원주민 대표들을 초대하여 독살 시켜 그 목을 잘라서 높은 장대에 달아 놓았다.
그것을 본 원주민들은 대장도 없고 백인들이 무서워서 멀리 떠나버리고 백인들은 빈 땅을 차지 해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은혜를 베푼 원주민들에게 악으로 돌려주는 하얀 색의 악마들.
(평단 문화사.조찬선 목사 지음의 기독교 죄악사 하권에서 요출함)
이렇게 시작된 것이 추수 감사절이라는 기원이다.
아메리카에 하얀 악마들이 만든 추수 감사절이 라는 것이 우리 한국 땅에 전래되어 이곳에서도 성행을 하는데 우리 고유의 농경 사회에서 유래했던 추석도 아니고 저 인간 같지 않은 악마들이나 할 행동을 저지르며 탄생한 추수 감사절이라는 것을 한국 교회도 그대로 따라서 답습을 하며 예배당 십자가 앞에 푸짐하게 차려 놓는 것을 보면 지방 써놓고 음식 차려 놓은 제사상 하고 무엇이 다른가.
다른것이 있다면 지방 대신 십자가가 있을 뿐이고 절 하는 대신 그 앞에서 춤추고 노래 하는 장기 자랑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나라는 미국하고 한국 뿐이란다아니 한국 사람들이 이민 가서 세운 한인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이 개척한 교회에만 존재 한다는 것이다.
추수 감사절은 성경적인 것이 아닌 초기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죽음 직전에 살아난 명절일 뿐이다.
어떤 목사들이나 목사 추종 교인들은 추수 감사절은 성경에 나오는 수장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큰 소리로 항변 할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장절만 지키고 유월절은 지키지 않는가?
장길자 하나님 어머니 교회에서는 꼭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하던데!
당신들도 장길자네 처럼 구약 모든 절기를 지키든지....
수장절이 일년 농사에 감사해서 지키는 것이라면 유월절은 죄의 노예 애굽에서 사탄의 상징인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낸 수장절과 비교 할 수 없는 큰 절기가 아닌가?
또 부림절은 어떤가?
사탄을 상징하는 하만의 손에서 유다 모든 백성들이 멸절 되려는 순간에 그 하만을 죽이고 모든 유다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어마 어마하게 큰 사건이 있는 절기가 아닌가.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지금 시대는 그 어떤 절기나, 날이나, 행위나, 장소나, 의식이나, 형식이나, 의복이나, (목사,장로,권사,집사) 이런 직분의 권위나 이런거 따지지 말고 날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주일이며 예배이며 기도이며 감사이며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로새서 2장 16절
レズリー・ニュービギンという英国国教会の宣教師がおられます。
その方は卓越した神学者でした。しかしインドで35年間、ヒンドゥー教徒に宣教をされた方です。
その方は毎週ヒンドゥー教の寺院に通い、そこにいるヒンドゥー教の指導者たちと一緒に、彼らの聖典である「ウパニシャッド」をサンスクリット語で学び、
ヨハネの福音書をギリシャ語で学びながら、お互いの聖典について討論をしていたそうです。
ところでヒンドゥー教の寺院に行くと、偉大な宗教指導者たちの肖像画が壁に掛けられているのですが、その中にはイエス様の肖像画も入っているそうです。
そして彼らも毎年クリスマスになると、そのイエス様の肖像画の前でイエス様の誕生を祝うのだそうです。ヒンドゥー教は皆さんもご存じのとおり、汎神論を基礎として作られた宗教です。このすべての世界、宇宙は一つに帰結するのであり、それを神と呼ぶ人々が汎神論者です。
簡単に言えば、この宇宙そのものが神なので、何一つ神でないもの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人間も最終的に解脱に至れば神にな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が彼らの主張です。結局、汎神論というものは無神論と同じ根を持つものです。
すべてが神であるなら、何一つ神ではないのと同じではありませんか。
ところがそのヒンドゥー教の指導者たちの中に、罪と赦しについて研究する有神論的教理を持つ神学者がいたそうです。
レズリー・ニュービギン牧師がそ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に、キリスト教で語る罪とキリストによる赦しの教理をよく説明してあげると、そ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はこう言ったそうです。「あなたが言うそのイエス・キリストさえ除けば、あなたと私の教理はまったく同じです。」私たちは皆罪人であり、罪の赦し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点には、自分も同意するというのです。
そこでそのレズリー牧師が、「それならあなたも、イエスを信じ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いうことを認めるのですか?」と尋ねると、そ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はこう言ったそうです。
「なぜそれが必ずイエスで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か。もしイエスが私を救ってくれないなら、あの多くの神々の中から、私を赦してくれる別の神を探しに行けばいいではありませんか。」
そう言って、壁に掛けられている宗教指導者たちの肖像画を指さしたのです。
今日、礼拝堂の中にも、こ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のようにイエスを信じている人が非常に多くいます。皆さんはいかがでしょうか。皆さんはなぜイエスを信じるのですか。イエス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皆さんに得られる益、皆さんに与えられる救いのためにイエスを信じ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間違った答えではあり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イエスを信じる目的が「救い」という「私たちの必要」に焦点を当てるようになると、私たちはそこで「神の栄光」というものを見失ってしまいます。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
もし私たちがあまりにも「私たちの救い」に信仰生活の目的を置いてしまうと、私たちは私を救ってくださるその方がどのようなお方なのか、私はその方を全面的に信頼できるのか、そういったことには関心を持たず、「とにかく誰でもいいから私に救いさえ与えてくれるなら、その神について行く」という方向へ行ってしまうのです。
これは本当に危険な信仰です。私たちは救いを受けるために神に仕えるのではありません。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神が、仕えられ、栄光と尊厳と賛美を受けるにふさわしいお方であるからこそ、その方に仕えるのです。
私たちが出エジプト記で学んだように、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出た後、モーセがシナイ山に登って40日間姿を見せなかったとき、シナイ山の下でイスラエルの民は金の子牛を作りました。
そしてその金の子牛を主(ヤハウェ)と呼びました。金の子牛はエジプト人が仕える豊穣と多産の神でした。つまりイスラエルの民は、自分たちを救ってくれた神に仕えたのではなく、自分たちの必要を満たしてくれる「どんな神でもよい、不特定多数の中の一つ」を拝んだのです。
キリスト教で言う信仰とは、私の必要を満たしてくれる力ある存在にへつらうことを信仰と言う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教の信仰とは、私の必要が一つも満たされないとしても、その方が主なる神であるからこそ、その方を信じることを信仰と言うのです。
皆さんはいかがでしょうか。皆さんは、皆さんに救いを与える方がどの神なのかを知ってその方に仕え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その方が誰であるかは関係なく、ただ私を地獄から救ってくれる「ある神」を拝んでいるのでしょうか。
なぜこの区別が重要なのでしょうか。後になれば、この二つの行き先が違ってくるからです。
私の救いが目的になると、私たちは救いの後の人生を走り続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しかし、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神の栄光が私の目的地になるなら、私は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その大いなる神の栄光のために今日を生きるようになります。だから正しい救いの理解を持っている人とそうでない人の人生には違いが出るのです。
つまり、酒に酔う人が自分のためにすべてを動員するのに対し、聖霊に満たされた人は神の栄光を自分の人生の中で現そうと熱心になるように、信仰とは私から神へと私の目と関心を向けることなのです。
このように「神の栄光」に焦点を当てるべき信仰が、「私の必要、私の救い」という感覚的で限られた範囲の信仰へと変質してしまったのには、いくつかの根本的理由がありますが、その中でも最も大きな影響を受けたのがルネサンスです。
キリスト教の歴史の中で1500年間は、むしろ過度に神中心の信仰でした。そのため人間が卑下され、盲信が横行し、聖職者たちが高位の官僚のように扱われていた時代でした。
しかし宗教改革が起こり、ルネサンス、文芸復興がヨーロッパを席巻すると、過度な神本主義は崩れました。そして人間の理性が強調されるようになり、聖書の啓示でさえも人間の理性の審判を経なければ啓示としての価値を発揮できないほどになりました。人間の理性で理解できない部分は、聖書の中でも容赦なく神話や伝説として扱われ始めました。
そのようにしてキリスト教は極めて人間中心的な宗教へと変質し始めたのです。
その人本主義が物質主義を生み、キリスト教は急速に人間中心的で物質主義的な宗教へと転落していったのです。だから礼拝堂に来ても「神の栄光」を求めるのではなく、「私の利益、私の救い、私に注がれるべき恵み」ばかりを追い求め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いつも私が中心です。イエスを語り、神を呼び、信仰や恵みを語っているのに、その話の中心はいつも「私」です。「私の家族、私が属している共同体」。厳密に言えば、それはキリスト教ではありません。
むしろそれを私たちは「罪」と呼びます。私たちは礼拝堂に来て感動することがあります。恵みを受けたと言うこともできます。
涙を流すこともあります。しかし皆さんが感動したその方が、主なる神ではない可能性もあります。そうした宗教的エクスタシーや感激は、どんな宗教にもあるものです。仏教にもあり、ヒンドゥー教にもあり、イスラム教にもあります。
私たちが信仰生活をしていると言いながら、このように「私の必要」に焦点を当てると、「神」という名前が付けられた偶像を作り出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そのように礼拝堂で、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ではなく、目に見える「私の必要」を求める人々は、何か感覚的で目に見える証拠を求めるようになります。なぜなら彼らは、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を知らないだけでなく、それを追い求めてもいないため、目に見える証拠を探すようになるのです。彼らがどこで一番安心するかご存じですか。「大きなもの」や「多くの人が共通して認める感動的なもの」を追い求めます。「賜物を強調するとか、宣教を強調するとかして、他の人たちは簡単には経験できないことを私たちはできる」という自負心を与えるのです。「私の必要」が主な関心である人々は、そうでなければ安心できないのです。自分が目に見える何かをしなければ、神の前で堂々としていられないと感じるからです。
そのように「私の必要」を求める信徒たちが大多数を占めるようになると、教会という看板を掲げた場所で彼らの必要を満たし始めました。なぜなら、その宗教によって生計を立てている人々があまりにも多く増えてしまい、彼らを維持するためにあまりにも多くの機関が生まれてしまったため、人々を引き留めなければ献金が入らず、そうしてこそそれらを維持できるからです。
それで感動的なプログラムを導入します。ウィロークリーク教会のような所には良いプログラムがたくさんありますよね。韓国の大型教会がそのプログラムを導入する際に、数十万ドルのロイヤリティを支払って導入しました。「弟子訓練、新信者訓練、オープン礼拝」などのものを、数十万ドルも払って導入する意図は何でしょうか。人々の必要を満たすためです。そして彼らをつなぎとめるためです。
子どもを持つ多くの親たちは、どんな教会を探すでしょうか。日曜学校で何を教えるかは関係なく、「うちの子が好きなプログラムがあるかないか」「うちの子の関心を引きつける教育プログラムがあるかないか」そんなことばかりを探します。
子どもたちが好きなプログラムとは何でしょうか。彼らの罪性を刺激するプログラムしかありません。子どもたちは何が一番好きでしょうか。罪を犯すことが一番好きです。何が一番嫌いでしょうか。古臭く聖書を教えられることが一番嫌いです。それなのに教会はそれぞれ、子どもの礼拝で演劇をする、音楽会をする、運動をする、美術を教えるなど、大騒ぎしています。親たちはそれを喜びます。だから教会はそれぞれ、良いプログラムを導入するために心血を注ぎます。
ある教会は神秘的な聖霊の賜物を強調します。人々はそのような目に見える神秘的なものと自分が関係していると思うと、たとえ短い間でも非常に安心するからです。
どうせなら礼拝堂も大きく建てます。冗談のように聞こ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大きな礼拝堂におられる神は、何か自分のためにもっと大きなことをしてくださる方のように人々が錯覚する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に人が多くなり礼拝堂が大きくなると、人々は必ず「自分は誰もが認める安全な共同体に入っている」という安心感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それで自分自身で走り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信仰生活をおろそかに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本当に大きな教会や人気のある教会が、神が共におられる証拠なのでしょうか。
キリスト教は空間の宗教ではありません。空間の宗教とはバアルを拝む宗教です。
バアルは彼の神殿にしかいません。だからバアルを仕える女祭司や聖職者、あるいは一般信者がその神殿で性関係を持つと、バアルが興奮して雨を降らせ、豊穣を約束するというような雑多な宗教なのです。キリスト教は時間と歴史の中で理解されるべきものであって、空間の宗教ではないのです。
(列王記上8:27-30)
27 神は果たして地の上に住まわれるでしょうか。天も天の天もあなたをお入れ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に、まして私が建てたこの宮など、なおさらです。
28 しかし、わが神、主よ、しもべの祈りと願いに目を留め、今日あなたの前でしもべが叫び求めている祈りを聞いてください。
29 あなたがかつて「わたしの名がそこにある」と言われたこの場所、この宮に向かって、昼も夜もあなたの目を注ぎ、しもべ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祈る祈りを聞いてください。
30 しもべと、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祈るとき、その願いを聞いてください。あなたがおられる天で聞き、聞いて赦してください。
ソロモンが神殿を建て、その神殿を神に奉献する場面です。しかしソロモンはその時でも、神がその神殿に住まわれる方では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
(列王記上8)
32 あなたは天で聞き、行い、あなたのしもべたちをさばき、悪者の罪を定めてその行いをその頭に報い、正しい者を正しいとし、その義にしたがって報いてください。
34 あなたは天で聞き、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罪を赦し、彼らをその先祖に与えた地に帰らせてください。
36 あなたは天で聞き、あなたのしもべと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罪を赦し、彼らが歩むべき良い道を教え、あなたの民に嗣業として与えた地に雨を降らせてください。
39 あなたがおられる天で聞き、赦し、それぞれの心をご存じであるあなたが、そのすべての行いにしたがって報いてください。人の心をすべて知っておられるのは、あなただけです。
44 あなたの民が敵と戦うためにあなたの遣わされる道に出て行き、あなたが選ばれたこの町と、私があなたの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の方に向かって主に祈るとき、
45 あなたは天で彼らの祈りと願いを聞き、その訴えを聞き入れてください。
人々が大きなものや多数を好むのは、このように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を知らないからです。
もちろん、私たちが最初に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るときには、「私の必要、私の救い」に関心を持ちます。しかし一度イエスを信じ、成長していくにつれて、私たちの関心の焦点は移っていくものです。私たちが幼い子どもであったときには、親とはただ私の必要を満たし、私をよく育ててくれる存在として認識されます。しかし私たちが成長して分別がついてくると、それからは親から何をもらえるかではなく、「お父さんお母さんは何を召し上がれば健康で長生きできるだろうか」「何を差し上げれば喜んでくださるだろうか」と考えるようになるように、私たちもイエスを信じて成長していくと、関心の焦点が変わっていくのです。
15世紀にコペルニクスが現れる前までは、人々はこの宇宙の中心が地球だと思っていました。
地球を中心に太陽も月も星もすべてが回っているという天動説を信じていました。しかしコペルニクスは、地球こそ巨大な恒星の周りを回る惑星であることを発見したのです。
それをコペルニクス的転回と呼びます。天動説から一夜にして地動説へと変わったのですから、世界がどれほど驚いたことでしょうか。
私たちの信仰生活にも、まさにそのコペルニクス的な大転換が起こ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今までは私が中心で神が私を助ける方でしたが、これからは神が中心で、私がその方のために存在するというコペルニクス的な大転換が、私たちの信仰生活には必要なのです。
とはいえ、アメリカ国民全体の中でも、いまだに天動説を信じている人が33%もいるそうですから、本当に言葉も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に、いまだに自己中心的な信仰にとどまっている人は、まだ自分自身が自分の人生の神であるため、自分で自分の力を強くしようとし続けます。財産や名誉はもちろん、世俗的な人気や他人からの認められること、そういうものを追い求めます。
皆さんは違うと思いますか。皆さんが「信仰が良い」「信仰が深い」「信仰が熱い」と認める人を一度思い浮かべてみてください。皆さんはその人たちの何を根拠にして、彼らの信仰を良い、熱い、深いと評価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教会の働きをたくさんしているから」「祈りが上手だから」「礼拝の時間によく泣くから」「聖書をたくさん知っているから」そのような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信仰には大きい小さいというものはあり得ません。信仰は完全な全体が、私たちに一度に与えられるものだからです。
(第二テモテ3:14)
15 あなたは幼いころから聖書を知っており、その聖書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信仰によって救いに至る知恵をあなたに与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ガラテヤ3:23-26)
23 信仰が来る前には、私たちは律法の下に閉じ込められ、後に現される信仰の時まで閉じ込められていました。
24 このように律法は、私たちをキリストへと導く養育係となり、私たちが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した。
25 しかし信仰が来た後は、私たちはもはや養育係の下にはいません。
26 あなたがたはみな、信仰によって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の子どもだからです。
信仰はイエスの中にあるものです。そしてそのイエスが私たちの中に入っておられます。だから私たちの信仰は皆、同じ大きさの信仰なのです。その信仰をどれだけ自分の人生の中で味わい、用いるかということを、信仰生活を通して私たちは追い求めていくのです。
すでに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その完全な信仰を、一つ一つ開いて見ながら、「ああ、私にはこのようなものが与えられていたのだ」と感激し、その信仰によって救い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栄光を現していく人生、それをキリスト者の人生と言うのです。
そのように神を知り、神の前に降伏し、その神の栄光を現す人を、私たちは信仰が良い人だと認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の人生の中で、その神の栄光が現れる人生を生きるためには、私が現れることによって神の栄光が現れるのではなく、むしろ私が砕かれていくことによって神の栄光が現れるのです。
(第二コリント4:6-7)
6 「闇の中から光が輝き出よ」と言われた神は、イエス・キリストの御顔にある神の栄光を知る光を、私たちの心に照ら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7 私たちはこの宝を土の器の中に持っています。それは、この非常に大きな力が神から出たものであって、私たちから出たものではないことが明らかになるためです。
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宝を宿している土の器です。しかしそのイエス・キリストは、神の栄光をそのまま持っておられる方です。その神の栄光が現れるためには、土の器が砕かれなければ神の栄光は現れないのです。
ですからイエスを本当に信じるようになると、皆さんの人生は思いがけず、何度も砕かれるような経験をするのです。他の人が見て、「あの人はどうしてあの状況であんな忍耐ができるのだろう」「あの人はどうしてあんな悪い人をあのように赦す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あの人はどうしてあそこまで低くなりながらも顔一つ赤くしないのだろう」と言うように、私たちは自分が砕かれていく姿の中で、神の栄光、その方のご性質を私たちの人生の中で現す人々なのです。それを聖さと言うのです。それがまさに私たちの信仰の目的地なのです。
多くの人が誤解しているのは、十字架を私たちの救いの道具や方法としてだけ考えていることです。そうではありません。十字架は私たちの救いの方法でもありますが、十字架は十字架によって救われた神の民の中に満た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内容でもあるの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いを得ましたが、その方が私たちの中に入っておられるように、十字架の原理もそのようなものなのです。
十字架は単なる刑罰の形ではありません。十字架は天の国の人生の原理です。
自分を死なせて敵を生かす天の国の人生の原理、いや、神のご性質を最もよく集約して要約したものがまさに十字架なのです。この世では愚か者のように扱われるその十字架が、天の国の人生の原理なのです。イエス様はこの地上に来られ、敵から苦しめられ、彼らを赦しながら、無理に歯を食いしばって耐え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と神のご性質なのです。
私たちはその十字架の人生をこの地上でそのまま再現する人生を生きることによって、神の栄光、神のご性質を現す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目標地点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イエス様がそのように生きていかれたように、絶えず砕かれ、壊される苦しみの中へと投げ込まれていくのです。
では、私たちがそのように神の栄光のために生きるためには、その神の栄光が何であるのか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では、その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を、この地上で目に見える形で私たちに示してくださった方は誰でしょうか。イエス様です。しかし私たちは今、その方を直接お会い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は、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そのイエス・キリストを学ぶ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まさに、そのイエスについて詳しく、私たちの理解できるレベルに合わせて記録してくださっている聖書を、熱心に学ぶことです。
(ヨハネ1:17)
18 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懐におられる独り子なる神が、神を現されたのである。
(ヨハネ5:39)
39 あなたがたは聖書の中に永遠の命があると思って聖書を調べているが、その聖書こそ、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いるのである。
皆さんが熱心に聖書を通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学ぶこと、それが神の栄光、神のご性質を学ぶことなのです。
キリスト教とは、「私」から焦点を移し、「神の栄光」へと目を向けること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神の栄光を啓示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様を説明している聖書を、熱心に学ば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そして私たちのすべての時間は、そこへ注ぎ込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酒に酔ってはいけません。時間を大切にしなさい。自分の腹のためだけに時間を無駄にしてはいけません。そして聖霊に満たされなさい。聖霊の満たしは、聖書を通して受けることができます。
(ハバクク3:17-19)
17 たとえ、いちじくの木に花が咲かず、ぶどうの木に実がなく、オリーブの木の収穫がなく、畑に食物がなく、羊が囲いから絶え、牛が牛舎にいなくても、
18 それでも私は主にあって喜び、私の救いの神にあって喜び躍る。
19 主なる神は私の力であり、私の足を鹿のようにし、私を高い所に歩ませてくださる。この歌は指揮者のために、私の弦楽器に合わせて歌うものである。
(ピリピ3:8)
8 そればかりか、私の主キリスト・イエスを知る知識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私はすべて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ためにすべてを失い、それらをちりあくたのように思っています。それはキリストを得るためです。
(第二ペテロ3:18)
18 むしろ、私たちの主であり救い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その方を知る知識において成長しなさい。栄光が今も永遠の日に至るまで、その方にありますように。
さあ、これで何が本当に重要なのか、もうお分かりにな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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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 비긴이라는 영국 국교회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탁월한 신학자이십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35년간 힌두교 교인들에게 선교를 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매 주 힌두교 사원으로 출근 하셔서 그 곳에 있는 힌두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들의 경전인 “우파니샤드”를 “산스크리트 어”로 공부하고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공부하면서 서로의 경전에 대해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 사원엘 가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벽에다 걸어 놓는데 그 속에 예수님의 초상화도 들어 있답니다. 그리고 그들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예수님이 초상화 앞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답니다.
힌두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범신론의 기초 아래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이 모든 세상, 우주는 하나로 귀결되는 데 그 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범신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신이 아닌 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결국 해탈에 이르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결국 범신론이라는 것은 무신론과 맥이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게 신이면 아무 것도 신이 아닌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힌두교 지도자들 중에 죄와 용서에 대해 연구하는 유신론 적 교리를 갖고 있는 신학자가 있었답니다. 그 레슬리 뉴비긴 목사님께서 그 힌두교 신학자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에 대한 교리를 잘 설명해 주었더니 그 힌두교 신학자도 “당신이 말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 빼면 나와 당신의 교리는 정확하게 일치 한다”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자신도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레슬리 목사님께서 “그럼 당신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라고 묻자 그 힌두교 신학자는 ”왜 꼭 그게 예수여야만 하는가?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저 많은 신들 중 나를 용서해 줄 다른 신을 찾아가면 되지 않는가?“ 하고 벽에 있는 그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가리키더랍니다.
오늘 날 예배당 안에 이 힌두교 신학자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에게 얻어 지는 유익,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으시지요? 틀린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구원”이라는 “우리의 필요”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너무 “우리의 구원“에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을 두게 되면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는 이가 어떤 분이신 지, 나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아무나 나에게 구원만 주면 나는 그 신을 좇아 갈 거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위험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섬김과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공부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두문불출 하자 시내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준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 줄 “아무 신, 불특정 다수 중의 하나”를 섬긴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게 아부를 떠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필요가 하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 신지를 알고 그 분을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분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그저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는 “어떤 신”을 섬기고 계십니까?
왜 이 구분이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가면 이 둘의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목적지가 되면 나는 나를 구원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 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반면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삶 속에서 드러내려 열심을 내는 것처럼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으로 나의 눈과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 “나의 필요, 나의 구원” 이러한 감각적이며 제한된 한계 속의 신앙으로 변질이 된 것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악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기독교 역사 중 1,500년간은 오히려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하되고 맹신이 판을 치게 되고 성직자들이 고위 관리처럼 대접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지나친 신본주의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성경의 계시까지도 인간의 이성의 심판을 거쳐야 계시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성경에서 가차 없이 신화나 설화로 매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극히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인본주의가 물질주의를 낳으면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 적인 종교로 전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유익과 나의 구원, 나에게 쏟아져야만 하는 은혜” 이런 것만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내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부르며 믿음과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은 항상 “나”입니다.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엄밀히 말해서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동한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종교적 엑스터시나 감격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나의 필요”에 초점을 두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우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보이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은 뭔가 감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 것을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제일 안심하는지 아세요? “큰 것과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감동 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은사를 강조 한다든 가, 선교를 강조 한다든 가해서 다른 이들은 쉽게 경험 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나의 필요”가 주 관심인 사람들은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내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해야 하나님 앞에 떳떳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필요”를 구하는 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교회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를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버렸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기관들이 생겨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붙들어 놓아야 헌금이 들어오고 그래야 그 것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프로그램들을 도입합니다. 윌로크릭 교회 같은 곳에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지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그 프로그램을 도입해 가면서 수십만 불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들여갔습니다. “제자훈련, 새 신자 훈련, 열린 예배“ 이런 것들을 수 십 만 불 씩 주면서 들여가는 의도가 뭡니까?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이 있는 많은 부모들이 어떤 교회를 찾습니까? 주일 학교에서 뭘 가르치든 그건 상관 안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우리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어 줄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 이런 것만 찾아다닙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뭘까요? 그들의 죄 성을 자극해 주는 프로그램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뭘 제일 좋아할까요? 죄 짓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뭘 제일 싫어할까요? 고리타분하게 성경 가르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저마다 아이들 예배 때 연극을 한다, 음악회를 한다, 운동을 한다, 미술을 가르친다, 난리들을 떱니다. 부모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저마다 좋은 프로그램들을 유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신비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신비한 것과 자기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잠깐이지만 아주 안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예배당도 크게 짓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큰 예배당에 계신 하나님은 뭔가 나를 위해 더 큰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예배당이 커지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는 모두가 공인하는 안전한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경주해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큰 교회나 인기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닙니다. 공간의 종교는 바알 신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바알은 그의 신전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여 사제들과 성직자들, 혹은 일반 신자들이 그 신전에서 성 관계를 하면 바알이 흥분을 해서 비를 내려 주고 다산을 약속하는 그런 잡교입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공간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왕상8:27-30)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때도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상8)
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6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 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44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 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사람들이 큰 것과 다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나의 필요, 나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 가면서 나의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부모가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잘 키워 주어야 하는 분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철이 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모에게 무엇을 뜯어낼까 보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뭘 드시면 건강하게 오래 사실까? 뭘 챙겨드리면 기뻐하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되듯이 우리가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 져 가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줄 알았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도 달도 별도 전부 돌아가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오히려 거대한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하는 행성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코페르니쿠스 적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천동설에서 하루아침에 지동설로 바뀌어 버렸으니 세상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바로 그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중심이었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내가 그 분을 위해 존재하는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긴 미국 전체 국민 중에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33%나 된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자기중심 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꾸 힘을 키우려고 시도합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이고 세상 적인 인기와 다른 이들의 인정,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은 아닌 것 같지요? 여러분이 “신앙이 좋다, 믿음이 깊다, 믿음이 뜨겁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믿음을 좋다, 뜨겁다, 깊다, 라고 평가하십니까?
“교회 일을 많이 하니까” “기도를 잘 하니까” “예배 시간에 잘 우니까” “성경을 많이 아니까” 뭐 이런 것 아닙니까?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온전한 전체가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후3:14)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갈3:23-26)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은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모두 같은 크기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걸 얼마만큼 내가 내 삶 속에서 누리는가가 바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온전한 믿음을 자꾸 까 보면서 “아 나에게 이런 것이 주어졌구나.” 하고 감격하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자꾸 드러내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자꾸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고후4:6-7)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품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질 그릇이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본의 아니게 자꾸 깨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인내가 나올까?”“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악한 사람을 저렇게 용서를 할까?”“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낮아지면서도 얼굴 하나 안 붉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깨지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 분의 속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걸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도구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채워져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신 것처럼 십자가의 원리는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형벌의 모양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 원수를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아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집대성하여 요약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 그 십자가가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원수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억지로 이를 악 물고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표 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신 것처럼 계속 깨지며 부서지는 고통 속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지금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예수에 관해 자세하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록해 놓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요1:17)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5:39)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에서 초점을 옮겨 “하나님의 영광”으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가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시간은 그리로 쏟아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아끼세요. 여러분의 배 만을 위해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은 성경을 통하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합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빌3:8)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벧후3:18)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자,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エペソ人への手紙 4:17-24 「脱ぎ捨てることと着ること」
本文:エペソ人への手紙 4:17-24
17 そこで私は、これを言い、主にあって証言します。もはや、異邦人がむなしい心で歩んでいるように歩んではいけません。
18 彼らは知性が暗くなり、その内にある無知と、心の頑ななことのゆえに、神のいのちから遠ざかっています。
19 感覚が麻痺した彼らは、放蕩に身を任せ、貪欲にらゆる汚れを行っています。
20 しかし、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そのように学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
21 真理がイエスの内にあるとおり、あなたがたは本当にイエスについて聞き、イエスの内で教えられたはずです。
22 すなわち、以前の生活態度に従う、誘惑の欲望によって滅びゆく「古き人」を脱ぎ捨て、
23 心の霊において新しくされ、
24 神にかたどり、義と真理の聖さにおいて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す。
私たちは今、エペソ人への手紙4章17節以降の御言葉を数回にわたって分かち合っています。それほど、これらの御言葉は重要であり、また誤解を招きやすいため、繰り返し確認する必要があります。
前回は、使徒が異邦人であるエペソの信徒たちに、異邦人のむなしい生き方をしてはならないと語った箇所を分かち合いました。エペソの信徒たちだけが異邦人なのではなく、私たちもまたイスラエルの外にいた異邦人であったこと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使徒は先に2章でも、異邦人であったエペソ人たちがどのように神に近づくようになったかを語っています。
(エペソ 2章)
12 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外にあり、イスラエルの国から除外され、約束の契約については他国人で、この世にあって望みもなく、神もない者たちでした。
13 しかし、かつては遠く離れていたあなたがたも、今で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近い者となりました。
14 キリストこそ私たちの平和です。二つのものを一つにし、隔ての壁、すなわち敵意を、ご自分の肉において打ち壊し、
15 数々の規定から成る戒めの律法を廃棄されました。それは、この二つのものをご自分にあって一人の「新しい人」に造り上げて平和をつくり、 16 また、十字架によって二つのものを一つのからだとして神と和解させ、敵意を十字架によって消滅させるためでした。
17 また、キリストは来られて、遠くにいたあなたがたに平和を宣べ伝え、近くにいた者たちにも平和を宣べ伝えられました。
18 それは、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両方が一つの御霊において父のもと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つまり、この御言葉はエペソ人だけに向けられたものではなく、神を知らなかった私たちへの言葉として受け止めるべきです。私たちは神の約束があるイスラエルの外にあり、望みもなく神もない者でした。そのような私たちが、どのように神と近くなったというのでしょうか?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その血によって」です。
ある人々はこのような質問をします。宣教師たちがこの国に来て福音を伝えてから二百年も経っていないのに、それ以前に生きていた人々はどうなるのかと。「李舜臣(イ・スンシン)将軍は救われたのですか?」「世宗(セジョン)大王は救われたのですか?」このような質問をする人は、神の救いが私たちの選択ではないこと、すなわち、神は創造主であり私たちは被造物であることを忘れているからです。
私たちはこれをあまりにも頻繁に忘れてしまいます。簡単に言えば、私たちには神に対して「私を救ってください」と言う権利などないのです。私たちは被造物です。被造物とは、創造主が造られた本来の場所にとどまっている時にのみ「存在」となるものです。しかし、そのような質問をする人々の根底には、歴史的に私たちが尊敬し偉大だと思う人々でさえ救われないのなら、一体誰が救われるのかという人間中心の考えがあります。
しかし、救いは私たちの行為や資格にあるのではなく、ただ神の約束にあります。エペソ人への手紙を見ると、その約束は創世の前、永遠の昔にあったと記されています。永遠の昔とは、私たちのいかなる行為も存在する前です。私たちの行為とは無関係に、神が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これを「神の予定」と言います。ローマ9:13の御言葉のように、ヤコブとエサウが生まれる前でさえ、神は「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かれている通りなのです。
そう聞くと、また少し気分を害するかもしれません。「選択は神だけができることなのか」と。その通りです。選択は創造主である神だけがなさいます。ですから、神の選択を受けた者だけが、その神を知ることが許されているのです。被造物があるべき場所とは、そのようなものです。
ですから、神の聖徒、神の約束の内にある者たちは、もはや自分の行為に縛られません。閉じ込められないのです。私の救い、私の罪の赦し、さらには私の死の問題までもが、自分に原因があるのではなく神の約束に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からです。
先ほど私が祈った時、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最も重要なことは何だと言いましたか? 罪の問題と、罪による死の問題です。この二つが解決されれば、言い換えれば神と私の関係が回復されれば、罪による死の問題が解決されます。これが解決されれば、すべてが解決されたも同然です。これ以外の問題は、重要なものは一つもありません。人生は百年も生きられませんが、生きてきた中でのすべての出来事は、過ぎ去ってみれば何でもないことです。「虎は死して皮を残し、人は死して名を残す」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その恥ずかしい名前を残してどうするのですか? ある人の言葉を借りれば、屋台のつまみに出てくる雀よりも劣る人生なのに……。
皆さん、キリスト教的な歴史観は非常に否定的です。聖書が語るところによれば、この世と歴史には終末があります。終わるのです。歴史の主人である神が経綸される最後の聖徒の救いが完成されれば、天と地はそれで終わりです。その役割を果たし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なのに、その世に何を残すことがあるというのでしょうか。人間がまるで歴史の主人であるかのように錯覚して生きているのです。
今日の説教の題は「脱ぎ捨てることと着ること」です。これは、神が創世の前の約束通りに、すなわち、聖くて傷のない子らとされること、本来「無」である私たちが神的な存在とされること、そしてそのような私たちを神の国とされること、そうして永遠に神と共に生きること、これが神の約束です。その約束はいつ成し遂げられたのでしょうか? すでに永遠の昔、創世の前に成し遂げられました。神はご計画そのもので完了されています。神には時間と空間は必要ありません。それを「黙示」と言います。この世の歴史はその黙示から始まり、その黙示が展開されたものです。
そのように完了された子たちに、それがいかに神の愛であり恵みであり栄光であるかを教えるために、神は天と地を創造されたと言います。聖書の冒頭、「初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というその「初め(ベレシート)」こそが、私たちに神がいかなる神であられるか、そしてその神の犠牲と愛と奉仕によって私たちがいかに存在するのかを教えるために、天と地を造られたという物語なのです。そしてその時から歴史が始まりました。時間の始まりです。本来、時間は存在しません。そしてその時間が終われば、再び永遠へと戻ります。
そのように私たちはすでに黙示の中で完了されていますが、その完了された神の子がどのような子であるかを教えるために、私たちに絶えず「脱ぎ捨てることと着ること」という神の新創造、すなわち逆創造を通じた新創造が神の民にあるのです。最初の人間アダムは善悪の知識の木の実を食べて罪を犯しました。神がいなさいと言われた(見て良しとされた)最初の場所を離れたことで、アダムとエバはエデンから追放されました。そのアダムがどのように再び神との関係を回復するのか? いかにしていのちの木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もとへ行き、神のかたちとして完成されるのかというすべての過程を、私たちを通して……私たちはアダムの子孫であり、アダムのDNAを受け継いでいるからです。ダビデが「私たちは母の胎内にいる時から罪人だ」と言うように、そのような私たちに、なぜ神と断絶された状態では存在ですらないのかを教えるために、神が定められた契約の死が私たちの内で作動するのです。コリント第二4章7節から12節の御言葉がそれです。
ローマ5章を見ると、最初の人アダムを通して罪が入ったと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罪を犯したから罪人なのではなく、生まれながらにして存在論的に罪人なのです。罪人からは罪しか出てきません。「私は違います、私は良いこともしました。小学校の時にこんな善行をし、可哀想な人を助け、教会にも通って……」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その最初の場所を離脱した状態から出てくるすべてが罪なのです。以前も申し上げましたが、罪人は自ら罪を犯すことさえできないのが罪人です。なぜなら、罪人が行うすべてが罪だからです。自分自身で善と悪を区分して「これは良いことだから行い、これは悪いことだからやめよう」という選択ができません。アダムから生まれたすべての人間は、運命的に罪人です。ですから、聖書が言う罪とは、行為の一つ一つを罪と言うのではなく、根源が汚染されているために、人間から出るすべての行為が「悪」だと言うのです。その行為のすべてが、自分のための、自分中心の行為だからです。
では、罪と罪でないものの違いは何でしょうか? 神の目に「良し」とされることが「善」です。つまり、善と悪の違いは、キリストの「内」にいるか「外」にいるかの違いです。神が定められたお一人、主イエス・キリストにあってのみ「存在(神のかたちに造られたアダム)」となるからです。神はその「存在」でないものはすべて否定されるため、悪と規定されるのです。(旧約の規定で、死んだものを汚れたものとして近づかせないのはそのためです)。先ほど読んだエペソの御言葉通り、キリストの外にいた私たちが、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約束のあるイスラエルと一つになったというのはそういう意味です。神がアダムから受け継いだ私たちの汚れた「古き人」をいかに脱ぎ捨てさせ、神の前に聖くて傷のない子らとして立たせるかを教えるために、私たちの人生には絶えず「脱ぎ捨てることと着ること」が繰り返されますが、その中心にキリストの十字架、すなわち契約の死があるのです。今日の本文はそのお話です。
ご存知のように、私たち大韓民国の人々は約束のあったイスラエル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神の約束があるイスラエルの外にあり、望みもなく神もない者でしたが、そのような私たち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その血によって神との和解が成し遂げられました。使徒はこれをエペソ1章から4章まで、私たちに繰り返し語ります。私たちの救いは恵みの福音、すなわち私たちのいかなる行為も存在する前の、創世前の神の約束であるということをまず確定して、エペソ人への手紙は始まるのです。
キリストの内にあるその救い、私たちの罪を拭い去ったその契約の血によって、神は私たちの背きを拭い去り、私たちの罪を思い出しもしないと言われます。これがイザヤ書43章に出てくる福音です。
その血による救い、「なぜあなたがたは自ら罪から脱け出すことができないのか」「なぜあなたがたの善い行為では救われないのか」を教えるために、神がイスラエルにまず与えられたのが律法です。ですから、全世界を律法の下に閉じ込め、神の裁きの下に置いたというのが使徒の語るこの世の現実です。
そのようにすべての人間が神の敵となったその断絶を、イエス様がご自分の肉において打ち壊されました。イエス様が父との約束を十字架ですべて成し遂げられたことにより、聖所の幕が裂け、私たちがその血によって神のもとへと進む道が開かれました。それまでは、到底神を知ることもできず、神のもとへ進める道はなかったのです。
いかなる方法によっても神のもとへ進む道がないことを教えるために与えられたのが律法です。しかし、イスラエルは「神が守れない法を私たちに与えられたはずがない」と勘違いし、懸命に自分たちの行為で法を守りました。パウロがそうでした。「私は律法の義については非の打ち所がない者だ」と。徹底的にすべて守った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後で気づいてみれば、一つも守れていなかった……なぜか? 心にある罪までは解決する方法がないからです。ですから、そのすべての律法の行為が、結局は「自分の義」を手に入れるためのものだったというのが、ローマ書にあるパウロの告白です。神の前に堂々と自分の救いを確保しようとする「貪欲」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ヘブル 10章)
19 ですから、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20 イエスは、幕、すなわちご自分の肉体を通る、私たちのための新しい生ける道を開いてくださいました。
神は聖なる方ですから、汚れた罪人がそのもとへ進む道はありません。罪人が神に出会えば、その場で滅ぼされ死にます。しかし、ヘブル書の記者は言います。「今や、神のもとへ進む道が開かれた」と。どのようにして? イエスによって。その血によって。この言葉は、イスラエルが捧げ続けた犠牲の供え物が来たるべきキリストを象徴しており、その血によって、イエスの血の注ぎを受けて、私たちが点も傷もない者となり、今や神の前に聖なる子らとして立たされ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使徒はこの話を、エペソ(現在のトルコ)という異邦人たちとイスラエルを一つに結びつけて説明しています。それが先ほど読んだ2章です。「この二つのものをご自分にあって一人の新しい人に造り上げて神と平和にさせた」「神と私たちの間にあった隔ての壁を崩してしまった」と言います。キリストの内にある新創造です。
さて、では彼らが神のもとへ近づけなかった理由は何でしょうか? 罪です。私が繰り返し申し上げますが、私たちの人生で最大の問題は罪の問題です。罪による死なのです。本来、永遠の昔には死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神の義、神の聖、神の恵み、神の愛を教えるために、一時的に罪が入り込み、その罪の報酬が死です。
今や、異邦人もイスラエルもキリストにあって区別がなくなりました。「キリストにあって一人の新しい人に造られた」……ここでの「新しい人」は、前回学んだコリント第二5章に出てくる、まさにあの「新しく造られたもの」です。「新しい(カイノス)」です。ここでキリストの内にある「新しいもの」という言葉は、質的に異なる新しいものを指します。神の新創造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た新しいものです。ですから、キリストの内ではすべてが新しい一つなのです。
そのように異邦人である私たちとイスラエルが、キリストの一つのからだとして、神の血によって買い取られた教会として、ついに神と和解した。これが救いです。神と和解することがいかに重要なことか、私たちがいかなる障害もなく神のもとへ進めるようになったことがいかに重要なことかを教えるために、一時的に罪が必要であり、死も必要であり、この世の万物と歴史が必要なのです。
そうして「今やあなたがたは、異邦人のむなしい生き方から脱した」と言われます。行いを一つ一つ直して善く生きろ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今や存在論的に新しく造られたものとなったので、以前住んでいた異邦人の世界とは断絶された。戻りたくても戻れない。私が必ずあなたがたをそのように世から切り離して見せる」ということです。「聖別(きよめ)」です。ですから、早くに諦めなさい。あなたがたいくら世を愛し楽しもうとしても、そうはいかない。誰が勝ちますか? 神が勝たれます。それが私たちの「聖(きよさ)」です。二度と戻ることはできません。すでにキリストの内へと移されたその現実を、使徒は今、この御言葉を通して私たちに確認させているのです。一言で言えば「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ものとなった」……食べるにも飲むにも、何をするにも主のためとなる者たち、キリストに所有された者たち、キリスト者です。そのように世と歴史は、彼らの区別のために存在しているのです。
これがいかに重要であるか計り知れません。「キリストのものとなった」という言葉は、もはや「自分の人生はない」という意味だからです。「私たちは、生きるにしても主のために生き、死ぬにしても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ローマ 14:8)。私たちがなぜ苦しむのでしょうか? 「自分の人生」があるからです。自分の人生を自分で責任を持とうとするからです。しかし、私たちには主がおられます。私たちの罪の問題、死の問題、永遠の問題……私たちは百年も生きられません。そしてその後は永遠なのです。永遠の観点から見れば、この人生は一瞬にも満たないものです。この永遠の問題を約束された者たちが聖徒です。聖書はこのような「真の現実」「永遠の現実」を、御言葉を通して私たちに確認させています。
(イザヤ 43章)
18 先の事柄を思い出すな。昔の事柄を考えるな。
19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砂漠に川を設ける。
20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引き、砂漠に川を流して、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荒野に水を、砂漠に川を流して、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のです。これが「いのちの水」です。)
21 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ために、わたしのために造った。
(主なる神が私たちを造られた目的です。その下には、またこのような御言葉が出てきます)
25 わたし、このわたしは、わたし自身のために、あなたの背きを拭い去り、あなたの罪を思い出しもしない。
先ほども言いましたが、罪とは悪いことをしたり嘘をついたり盗んだりすることを指すので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それも罪ですが)。聖書が言う本質的な罪は、主であられる方との関係においてのみ発生する罪です。「義」も同様です。義もまた、その方との関係を指します。つまり、簡単に言えばイエスを信じないことが罪であり、イエスだけを信じることが義なのです。罪と義は、その方を通して区分されるからです。詩篇51篇でダビデ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 人の妻を奪い、その夫を殺してもなお、ダビデは「私は主に対してのみ罪を犯した」と言います。ダビデは罪の本質が何であるかを知っていたのです。一人の人間アダムを通じて世に入った罪は、来たるべきキリストによって与えられる神の義を示すための罪なのです。したがって、キリスト以外のいかなる善いことも、すべて神の目には悪なのです。
このように、すべてのことは神の約束によるものであり、すべての始まりは神であり、また神によって完成されます。ですから、神はご自分の約束に対して全能なる神です。私たちが存在する前、私たちのいかなる行為が存在する前、創世の前に、神は御子の血によって聖くて傷のない子らを創造すると約束されました。すべてはその約束から始まります。そしてそのことは、神のご計画の中ですでに成し遂げられており、神が造られた世と歴史の中でも成し遂げられるのです。どのように? 神が世に来られ、その契約の血を残されたことによって。
その十字架の栄光のために、創世前に御子の血によって聖なる子らを創造することに決められたその約束に全能なる神、その神が神であられることのために、一人の人間アダムを通して罪と死がこの世に入ってきたのです。パウロはローマ書でその話をしました。
しかし、最も重要なこの問題を、ローマ書5章12節から出てくるこの話を、一生教会に通っても聞いたことがないという人が99%です。ですから、この約束を知らないので「なぜエデンに善悪の木を置き、また蛇を現れさせて私たちをこのように苦しめるのか」という質問をします。そうではないのです。神が放っておかれた人々ではなく、神の約束の内にある神の民にとっての罪の問題は、主なる神が解決されるべき問題であって、被造物である私たち人間が自ら解決する問題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いかなる熱心さを出し、いかなる宗教行為をしても、罪の問題を解決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悪いことを10回して、良いことを100回すれば罪はなくなりますか? 人生においてこの罪の問題が解決されなければ、生まれてこない方がましです。
ですから、その罪の問題が解決されることを、聖書は「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と語ります。私たちのいかなる行為によっても不可能であるということが「信仰」なのです。ですから信仰とは、主イエスと私たちの関係を指します。別の言い方をすれば、主が行われたことを私たちにそのまま「着せて」くださることを信仰と言います。それが主の行い、信仰の行いです。主がご自分の約束通りにご自分の死の中で完全に成し遂げられたことを信じる信仰です。その約束を信じるのです。イザヤ43章の御言葉のように、神は私たちのすべての背きを拭い去られます。きれいにすべて消し去るという意味です。私たちが幼い頃から犯した罪と、死ぬまで犯すであろうすべての罪を、神は思い出しもしません。これを信じるのです。これを信じることが「救いの確信」です。
では、神はなぜ罪を思い出しもされないのでしょうか? それは、私たちに「イエス・キリスト」が着せられているからです。その血によって私たちはきよめられたのです。それを信じる信仰の内にあるので、その信仰の内において私たちをきよい、正しい、罪がないと「見なして」くださいます。なぜでしょうか? すべてが約束から始まったからです。私たちのいかなる行為が存在する前、私たちが存在するよりも前に約束が先にあるので、その約束を信じる信仰の内において、私たちをきよい、正しいと見なしてくださいます。救いは私たちの行為ではありません。
それなのに、罪に汚染された私たちの「古き人」、この世の精神に染まった古き人は、主の完全な成し遂げを見つめるのではなく、しきりに自分を点検し、急き立てます。そのように自分を見つめるということは、一言で言えば信仰の内に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キリスト・イエスと関係を持てていないという意味です。
悪しき悪魔は私たちを絶えず断罪します。隙あらば「お前の姿を見ろ。それがイエスを信じている者の姿か。それで救われたと言えるのか」と言いながら、絶えず断罪し訴えます。
しかし、そのような敵の前で、主は十字架で勝利された主の勝利を、信仰の内において私たちのものとして譲り渡し、私たちの罪で汚された服を脱がせ、ご自分の血で洗った「新しい衣」を着せてくださいます。詩篇23篇の御言葉はその現場です。それを聖書が「脱ぎ捨てることと着ること」で説明しているのです。
(ゼカリヤ 3章)
4 主は、自分の前に立っている者たちに命じて言われた。「その汚れた衣を脱がせよ。」また、ヨシュアに言われた。「見よ。わたしはあなたの不義を除き去った。あなたに晴れ着を着せよう。」
神が用意された美しい衣を着せてくださることが救いなのです。悪魔は神に訴えました。「ヨシュアを見てください。汚れた衣を着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行いが汚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と。すると神は「衣を脱がせなさい。わたしが新しい衣を着せてあげる。わたしが用意した美しい衣を着せるのだ」……これが救いです。新約に来れば、ガラテヤ書に出てくる「キリストを着ること」です。
そしてどうなさいますか? 先ほど読んだイザヤ43章で「あなたの罪を思い出しもしない」と言われます。本来、罪は存在しないものであり、イエス・キリストとの関係においてのみ罪が発生するからです。言い換えれば、その方を知らないこと、その方を信じないこと、これが罪なのです。聖徒は、そのように罪とは無関係な世界へと移されたのです。決して罪に定められることのない「キリストの内」です(ローマ 8:1-2)。
このように神の所有とされた者たちの現実は、運命的に罪悪に満ちた世と区別されています。聖書はこの神を賛美しなさいと言います。私たちの神の民は皆、その恵みの栄光を賛美するために造られ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の人生は、その「新しい歌」、その賛美を学ぶためにあり、その賛美となるための人生です。
このように、自分を造られた神を「知ること(一つになること)」が私たちの救いであり、神は、そのような私たちに光り輝くきよい亜麻布の衣を着せ、その亜麻布の衣を私たちの正しい行いと言われます。「彼女は、光り輝く、きよい亜麻布の衣を着ることを許された。その亜麻布の衣とは、聖徒たちの正しい行いである」(黙示録 19:8)。
(黙示録 14章) 3 彼らは、御座の前、また四つの生き物と長老たちの前で、新しい歌を歌った。地から買い取られた十四万四千人のほかには、だれもこの歌を学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
私たちの人生は、神を賛美する歌を学ぶ期間です。贖われた者たちだけが、その歌を知るのです。私たちは小羊の婚宴に招待されましたが、その宴に入るためには宴の礼服を着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その亜麻布の衣は、主人が用意した礼服なのです。そのように、小羊の婚宴に招かれた者たちの福はまさにそれです。主が用意された衣を着た者たちだけが、その方を知り、その方と共に歩みながら、一生涯「新しい歌」を学ぶのです。
彼らは皆、その宴に行って何をすると言いますか? 冠を脱ぐではありませんか。「私にはこれを受ける資格がありません。何も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したことと言えば、一生涯、自分を愛し、自分の栄光を願ったことだけで、罪を犯したことしかないのに、そんな私たちを神がご自分の約束のために、血で洗った亜麻布を着せて永遠の国へと連れて行ってくださった」……その恵みの栄光を賛美するのです。永遠に。
このように真実な御言葉によって、御言葉となっていく新創造の統治の中で、私たちの残された人生の間、その永遠の国で歌わなければならない歌を学ぶことになるのです。その歌を学びながら、私たち自身がその歌となり、賛美となっていきます。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の体は今や神の血の代価で買い取られたものとなったので、自分のものであると主張できない」……これがどれほど喜びであり栄光であるか知れません。
(コリント第一 6章)
19 あなたがたのからだ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神から受けた聖霊の宮であることを知ら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20 あなたがたは、代価を払って買い取られたのです。ですから、自分のからだをもって神の栄光を現しなさい。
神の栄光をどのように現しますか? 教会に熱心に通い、祈りをたくさん捧げ、聖書勉強をたくさんし、良いことをたくさんし、世の中で出世して高い地位に上り、お金をたくさん稼いで立派な礼拝堂を建てて捧げれば栄光を現すことになりますか?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 フィリピ書に出てくるではありませんか。「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地の下にあるもののすべてが、イエスの御名に膝をかがめ」(フィリピ 2:10)……主イエスの御名の前に膝をかがめることです。「私は私ではありません。私の人生はありません。あなたの血の代価で買い取られたので、私は主のものです」と完全に降伏することです。これが神への栄光なのです。全人的な降伏です。
(ローマ 14章)
7 私たちのうちで、だれ一人として自分のために生きる者はなく、自分のために死ぬ者もありません。
8 私たちは、生きるにしても主のために生き、死ぬにしても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9 キリストは、死んだ者と生きている者との主となられるために、死んで、また生き返られたのです。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主のものとなったその喜びと感謝を忘れ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世に生きる中で、世の事に巻き込まれて、本当の感謝、本当の恵みの栄光をほとんど忘れて生きていますよね。しかし本当に重要なことは、私たちが主のものとなったという、この喜びと感謝です。これが私たちの信仰であり、能力です。
エペソ人であれローマ人であれ、もはや異邦人として生きていたあの頃に戻ることはできません。出エジプトしたイスラエルが紅海を渡った後、その紅海は再び水に覆われました。戻れないのです。エジプトには戻れません。荒野の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を恋しがりますが、彼らは神の統治下にある神の民であり、小羊の血が注がれたイスラエルとして、約束の地という明確な目的地があるイスラエルなのです。まさに皆さんがそうなのです。この世と皆さんの間には、境界を引かれた「血」があります。罪悪に満ちた世と混ざり合うことのできないイエスの血です。そして私たちには明確な目的地があります。「約束の地」「神の国」という目的地があります。ですから、今日の本文で使徒が語っているのがまさにそれです。天的存在としての「新しい人」です。
そのように、キリストにあって神の新創造が完全に成し遂げられるまで、神の導きと新しくしてくださる御手が、一刻も私たちを離れないことを一言で言えば「脱ぎ捨て、着ること」です。自分たちで脱いで着ろ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そのように自分で脱いで着るのは「宗教」です。法頂(ポプチョン)和尚のように無所有を説く人もいれば、髪を剃って山に入る人もいます。中世の修道院運動など、そのようなものは多いですが、それは「自発的な脱ぎ捨て」です。貪欲なのです。人間の限界を自ら超えようとするそのような試みは、本文で語る「脱ぎ捨て」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脱ぎ捨ては、先に述べた通り、主が脱がせてくださる脱ぎ捨てです。アダムから受け継いだこの「肉(ソーマ、サルクス)」を、御言葉の剣で魂と霊と関節と骨髄まで切り裂く、あの死、逆創造。「存在している」と錯覚している私たちを再び「無」へと戻す逆創造。しかし、私たち自身ではそれができないので、主が御言葉の剣で私たちを解体していかれるのです。使徒が言う「日々の死」、イエスの死に渡されるあの死です。その脱ぎ捨てと共に、新しい「着ること」が彼らに与えられます。
このような逆創造と新創造の中に私たちの人生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自身で汚れたもの、死の中に閉じ込められたその限界から抜け出し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そのように脱がせ、着せてあげる」という御言葉なのです。これが、アルファでありオメガであられる方の働きなのです。約束の御霊の中で、御言葉の働き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古き人を解体し、必ず聖くて傷のない子らとして完成させますが、その中心にキリスト・イエスの十字架があるのです。そしてその十字架の死が分かち合われる分だけ、イエスの命も分かち合われることになります。
ですから、私たちの人生は痛く、辛いのです。その「自己否定」という死を、毎日経験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す。私たちは世を愛し、世に従って生きたいのに、その世と私たちを強制的に引き裂かれるので、どれほど痛いことでしょうか。しかし、その引き裂き、分離していく過程で、私たちは一瞬、神の義と聖を目にすることになります。神の熱心はそのように現れるのです。
新創造は、私たちの古き人が十字架につけられる逆創造、すなわち「脱ぎ捨てること」と共に起こる「着ること」の新創造です。そのようにイエス様の死に合わせられなければ、新しい命への復活もありません。
ところが、宗教家たちは十字架の死のない命、死のない復活を夢見ます。十字架を回避し、自己否定がなく、自己の死がない救いを追求します。これがすべての宗教の本性です。
ですから、悪しき悪魔は常に「十字架のない復活」「血の注ぎのない救い」を世の教会に広めます。99.9%の世の教会が、それを教え、願っています。「私を肯定してくれる神」「私の問題を解決してくれる神」「私を癒してくれる神」「私の思い通りに私を助けてくれる神」を求めます。そこにはイエスの十字架が隠されています。言い換えれば、創世前に神が約束されたあの「死」がなく、あの「血」がありません。彼らを「十字架の敵」と言います.
(フィリピ 3:18-19)
18 私はたびたびあなたがたに言ってきたし、今も涙ながらに言うのですが、多くの人々がキリストの十字架の敵として歩んでいるからです。
19 彼らの最後は滅びです。彼らの神は彼らの欲望であり、彼らの栄光は彼らの恥の中にあります。彼らの思いは地上のことだけです。
悪魔は神と見紛うほどの知恵と能力があります。この地に来られたイエス様を試みるほどの能力があります。しかし、私たちにはその悪魔、悪しきサタンに打ち勝つ能力も信仰もありません。ですからイエス様は、私たちの代わりに40日間荒野で植えながら、試みを受けられました。イスラエルが40年間荒野で失敗したあの試みです。そのような私たちの代わりに、イエス様がその試みを通過し、正解を出されたのです。「主なるあなたの神を拝み、ただ神に仕えよ」「主なるあなたの神を試みてはならない」「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い、神の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によって生きる」。イエス様だけが出せる正解であり、私たちの信仰です。
悪しき悪魔は、今日でも世のすべての宗教家、教会にそれらを撒き散らしています。主と共に釘付けにされた十字架ではなく、古き人の死がない「私の救いのための十字架」、私の不幸を防ぎ願いを叶えてくれる「十字架」だけを手にした者たちが、悪魔の試みに陥った世の宗教家たちです。私たち人間が何を好み、何を望んでいるかを、人間よりもよく知っているのが悪魔ですから、自分にひれ伏す者にそれらを与えるのです。ですから、教会に通っているからといって、イエスを知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彼らは依然としてキリストの外にいる異邦人です。イエス様の十字架に自分たちの古き人を釘付けにしたことのない彼らは、キリストの外にいる神の敵です。
このように、今日の本文は「自分たちで古き人を脱ぎ捨て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はなく、十字架で古き人が釘付けにされた者たちにのみ与えられた御言葉なのです。ガラテヤ2:20でパウロ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 「私は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ました。もはや私が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いま私が肉体にあって生きているの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分を捨てられた神の御子の信仰によるのです」……神の約束が実行された者たち、二千年前のイエスの十字架で共に釘付けにされた者たちにのみ、この御言葉が信じられます。神の御子の信仰の内にいるのです。
ですから、彼らだけが「古き人を脱ぎ捨てること」と「新しい人を着ること」の意味を知っています。そして主が新しく着せてくださった「新しい人」「新しく造られたもの」として、聖徒たちだけが、自分の中からハルマゲドンの熾烈な戦闘が繰り広げられます。そのように、彼らは日々死に、日々生き返ります。彼らだけが、コリント第二4章に出てくる使徒のような自己認識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
このように、神の新創造の御手を聖徒は知っています。日々、私の内で働いておられるその方の働き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のように神を知っていくすべての過程、そしてその方の忍耐と赦し、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恵みの必然性を、人生の中で切実に体験し味わうために私たちの人生があります。それを通じて、私たちはしきりに自分自身を手放していきます。「私は私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神です」……私には主がおられる。
善悪の知識の木の実を食べた人間は、皆自分が神であるかのように生きています。自分のことしか考えません。そのような私たちが「私は私ではありません」という自己否定へと向かうすべての過程が信仰生活です。そしてついに、神が新しく造られた「新しい人」がイエスの御名の前に完全に膝をかがめることを、神の栄光と言います。別の言葉で言えば「神が神であられること」です。「御心が天で行われるように、地でも行われますように」、また「御名があがめられますように」……これはイエス様が私たちに教えてくださった主の祈りではありませんか。神が私たちをご自分のかたちに造られたあの最初の場所で、神を神として知るようになること、神の御名を崇めるその働きのために、神の御霊、聖霊がご自分のからだである教会を今も新しくしておられます。これが、キリストの長成した身丈にまで私たちが成長している現実です。
その働きに動員されるのが「患難」と「苦難」です。私たちが何事もなく、すべてが自分の思い通りにいけば、私たちは神を求める存在になれません。ですから、主が私たちを揺さぶり、振り落とし、あらゆる苦難を通じて私たちの高慢な心を折り、練達(試練)として扱ってくださるのです。「練達」とは、鋭い鉄のようなもので私たちを削り出すことを言います。それを通じてついに塵となり、膝をかがめさせます。その結果として「天の望み」を持たせます。私たちが住むべき場所はここではないことと、神が定められた、約束された愛の御子の国があることを見つめ、望むようにな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の信仰の先祖たちは、約束の地であるカナンに入っても、テントを張って住みました。アブラハム三代がテントで暮らしましたね。彼らは皆、本郷を求める者たちだからです(ヘブル 11:8-16)。
神様は今も、私たちをそのように新しく造り変えておられます。永遠に神と共に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その神を知らなければ、共に住むことはでき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ですから、塵である私たちを「天的存在」へと造り変えておられます。そしてそのように新しくされた者だけが、自分たちの古き人が行っていた「むなしいこと」を振り返ることができます。「あの時は私が神を知らず、このむなしい世を追い求めていたのだな」……このように一枚ずつ皮を剥いでいくのです。
そのように主は、私たちの世での暮らしにさえも共におられます。エレミヤ書を見ると、イスラエルが罪悪によってバビロンへ連行される時、神が異邦の将官を通じてエレミヤに語られます。「わたしは捕囚として行くイスラエルと共に行くが、お前はついて来なくてもよいから、お前の行きたい所へ行け」と言われました。「お前がいなくても、わたしの民はわたしが世話をする」ということです。
今、私たちの人生の歩みはバビロンへ連行された捕囚生活のようです。私たちは本来、この世の人間ではありません。すでに天において完了された者たちです。しかし、一時的に神を教えるために、バビロンというこの世にしばらく送られたのです。そしてこのバビロン捕囚の間、神は一時も私たちから目を離さず、私たちと共にいてくださいます。ですから、聖徒のすべての人生は、主のための人生として与えられるのです。食べるにも飲むにも、何をするにも、すべてが主のためのものとなるように造り変えていかれます。彼らは初めから主のものだからです。
神がきよいと言われれば、きよいのです。パウロが言うではありませんか。何を食べるにも飲むにも、分け隔てしてはならない。神がくださったものはすべてきよい。信仰をもって受け取れば、汚れたものはないというのです。聖徒が肉体で行ったこと、古き人のいかなる行為も、神はカウントされません。古き人から出てくるものは何ですか? ローマ1:18から3章までに出てくるあのすべての不浄なもの。ローマ1章から3章まで、神が私たち人間をどのようにお見になられていると言いますか? 「不義、悪徳、貪欲、悪意に満ち、ねたみ、殺意、争い、欺き、邪念に満ち……彼らののどは開いた墓であり、その舌で欺きを弄し、その唇にはまむしの毒がある……したがって、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どうして善いものを探そうとしても一つもないのでしょうか? 後で家でローマ1章から3章までを一度読んでみてください。これがすべて私たちの話なのです。
そのような不義で不浄なすべてのことが、3章21節に行くと完全に一変します。「しかし、今は」……という大転換が起こります。その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律法とは別の「一つの義」が現れたように、すべての人間を律法の断罪から救う「神の義、イエス・キリスト」。それが本文20節で「しかし、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そのように学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か」と問い返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は」……このように分かれるのです。イエス様がこの地に来られた時も、たとえで話されたことを弟子たちには別に教えられました。「しかし、あなたがたには、知ることが許されている」。あなたがたにだけ、神と神の国を知ることが許されているという意味です。今日の本文にも「しかし、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そのように学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20節)……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すでに知っている者たちであり、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者たちとして、もはや律法に負債のある者ではないという意味です。
(ローマ 8章)
12 ですから、兄弟たち。私たちは負債を負っていますが、肉に従って生きる責任を、肉に対して負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13 もし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ぬ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もし御霊によってからだの行いを殺すなら、あなたがたは生きます。
ここでの「肉」は、人間が定めた善悪の行為を指します。生まれながらに持っている自己中心的なその善悪の行為に従って生きれば、必ず死ぬということです。そのこと自体が律法の断罪の下にあるからです。
しかし、御霊によってからだの行いを殺すことは「約束の実行」、すなわち十字架に釘付けにされた現実を指します。あなたがたの古き人が十字架で死んだことを信じれば生きるという意味です。それなのに、依然として善悪の律法の下で生きようとするのか? あなたがたは誘惑の欲望に従って滅びゆく古き人の行い、善悪の知識の木の実を食べたアダムの善悪の体を脱ぎ捨て、ただ霊(御言葉)の中で神の御心に従い、義と真理の聖さの中で創造された「新しい人」を着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信仰です。
使徒の書簡に出てくる様々な命令文(せよ、するな、着よ、脱げ)は、私たちに「実践せよ」と言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神がそのようになさる、という話なのです。すでにあなたがたはそのように脱いで着た者となったので、その「新しい人」を着た者の行いが必ずあなたがたから現れるようになる……これが別の言葉で言えば「信仰の行い」であり、また別の言葉で言えば「イエス・キリストの行い」という意味です。
そのように、私たちの古き人は日々死に、神が造られた新しい人として日々新しくされる「脱ぎ捨てることと着ること」です。そのように聖徒はすでに愛の御子の国へと移された者たちですから、私たちの人生をどのように生きるかによって結果が変わる者たちではなく、すべての原因と結果は神にのみあるので、あなたがたはこの世を生きる間も必ず「神の慈しみ」「神の働き」があなたがたの人生に現れる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
そのように世との区別、脱ぎ捨てと着ることが繰り返し体感される人生をあなたがたは歩むことになる……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は自分の人生を自分で生きるのではなく、主のために生きる「主のもの」であるという確証としての「脱ぎ捨て、着ること」があなたがたに与えられる。ゆえに、今からは異邦人のむなしい行いや無知、神の命が離れている感覚のない者にな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のが今日の本文の使徒の勧告です。
しかし、今は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を知っている。どのように? 神の聖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内」という世とは異なる現実を生きているので、キリストを着た者のように、世と区別された人生をあなたがたは歩まざるを得ない。すべての思考、すべての人生観、価値観、歴史観、世界観などが世とは違うのです。それが今日の本文25節から出てくる「キリスト者の生き方」です。救いの日、キリストのからだとして完成されるその日まで、聖霊の証印を押されているので、この世の中であなたがたがそのように区別されるのは当然のことなのです。
ある人々のように、福音を知っているからといって自堕落に生きろ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主がおられるのに、どうして勝手気ままに生きられるでしょうか。勝手気ままに生きていても、主の統治ゆえに、その方の鞭ゆえに、懲らしめゆえに再び戻ってくる者たちが、キリストに所有された者たちです。さらには、彼らの自堕落な生き方までも主のためのものに変えてくださるのが主なのですが、「勝手気ままに生きることが福音を知ることだ」と教える奴は、彼自身が主と何の関係も持てていないのです。信仰がないのです。
そのように世の中でも天国が侵入してきて、神の国を生きる者たちが神の民です。ですから、今日のこの本文の御言葉は、単に「善く生きなさい」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今や、あなたがたの歩みはすべての事件を通じてキリストを学び、キリストのための歩みとなっていくという「宣言」なのです。言い換えれば、聖書のすべての御言葉は主によって行われ、完成される御言葉であることを信じるその「信仰」が、私たちの「行い」なのです。
そのような信じる者たちから、信仰による善い行いが必ず現れるようになります。そして彼らは必ず主の行いを告白するようになります。「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行われたのは主です。私ではありません、主がすべてをなさいました」と。もし私から善いもの、正しいものが現れるなら、それは私が行ったのではなく主が行われたのだ、という告白です。
ですからパウロは、パリサイ人として生きていたあの時、自ら正しいと見なしていたもの、律法の義と見なしていたもの、自分にとって有益だと思い自分の義として握りしめていたそのすべての行いを、すべて「害」とし、「塵あくた(糞土)」と見なしました。すべて投げ捨てたということです。ただキリストを得て、キリストの内で見出されるために、自分が知っていたあの律法の義、律法の行為を「ゴミ」として捨てたのです。
(フィリピ 3章)
7 しかし、私にとって得であったこのようなものを、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損と思うようになりました。
8 それどころか、私の主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を知っていること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いっさいのこと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すべてを捨てて、それらをちりあくたと思っています。それは、私がキリストを得て、
9 キリストのうちに見いださ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私は、律法による自分の義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のです。
10 私は、キリストとその復活の力を知り、キリストの苦しみにあずかって、キリストの死と同じ状態になり、
11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12 私は、すでに得たのでもなく、すでに完全にされているのでもありません。ただ捕らえようとして、追い求めているのです。かつてキリスト・イエスに捕らえられたのですから。
福音を聞き、その恵みの絶対性を知ると、そのような話をされる人が本当に多いです。「私がすることは何もないのだな」と。しかし、そうではありません。主の熱心が私たちに「熱心」を出させ、走らせるのです。新しい目標を見せてくださるのです。その標的に向かって走る熱心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これがキリストにあって義と認められた者、私の律法の行為によって義とされるのではなく、ただキリストにあって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者の「熱心」なのです。パウロを捕らえていた神の熱心、今日の本文にあるキリストを学んでいくすべての過程として私たちに与えられる、そのような熱心なのです。この熱心がなければ、神が私たちをご自分の信仰で縛って連れて行ってくださるのでなければ、キリストを頭(知識)でだけ知り、知識としてだけ知って、自分の欲を合理化することに陥りかねないため、使徒は私たちに、イエスを信じる教会にこのような願いの御言葉を書き残して伝えているのです。
2部は次回に続けます。今日はここまで。
お祈りします。 父なる神様、私たちの熱心ではなく、私たちの信仰でもなく、ただ私たちの主の信仰であり、私たちの主の誠実さであることを、またその限りない愛と赦しを私たちが知りました。私たちの残された日々が、私たちの主の信仰によって帯を締められ、主の目的地まで連れて行かれるすべての過程として、私たちがその恵みを知り、その恵みの栄光を賛美するような残りの日々となりますように。ただ主だけを見つめ、主にのみ完全に委ねる、そのような幸いな聖徒たちとならせてくださ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お祈りいたします。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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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4:17-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을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지금 에베소서 4장 17절 이후의 말씀을 몇 차례에 걸쳐서 나누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들은 중요하면서 또 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반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지난 시간에는 사도가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방인의 허망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한 말씀을 나누었는데요, 에베소 교인들만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앞서 2장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엡 2장)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에베소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몰랐던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스라엘 밖에 있었고, 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단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지 이백 년도 안 되었는데, 그럼, 그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나요?” “세종대왕은 구원을 받았나요?”이런 질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들의 선택이 아님을,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임을 잊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자주 잊어버려요. 쉽게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 말할 권리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이라는 말은 창조주가 지으신 원래의 자리에 가만히 있을 때만 있음, 존재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존경하고 위대하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는가 하는 인간 중심의 생각이 밑에 깔린 겁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자격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요. 에베소서를 보면 그 약속은 창세 전, 영원 전에 있었다고 하죠? 영원 전은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이에요.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단 말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해요. 롬9:13 말씀처럼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심과 같은 거란 말입니다
그럼, 또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고 하죠? 선택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거냐고 말이에요. 맞습니다. 선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들만 그 하나님을 아는 게 허락되어 있어요. 피조물의 있어야 할 자리는 그런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에 매이지 않아요. 갇히지 않는단 말이에요. 나의 구원, 나의 죄 사함, 더 나아가서 나의 죽음 문제까지도 나에게 원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있음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아까 제가 기도할 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했습니까? 죄의 문제와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예요. 이 두 가지가 해결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되면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가 해결돼요. 이게 해결되면 다 해결된 거예요. 이 외 다른 문제들은 중요한 게 하나도 없어요. 인생 백 년도 못 사는데, 살면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에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는데, 그 부끄러운 이름 남겨서 뭐 할 겁니까? 누구 말대로 포장마차 안주로 나오는 참새보다 못한 인생인데...
여러분, 기독교적 역사관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과 역사는 종말이 있다고 하죠. 끝나는 거예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마지막 성도의 구원의 완성되고 나면 하늘과 땅은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 역할을 다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에 뭘 남길 게 있다고... 인간이 마치 역사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벗음과 입음’이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 자기 약속대로, 즉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을 만드시는 것, 원래 없음인 우리가 하나님적인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들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신 것, 그렇게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거든요.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졌다고요? 이미 영원 전, 창세 전에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은 작정 그 자체로 완료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 없단 말이에요. 그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이 세상 역사는 그 묵시로부터 시작되고 그 묵시가 펼쳐진 거에요.
그렇게 완료된 아들들에게 그게 어떤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며 영광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성경 맨 첫 부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그 태초(베레시트)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과 섬김으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때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시간의 시작입니다. 본래 시간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간이 마치게 되면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요.
그렇게 우린 이미 묵시 안에 완료되어 있지만, 그 완료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아들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벗음과 입음이라는 하나님의 새 창조, 곧 역 창조를 통한 새 창조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했잖아요.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보시기에 좋은) 그 처음 자리를 떠남으로 해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났단 말이에요. 그 아담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가? 어떻게 생명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는가 하는 모든 과정을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이니까, 아담의 DNA를 물려받았으니까. 다윗이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인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우리로 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존재도 아닌가를 가르치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죽음이 우리 안에 작동하는 것입니다. 고후 4장 7절부터 1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존재론적으로 죄인이에요.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옵니다. 나는 아닌데요, 나는 착한 일도 했는데요, 초등학교 때 이런 착한 일을 했고 불쌍한 사람도 도아주고 교회도 나가고.. 그런거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처음 자리를 이탈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게 죄예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죄인은 스스로 죄도 못 짓는 게 죄인입니다. 왜? 죄인이 하는 모든 게 죄이기 때문이에요. 나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해서 이건 착한 일이니까 하고 이건 나쁜 일이니까 안 하고 그런 선택이 안 돼요.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운명적으로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 하나 하나를 죄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근원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가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다 자기를 위한 자기 중심의 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럼, 죄와 죄가 아닌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선이에요.그러니까 선과 악의 차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의 차이예요. 하나님이 정하신 한 분 ,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음(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 아담)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있음(존재)가 아닌 것은 다 부정하기 때문에 악으로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규례에서 죽은 것을 부정하다고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좀 전에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약속이 있는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게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우리의 부정한 옛사람을 어떻게 벗겨내시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세우시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 인생에는 계속 벗음과 입음이 반복되는데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언약의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예요.
아시다시피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약속이 있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스라엘 밖에 있었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는데,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4장까지 우리에게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의 복음, 곧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인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먼저 확정하고 에베소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구원, 우리 죄를 도말하신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 허물을 도말하시고 우리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이사야서 43장에 나오는 복음이에요.
그 피로 말미암은 구원, 왜 너희는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왜 너희의 착한 행위로 구원이 안 되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먼저 주신 게 율법이에요. 그래서 온 세상을 율법 아래 가두어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했다는 게 사도가 말하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그것을 그 단절을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약속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므로 말미암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우리가 그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전까지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거든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게 나아갈 길이 없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신 게 율법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착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가 지키지 못할 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자신들의 행위로 법을 지켰어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철저하게 다 지켰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하나도 지킨 게 없더라.. 왜? 마음에 있는 죄까지는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 모든 율법 행위가 결국 자기 의를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자기 구원을 챙기려는 탐심이었다는 것이지요.
(히 10장)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정한 죄인들이 그분께 나갈 길이 없어요. 죄인들이 그분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진멸되어 죽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죠? 이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어떻게? 예수로 말미암아. 그 피를 힘입어. 이 말은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제사 지냈던 희생 제물이 오실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그 피를 힘입어서, 예수의 피 뿌림을 받아서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가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아들들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도는 이 이야기를 에베소(지금의 터키)라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아까 읽었던 2장이에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창조입니다.
자 그럼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가 뭡니까? 죄죠.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예요.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란 말입니다. 본래 영원 전에는 죽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잠시 죄가 들어왔고, 그 죄의 삯이 죽음입니다.
이제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셨다’.. 여기서 새 사람은 지난 시간에 했던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바로 그 새 피조물이에요. 새롭다, 카이노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것이라는 말은 질적으로 다른 새것을 말해요. 하나님의 새 창조로 이루어진 새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는 다 새로운 하나입니다.
그렇게 이방인인 우리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로 마침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이게 구원이에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가 그분께 어던 장애물 없이 나아가게 된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잠시 죄가 필요하고 죽음도 필요하고 이 세상 만물과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이제 너희들은 이방인의 허망한 삶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행실 하나하나 고쳐서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예요. 너는 이제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살던 이방인의 세계와 단절되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 내가 반드시 너희를 그렇게 세상과 갈라놓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거룩입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해라. 너희가 아무리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려고 해봐라 되는가.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이 이기시죠. 그게 우리이 거룩이에요.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그 현실을 사도가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한 마디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한 것이 되는 자들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 그리스도 인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역사는 그들의 구별됨을 위해 있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말은 이제 내 인생은 없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가 왜 힘들어합니까? 내 인생이 있기 때문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가 계십니다. 우리의 죄 문제, 우리 죽음의 문제, 영원의 문제.. 우리는 백 년도 채 못 살잖아요. 그리고 그 후는 영원이란 말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 이 인생은 째깍도 안 돼요. 이 영원의 문제를 약속받은 자들이 성도란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진짜 현실, 영원한 현실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고 있어요.
(사 43장)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내어서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한단 말이에요. 이게 생명수예요.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에요. 아래에는 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죄는 나쁜 일 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 훔치는 이런 것을 말하지 않아요 (물론 그것도 죄 맞아요)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 죄는 주가 되시는 분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죄입니다. 의도 마찬가지예요. 의 역시 그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를 안 믿는 게 죄고, 예수만 믿는 게 의예요. 죄와 의는 그분을 통해서 구분되기 때문이에요.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남의 여인을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고도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고 하죠. 다윗은 죄의 본질이 뭔지를 안 겁니다. 한사람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죄는 오실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의 어떤 선한 것도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고 모든 것의 시작이 하나님이며 또 하나님으로 완성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있기 전,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 전, 창세 전에 하나님은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을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단 말이에요. 모든 건 그 약속으로 시작해요. 그리고 그 일은 그분의 작정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그분이 지으신 세상과 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그 언약의 피를 남기셨으므로.
그 십자가 영광을 위해서, 창세전 아들의 피로 거룩한 아들들을 창조하시기로 한 그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위해서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죄와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로마서 5장 12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를 평생 교회 다녀도 못 들어본 사람들이 99%예요. 그래서 이 약속을 모르니까 왜 에덴에 선악과를 두고, 또 뱀이 나타나게 해서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느냐고 질문을 해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내어버려 두신 사람들 말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죄의 문제는 주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문제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열심을 부리고 어던 종교행위를 해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나쁜 일 열 개 하고 착한 일을 백 개 하면 죄가 없어집니까? 인생에 있어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젤 낫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안된다는 것이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믿음은 주 예수와 우리의 관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분이 행하신 것들을 우리에게 그냥 입혀주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그게 주님의 행함, 믿음의 행함이에요. 주께서 자기 약속대로 자기 죽음 안에서 다 이루셨음을 믿는 믿음이에요. 그 약속을 믿는 거예요. 이사야 43장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 모든 허물을 도말하세요. 빡빡 다 지우신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은 죄와 죽기까지 지을 모든 죄를 하나님은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는 거예요. 이것을 믿는 게 구원의 확신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왜 죄를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입혀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 피로 우리가 깨끗함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 있기에, 그 믿음 안에서 우리를 깨끗하다고, 의롭다고, 죄 없다고 ‘여겨’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약속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 전, 우리가 있기도 전 약속이 먼저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깨끗하다고,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죄에 오염된 우리 옛사람, 이 세상 정신에 물든 옛사람은 그분의 다 이루심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꾸 자신을 점검하고 닦달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본다는 말은 한마디로 믿음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합니다. 틈만 나면 “니 꼬라지를 봐라. 그게 예수 믿는 게 맞니? 그러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계속 정죄하고 참소를 하지요.
그러나 그런 원수 앞에서 주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의 이기심을 믿음 안에서 우리 것으로 넘겨주시고 우리 죄로 더럽혀진 우리 옷을 벗기시고 자기 피로 빤 새 옷으로 입혀주십니다. 시23편 말씀이 그 현장이에요 . 그것을 성경이 벗음과 입음으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슥 3장)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는 게 구원이란 말이에요. 마귀가 하나님께 참소했거든요. “여호수아 한번 보세요. 더럽혀진 옷 입고 있잖아요. 하는 행실이 더럽잖아요.”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옷 벗겨. 내가 새 옷 입혀줄 거야. 내가 준비한 아름다운 옷을 입힐 거야.”.. 이게 구원이에요. 신약으로 오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로 옷 입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아까 읽은 이사야 43장에서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세요. 본래 죄는 없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죄가 발생하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을 모르는 것, 그분을 믿지 않는 이게 죄란 말이에요. 성도는 그렇게 죄와 상관없는 세계로 옮겨진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입니다 (롬8:1-2)
이렇게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의 현실은 운명적으로 죄악된 세상과 구별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부 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인생은 그 새 노래, 그 찬송을 배우기 위해 있고 그 찬송이 되기 위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하나됨)이 우리의 구원이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히시며 그 세마포 옷을 우리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십니다.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8)
(계 14장)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배우는 기간이에요.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 그 노래를 안단 말이에요.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받았는데 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선 잔치 예복을 입어야 해요. 그리고 그 세마포 옷은 주인이 준비한 예복이란 말에요. 그렇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의 복은 바로 그것입니다. 주게서 준비하신 옷을 입은 자들만 그분을 알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일생동안 새노래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부 다 그 잔치에 가서 뭐한다고 합니까? 면류관을 벗잖아요. 저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한 거라곤 평생 자기 사랑, 자기 영광을 바란 것뿐인데, 죄 지은 것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위해 피로 빤 세마포를 입혀서 영원한 나라로 데려가셨단 말이에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거예요. 영원토록
이같이 참되신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되어가는 새 창조의 다스리심 안에서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그 영원한 나라에서 불러야 하는 그 노래를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 노래를 배우면서 우리 자신이 그 노래가 되고 찬송이 되어갑니다.
이렇게 너희의 몸은 이제 하나님의 피 값으로 산 게 되었기 때문에 너희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이게 참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몰라요.
(고전 6장)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립니까? 교회 열심히 나오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공부 많이 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 많이 벌어서 예배당 멋지게 지어 바치면 영광 돌립니까? 성경은 뭐라고 하죠? 빌립보서에 나오잖아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0)..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요. 내 인생 없습니다. 당신의 피 값으로 사셨으니까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온전히 항복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이에요. 전인적 항복.
(롬 14장)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주의 것이 된 그 기쁨과 감사를 잊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일에 휘말려서 진짜 감사, 진짜 은혜의 영광을 대부분 잊고 살잖아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다는 이 기쁨과 감사예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능력입니다.
에베소인이나 로마인이나 이제는 이방인으로 살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그 홍해는 다시 물로 덮였어요. 못 돌아간단 말이에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광야 이스라엘이 애굽을 그리워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이스라엘로 약속의 땅이라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이스라엘인 거예요. 바로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과 여러분 사이에는 경계 지어진 피가 있어요. 죄악된 세상과 같이 섞일 수 없는 예수의 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지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적 존재로서 새사람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새롭게 하심의 손길이 한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벗고 입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벗고 입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스스로 벗고 입는 건 종교죠. 법정처럼 무소유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중세 수도원 운동 그런 거 많은데, 그건 자발적 벗음이에요. 탐심이지요.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보려는 그런 시도는 본문에서 말하는 벗음이 아니에요. 우리의 벗음은 앞서 말한대로 주께서 벗겨주시는 벗음이에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육(소마, 사륵스)을 말씀의 검으로 혼과 영과 골수까지 쪼개는 그 죽음, 역창조, 있음이라고 착각하는 우리를 다시 없음으로 되돌리는 역창조.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그게 안 되니까 주께서 말씀의 검으로 우리를 해체해 나가시는 거예요. 사도가 말하는 날마다의 죽음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그 죽음이에요. 그 벗음과 함께 새로 운 입음이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역창조와 새 창조 안에 우리 인생이 있어요. 너희들 스스로 더러운 것, 죽음 안에 갇힌 그 한계에서 벗어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그렇게 벗기고 입혀주시겠다는 말씀이에요.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의 역사인 것입니다. 약속의 성령 안에서 말씀의 역사로 너희 옛사람을 해체하고 반드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완성할 것인데 그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죽음이 나누어지는 만큼 예수의 생명도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아프고 힘들어요. 그 자기 부정라는 죽음을 날마다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좇아 살고 싶은데 그 세상과 우리를 강제로 찢어내시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나 그 찢어내고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잠시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역창조, 곧 벗음과 함께 일어나는 입음의 새 창조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지 않으면 새 생명으로의 부활도 없어요.
그런데 종교인들은 십자가 죽음 없는 생명, 죽음 없는 부활을 꿈꿉니다. 십자가를 우회해서 자기 부정이 없고 자기 죽음이 없는 구원을 추구합니다. 이게 모든 종교의 본색이예요.
그래서 악한 마귀는 항상 십자가 없는 부활, 피 뿌림이 없는 구원을 세상 교회에 퍼뜨립니다. 99.9%의 세상 교회들이 그것을 가르치고 바라고 있어요. 나를 긍정해 주는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하나님, 나를 치료해 주는 하나님, 내뜻대로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거기에는 예수 십자가가 가려져 있어요 다시 말해서 창세 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죽음이 없고 그 피가 없어요. 그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빌3:18-19)
마귀는 하나님을 방불할 만큼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시험할 정도로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마귀, 악한 사단을 이겨낼 능력도 믿음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40일간 광야에서 주리시면서 시험을 받으셨어요.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실패했던 그 시험입니다, 그런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그 시험을 통과하시고 정답을 내놓으신 거예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예수님만 내어놓을 수 있는 정답이며 우리의 믿음입니다..
악한 마귀는 오늘날도 세상 모든 종교인, 교회들에 그것들을 퍼뜨려 놓은 거예요.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십자가가 아닌, 옛사람의 죽음이 없는 내 구원을 위한 십자가, 내 불행을 막고 소원을 들어주는 십자가만 챙겨가진 자들이 마귀 시험에 바진 세상 종교인들이에요. 우리 인간이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를 인간들 보다 더 잘 아는 게 마귀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닌다고 해서 예수를 아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옛사람을 못 박은 적이 없는 그들은 그리스도밖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예요.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은 우리 스스로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못 박힌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나는 것이라”..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된 자들, 이천 년 전 예수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힌 자들에게만 이 말씀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만 옛사람을 벗는다는 것과 새 사람을 입는다는 의미를 알아요. 그리고 주께서 새로 입혀주신 새 사람, 새피조물로 성도들만 자기 안에서부터 아마겟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요. 그렇게 그들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납니다. 그들만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사도와 같은 자기 인식을 하게 돼요.
이렇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손길을 성도는 알아요. 날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일하심을 안단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과정, 그리고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용서하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인생 가운데서 처절하게 체감하고 체휼하라고 우리 인생이 있어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자꾸 나 자신을 놓아갑니다. ‘나는 아니요, 당신이 하나님 맞습니다.’나에게는 주가 계시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인 양 살아가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런 우리가 ‘나는 아니요’라는 자기 부정이 되어가는 모든 과정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새로 지으신 새 사람이 예수 이름 앞에 온전히 무릎 꿇게 되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이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그 처음 자리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는 그것,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지금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우리가 자라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일에 동원되는 게 환난과 고난이에요. 우리가 아무 일 없이 모든 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존재가 못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흔들고 털어내시며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높아진 마음을 꺾고 연단으로 다루어주시는 것.. 연단은 날카로운 쇠 같은 걸로 우리를 갈아내는 것을 말해요. 그를 통해서 마침내 티끌이 되고 무릎 꿇게 하십니다. 그 결과물로 하늘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 곳은 이곳이 아닌 것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약속하신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있음을 바라보고 소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텐트를 치고 살았어요. 아브라함 3대가 텐트치고 살았지요. 그들은 다 본향을 찾는 자들이기 때문에. (히11:8-16).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살아야 하기에 그 하나님을 모르면 같이 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티끌인 우리를 하늘적인 존재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자들만 우리 옛사람이 행했던 허망한 것들을 돌이켜볼 수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이 허망한 세상을 좇아갔구나’.. 이렇게 한 꺼풀씩 벗겨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은 우리의 세상살이까지도 함께하십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하나님이 이방 장관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세요. 내가 포로로 가는 이스라엘과 함께할 것인데 너는 안 따라와도 되니까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하셨어요. 니가 없어도 내백성은 내가 챙기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생살이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 생활과 같아요. 우리는 본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란 말에요. 이미 하늘에 완료된 자들이에요. 그런데 잠시 하나님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에 잠시 보내어진 거예요. 그리고 이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에 하나님은 한 시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모든 인생은 주를 위한 인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들은 태초부터 주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면 깨끗한 거예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가리지 말아라.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깨끗하다. 믿음으로 받으면 더러운 게 없다는 겁니다. 성도가 육체로 산 것들, 옛사람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은 카운트 안 하십니다. 옛사람에게서 나오는 건 뭐예요?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까지 나오는 그 모든 부정한 것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보신다고 합니까?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너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혀로 속임을 일삼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어떻게 선한 것을 찾아볼래도 하나도 없냐? 나중에 집에서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를 한번 읽어보세요. 이게 전부 우리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 불의하고 부정한 모든 것이 3장 21절에 가면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대전환이 일어나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난 것처럼 모든 인간을 율법의 정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 그게 본문 20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느냐? 라고 되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너희는’ 이렇게 나누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을 제자들에게는 따로 가르치셨어요. 그러나 너희에게는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니. 너희에게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게 허락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절)..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미 아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자들로 이제 더 이상 율법에 빚진 자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롬 8장)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육신은 인간이 정한 선악 행위를 말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의 그 선악 행위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예요. 그 자체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으니까
그런데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건 약속의 실행, 십자가에 못 박힌 현실을 말해요. 너희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으면 산다는 말이에요. 그런데도 여전히 선악의 율법 아래서 살려고 하느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의 행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선악의 몸을 벗어버리고 오직 영(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사도의 서신에 나오는 여러 가지 명령문들 있잖아요. 하라, 하지 말라, 입으라, 벗으라.. 하는 말들은 우리 보고 실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이야기예요. 이미 너희는 그렇게 벗고 입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새 사람을 입은 자의 행실이 반드시 너희들에게서 나오게 될 것이다.. 이게 다른 말로 믿음의 행위이고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 옛사람은 날마다 죽고 하나님이 지으신 새 사람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벗음과 입음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이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바뀌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원인과 결과는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일하심이 너희 인생에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구별됨, 벗음과 입음이 반복해서 체감되는 인생을 너희는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네 인생을 네가 사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사는 주의 것이라는 확증으로서의 벗고 입음이 너희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허망한 행함과 무지함,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 있는 감각 없는 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게 오늘 본문의 사도의 권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를 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처럼 세상과 구별된 삶을 너희는 살 수밖에 없다. 모든 사고와 모든 인생관 가치관 역사관, 세상관 등이 세상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25절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구원의 날,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되는 그날까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 속에서 너희들은 그렇게 구별되는 게 마땅하다.
어떤 사람들처럼 복음을 아니까 막 살라는 거 아니란 말에요. 주가 계시는데 어떻게 막 삽니까? 막 살다가도 주의 다스리심 때문에, 그분의 회초리 때문에, 징계 때문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자들이 그리스의 소유된 자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막 산 거까지 주를 위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신데 막 사는 게 복음 아는 거라고 가르치는 놈은 그 자신부터 주님과 어떤 관계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 없음이에요
그렇게 세상 속에서도 천국이 침노해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제 너희의 삶은 모든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점철되어 간다는 선언이에요.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주님에 의해서 행해지고 완성되는 말씀임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행함인 것입니다.
그런 믿는 자들에게서 믿음에 의한 선한 행실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주님의 행하심을 고백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행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나는 아니요,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만일 나에게서 선한 것, 의로운 것이 나온다면 이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한 것이라는 그런 고백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그 때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것들, 율법의 의로 여겼던 것들, 자신에게 유익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로 챙겼던 그 모든 행위를 다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내다 버렸다는 말이에요.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알았던 그 율법의 의, 율법의 행위들을 쓰레기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빌 3장)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복음을 듣고 그 은혜의 절대성을 알고 나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아무것도 내가 할 게 없네..라고. 그러나 그거 아니에요. 주님의 열심이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하고 달려가게 만드십니다. 새로운 목표를 보여주신단 말이에요. 그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열심을 주시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 나의 율법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게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열심이란 말이에요. 바울을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열심,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모든 과정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런 열심인 것입니다. 이 열심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믿음으로 묶어서 데려가심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알고 지식으로만 알아서 내 욕심을 합리화하는 데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 믿는 교회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씀을 기록해서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2부는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열심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오직 우리 주님의 믿음이요 우리 주님의 성실하심인 것을 또 그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저희가 알았습니다. 우리 남은 날들이 우리 주님의 믿음에 띠 띠어져서 주님의 목적지까지 데려가시는 모든 과정으로 우리가 그 은혜를 알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그런 남은 날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온전히 의탁하는 그런 복 된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悔い改め(メタノイア μετάνοια G3341)とは?
■ 悔い改め(メタノイア μετάνοια G3341)とは?その心を打ち砕き、建て直すこと
悔い改め
a. メタノエオー(μετανοέω G3340)から由来(考える、再考する) = メタ(μετά G3326)+ ノイエオー(νοιέω G3539)
メタ: 「〜の中に」属格(連合)、「〜の後に」対格(連続)
ノイエオー: 心を用いる、理解する、認知する
ヌース(νους G3563): 意味、心、知能から由来
ギノスコ(γινώσκω G1097): 知る、知るようになる、理解するから由来
b. シュブ(H7725): 悔い改める、回復させる、救う、(自ら)立ち返らせる
(マラキ 4:5-6)
「見よ。主の大いなる恐ろしい日が来る前に、私は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彼は父の心(レブ H3820)を子に向けさせ(シュブ H7725)、
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さもなければ、私が来て、呪いでこの地を打ち滅ぼすといけないからだ。」
■ 悔い改め(メタノイア μετάνοια G3341)
悔い改めと新しく生まれる(新生)ということは、単なる反省の概念や後悔の程度ではない。
ヘブル語(シュブ H7725)
神様が真理を説明するために「下のもの」として与えられたその「聖殿」を正しく知り(分析して正しく理解すれば)、
世の生活の表層的な価値から神様の御旨へと、自分の価値観と世界観が完全に変わり、自分が行く道から神様が願われる方向へと進むことを言う。
ギリシャ語(メタノイア G3341)
すべての人間は、聖書の内面的な神様の御旨に従って生きることはできない。
ゆえに、すべての人間は罪人である(原罪)。
「見よ、私は不義のうちに生まれ、母は罪のうちに私をみごもりました。」(詩篇 51:5)
「義人はいない。ひとりもいない。」(ローマ 3:10)
アダムたちは生まれながらにして、すぐに「自分のために」神様とは反対方向へ行くようになっている。
神様は、そちらへ行けば「死」であると言われた。
しかし、人間側にはその方向を正す能力がない。
ゆえに、神様が私たちに聖霊を送ってくださり、その聖霊が私たちを(私たちが)望まない方向から「真理の帯」を締めさせ、
あなたが望まない方向へと「わたし(神)が引き連れて行く」。これが悔い改めである。
*悔い改め — ルカの福音書 15章にて、3つのたとえを通して「悔い改めとは何か」を説明されている。
失われた羊のたとえ
ドラクマ銀貨のたとえ
放蕩息子の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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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G3341)란? 그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운다
회개.
a.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G3340)에서 유래(생각하다.재고하다) = 메타(μετάG3326) + 노이에오(νοιέωG3539)
* 메타; -중에‘소유격’연합,‘목적격’연속
* 노이에오; 마음을 사용하다.이해하다.인지하다.
- 누스(νουσG3563)-의미,마음,지능에서 유래
- 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알다.알게되다.이해하다에서 유래
b. 슈브(H7725)-회개하다.회복시키다.구원하다.(스스로)돌이키게하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레브H3820)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슈브H7725)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둘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회개(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G3341)
회개와거듭남이란...단순히 반성의 개념과뉘우침의 정도가 아니다.
히브리어(슈브H7725)
하나님께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아래 것으로 주신 그 성전을 제대로알아 (분석하여 제대로 이해하면)
세상 삶의 표치적 가치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어 자기가 가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헬라어(메타노이아G3341)
모든 인간은 성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신 뜻으로 따라서 살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인간은 죄인이다.(원죄)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이땅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3:10)
아담들은 태어나면서 즉시 ‘나를 위해’하나님과 반대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로 가면 죽음이다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측에서는 그 방향을 바로 잡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이 우리를 원치않는 방향에서 진리의 띠를
띠우고 너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가 끌고 간다 이것이 회개이다.
* 회개 - 누가복음 15장에서 3가지 비유를 통해 회개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신다.
1.잃어버린 양의 비유
2.드라크마의 비유
3.탕자의 이야기